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서 시작하라 |…… 혜천스님설교

2017. 10. 8. 00:1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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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서 시작하라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5월 2주차: 불기2554년 5월 9일


 

오늘 강론의 주제는 '그 자리에서 시작하라'입니다.

지난 주만해도 앞뜰에 철쭉꽃이 만발했더니, 이제는 다 떨어졌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를 부른 백설희의 부고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녀의 노래처럼 봄날은 갔습니다. 그녀도 갔습니다.

 

역사가 사마천은 역사란 '일치일란(一治一亂)"이라 하였습니다. 그는 역사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도 일치일란이라고 했습니다. 즉 한 번의 치(治)와 한 번의 난(亂)이 교체하는 역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치는 치세(治世)이며, 난은 난세(亂世)입니다. 치세란 평화가 유지되는 시대이며, 난세란 혼란의 시대입니다. 일치일란은 치와 난이 교차하는 것이 아닌 교체되는 것입니다. 즉 치와 난이 끊임없이 자리를 바꿔 앉는 것이 역사라는 것입니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제 행복했지만, 오늘은 기분이 껄쩍지근하고 거시기합니다. '오늘 누군가 지나가다가 어깨라도 부딪쳐봐라 요절을 낼 것이다' 뭐 이런 기분이죠. 그런데 내일이 오면 어제 그 마음은 어디 가고 기분이 아삼삼한게 좋습니다. 어제 슬프고, 오늘 기쁩니다. 개인의 삶도 치와 난이 자리를 바꿔 앉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윤회를 말합니다. 보통은 윤회를 이해하기를 오늘 꼴깍 죽어 내일 돼지우리의 돼지로 태어나 꿀꿀거리는 걸로 압니다. 봄날은 갔다고 슬퍼하다가도 오늘 옆집이 아들을 낳았다고 박수치며 좋아하는 것도 윤회입니다. 하지만 죽어서 무엇으로 바뀌는 것만이 윤회가 아닙니다. 윤회(輪廻)란 바퀴가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순환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리바꿈을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육두윤회(사실은 육도윤회)를 말합니다. 여기서 육도란 천상, 인간세계, 아수라, 지옥, 아귀, 축생을 말합니다. 

 

천상은 신들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어떤 사람은 100년을 살면서 시간이 짧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지겹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인간세계의 100년이 도솔천, 즉 신들의 세계의 1년과 같습니다. 도솔천에서 아침에 보이다가도 저녁에 안보이면, 인간세계로는 그저 한 50년 산 것입니다.  인간세계는 축복된 삶이지만, 천상의 그런 사람들이 귀양온 것입니다. 내 아내가 요리를 못하고, 내 아이가 공부를 못하고, 내 남편이 돈을 못벌어 오면, 이렇게 생각하면 딱 맞습니다. "아싸 봉잡았네'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들이 요리를 못하고, 공부를 못하고, 돈을 잘 못벌어오는 것은 그들이 인간세계에 처음 온 것이라 서툴러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최소한 인간과 신의 중간인 사람과 사는 줄 알면 됩니다. 내 아내가 요리를 못하는 것은 하늘에서 온 천녀라 그 곳에서 요리를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이며, 내 아이가 공부 못하는 것도 순진무구해서 그런 것이며, 내 남자가 어리벙벙한 것도  인간세계에 처음 온 탓입니다. 이 모두 이들이 인간세계에 처음 와서 서툴러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그들에게 선택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수라는 원래 호전적인 신입니다. 페르시아 최고의 신 아즈라 마후다의 인도식 발음이 아수라입니다. 고대 인도로 올라가면 인도 최고의 신 브라만 역시 아수라와 관련됩니다. 그 다음이 지옥, 아귀, 그리고 축생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렇게 육두를 윤회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육두윤회는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매일 하고 있습니다. 내가 기쁘면 천국, 슬프면 인간세계입니다. 아수라, 지옥, 축생 역시 매일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만 배터지게 먹으면 된다고 여기면 그것이 축생이고, 나 혼자만이 맛있는 걸 먹겠다고 다투면 그것이 아귀입니다.  

