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혜천스님설교

2017. 10. 1. 12:3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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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스님 5월 2일 일요법회

보물

 

 

완연한 봄입니다. 지금 흥천사 마당에도 며느리꽃들이 만발했습니다. 며칠이 춥고 궂던 날씨가 오랫만에 봄날에 맞게 따뜻하고 환해서 우리 기분이 좋습니다.

 

오늘의 강론 주제는 보물입니다.

부처님께서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보물은 자신감이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보물도 자신감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갖고 있고, 또 가질수 있는 것이 자신감인 것입니다. 보물이 무엇입니까. 이수일과 심순애의 다이아몬드 일까요, 허장강 선생의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하지"하며 자랑하는 반지일까요. 사람들은 하시라도 누가 훔쳐갈까봐 그 보물을 깊숙히 넣고, 담장을 높입니다.

 

인간이 갖고 있고 가질수 있는 보물은 자신감인데 이 자신감은 누가 나에게 주는 것인가? 아니면 만들어지는 것인가? 중국 당나라때, 조동종을 일으킨 동산양개(洞山良价:807∼869)는 오도송을 처음으로 남긴 스님으로 꼽습니다. 조당집》 제5권 〈운암화상장(雲岩和尙章)에 따르면, 양개가 개울을 건너다가 깨달음을 얻고 ‘동산과수(洞山過水)’*라는 게송을 남겼는데 거기에 보면 "밖으로 향하여 찾지 마라, 찾을수록 점점 나와는 멀어지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밖에서 찾을 수록 나와는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밖에서 찾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녁 해거름이 지난 가로등불빛 아래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친구들도 모두 그 친구 옆에서 같이 손으로 더듬어가며 도와 주었답니다. 한참을 아무리 찾아도 잡히는 것이 없자 친구들이 그에게 묻습니다. "어디쯤에서 잃어 버린 거야"하자 그는 "응 저쪽에서 잃어 버렸어..." 그러자 친구들이 화를 내며 "야 그런데 왜 이곳에서 그것을 찾는 거이야..." 하자 그 친구는 "응 여기는 가로등 불빛이 밝아서..."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렇다면 자신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내가 권력이 많아서? 주먹이 세서? 이뻐서? 돈이 많아서? 젊어서?... 물론 이러한 요인들이 자신감을 갖게 하는 여러 요건들은 되어 주겠지요..., 그렇지만 이런 것은 진정한 자신감이 아닙니다. 일국의 대통령이었던 사람이 바위에서 뛰어내리고, 삼성의 부사장이 목을 매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이 갖고 있는 조건으로 살아 갑니다. 하지만 그 조건은 변하게 돼 있습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자인 대통령도 기껏해야 5년이요, 부자도 삼대뿐입니다. 누구도 어떤 것을 영원히 가질 수 없습니다. 최고 권력가도 그 권좌에서 내려오는 순간 칼날위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신감은 그 조건들이 변화해도 흔들리지 않는 것으로 이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권력이 있으면 손가락으로도 사람을 부립니다. 예전에 송나라 때 운문종의 큰 스님이셨던 효순 노부 스님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다 당시의 지방관리였던 괴도관 남강태수에 밉보이게 되었습니다. 그가 보물을 탐냈지만, 그것을 주지 않자 그의 승복을 벗겼습니다. 그 때에는 도첩제가 실시되던 때이라 반드시 도첩(국가의 인정)을 받아야만 승려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승적을 뺏기고 길거리로 나 앉은 효순스님의 처지를 안타까워 한 후임주지가 두 장정에게 스님을 멀리 나한사에까지 모셔다 주라 했지만, 두 장정은 힘도 들고 하여 의논 끝에 이미 우리 선원의 노스님이 아니니 멀리 갈 것 없다 하고는 가마를  버리고 돌아가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효순스님이 고생고생하며 예전에 자신의 회하에서 공부한 적이 있던 정인사 대각 회연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절에는 당시 황제였던 인종이 자주 찾아오곤 하였는데, 대각 스님이 효순스님을 극진하게 모시는 것을 보고, 연유를 물어보고 인종은 '위대한 도풍을 간직한 산림의 진짜 달사로다' 감탄하며 효순스님의 승적을 되돌리고 다시 서현사의 주지로 임명하며 자의가사와 은발우를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앞서 그를 버렸던 두 장정이 얼마나 떨었겠습니까. 효순은 그들을 위해 먼저 사람을 보내 당시 너희들의 행동은 옳은 것이었으니 두려워말고 안심하라는 기별을 넣고 절에 이르렀답니다. 그리고 법당에 올라 다음과 같은 송을 하였다고 합니다.      


