2017. 7. 8. 20:53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인연 26
제 6장 무소의 뿔처럼
『서장』과 『절요』의 강의가 끝나는 날 오후였다. 일타는 한여름의 더위도 식힐 겸 십여 명의 학인을 따라 통도사 8경 중 하나인 자장동천으로 나갔다. 이른바 강사 앞에서 책을 통째로 외우는 책걸이 행사는 아니었으나 여러 학인이 제의해서 강사를 좌장 삼아 세족(洗足)을 나갔던 것이다.
걸망에 넣고 간 다관과 찻잔을 너럭바위에 풀어놓고 솔방울과 솔가지를 주워와 불을 피웠다. 주전자의 찻물은 자장암으로 올라가 길어온 샘물이었다. 찻물이 끓기 전부터 학인들은 개울물에 발은 담근 채 다담(茶談)부터 나누었다.
“강사스님, 좋은 차시(茶詩) 한번 들려주십시오.”
그러나 강사는 한시에 달통한 전문가답게 학인이 말한 ‘차시’를 어떻게 발음해야
옳은지 그것부터 말했다.
“나는 한자(漢字)로 어울린 단어는 한자음으로 발음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다(茶)도 한자요, 시(詩)도 한자이니 우리말과 한자음이 어색하게 합쳐진 ‘차시’보다는 ‘다시’라고 발음하는 것이 언어 규칙상 옳다는 것이지. 자, 그럼 초의선사가 우리 차를 찬양한 노래 『동다송』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구절을 읊조려보겠네.”
찻물 끓는 대숲소리 솔바람 소리 쓸쓸하고
맑고 찬 기운 뼈에 스며 마음을 깨워주네
흰 구름 밝은 달 청해 두 손님 되니
도인의 찻자리 이것이 빼어난 경지라네.
松竹濤俱簫凉
淸寒瑩骨心肝惺
惟許白雲明月爲二客
道人座上此爲勝
어느새 찻물이 소소소, 하며 대숲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내자, 강사가 찻잎을 넣어둔 다관에 뜨거운 찻물을 넣었다. 솔가지가 타는 냄새가 차맛을 더 기다려지게 했다. 강사는 학인들 중에서 일타를 먼저 불렀다.
“일타스님, 차 한 잔 받으시게.”
차를 따르는 강사가 제일 먼저 일타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그러자 한 학인이 웃으며 말했다.
“강사스님, 어째서 일타스님이 제일 먼저 차를 받습니까.”
“입은 많지만 차를 마실 만한 입이 적지 않는가.”
“차 마시는 입이 따로 있다니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이 차는 공부를 잘한 학인에게 주는 차이니 그리 알기 바라네.”
학인들이 여기저기서 투덜거렸다.
“공부를 잘한다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강원에서 배운 『서장』이나 『절요』를 한자도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는 학인이 이
자리에 있는가.”
학인들이 말을 못하자 강사가 다시 말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왜 말이 없는가. 그래서 내가 입은 많지만 차를 마시는 입이
적다고 한 것이네. 수행자들이 차를 마시는 것은 다만 혀를 즐겁게 하기 위해 마시는
것이 아니지. 지금 여기서 마시는 차도 반드시 득도하겠다는 발심의 차가 되어야
하네.”
강사가 일타에게 다시 말했다.
“일타스님에게는 진정 차 마실 입이 있는가, 없는가.”
일타는 찻잔을 말없이 바라보고 나서는 말했다.
“스님께서는 저더러 무엇을 외울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단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외울 때는 스님께서 제 부탁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부탁이 무엇인가.”
“학인 모두에게 차를 주셔야 합니다.”
강사의 말에 주눅이 들었던 학인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좋지. 『서장』의 첫 부분을 외워보게. 자장암 샘물로 우린 맑고 향기로운 일완청다(一梡淸茶)를 학인들 모두에게 주겠네.”
학인들은 모두 일타의 입을 주시했다. 일타는 강사가 지적한 『서장』의 첫 부분을 또박또박 외웠다.
“시랑 증개(曾開)는 예전에 장사에 있으면서 원오 노사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때 스님을 일컬어 ‘늦은 나이(晩歲)에 만났으나 깨달은 바가 범상치 않고 매우 뛰어났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 스님을 생각함이 8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스님의 법문을 직접 듣지 못한 것을 늘 안타깝게 생각하다 보니 사모하고 우러르는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발심하여 선지식을 찾아뵙고 이 일(一大事)을 질문하였으나 스무 살이 ?惻ぜ?는 혼인과 벼슬살이를 하였으므로 참선공부에 전념하지 못하고 이러구러 늙음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도 들은 것이 있지 아니하므로 늘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탄식하였습니다.
