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8. 12. 19:15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법화경·관세음보문품
道(마음)은 방소(方位)가 없거늘 어디에 道(마음)이 있는가?
道는 배울 것이 없으니 오염시키지만 말라
道는 어떤 처소(方位))가 없으므로 알음알이(識)로 배우면 그릇 돼
道를 배우라는 가르침은 깨우치게(깨닫게) 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
원문: 황벽선사가 말했다.
“진실한 法(진리)란 전도(顚倒)됨이 없는 것이다.
그대가 지금 질문하는 자체가 전도되어 있다. 무슨 진실한 法을 찾는가?”
배휴가 물었다.
“저의 질문이 전도된 질문이라 한다면 화상의 답은 어떤 것입니까?”
황벽 선사가 답했다.
“그대가 그대를 보려면 어떤 거울을 통해 자신을 비춰봐야지
다른 사람과는 상관할 바가 아니다.”
또 다시 황벽 선사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중생은 다만 한낱 어리석은 개와 비슷해 사물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짖어대니,
바람에 흔들리는 초목과 다를 것이 없다.
해서 우리 禪宗에서는 일찍이 法이 전해진 이래로 사람들에게 알음알이(識)으로
道를 구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단지 道를 배우라고 가르쳤는데,
이 또한 오래 전부터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해 말한 方便이다.
실은 ‘道’라는 것은 배울 것이 없다.
뜻을 두어 알음알이(識)으로 道를 배운다면 오히려 道의 미혹에 떨어진다.
道에는 어떤 처소(방위)가 없으므로 道를 일러 대승심(大乘心)이라고 이름한다.
道라고 하는 이 마음(心)은 안에 있지도 아니하고, 밖에 있지도 않으며,
중간에 있지도 않다. 道라는 이 마음(心)은 진실로 정해진 방소(방위)가 없다.
道를 알려고 할 때 제일 중시할 점은 알음알이(識)를 내지 말아야 한다.
道를 단지 그대에게 뜻으로 말한 것은 뜻이 다한 곳이 바로 ‘道의 자리’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한 방편에서다.
만약 뜻, 알음알이(識, 분별심, 분별의식)이 다한다면, 마음에 방소(방위)가 없을 것이다.
道는 본래 매우 천진(天眞)해서 이름도 없다.
다만 세상 사람들이 道를 알지 못하고 미혹해서 道라는 뜻(識, 알음알이, 분별심, 분별의식)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제불(諸佛, 모든 부처, 우주삼라만상, 이 세상 만물)이 이 세상에 출현해
法(진리, 道, 禪, 佛, 心)을 사람들에게 설한 것이다.
해설: ‘전도(顚倒)’란 거꾸러졌다, 뒤로 자빠졌다는 뜻으로 어떤 일이나 어떤 것이
그릇되거나 잘못된 것을 말한다. 청정하지 않은 마음을 말할 때 전도심(顚倒心)이라고 말한다.
규봉 종밀(圭峰宗密, 780~841)은 ‘금강경오가해’에서 청정심(淸淨心)과 동일한 의미로
‘부전도심(不顚倒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니 원문에서 ‘진실한 法은 전도됨이 없는 것’이란 말은 眞實되고
淸淨한 眞理라는 의미로 미루어 볼 수 있다.
원문에 ‘禪宗’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중국불교는 종파불교라고 할 만큼 경전(經典)을 중심으로 8宗이 형성되었다.
禪宗도 8宗 중의 하나이다. 달마가 520년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이래
수많은 조사들에 의해 각각의 자파의 선사상(禪思想)이 정립되었지만,
정확히 ‘禪宗’이라는 호칭이 처음 언급된 기록은 황벽 선사가 펴낸 ‘전심법요’이다.
