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끊어진 자리 / 숭산스님

2017. 11. 18. 19:5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728x90

생각이  끊어진  자리 / 숭산스님

나를 내 마음 속에 끌고 다니지 말고 환경에 집착하지 마라. 그래야 올바른 생각을 하게 되는 법 견해, 즉 ‘나’를 버리면 세계 평화도 절로 이루어진다. ‘생야사야生也死也’ 그러나 본래 한 물건이 없는데 무엇이 생하고 또 무엇이 죽는단 말인가. 서산대사의 게송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닭소리를 들으니 장부 하는 일을 모두 마쳤도다.” 이 장부의 일이란 바로 생사일대사 生死一大事를 이른다. 내가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벽안의 미국인과 법회를 여는 것도 육대조사나 지구상 5억 불교 식구가 한결같이 바라고 행하고 깨닫고자 하는 것이 일대사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생生이고 사死냐. 내 몸을 가지고 나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것은 문명 나는 아니다. 다만 나라고 생각할 뿐. 먼저 나를 밝히자. 무엇인가 몸을 끌고 다니는 것, 그것이 어떻게 생긴 물건이냐.

‘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오’ 생이 온 곳이 있다면 간 곳도 있을 터.

생이란 허공에 뜬구름과 같다 했다. 항상 뚜렷이 드러나는 한 물건, 그것은 허공에 뜬구름과는 다르다. 맑고 깨끗해서 생사에 따르지 않는 특성을 지녔다. 다만 없는 생사를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원래가 남(生)도 없고 멸함도 없다. 해와 달과 별도 인간이 그렇게 불러서 있는 것이지 생각을 내지 않는다면 모든 물건의 이름조차 없다.


무릇 삼라만상의 이름을 생각으로 지었으니까

그 생각이 끊어진다면 중생이나 부처님이나

이 주장자 소리나 똑같은 것이다. 생각을 내지 마라.

나라는 물건을 쥐꼬리만큼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차문래 막존지해(以此門來 莫存知解)하라.‘ 서양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 바로 이와 같은 자기 인식의 확립이 선이요, 그 선의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곧 불교다. 데카르트의 명제와는 정반대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텅 빈거냐. 생각 않는 자체란 생각 이전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사물의 본성이 여기에 있다. “티끌 하나하나가 묘체妙體를 지니고 있으며

마땅히 다 구족되어 있다”고 한 조사의 말과 같이

삼라만상의 이름은 각각이나 그 본성은 똑같은 것이다. 즉 생각이 탁 비어 있다는 것은 대우주와의 동일체 (혹은 통일체·전일체·순일체라고도 한다)된 것을 이르는 것이다. 생각을 일으키면 안 되지만 끊으면 된다.

그러면 생각을 어떻게 끊느냐. ‘이뭣고’ 생각이 꽉 막히고 커다란 의심덩어리를

끌고 들어갈 때에는 벌써 하나의 원점에 이른 것이다.

생각이 끊어진 그 자리다. 이 원점을 마음이니, 부처니, 진여, 여래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지만 사실은 이름이 없는 것이다.

대우주와 하나가 되었을 따름이다.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입을 안 열고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했다. 영산회상에 앉아 천이백 대중을 향해 설법 대신

꽃 한송이를 들어 보인 부처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는 가섭존자처럼 말이다. 내가 주장자를 들어 보인 것과 3천여 년 전 부처님이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인 것은 같은가 다른가?

삼라만상은 모두 불성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 “개도 불성을 지녔습니까?” 하고

조주 스님이 그 스승에게 물었을 때 ‘무無’라고 대답했다는데,

이때의 ‘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서구문화는 곧 기독교문화이다.

이 속에서 모든 사상과 주의가 다 나왔다. 이른바 하나님과의 계약에 의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쟁취한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으며, 그 본령인 인본주의사상은 공산주의라는 사회혁명과

자본주의라는 산업혁명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 두 갈래의 커다란 사회변천이 가져다준 것은 인간의 기계화와 이로 인한 윤리도덕의 타락이다. 천륜이 끊어진 상태에서 극도의 개인주의와 영리주의가

판치는 물질문명은 공해라는 새로운 대적을 만들어냈으며

인간성을 탈취당하고 말았다. 지금 미국의 젊은이들은, 입으로 세계 평화를 부르짖지만 뒷전으로

가공할 핵무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기성세대를 향한 불신이 깊다. 대자연과 함께 살자는 명제 아래

탈취당한 인간성 회복을 부르짖고 나선 젊은이들 사이에

동양의 선사상이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제 선은 불교의 전용물이 아니다. 종교를 초월해서 누구나 다 반성하고 ‘생각을 쉰다’는 소승선小乘禪의 경지까지는 들어간 셈이다. 미국에서만도 그 인구가 3백만에 법사(조계종)가 70명에 이른다. ‘모든 법이 다 오직 마음이 지어낸 것이다.’ 시공조차 고전 물리학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현재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며 동서남북이 다를뿐더러 백 사람의 무지개 또한 각각 다른 이유이다. ‘아유필유我有必有 아멸필멸我滅必滅’이다 내가 없어지면 우주와 나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몸속에 매달렸던 무거운 떡돌로 꽉 막힌 그 자리에서

문득 깨달았다는 대법안大法眼의 일화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실로 크다. ‘마음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마음이다’를 금과옥조로 삼던

그 제자 현축도 “부처란 무엇인가?”하고

다시 묻는 스승의 깨우침에 무릎을 꿇었다지 않던가. 모든 사물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는 것이

곧 불교요 선의 본지이다. 나를 내 마음 속에 끌고 다니지 말고 환경에 집착하지 마라. 그래야 올바른 생각을 하게 되는 법. 견해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싸움질을 하게 되고

정상화가 안 되는 것이다. 견해를 버리면, 즉 ‘나’라는 것을 없애면 대자연의 파괴는

안 하게 되며 세계 평화도 절로 이루어지게 된다. 1980.10.19 재미홍법원장, 화계사 주지 재임시 숭산 스님 1927년~2004년 1947년 고봉 스님을 은사로 득도 불교신문 발행인 겸 편집인 화계사 주지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 동국학원 이사


60~80년대 금지곡 모음 (K-pop) 60 ~ 80s forbidden collection

https://www.youtube.com/watch?v=5kpJ1qwSBj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