 

옛날 공삼거사 김영삼과 대중검자 김대중이 대선에 맞붙어서 김영삼이 승리하자 김대중은 정계를 은퇴하고 영국으로 떠납니다. 그런 뒤 2년이 지나 국내로 돌아와  정계복귀를 선언하지만, 김영삼대통령은 그를 만나주지 않습니다.  그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다른 사람들을 청와대에 초청해 칼국수 대접을 할 때인지라 "나도 칼국수를 먹을 줄 아는데..."라고 말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집니다. 우리가 마음이 그거하면 그게 그렇습니다. 천상, 인간, 아수라, 지옥, 아귀, 축생으로 윤회하는 것은 치와 난이 교체되는 것입니다.

 

업이란 무엇입니까? 업이란 이러한 치와 난의 순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치는 반가워하고, 난은 거부합니다. 치할 때는 행복해서 울고, 난일때는 울고불고 난리납니다. 인생을 살면서 일치일난을 겪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개인의 삶, 즉 개인사이기 때문에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의 창시자인 이슬람의 마호멧, 기독교의 예수에 비해 불교의 부처님의 삶이 평안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살해위협에 시달려 술먹인 코끼리에 내몰리리기도 하고, 부처님 앞에 이쁜 처녀를 왔다갔다하게함으로서 유혹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그 처녀를 죽여 정사 뒤의 숲에 묻고, 부처님이 한 일이라 모함해 신고하여 조사받기도 했습니다. 모두 경전에 있는 내용입니다. 부처님 또한 여러 곤경에 처하였습니다. 부처님, 마호메트, 예수 같은 성인들 역시 일치일난이 없었던 적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 역시 이 일치일난을 어떻게 소화시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치가오거나 난이 오면, 그때 그때에 따라서 변합니다.  '벼랑 끝에 서다'라는 말처럼 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 벼랑 끝에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벼랑 끝에 두 손을 놓고 뛰어 내릴 수 있어야 진정한 장부입니다.현애살수장부아(懸崖撒手丈夫兒)’. 이는 원래 중국 선사의 말이지만, 김구 선생 역시 자주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 

 

가수 정태춘의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가 여기에 딱 들어맞는 얘기입니다. 막차가 지나간 뒤에 다시 첫차를 기다린다는 것이 이 노래의 내용입니다. 막차가 가면 우리는 종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막차가 갔다는 것은 첫차가 온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은 이제 난이 가고 치가 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칠흑같은 어둠이 있기에 새벽이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욱일승천((旭日昇天)은 아침에 태양이 떠오른 것을 말합니다.동양에서는 중천의 해, 즉 정오의 해는 지는 해로 간주합니다. 왜일까요? 해가 정점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주역에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역 건위천에 이르기를 '亢龍(항용)이니 有悔(유회)리라.' 해설하면 "최고의 경지까지 오른 용이니 다음은 내려오게 되느니라, 어찌 후회가 없으리요."입니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용은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올라 갈 수 없는 용은 떨어질 수 밖에 없고,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해도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욱일승천, 아침해가 가장 강한 것입니다. 밤이 짙다는 것은 아침이 가까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막차가 가면 첫차가 옵니다. 가수 정태춘의 노랫말이 바로 성인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많이 듣는 표현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너무 많이 와서, 돌아가기 너무 늦다"  TV연속극에 많이 나오는 말입니다. 특히 부부클리닉<사랑과 전쟁>에 이 말이 많이 나옵니다. 과연 그런가요. 부처님께서는 뭐라고 말할까요? 우리는 너무 많이 와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지만, 부처님은 "네가 멀리 왔다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라"고 합니다.  출발, 첫차, 막차, 끝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무시무종(無始無終)을 말합니다. 즉 처음도 끝도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시작하면 그 자리가 시작이고, 내가 멈추면 그 자리가 끝입니다. 시작과 끝, 치와 난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작과 끝, 치와 난은 순환되는 것입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출발할 때 그것이 시작입니다. 