까닭없이 참소입어 쫓겨났던 몸    반 년 남짓 세월을 속인이었네

오늘 또다시 삼협사에 돌아오니    기뻐할 이 그 얼마며 노여워할 이 그 몇일까.

無端被枉遭迍   半年有餘作俗人

今日再歸三峽  寺幾多喜幾多嗔

 

결국 어떤 배경이나 조건은 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배경이나 조건을 갖고 으시대고 교만해집니다. 자신감은 자기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것에서 나옵니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옛날에 사마천은 "역사는 일치일란(一治一亂)이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치란 통합되고 다스려지는 것을 의미하고, 란은 분열하고 다투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국이 주나라로 통합된 것이 치라고 한다면,  그 뒤의 춘추전국시대는 란이요, 진나라가 치라면 유방, 항우가 할거했던 시대가 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개인사에 비유하자면 한번의 치와 란이 아침, 저녁에 뜨고 지는 해와 달과 같다는 것입니다.  어떨때는 세상이 좁살처럼 보이고 또 어떨때는 세상이 그렇게 완고한 절벽처럼 느껴집니다.

 

붓다께서는 '마음의 고개만 돌리면 피안'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마음의 고개만 돌리면 지옥이자 그대로가 행복일 수 있습니다. (썩은 동아줄 세발만 있으면...노승 예화) 이 세상에 나만 힘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가족과 주위사람들이 괴로운 지경이 되자 산속의 밧줄안에 목을 넣었다가 뺐다가 하면서 고민하다가 '그래도 내가 살아서 한달에 만원이라도 벌어서 아내에게 줄 수 있다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고 산을 내려와 열심히 살았다고 합니다. 그 뒤 그 사람은 다시 재기하여 잘 살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아무리 그 순간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 같지만 그 순간도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힘든 일을 만나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하고 마음의 고개를 돌릴 일입니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얘기이지만, 인도의 어떤 왕이 차를 마시다가 이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설산인지, 지위인지, 나의 명예인지... 여러가지 생각읗 하다 보니 그 어떤 것도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만리화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웠던 부인에게 '왕비여 이 셍상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오?'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왕비가 '왕께는 미안한 얘기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하고 대답하더랍니다. 이에 왕은 노여움은 커녕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었노라 라며 같이 붓다를 찾아뵙기로 했습니다. 붓다에게 예를 갖추고 이러한 말씀을 드리자 붓다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자 소중한 것은 너 자신"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붓다 입장에서는 너 자신이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나 자신입니다. 나 자신보다 소중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들도 모두 이와 같습니다. 모든 생명들이 소중한 것입니다. 니까야에도 나와있고, 대념처경을 강의할때도 말씀드렸지만, 다섯가지 수행방법에 '자비관'이라고 있습니다. 수행은, 수행의 바탕은 자애심입니다. 마치 홀어머니가 외아들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수행의 근본은 자애심이고, 멈출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수행이라고 하면 축지법 등의 초능력을 떠올립니다. (한겨례 신문, 김도향 칼럼 예시) 요사이 축지법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나도 지금 나가서 저녁때까지 부산을 다녀올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생명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입니다. 그것이 사랑이고 자애심입니다. 나 자신을 섬기고 감사하고 사랑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섬기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사랑할줄 모르는 사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내가 행복하지 못한데 어떻게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할 것입니까. 얼마전 여중생을 두고 있는 아주머니와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는 딸이 진달래, 개나리를 감상할 줄 모르고, 공부도 그냥 시늉으로만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고 딸아이와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아이와 눈을 맞추고 진심으로 대하기 시작하자 딸아이의 집중력도 높아지고, 둘 다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처럼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힘이나 권력, 돈이 아닙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섬기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내 마음 속에 있는 것들입니다. 내 마음을 돌리면 그대로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거창한 것을 생각하지만 세상은 부치기 뒤집듯 한번에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숫자도 0에서 시작합니다. 0은 그 존재감이 없지만 0이 없으면 수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수에서의 0과 같습니다. 우리는 태어나 많은 교육을 받지만, 정작은 개나리, 진달래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랑은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것입니다. 사랑은 그만큼 소화력이 좋아서 체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예전에는 3년, 요사이는 49일 정도만 슬퍼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자식들이 죽으면 평생을 잊지 못하고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법입니다. 얼마전, 우리 도량의 어린 딸도 유명을 달리 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아무 느낌, 생각도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것도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낳게 되었다고 봅니다. 우리는 감성적으로 느끼고, 이성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지금 시내에는 걸어다니는 송장들이 넘쳐 납니다. 무슨 얘기냐하면 그만큼  감성적으로  느끼고, 알고, 사랑해야 되는데 송장처럼 아무런 감성이 없는 생활을 한다는 뜻이지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붓다는 인간이 가질 수 있고 또 갖고 있는 것이 자신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바탕에는 자애관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오직 섬기고 감사하고 사랑하라.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  이러한 사랑의 기술,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줘야 할 것입니다. 유년기에 사랑하던 경헙이 없으면 사랑하는 방법이 거칠어 집니다. 사랑을 표현하지 못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 일쑤입니다. 사랑은 비단처럼  섬세하고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비단을 무명처럼 거친 손으로 다루면 깨지게 마련입니다. 마침 옷감의 재료인 무명과 번뇌를 뜻하는 무명(無明)이 같은 단어로 표현이 되는 군요.

