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性에서 일어나는 德을 믿고 / 현웅스님

2017. 8. 19. 20:2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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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殘枯木倚寒林
幾度逢春不變心
樵客遇之猶不顧
人那得苦追尋
최잔고목이 찬 수풀에 의지해 있으니
봄을 여러 번 맞아도 마음 변치 않네
나무꾼도 고목은 돌아보지 않는데
목수는 어찌하여 괴로이 찾으려 하는가

- 대매 법상 선사(大梅 法常, 741-808,752-839)






本性에서 일어나는 을 믿고 


  

본성을 의지해 사는 사람은 사람을 대할때

그 대하는 눈이 道에 바탕을 두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타고난 성격이나 객기에 마음을 둔다.

 

 

객기에 맘을 두고 사는 사람은

일시적으론 성공한 삶 같지만 뒤엔 탈이 따른다 

사람이 그를 날 떠날때 원한을 안고 떠난다.

 

일 뒤에 씩씩함은 있다.

그러나  시간 지나면 공허감만 나를 맴돈다.

 

도덕을 의지해 사는 사람은

설사 실수를 했더라도 곧 뉘우쳐 회복한다. 

되러 그 실수가 德으로 다시 빛난다.

 

이런 일은 종교를 떠나 인간어디에서나 일어난 일들이다.


그런 걸 보면 는 종교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 속에 있다.

 사람이 이지만 하고 안 하고는 그 사람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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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이란 본시 뿌리가 없는 것!

업은 붙들림속에 있을때 있는 것처럼 뵌 착각이다.

제 아무리 열심히 닦아도 근본이 없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일시적일 뿐 업의 그림자는 나를 따라 다닌다.

업 업 ! 하다 가버린 불교!

야칫 잘못 하면 업귀신속에서 못 나온다.

믿음이 바로서야 한다.

바른 믿음없는 신앙은 타종교와 다를게 없다.

말만 다르다.

업을 말할때 그 근본이 성질을 말해주고 그 다음에 방편설을 든다.

인연법 역시 같다.

중도를 깨달으면 인연법을 알고 인연법을 바로 알면 중도에 든다.

어느 한쪽을 따로 두고 설하면 마구니 법이 된다.

대개 업타령만 하는 스님들 이 치웃침을 못 벗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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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을 모르면 불교는
헛짓거리 하는 言語의 장난 일뿐!


해석 할려는 생각을 그칠 줄 알면 禪이 시작되는 것!...
禪은 연구 대상이 아님,

곧 자기 맘이 禪이기 때문!

그 맘을 가지고서도 모르니 禪 공부를 하는 것.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기 맘이 스승.
佛도 그렇게 說합니다.

맘을 알면 삶 자체가 풀립니다.
맘을 모르면 아무리 해석을 잘 해도

그 해설이 맘을 아는 데 더욱 더 장애만 됨..
다만, 맘을 믿는 데 도움이 된 해설은 꼭 필요 함.
그게 法門임.

그러나 경험 해져야 할 것을 이해를 먼저 해버리면

아무 소용없고 지 맘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함.
맘은 지금 항상 존재함.
맘 없는 사람 없습니다.
맘 있는 者는 다 禪을 할 수 있습니다.

맘이 곧 부처이고 스승임!  / 법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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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性慾, 性 .사랑 그리고. 識


性에서 좋아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좋아하는 것이 마음에 닿으면 사랑이 된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이 마음을 등지면 性은 곧, 성욕이 된다.

성이 사랑으로 쓰여 질 때는 神性하다.

대개의 사람들은 性慾을 사랑으로 오인하여 쓴다.

사랑이 없는 性은 삼가 할 줄 아는 이는 도덕이 있는 사람이다


아는 것과 마음은 다르다.

아는 것과 마음을 구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것에 혼돈 중이다. 아는 것은 識이다.

마음은 형상이 없는 것이어서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

그러나 있다. 형상이 없이 있다. 妙하게 存在한다.

이 마음을 만나면 아는 것은 붙어 있을 곳을 잃는다.

이 때를 식이 공하다고 한 것이다. 시비 같은 것이 없다.

시비가 이미 끊어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비하고 있는 동안

 아는 것이 마음인 줄로 착각한다. 그게 망식이다.


마음은 지혜를 품고 있다. 아는 바 없이 안다.
그러면서 할 것은 다 하고 행을 동반한다. 그게 능력이다.

이 능력을 우리는 가지고 있지만 쓰지 못하고 있다.
바로 아는 것으로 마음을 삼는 불법을 빙자한 망상 때문이다.

 이것을 알기가 어렵다.

그래서 불교는 아는 것이 오기 전에 믿음을 먼저 길러야한다.
믿음 속에서는 망동한 생각은 없고 공덕만 자라난다.

 이 몸이 나라고 아는 것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서 내 몸 같이 봐진다.

 그러나 사실 마음이 없으면 이 몸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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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같이 한다는 것은.....?


생각이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툼 없는 마음으로 생각이 같은 것을 말한다.

맘에 다툼이 없게 되면 중생과 부처가 다르지 않아

뜻이 저절로 같아 진다.

이때는 생각은 달라도 생각 때문에 이렇쿵 저렇쿵 하지 않는다.