그러나 뜻을 세우고 원을 세운 것은 진실로 천박한 지견이나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깨닫지 못한다면 모르되, 깨닫는다면 반드시 고인이 몸소 증득한 곳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크게 쉬는 경지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이런 마음은 한 생각도 일찍이 퇴굴(退屈)하지는 않았으나, 공부한 바가 끝내 순일하지 못했음을 알았습니다. 말씀드리자면 ‘뜻과 원력은 크나 역량이 모자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번에 원오 노사께 매우 간절히 법문을 청하자, 노사께서는 여섯 단계의 법어를 제시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이 일’을 바로 보이시고, 뒤에는 운문의 수미산(須彌山)과 조주의 방하착(放下着) 두 가지 공안을 들어서 착실히 공부를 지어가도록 지시하시면서 ‘항상 스스로 들어서 깨닫기를 오래오래 하다 보면 반드시 들어가는 곳(入處)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노사의 노파심은 이토록 간절하였지만 저의 아둔함은 너무 심할 따름이니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이제 다행스럽게도 가정의 인연을 모두 끝내고 한가롭게 살고 있습니다. 진정 지금이야말로 제 자신을 아프게 채찍질하여 처음 세운 뜻을 실현시킬 때지만, 다만 아직도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할 뿐입니다.
일생 동안의 허물을 이미 낱낱이 말씀드려 바쳤으니, 반드시 제 마음을 능히 꿰뚫어 보셨을 것입니다. 부디 바라옵건대 자상하게 이끌어 깨우쳐 주십시오. 평소에 어떻게 공부를 지어 나가야 할까요. 다른 길을 밟지 않고 바로 본지(本地 : 근본 자리)와 계합할 수 있기를 바라옵니다. 이와 같은 말도 역시 허물이 적지 않겠지만, 다만 바야흐로 제 자신의 지극한 정성을 숨기기 어려워서 그런 것이니 불쌍한 노릇입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여쭙습니다.”
운문의 수미산이란 한 승려가 “한 생각(一念)도 일어나지 않으면 허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묻자 운문이 “수미산”이라고 답했다 하여 공안이 된 것이고, 조주의 방하착이란 법제자 엄양(嚴陽)이 “단 하나의 물건(一物)도 이르지 않을 땐 어찌합니까” 하고 묻자 조주가 “내려놓아라(放下着)”고 답하여 공안이 된 말이었다.
일타가 시랑 증개의 편지를 다 외우자, 강사가 차를 한 잔 더 권하며 말했다.
“이 편지는 재가불자인 증개가 쓴 것인데, 내용은 학인 여러 분이 배우고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일대사를 요달하는 공부와 태도는 승속을 불문하고 간절한 마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겠는가. 또한 법을 구하고자 하는 보리심과 승보를 존경하는 마음이 얼마나 지극한가. 그러지 않고서 어찌 도를 구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일타는 대혜가 증개에게 보낸 답서(答書)까지 마저 외웠다.
“편지를 받아보니, ‘어린 시절부터 벼슬살이 할 때까지 훌륭하신 대종장(大宗匠)을 참례하였으나, 중간에 과거와 혼인에 매달리고, 또 나쁜 견해와 습관에 억눌린 탓으로 공부를 순일하게 하지 못했음을 큰 죄로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덧없는 세상 속의 온갖 허환(虛幻)한 것들은 단 하나라도 즐거워할 것들이 없다고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오직 온 정성을 다하여 일대사인연을 참구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대의 이 같은 생각은 나의 뜻과 딱 들어맞습니다.
그러나 속가의 벼슬아치인지라 녹봉을 받으며 살아가게 마련이고, 혼인하고 과거를 보고 벼슬살이하는 것도 세간에 있어서는 능히 피할 수 없는 일들이니 이 역시 그대의 죄가 아닙니다. 사소한 잘못인데도 크게 두려워하니, 시작이 없는 광대한 때로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참된 선지식을 받들면서 반야의 종자와 지혜를 훈습하지 않았다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대가 말하는 큰 죄는 성현들도 능히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다만 헛되고 환과 같아 구경법이 아닌 줄 알고서 마음을 이 문(門)으로 능히 돌이켜 반야지의 물로 오염된 때를 씻어내고, 스스로 청정하게 생활하면서 온갖 망념을 발밑에서부터 단칼에 두 동강을 내어 다시는 상속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굳이 앞일을 헤아리고 뒷일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일체가 헛되고 환과 같다고 말했다면 업을 지을 때도 환이며, 업을 받을 때도 환이며, 지각할 때도 환이며, 미혹하여 전도될 때도 환이며, 과거 현재 미래도 모두 환입니다. 지금 잘못된 줄 알았다니, 이는 환약(幻藥)으로써 환병(幻病)을 다스려 병이 낫는 것입니다. 병이 낫고 약이 필요 없어지면 원래부터 변함없는 옛 시절의 사람(舊時人)입니다. 만약 따로 깨닫는 사람이 있고 깨달은 법이 있다면, 이는 사마외도(邪魔外道)의 견해일 것이니 그대는 깊이 생각하십시오.