 

우리는 매일 죽었다 살아 일어났다 합니다. 안 그러세요? 내가 15세때 이야기입니다. 내가 원래 잠이 많습니다. 어느날 아침에 어머니가 깨워서 일어나보니 난리가 났습니다. 밤새 집안이 어지럽혀졌는데, 도둑이 들었던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났으니 산사람입니다. 밤새 도둑 든 것도 모르고 잤으니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어느 중국 선사의 이야깁니다. 어느 날 도둑이 황궁을 털다가 잡혔습니다. 황제가 간이 큰 놈이라 여겨 "너 같은 도둑놈도 등에 식은 땀을 흘린 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도둑이 '딱 한번!"이라고 대답합니다. 황제는 제 아무리 간 큰 도둑도 황궁릉 털 때는 두려워 하는구나라고 여기며, "네 놈이 그럼 그렇지 황궁을 을 들어오기가 쉽겠느냐?"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도둑이 "여기 들어오기는 쉽습니다. 그저 기다리다가 순라군들이 짝짝하는 소리에 맞춰 교대할 때 들어오면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럼 언제 도둑질할 때 식은 땀을 흘려 보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옛날 어느 암자를 턴 적이 있는데, 스님이 앉아 있었습니다.  스님이 누워 자야 물건을 훔칠 것인데, 안자고 앉아 있으니 기다리면서 떨고 있었습니다. 기다려도 눕지 않고 오래도록 미동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참다 못해 스님에게로 다가가서 코 앞에 손을 대어 봤더니, 콧김이 없더랍니다. 그래서 마음껏 훔쳐 마루를 막 내려서려는데, 뒤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보게. 날씨가 차네. 찬바람 들지 않게 문은 닫아주고 가야지" 그 순간 도둑은 온 몸에 힘이 빠지고 등골에 식은 땀이 흘려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 때가 가장 두려웠던 때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치와 난의 순환입니다. 특별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치와 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왜일까요? 치와 난이 우리 삶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시무종입니다. 시작이 어디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죽고 또 매일 일어납니다. 도둑이 든 것도 모르고 잤다는 것을 두고 어찌 살아있다고 할 것입니까? 살아 있다는 것은 내가 깨어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황궁을 턴 도둑이야기의 스님처럼 말입니다. 죽었다는 것이 다른 겁니까? 우리가 말하는 죽음은 영영 깨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깨어나니 매일 죽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막차하면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늘 초조하고, 불안하고, 두려워합니다.

 