‘사실 道는 배울 것이 없다’는 내용은 ‘전심법요’의 주요 思想이요, 중심 主題로,
필자가 해설에서 자주 언급한다. 사실 道는 배울 것이 없다는 이 思想은 道는
평상(平常)의 일상생활 그대로 무사(無事)하게 사는 것을 말하며,
平常心이 道라고 했듯이 平常心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道, 부처(佛), 禪, 法(진리),
心(마음)이기 때문에 굳이 道, 부처, 禪, 法(진리), 心(마음)이 무언지를
굳이 애써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조(709~788)선사는 ‘道는 닦음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 물들지만 말라
[道不用修 但莫汚染]’고 말했고, 백장 선사(百丈, 749~814)는
‘道는 닦을 것도 없고, 증득할 것도 없다[無修無證]’라고 하였다.
또한 마조의 스승인 남악은 ‘다만 오염시키지 말라[但不汚染]’고 하였다.
오염(汚染)이란 수행해서 깨달음을 얻겠다는 인위적인 분별심, 조작하고 취사하고
선택하는 분별심, 마음 바깥에서 道를 구하려는 어리석은 분별심을 말한다.
오염을 달마의 ‘이입사행론’에서는 ‘교위(巧僞)’, ‘임제록’에서는 ‘인혹(人惑)’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황벽은 알음알이(識, 분별심, 분별의식)을 일으키지 말것이며, 알음알이를 일으키는
자체가 道에서 전도된 마음(顚倒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마음(心)은 안에 있지도 아니하고 밖에도 있지 아니하고 중간에도 있지 않다~
진실로 방소(방위)가 없다’는 내용을 살펴보면 ‘42장경 2장’에서는
“道(마음, 부처, 法, 禪)이라는 것은 안에서 얻을 수도 없고, 밖에서 구할 수도 없다”고
하였고 ‘유마경’에서는
‘이 마음은 안과 밖, 그 중간에 있지 않다[此心不在內外中間]’라고 하였다.
‘능엄경’에서도 마음(禪, 法/진리, 道, 佛/부처)는 色身인 이 肉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마음은 무엇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어디에 있다고 단정할
수도 없으며, 무한대로 너무 커서 방소(방위, 정해진 위치)가 없다는 말이다.
‘법화경’에서는 석가모니부처의 일대사인연은 중생들에게 불지견(佛知見)을 열어서[開],
불지견을 보여주고[示], 불지견을 깨우치도록 하여[悟], 불지견의 길에 함께 들도록
하기 위해[入] 석가모니부처가 이 세상에 출현했다고 말한다.
‘화엄경’에서도 모든 중생들이 본래 이미 완전하게 지혜와 덕상을 구족하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석가모니부처가 어리석은 중생들을 가르쳐서 그 사실을
깨우치게 하려는 간절한 서원이 담겨 있다.
정운 스님
1
모든 법은 본래부터 공하다
여러가지 모든법은 본래부터 공함이라.
일어남도 없지마는 멸하지도 아니하니
지혜있는 모든이들 친근처라 하느니라.
모든법이 있다없다 진실이다 거짓이다.
생과멸을 따지는건 뒤바뀐 분별이라.
고요한데 있으면서 그마음을 다스리고
흔들림이 아주없이 편안하게 머무르되
수미산과 같이하여 보살행을 보일지라.
온갖법이 모두공해 본래부터 없는것이
빈허공과 같으므로 견고함도 없느니라.
오는것도 가는것도 움직임도 전혀없고
물러남도 아주없이 한모양에 머무름이
그곳바로 이름하여 친근처라 하느니라.
-법화경 안락행품-
강물이 흐르며 / 최춘해
먼저 가려고 다투지도 않고
뒤에 처져 온다고 꾸짖지도 않는다
앞서간다고 뽐낼 줄도 모르고
뒤에 간다고 애탈 것도 없다
먼 길을 가자면
서둘러도 안 되고
조바심해도 안 된다는 걸 안다
제 차례를 지키며 쉬지 않고 간다
가는 길에 낯선 물이 끼어들면
싫다 않고 받아준다
금방 만나도 한마음이 된다
마음이 넓어서 자리다툼도 없다
패랭이꽃도 만나고
아름다운 새들의 노래가 꾀어도
한눈팔지 않고 갈 길을 간다
큰일을 위해 참고 견딜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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