 

여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를 위하여 화장을 고치고,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생명을 바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나 자신을 비단처럼 다루어야 합니다. 현실이 어렵고 힘들수록 내 자신을 함부로 굴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대접받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대접해야 합니다. 이제라도 자식들을 위해, 남편을 위해 생선 대가리만 먹지 말고, 같이 몸통을 잡수십시오. 그래야 사랑이 통하고 행복이 통하는 법입니다. 그래야 자신 속에서 자신감이 솟아 오릅니다. 그래야 입성이 누추해도 세상에서 왜소함을 느끼지 않고, 위축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행복을 느끼고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결론적으로 아까 얘기했던 동산 양개스님의 과수게를 인용하는 것으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절대로 밖을 향하여 찾지마라

  나 와는 점점 멀어질 뿐이니...., 

 

 

 

* 洞山過水 :

 

             밖에서 찾지 말지니
             나와는 점점 멀어질 뿐이다.

             다만 지금 홀로 가지만,

             그는 나와 함께 갈 것이니
             그는 이제 바로 나여도

             나는 이제 그가 아니로다
             응당 이러히 깨달아야

             바야흐로 진여와 하나 되리라.

                                   - 동산양개(洞山良价:807∼869) -

 

조동종을 창시한 동산 스님의 이 오도송은 스승 운암선사의  이것이 이것(這箇是)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개울을 건너다 문득 물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대오했다고 한다. 하여 이를 두고 물을 건너다 지었다 하여 ‘과수게(過水偈)’라고도 일컬어진다. 오도송은 이처럼 뜻하지 않는 곳에서 깨달음을 얻을 때 남기는 경우가 많다.

 

오도송(悟道頌) 이란 선승이 자신의 깨달음을 읊은 선시(禪詩)를 이르는 말로서 게송(偈頌)의 하나이다. 게송이란 불교의 가르침을 함축하여 표현하는 운문체의 짧은 시구를 말하는데, 본래 게와 송은 같은 의미이다.  게는 산스크리트 가타(gatha)의 음을 따서 만든 말이고, 송은 가타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게송을 게 또는 송으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  이 게송 중에서 고승이 자신의 깨달음을 노래한 것이 바로 오도송이다.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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