아니 생각해 보셔요. 내가 내일 아침 일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해보면 오늘 잠이 오겠습니까? 인도의 아쇼카왕과 그의 동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마 아쇼카 왕의 동생은 왕인 형을 배경삼아, 권세를 피우고, 탐욕을 부리고, 미녀들을 탐했나 봅니다. 왕은 이런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겠는데,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동생의 버릇을 고칠 계책으로 신하들과 짜고 왕궁을 며칠 비우기로 합니다. 왕궁이 비게 되자 신하들이 계획한대로 왕좌에 앉아 볼 것을 권합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에 한사코 거부합니다. 그러다가 신하들의 간곡한 청이 계속되자, 사람이 원래 묘한 데가 있는지라 한번 앚아 볼까 생각하고는 덜컥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동생이 옥좌에 앉자마자 신하들이 "황제 페하 만세! 만세! 만만세!" 라고 외칩니다. 그 때 형인 아쇼카왕이 들어와 '네가 나의 옥좌를 탐하는구나"라고 호령합니다. 동생은 무릎을 꿇고 사정을 말하며 사죄하지만, 아쇼카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처럼 명합니다. "내가 이 자리에서 너를 지금 당장 끌어내어 죽일 것이지만, 너와 나는 어버이가 같으니 당장 죽일 수는 없다. 그래서 일 주일을 살려둘 것이니 죽기전에 맘껏 즐겨보거라" 라면서 동생을 끌어내게 합니다. 궁 밖에 내쳐진 동생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날 이후로는 진수성찬을 차려도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고, 그 좋아하던 음주가무도 다 싫어지고, 왕이 내린 아름다운 궁녀도 부질없는 것이었습니다. 일주일 뒤면 죽다고 생각하니,  즉 살 수 있는 시간이 일주일로 정해져 있으니 모든 즐거움이 일순간에 사라지고,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 뿐이었습니다. 밖에는 군사들이 지켜 도망도 못가고, 목매 스스로 죽을 용기도 없습니다. 일주일 째 되는 날, 아쇼카왕은 동생을 불러 그 동안 동생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각본을 짠 것이라고 말하면서 속인 자신을 용서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일주일의 시간을 줬는데 왜 그 좋아하는 권력과, 음주가무와 미녀들을 거절했느냐고 묻습니다. 동생은 "일주일 후에 죽는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즐겁지 않고, 오직 두려움과 공포뿐이었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내일 일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오늘 잠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막차가 끝이라고 생각하기에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네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서 시작하라" 그것이 윤회이고, 그것이 업입니다. 업과 윤회는 다르지 않습니다. 시계는 동그라미로 생겼습니다. 동그라미에서 어디가 시작이고 끝입니까? 원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윤회도 동그라미와 같습니다. 순환하는 것입니다. 순환은 바뀌는 것이 아니라 교체되는 것입니다. 계주는 보통 4명이 한팀입니다. 바통터치만 없다면 네 명이 한 사람처럼 뛰는 것입니다. 마치 치와 난이 바통터치를 하는 것입니다. 2번주자, 3번주자, 4번주자 이런 순으로 뜁니다. 보통 이 때에 1번과 4번에 가장 빠른 주자를 배치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항상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1번에서 4번까지 조화를 이루는 팀이 우승합니다. 우리 삶은 치와 난의 조화입니다. 치와 난을 어떻게 조화하느냐하는 것입니다. 계주는 네 사람이 뛰는 것이지만 한 사람이 뛰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역사나 개인 모두 일치일난, 즉 쉬움과 위기가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단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치와 난이 모두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어떤 비구에게 호흡지간을 말합니다. 호흡지간, 즉 들숨과 날숨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소중한 시잔은 매 순간입니다. 특별히 소중한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순간이 소중합니다. 무슨 얘기냐? 매 순간 치는 치대로, 난은 난대로 소중한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집 밥은 맛이 없는데, 산골에 있는 절밥은 밥맛이 좋습니다. 땀흘려 그 절까지 올라왔으니 밥맛이 날수 밖에. 입맛이 없을 때 울타리 밑에만 가도 밥이 맜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절에 오면 당연히 밥이 맛있게 되어 있습니다. 있을 때는 고마움을 모릅니다. 없을 때 고마움을 압니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 나오면 물이 소중한 줄 모릅니다. 제가 삼척 영흥사란 절에서 탄허스님을 모시고 있을 때 일입니다. 절에서 조금 떨어진 조그만 집에 머물렀는데, 그 곳에는 우물이 없습니다. 큰 절에는 우물이 있지만, 이곳에는 우물이 없습니다. 그러니 물이 아쉽기 이를데 없습니다. 세수도 물 한움큼으로 할 수 있습니다. 설겆이는 꿈도 못 꿉니다. 아니면 설겆이 그릇을 들고 먼길까지가셔 해야 했으니까요. 물을 길러서 써보면알지만, 물이 얼마나 헤픈지 모릅니다. 그 곳에서는 먹는 것도 그저 시래기 반찬 하나였습니다. 세달이 지나서 나오게 되어 다른 절에서 밥을 먹으니, 눈이 정신을 못 차립니다. 우리는 사실 있을 때 귀한 줄 모릅니다. 없을 때 얼마나 귀한 줄 압니다. 오죽하면 "있을 때 잘해"라는 노래가 있겠습니까.

 

스님들 사이에 "토굴에 들어갈 때는 단 둘이 들어가지 말라"는 철칙이 있습니다. 둘이 들어갈 경우 아무리 사이가 좋았더라도 한참을 있게 되면, 따로 내려 옵니다. 살던 습관이 달라 충돌하게되는 것입니다. 셋이면 중재자가 있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사이가 좋다가도 나중이 되면 다른 사람이 '안가나'하고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한 사람이 떠나 갑니다. 그러면 그 날 저녁 그 사람이 벌서 그리워집니다. 있을 때는 그 사람 때문에 공부가 안되는 듯 햇는데, '도통하시요' 한 마디 남기고 떠나가면 그 때서야 그리워지고 간절해집니다. 우리가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은 어떤 철학적 명제보다 더 철학적입니다. 있을 때 잘해야지 떠나고 나서 후회해도 소용 없습니다. 왜?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매순간이 소중합니다. 한 번 지나간 순간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불교만이 아니라 주역에서도 변화를 말합니다. 주역의 역(易)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서양도 변화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동서양 모두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하는 아니짜(무상함)는 항상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매순간은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단순히 변화가 아닌 변화한 것은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순간이 소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메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굽니까? 내 자신 그리고 지금 내곁에 함께 해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이익과 내 이익이 충돌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내 곁에 앉아 있는 사람입니다.