삶의 폭이 넓어져 있다.


동쪽에 살아도 기쁜 소식이 들리고 서쪽에 살아도 기쁜 소식이 들린다.

생각이 달라도 맘 길이 같으니 이세상에 같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은 같고 맘 길이 다르면 내것 네것을 만들어 폐를 가른다.

마침낸 경쟁관계로 변한다. 서로 원수가 되기도 한다.

우리 삶속에서 어떤 길을 가든지 같이 가기 위해서는

나속에 다툼이 없어야 한다.

이 다툼은 의 근본 이다.

그래서 육조는 악도 생각치 말고 선도 생각치, 말라 ,...

라고 하는 성품의 길을 보여준다.


이 사회가 갈등이 많은 것은 똑똑한 생각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너 잘라고 나 못나 하는 생각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서로 같이 살아 가는데 편할 수가 없다.

나와 남이 만나서 편하지 못하는 것은

이렇게 똑똑한 생각들이 맘 길을 막아서 그렇다..

맘 길이 같으면 저절로 너와 나라는 생각이 적어진다..

이럴때 서로의 뜻이 달라도 우리의 삶은 아름답게 된다.

시끄럽고 복잡해져 가는 사회 속에서도

갈등 없이 살아 가는 상생의 길이 뵌다.

스승 부처님은

우리 들에게 이런 길을 보여주고 간 사람이 아닌가 싶다....




..... 그것은 ?

믿으면 흐르는 물에 같이 따라 내려간다.

 

지옥 갈 사람이 극락으로 따라 흘러 들어가고

중생은 부처 있는 곳으로 같이  따라 흘러 들어간다.

 

그래서 아난은 金剛經 첫 구절에 如是 我聞 이라고 시작한다.

  자기 생각을  일으킴이 없이  " 나는 이렇게 들었다 "  !

는  이 뜻을     그품고 있다.




빈방에 홀로 앉아

 

 오랫만에 집안일을 마치고 혼자 있다.

 찻잔을 앞에 두고 앉아있으니 절로 한가롭다.

 

몸과 마음에선 무엇을 기다리는 듯 하지만 이젠 별로 할 일이 없다.

 할 것이 있을 때는 조금은 분주했는데 할 것이 없으니 이젠 마음만 남는다.

 이 마음이 일고 꺼져 무엇을 찾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공연한 습에서 온 것들이다.

 

일고 꺼지는 것들은 있는 것 같지만 그 근본은 없는 것,....

 

절로  고요하다.

 

  마음이 없으면 일이 없다. 이때 일이 있어도 일이 아니다.

 오고감에 노닐며 한가롭다.

무엇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아직 마음의 일이 아니다.

 

옛이 지금이고 지금이 옛이다.

모든 성인은 여기에 살고 있다.

 성인들도 여기에 있고 범부도 여기에 있다.

 

 다만,

 범부는 바쁘고 할 일이 많다..

성인은  일이 없는 곳에서 일을 한다.

하는 것마다 싱그럽고 보는 것마 다 빛난다.

사람사람이 슬기롭고 눈뜨고 듣는 것, 이 얼마나 묘한지 모른다. ! 

 마음이 곧 이며 이 곧 마음이다.

 

그 다음 것들은 사람 스스로가 만든 것들이다.

만들고 지우고 또 만든다.

 일고 꺼지는 것에 마음을 맞겨 부댓긴다.

타고 난 생을 일그러 뜨린다.

이런 것들은 모두가  마음을 잘 못 알아 생긴 일들이지

본시 있는 것이 아니다




가 없으면 사랑은 숨어 버린다.


사랑은 生命이 존재하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남년간의  사랑도 그 사랑이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은

이 삶이 생멸 하는 것 속에 있어 그렇다.
생멸은 삶의 표현이지 道가 아니다. ...
마?? 바람이 불면 나무 가지에 나뭇잎들이 살랑 거리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그런 것에 눈이 쉬이 가 매달리곤 한다.


그러나 저 나무 끌텅 아래에는 바람에 조용하다.
도는 그 눈이 나뭇잎에도 있지만 나무 끌텅에 있는 눈은 더 조용하다.
이 삶을 보는 눈이 그렇다. 無常이 그것이다.

남 여 간에 사랑이 오래 가려면 道에 근 본을 두어야한다.
도를 벗어난 사랑은 일고 꺼지는 일에 휘둘러 사랑이 숨어 버린다.
사랑이 오래가지 못한다.


일고 꺼지는 데 마음을 두는 것이

사랑이 일어나는 생명이 있는 곳을 장애하기 때문이다.

다툼이 있고 온유함이 없다. 지혜가 없다.

서로의 보살핌이 없고 요구한 것은 많아진다.
불만은 늘어만 간다. 있는 사랑도 없어져 버린다.

그러나 도 있는 곳에는 사랑이 날마다 탄생한다.

이게 불교에 응 무 소주 이생 기심이 곧 그 것이다.


그래서 도는 사랑의 눈을 가지고 있다.
이게 西쪽 사람들은 神은 사랑이다, 라고 하는 것이 그것다.
사랑은 탐, 진, 치 ,에도 조용하다. 온유함 속에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남을 배려한다. 이쪽 佛敎에 자비가 그 것이다.


- 현웅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