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돈수론에 대한 논평과 답변/한보광 ㅡ스님

2017. 8. 19. 20:3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728x90

돈오돈수론에 대한 논평과 답변



頓悟頓修論에 대한 논평


한 보광(동국대 교수)



저는 이번 이러한 행사를 ‘白蓮佛敎文化財團’이 주최하여 유서 깊은 法寶宗刹인 해인사에서 개최하게 된 것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만 또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즉 이곳에 주석하고 계시는 宗正猊下의 지도노선, 이것은 바로 조계종의 지도노선이며, 방향입니다. 이 지도노선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라고 반문해 보았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宗正猊下의 지도노선에 대한 크나큰 도전이며, 조계종의 방향을 흔들어 놓는 일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긍정적으로 이해한다고 하면 사회의 흐름이 개방화 민주화되었기 때문에 우리 종단도 여기에 발맞추어서 무엇이든지 토론의 장으로 끌어내어 어리석은 중생의 잣대로 견주어 보아도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는 가장 민주화된 종교단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종단은 위계질서가 무너져서 종정예하의 지도노선에 역해하거나 도전하여도 아무런 제재도 할 수 없는 교단의 무질서 내지는 교단의 존엄성의 상실을 의미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우리 종단이 참으로 위계질서가 서 있고 권위가 회복되어 교권이 확립되어 있다고 한다면 종정예하의 지도노선에 대하여 이와 같이 시비를 논할 수 있었을는지 대단히 의문스럽습니다.


제가 평소에 늘 존경하는 박성배 교수님의 발표 논문을 잘 읽었습니다. 이 논문에 대해서는 어느 한 구석 흠 잡을 곳이 없을 정도로 대단히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며 문장 역시 막힌 곳이 없습니다. 어찌보면 頓悟頓修論에 대한 것이라고 보다는 너무나 이론적이라서 이것이 언어학회인지 불교학회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와 같은 어원의 분석에만 집착하다 보면 부처님이 가장 경계하신 戱論에 빠질 수도 있으며 衒學的인 논문으로 변질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저의 일천한 견해로서는 이 논문만 가지고는 박 교수님의 頓漸에 관한 논지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민 끝에 박 교수님의 논지를 좀더 정확하게 알기 위하여 이와 관련하여 평소에 발표하신 논문들을 먼저 읽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는 과거에 性徹스님의 저서인 ?禪門正路?에 대하여 비판한 송광사의 ‘普照思想硏究所’에서 발표한 논문들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송광사라고 하는 어떤 특정한 장소가 문제시되지는 않습니다. 이는 普照的인 견해인 頓悟漸修的인 입장에서 해인사의 성철스님의 돈오돈수를 비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일반적으로 송광사는 普照스님, 頓悟漸修, 普照思想硏究所로 통용되며, 해인사는 성철스님, 돈오돈수, 백련불교문화재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두 사찰은 조계종의 본사로서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三寶 寺刹 중 하나인 法寶와 僧寶 寺刹에 각각 해당하고 있으며, 과거 고려시대 조계종의 중흥조라고 하는 보조스님과 800여 년 뒤인 현재 종정인 성철스님의 견해의 차이이며, 종단의 지도노선입니다. 이와 같은 양자의 관계 속에서 세인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분은 당사자인 보조스님이나 성철스님이 아닌 박성배 교수님이십니다. 박 교수님의 논문 발표 때마다 교계나 일반 언론들은 대서특필하여 왔으며, 지나치게 흥미위주로 다루어져 왔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각도에서 분석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 책임은 박 교수님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는 언론의 속성인 사회관심이나 흥미의 유발이라는 점에서 박 교수님은 이러한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교수님은 지금까지 송광사의 보조학회에서 돈오점수를 지지하면서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성철스님을 신랄하게 비판해 왔습니다. 이와 같은 견해는 박 교수님 이외에도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였습니다만 다른 분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오직 교수님의 견해에 대해서만 크게 어필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다름아닌 교수님과 성철스님간의 특별한 인간적인 관계를 모두들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수님은 성철스님의 문하에서 직접 지도를 받았으며 師資의 관계를 맺어 왔습니다. 그런데 송광사에서 성철스님의 지도노선에 대해서 신랄히 비판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사회의 관심은 교수님의 논문에 의해 성철스님과의 인간적인 관계를 조며해 보려고 하는 점이었습니다. 여기에 교수님은 자신도 모르게 휘말려들어 갔으며 어찌보면 희생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발표 논문들을 살펴보면 이와 같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는 문장들이 대단히 많았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여기에 대한 책임은 좋든 나쁘든 본인이 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교수님께서 양해해 주신다고 한다면 저는 이러한 관점에서 금번 발표논문과 과거의 논문들을 비교 검토하고자 하며 여기에서 나타나는 모순점에 관하여 몇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몇 해 전부터 송광사에서 발표하신 논문이 있고, 최근에는 1992년 민족사에서 출판된 ?깨달음, 돈오점수인가 돈오돈수인가?에서 「성철스님의 돈오점수설 비판에 대하여」라고 하는 논문이 있습니다. 저는 박 교수님의 지난해의 이 논문과 그후 1년 뒤인 이번 발표 논문을 서로 비교하여 그 모순점과 의문점에 대하여 몇 가지 여쭙고자 합니다.