 

어제가 어버이날이었습니다. 우리는 내가 형편이 좀 피면, 내 마음이 좀 좋아지면 효도해야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나는 기다려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상은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그것이 나와 대상의 차이입니다. 강독에서도 여러번 말했다시피, 이 세상에는 나와 대상, 딱 두가지 만이 존재합니다. 나는 천년 만년 기다려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난 대상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왜?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대상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대상이 내게 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네가 지금 선 그 자리에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 곳이 가장 좋은 출발점입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든 아니든, 흘러간 것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소중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것을 바깥에서 찾습니다. 

 

법정스님의 글에는 참 좋은 이야기, 맑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동화에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살아있는 부처님을 만날 수 있느냐 하는 이야기도 그러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너를 보고 맨발로 뛰쳐나올 수 있는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들은 살아있는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집을 나가 헤멥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부처님을 결국 만나지 못한 채 실망해 집으로 돌아옵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집을 나간 아들이 잘 있는지, 언제나 돌아올지 노심초사합니다. 그러니 기다리던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반갑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맨발로 뛰어서 마중을 나갑니다. 그제서야 소년이 깨닫고 소리칩니다. '부처님이 우리집에 있었네' 그렇습니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도 마음의 고개만 돌리면 그대로 피안이라고 했습니다. 피안은 행복한 세계를 이르는 말입니다. 똑같은 조건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마음가짐입니다. 공모에서 대상을 탄 라디오에서 들은 며느리가 보낸 고부갈등에 관한 수기 내용입니다. 시집을 갔는데, 시어머니와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구박해서가 아닙니다. 청상과부로 남편을  홀로 키운 시어머니는 아들이 결혼하였는데도, 부부사이에 늘 함께하는 것이 고부갈등의 원인이었습니다. 싫어지기 시작하니, 시어머니는 젊어서 부터 배운 듯한 담배를 피우는 것도 싫고, 시어머니의 양말 한 짝 사는 것조차 싫어지더랍니다. 우울증에 병원치료를 받을 정도로 갈등이 깊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친정 어머니가 이를 보고 돌아가서 딸에게 장문의 편지를 씁니다. 그 동안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 시집살이한 이야기를 쓴 것입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초지견성(初知見性)의 수준으로, 딸의 상황을 딱 보고 바로 아는 수준입니다.  이 정도 되어야 남의 엄마가 될 자격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며느리는 친정어머니의 편지를 읽고 웁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등이 가려워 남편에 긁어달라고 했더니, 긁어주어 시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때 문득 시어머니 생각이 나더랍니다. 스물 일곱에 청상이 되었으니, 그 동안 시어머니 등은 누가 긁어 주겠는가라는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 생각을 하고 벼갯머리에 눈물을 적시었습니다. 그리고는 내일 아침에는 자신이 먼저 일어나 손수 밥을 지어 드려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까지 시어머니가 아침밥상을 차렸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시어머니가 평소 베란다에서 담배 피우는 것이 그렇게 보기 싫었는데, 그 외로움을 담배로 달랜 것이라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그들 부부를 한사코 따라 다니는  것이 외로움 때문이라는 것을 알겠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시어머니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아픔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요? 

 

항상 우리는 매순간 그 자리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정태춘이 '첫차를 기다리면서'에서 노래하듯, 막차가 지나간 그 자리에서 첫차가 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 자리에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강론은 여기까지입니다. 시간이 되면 정태춘의 <첫차를 기다리면서>를 한번 들어 보세요. CD가 없으신 분은 사서 들어도 좋겠습니다. 그저 항상 행복하고 건강한 나날 되시길 바랍니다.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 

 
박인희 노래 모음 20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