다만 이와 같이 차근차근 다잡아가되 때때로 고요한 중에도 공부가 아주 잘되는 가운데에 간절히 수미산, 방하착의 두 공안을 결코 잊지 말고, 오로지 발밑으로부터 착실하게 공부를 지어 가십시오. 이미 지나간 것은 모름지기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또한 이리저리 헤아리지도 마십시오. 헤아리고 두려워하면 곧 도에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모든 부처님 앞에 큰 서원을 일으키십시오.
‘바라건대 이 마음 굳세어 영원히 물러나지 않기를, 모든 부처님의 가피력에 의해 선지식을 만나 뵙기를, 선지식의 말 한마디 아래서 단숨에 생사를 잊고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증득하기를, 그리하여 부처님의 혜명을 이어서 모든 부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갚게 되기를 바라나이다’라고 하십시오. 진정 이와 같이 오래오래 계속한다면 깨닫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대혜의 답한 편지 내용을 아직 다 외우지 않았지만 강사는 학인들을 향해 박수를 유도하면서 멈추게 했다. 일타를 바라보는 강사의 얼굴에는 흡족함이 가득했다.
“앞으로 통도사 강원에서 일타스님 같은 수재는 출현하기 힘들 것이다. 왕대밭에서 왕대 나온다는 세속의 속담처럼 일타스님은 대강백 고경스님의 상좌가 아닌가.”
일타는 우쭐했고, 학인들 또한 자부심을 느꼈다. 강원에서 함께 배우는 학인 중에 출중한 인물이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워서였다. 실제로 일타는 강사가 가르쳐주는 대로만 따르지는 않았다. 강사에게 『서장』이나 『절요』의 구절을 배우는 동안 자기식대로 해석할 때가 많았다. 그것은 선방에서 두 철 동안 화두를 들고 참선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강사는 은근히 일타에게 자신의 후계자가 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지금 일타스님의 실력만으로도 강사가 ?? 수 있는데 학인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
“좋습니다.”
또 박수가 터졌다. 그러나 일타는 합장하고 나서는 거절했다.
“강사스님의 말씀은 더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경책으로 받아드리겠습니다. 저는 아직 강사 할 자격도 이력도 부족합니다. 더구나 저는 강원을 마치고 나서는 선객이 되려고 합니다. 이것은 입적하신 은사스님과의 약속이고 제 자신과의 약속입니다. 저는 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 것입니다.”
강사는 일타의 막내외삼촌 진우와 통도사 강원의 도반으로 일타의 총명함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일타를 강사로 추천하려고 했던 것인데, 일타는 오직 선객이 되고 싶을 따름이었다. 강사는 일타가 진우의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학인들이 삼삼오오 흩어진 뒤 일타가 물었다.
“강사스님, 진우스님은 어디 계십니까.”
“모르고 있었는가.”
“뵌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올해는 은사스님 제일(祭日)에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아마 바빠서 그랬을 거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수좌들에게 바쁜 일이라는 게 따로 있나. 선방 좌복에 앉아 일대사를 해결하려는 게 가장 바쁜 일이지.”
“선방에 계시느라고 오시지 않았군요.”
“이번에는 아예 한곳에 눌러앉으려고 선방을 지어 살고 있다고 그래. 전주 서고사 밑에 법성원(法性院)이라고 하더구먼. 선방을 하나 지었으니 더 바빴겠지.”
일타는 문득 외삼촌 진우가 그리웠다. 어린 시절에 외삼촌들 중에서 가장 따르고 좋아했던 사람이 진우였던 것이다. 지난봄에 경봉을 만났을 때도 스님은 진우의 인상이 깊이 남았던지 ‘진우수좌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곤 했던 것이다.
한여름이었지만 자장동천의 개울물은 차가웠다. 한겨울의 얼음물처럼 발이 시릴 정도였다. 학인 중에 장난기가 발동하여 장삼을 입은 채로 물에 풍덩 들어갔다가는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나오기도 했다.
해가 기울자, 개울물은 더욱 차갑게 소리치며 흘렀다.
정찬주
감미로운 발라드 10곡 01. 왁스 - 슬퍼지려 하기전에 02. 버즈 - 가시 03. 영조 - 사랑 그리고 계절 04. 김범수 - 슬픔보다 더 슬픈이야기 05. 채영인 - 착한이별 (가문의 영광 Part.2 ost) 06. Arie - 그대를 닮아 (하얀 거짓말 O.S.T ) 07. 양하영 - 영원한 사랑인줄 알았는데 08. 최지연 - Rain 09. 안재욱 - Make Me Smile (Feat. 유진) 10. YB(윤도현 밴드) - 사랑 two
80세의 老붓다가 고백하신다.
"아난다야,
나는 이제 여든 살
늙고 쇠하였구나
마치 낡은 수레가
가죽 끈에 묶여
간신히 굴러가듯
나 또한 가죽 끈에 묶여
간신히 굴러가고 있느니라"
- 대반열반경
‘프란시스코’의 ‘평화의 기도’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 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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