여기서 교수님의 논리적인 전개는 성철스님께서는 보조스님을 ‘毒樹生庭’의 존재로 비판하였다고 하면서 시작됩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대단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시작되지만 후반부에 갈수록 비논리적이고 감성적으로 전개되어,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는 성철스님에 대한 인격적인 인신공격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만약 전후의 문맥을 단절시키고 한 구절 한 구절만 가지고 본다면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정된 시간성의 제약을 받으므로 앞뒤의 말을 모두 전개할 수 없고, 독자들이 보면 오해할 수 있는 구절만 잘라서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만일 성철스님께서 보조국사가 문제삼는 의미의 修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면 성철스님은 화두선 근본주의자라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현대 사회에 있어서 근본주의자들의 폐해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계는 지금 가지가지의 근본주주의 공해 때문에 신음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것은 아집과 아만의 산물이며, 지금 세계를 ?벼하는 평화의 적들이다. 성철스님은 선사이다. 선사가 근본주의자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수도원 밖에서 날이면 날마다 화두선 이외의 것들과 상종하면서 살고 있는 절대 다수의 일반 불교인들을 위해서 보조국사의 萬行兼修에 필적하는 수행의 이론을 제시해 주십사고 스님께 간청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현대는 근본주의자들에 의해서 세계가 위협받고 있으므로 그들은 평화의 적이라고 간주한 것입니다. 그러며서 만약 성철스님께서 보조국사와 같이 修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을 제시하지 못할 경우 성철스님은 바로 화두선의 근본주의자입니다라고 하는 논리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단서 조항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성철스님은 화두선의 근본주의자이며, 이는 평화의 적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본 논문의 저난적인 요지가 성철스님은 修에 대한 언급이 결여되었다는 내용이므로 성철스님은 바로 화두선의 근본주의자이기 때문에 평화의 적이라는 논리로까지 비약시킬 수도 있습니다.


본인의 생각으로는 성철스님은 화두선의 근본을 세우신 분이며, 이를 위해 ?禪門正路?를 저술하신 것이지 결코 화두선에 광신하는 근본주의자는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즉 근본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과 근본주의자와는 다릅니다. 근본주의자란, 공산주의자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이데올로기의 문제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스님께서는 화두를 결코 이데올로기로 생각하시지는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성철스님에게 어떤 조건을 내세워서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당신은 근본주의자이며, 평화의 적이다”라고 하는 것은 서양의 흑백논리이지 결코 동양적이고 불교적인 사유방법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다음에 성철스님이 정말 깨달았을까? 아니면 깨닫지 못했으면서도 깨달은 것처럼 꾸미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즉 이를 인용하면, “지금은 단도직입적으로 성철스님께 여쭈어보지 않을 수 없다. 돈오돈수를 주장하시는 스님은 돈오돈수하셨습니까? 그리고 스님의 지도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그러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나왔습니까?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서 스님께서는 언제 어디서 오매일여의 경지에 들어가셨으며, 또한 거기서 얼마 동안 계시다가 나오셨습니까? 이젠 제8아뢰야의 미세 망념까지 다 없어지셨습니까? 믿지 못하늡 복한 탓이라 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고 아무런 설명도 없이 믿으라는 것도 딱한 노릇이다. 마조 제자 80명 중에 정안은 수삼인이라는 황벽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오늘날 지구상에 무수히 많은 길 잃은 사람들을 성철스님은 무슨 수로 다 제도하시겠습니까? 四弘誓願을 조석으로 외우면 된다고 하시겠습니까? 無字話頭로 용맹스럽게 정진하면 된다고 하시겠습니까? 사홍서원을 외우던 사람들이 사홍서원을 외우지 않고, 화두를 들던 사람들이 화두를 들지 않는 우리의 기막힌 현실을 조계종 종정이신 성철스님께서는 보시고 계십니까? 한번 여쭈어보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박 교수님의 이와 같은 질문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당신은 늘 깨달음에 대하여 말하고 계시는데, 성철스님 당신은 정말 깨달았습니까? 만약 깨달았다고 한다면 언제 어디에서 깨달았으며, 그 증표를 내놓아 보십시오. 당신은 아직까지 한번도 그 증표를 내놓은 일이 없으며, 당신의 제자들 중 어느 한 사람도 그러한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여기에 대해 대답을 못한다면 당신은 깨달음을 가장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내용이 숨겨져 있다. 즉 “성철스님 당신은 아직 깨닫지 못했으므로 돈오돈수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논자의 심증이 숨겨져 있다. 이와 같은 것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로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사실은 깨침의 사건을 아직 가지지 못했으면서도 마치 깨침의 사건을 가진 것처럼 깨침의 내용을 말하는 경우는 대개 재주기운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재주의 장난이다. 이런 경우 재주는 悟의 생명을 끊는 독약이나 다를 바 없다.


