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어느 때나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만약 어떤 문제나 걱정거리가 생겨났다면 그것은 나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겉에 드러난, 나를 치장하고 있는 껍데기에서 문제가 생겨난 것일 뿐이다. 그러니 거기에 속지 말라. 그것은 내가 아니다.
그 껍데기는 이를테면 내 성격이라고 해도 좋고, 내 몸이라고 해도 좋고, 내 느낌, 욕구, 생각, 견해, 집착일 수도 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나’라고 규정짓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나’라는 규정에서 모든 문제며 근심 걱정은 시작되는 것이다.
성격이 어떻게 나일 수 있겠는가. 또한 몸뚱이며, 느낌, 욕구, 생각, 관념들이 어떻게 나일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다만 인연 따라, 상황 따라 끊임없이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면서 생성소멸을 반복할 뿐이다. 거기에 어떤 변치 않는 결정적인 ‘나’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껍데기들을 ‘나’라고 굳게 믿고 있다. 굳게 믿으면서 거기에 죽고 살며, 거기에 내 삶의 모든 것을 건다. 그것들이 근심 걱정에 시달리면 나도 따라서 근심 걱정에 시달리고, 그것들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나에게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인 양 괴로워하며 아파한다.
성격 때문에 어떤 문제가 생겨났다면 그것은 나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다만 성격에 문제가 생겨난 것일 뿐이다. 성격과 나는 동일인이 아니다. 그것을 내가 풀려고 애쓰지 말라.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니 상관하지 말고, 개의치 말라. 그냥 내버려 두라. 내버려 두되 다만 있는 그대로 살펴보고 관찰하라.
성격이 만들어 낸 문제들을 내가 풀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나는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차피 성격이 만들어 낸 문제를 내가 다 풀 수는 없다. 하나의 문제를 풀었더라도 그것은 끊임없이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 낼 것이고, 그렇게 하다가는 끊임없이 성격이 만들어내는 문제들을 뒤치다꺼리 하는 일로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생을 소비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는 나에게 주어진 이 한 생이 아깝지 않은가.
나에게는 나 자신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삶의 몫이 있다. 모든 존재들에게는 존재에게 주어진 본연의 물음이 있고, 해결해야 할 자신만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누구인가’ 하고 나 자신을 찾는 일이고, 그 일을 풀 수 있는 해결책은 관찰자가 되는 일 밖에 없다. 인격이 만들어 내는 문제, 소유가 만들어 내는 문제, 몸이 만들어 내는 문제 등 그 모든 다른 문제들을 다 놓아버리고, 다만 관찰자가 되어 주시하고 지켜보는 일, 그것이 바로 본연의 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근본 목적이요, 모든 수행의 시작이자 끝인 지관(止觀), 정혜(定慧)의 두 축이다.
다른 나와 동일시하고 있던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다. 욕구가 일어나고, 생각이 일어나고, 집착이나 관념이 생겨날지라도 그것과 나 사이에 먼 공간을 만들어 지켜보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어떤 현상을 다만 지켜보듯이,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장면들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관객처럼 내 삶의 연극을 다만 지켜보라. 내 삶의 모든 문제는 나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근심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다만 그 모든 일들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아주 멀리에서 나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듯이 그러나 흥미롭고 자비로운 시선으로 주시하기만 하면 된다.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나 자신이 아니라 나라고 가면을 쓴 가짜들이 만들어 낸 것에 속지 말라. 내 몸, 내 성격, 내 느낌, 내 생각, 내 관념, 내 욕구, 이 모든 것들에 ‘나’라는 수식을 빼고, 다만 그것을 지켜보는 관찰자가 되라.
운학사 주지 법상 스님
1063호 [2010년 09월 07일 1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