라고 하면서 성철스님의 ‘깨침’의 주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장을 전자와 후자를 연결할 경우 “당신은 깨치지 못하였으면서도 깨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당신의 재주기운 때문입니다. 이 재주기운은 깨침을 끊는 독약입니다”라고 크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됩니다. 교수님이 성철스님께 “당신은 깨쳤습니까”라고 하는 반문은 “당신도 못 깨쳤으면서도 남에게 깨쳐라고 할 자격이 없다”는 뜻으로 비추어지므로 이 문제는 성철스님의 인격에 관한 모독이라고 생각됩니다. 왜 하필이면 이와 같은 인격적인 인신공격을 하였느니 잘 납득이 가지 않는 점입니다.


이번에 발표하신 논문에서는 깨침과 깨달음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만 과거에는 理와 事에 대해서 논리를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성철스님의 논리가 잘못되면 修道至上主義者나 頓悟根本主義者로 전락할 우려가 있는 것처럼 전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수님께서는,


頓悟漸修는 종합적인 수행이론이며, 頓悟頓修는 좁은 의미의 특수한 修行理論인데 이를 만천하에 적용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넓은 의미의 일반적인 수행이론을 제시하려고 애쓴 보조스님을 마치 이단처럼 몰아붙인 것은 아무래도 좀 지나친 것 같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본인의 견해를 밝혔는데 본인께서는 ‘頓悟頓修的 漸修說로 발전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밖의 다른 논문들까지 관련시키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바탕 위에서 단 몇 가지만 여쭈어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교수님의 과거 논문들은 성철스님의 논리적인 모순점과 인간적 측면에서 많은 비판을 하셨는데, 이번의 논문은 성철스님의 논리를 합리화시키고 체계화시켜 드리고 있으며 인간적으로도 성철스님의 위대성을 밝히기 위한 논문이 아닌가라고 느껴집니다. 이렇게 볼 경우 교수님의 지금까지의 논문과 이번의 논문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이 극단적으로 서로 상반되는 논리적인 모순점이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리적인 모순점을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극복하실 것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두 번째는 성철스님의 참선 지도노선에 대하여 듣고 싶습니다. 조금전 발표때도 신문기자와의 인터뷰에 관해서 말씀이 있었습니다만, 교수님은 성철스님의 지도노선에 대하여 수용인지 거부인지, 아니면 수정인지에 관해서 알고 싶습니다. 전번 논문에서는 ‘頓悟頓修的 漸修說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셨는 데 위의 3자 중 어디에 해당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세 번째는 전장와 연관되는 사항입니다만 頓悟頓修的 漸修說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的’이라는 말의 뜻은 어떠한 것입니까? 요즈음 현정권에서는 12.12사건을 ‘역사적 사건이다’라고 하여 ‘역사적’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대단히 애매모호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과연 ‘的’이라는 것이 문법상 어떠한 어미를 가지며 그 품사는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분은 ‘자격적 조사’라고 하기도 했습니다만 어떻게 的이란 말을 사용하여 ‘頓悟頓修的 漸修說’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이는 박 교수님의 새로운 수행 방법인지 아니면 학설인지 또 어떻게 수행하는 것인지에 관해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네 번째는 금번 논문의 결론부분에서는 頓悟頓修者의 정진을 인정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과거의 논문에서는 돈오돈수자의 정진이나 修를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가 혹시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과거의 논문에서는 인정하고 있지 않던 것을 지금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수님은 “성철스님 당신은 깨쳤습니까?”라고까지 하고 계십니다. 물론 논문은 거듭 수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에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번에 다시 성숙된 후에 보니 그때 것이 잘못 되었으므로 돈오돈?자의 정진을 이제는 인정하는 것인지에 관해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이를 다시 이야기 한다고 하면 과거의 잘못된 견해를 이번에 수정한 것인지, 아니면 과거의 발표 장소는 송광사였기 때문에 성철스님에 대해 아무리 고격해도 상관없다가 이번에는 성철스님이 계시는 해인사이기 때문에 돈오돈수자의 정진에 대해서 분위기상 할 수 없이 인정하는 것인지에 관해서 교수님의 솔직한 견해를 듣고 싶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것은 본 논문의 주제하고는 좀 벗어난 이야기입니다만, 이번에 박 교수님께서 여기에서 발표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했습니다. 그분들은 박 교수님께서 과연 해인사에서도 과거 송광사 때처럼 성철스님의 인신을 공격하는 그러한 발언을 하실 수 있으실까? 아니면 이번에는 海印寺的으로 하실까? 하는데 대해서 많은 분들이 의구심을 가지고 저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러한 분들의 의구심에 대한 해답과 박 교수님의 그동안 송광사에서 일으킨 물의 내지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 발언, 발표 등에 대해서 솔직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의문점을 짧은 시간에 드리다보니 다소의 무례도 있었습니다만 깊은 이해 바라면서 두서없는 질문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논평에 대한 답변


박성배



네 가지를 하나하나 따져가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종합하여 답변하겠습니다.

제가 돈오점수 밑에 깨달음이라고 썼는데, 깨달음이 문제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깨달음은 지적으로 아는 것으로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깨침이 중요하다고 해서 깨달음이 쓸 데 없다는 소리는 할 수 없습니다. 보조국사는 누구든 가지고 있는 깨달음에 근거해서 체계를 세우신 분입니다. 성철스님은 ‘눈 있는 자는 보고 귀 있는 자는 들으라’하는 돈종적인 태도로서 철저하게 임제종의 간화선적인 태도인데, 저는 거기에 대해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또 그렇게 못하는 나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라도 자부합니다. 그런데 그런 입장을 취하신 분이 보조국사로서, 그의 책을 읽어보면 한국 역사상 드물게 학문적 감각이 있어서, 항상 체계화가 문제가 되고, 종합적인 것이 문제가 되고, 두루두루한 것이 문제가 되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근본주의자란 어떤 몇 개의 근본적인 진리를 앞세우고 일체를 그것으로 요리하고 그 이외의 것은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는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서, 기독교 보수진영에 많습니다. 저의 소신은 근본주의로는 안된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근본주의에 반대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성철스님은 화두선의 근본주의자다. 근본주의자는 평화의 적이다. 따라서 성철스님은 평화의 적이다’라는 삼단논법을 구사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의 어법에 관한 문제이지 삼단논법으로 스님을 구석에 몰아넣고 평화의 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돈오돈수자의 정진을 부정했다고 하는데, 그것도 저의 이해하고는 다릅니다. 저는 돈오돈수주의가 가장 잘 적용되는 사람은 해인사 선방에서 용맹전진한다는 그런 분들에게 가장 잘 적용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돈오돈수하고 돈오돈수설하고는 다릅니다. 돈오돈수는 부처님의 경지이고, 깨침의 경지이고, 구경각을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돈오돈수설은 그러한 것에 입각해서 자기 수도의 체계를 세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돈오돈수설이 우리의 경험권 안에서는 용맹전진하는 분, 화두정진하는 분에게 해당되고, 일반적인 모든 사람에 대해서는 보조국사의 체계가 더 일반적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보조국사의 장점은 타고난 학문적인 성격, 타고난 지혜여서 이것이 계승되었어야 하는데 불행히도 제자 혜심에 의해 계승되지 않고 끊어졌다고 봅니다. 따라서 보조국사는 제가 하고 있는 조직불교학의 선구라고 생각합니다.


돈오돈수적 점수설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부처님의 깨침을 말하는 이상 돈오돈수라고 하는 내용을 가진 깨침이어야지, 깨달음을 가지고 ㄲ침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침을 말하는 한 돈오돈수가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회 속에서 여러 가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한 ‘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모습은 ‘점’입니다. 그런데 그 ‘점’을 사는 정신을 ‘돈오돈수’의 깨침의 정신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이 거의 돈오돈수적 점수설의 본령입니다. 그래야만 보현행원품도 설명이 가능하겠고, 21세기를 맞는 불자로서 이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겠다는 앞날에 대한 전망에도 맞습니다.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