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3. 11. 10:29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변혁하라
오늘은 그 분의 1주기 입니다. 그래서 하늘도 슬퍼하는지 비가 내립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는 '변혁'입니다. 니까야를 보면 붓다께서 '아침에 정심, 정행, 정언하면 아침이 행복하고, 점심에 정심, 정행, 정언하면 점심이 행복하고, 저녁에 정심, 정행, 정언하면 저녁이 행복하다. 항상 이와같이 하면 언제나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정심은 올바른 마음이고 정행은 올바른 몸을, 정언은 올바른 언어를 뜻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올바른 마음이냐? 그것은 바로 마음을 새롭게 바꾸는 것이고 몸을 새로이 하는 것이고, 가르침과 동시에 배우는 언행을 지키는 즉 변혁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변혁, 몸의 변혁, 언어의 변혁, 이 세가지로 우리는 언제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의 조건은 자명해집니다. 마음, 몸, 배움의 변혁, 이것이 행복의 이유이기도 하고, 행복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침과 낮과 저녁에 항상 마음과 몸과 배움을 변혁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교란 무엇인가?'할때 여러가지 정의를 내립니다. 남방에서는 분식(分識)의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다시말해 '분별하는 것'을 불교라고 하는데 이는 서양 철학으로 보면 이성, 비판한다는 뜻입니다. 붓다께서도 "나를 비판하라. 나의 잘못을 비판하라. 설사 나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네가 정심하고 정행하고 정언하는 것에 비추어 받아 들일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불교는 이성을 중요시 하여 비판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부분이 바로 기독교와 상극을 이루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에는 이성이 없습니다. 지혜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지혜는 사악한 것이고 신은 맹목적으로 믿는 거일 뿐입니다. 충성스러운 종을 원할뿐 주인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붓다는 너희 스스로가 이성적으로 비판하여 받아들일수 있어야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우리나라 불교는 호국불교를 얘기합니다. 얼마전 마곡사의 한 스님이 금강 개발과 관련하여 4대강 반대논리를 펴면서 호국불교 운운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불교는 자비의 가르침이자 깨달음, 지혜의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불교는 변혁의 가르침입니다. 마음과 몸과 배움을 변혁시키는 것입니다. 일테면 '너 자신을 변혁시켜라'가 불교라는 상품의 브랜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변혁시키는 것, 이것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고 늘 타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흉내를 잘 내는 것으로 침팬지만한 것이 없습니다. 바둑으로 치면, 프로9단인 셈이지요. 어떤 조사에서 6살 먹은 아기와 6개월된 침팬지를 같이 키우며 이를 관찰,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침팬지가 아기를 따라했지만, 어느 순간 아기가 침팬지를 따라 하더랍니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인간은 학습되고 길들여지는 것을 반증합니다. 프로이드의 말처럼 '타자화'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는 태어날때부터의 본성을 운운하지만 환경, 교육에 따라 달라집니다. 인간은 학습된 존재입니다.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규칙과 법칙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는 흡사 6개월 된 침팬지를 따라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타자로서의 삶을 삽니다. 변혁한다는 것은 '나 자신으로 돌아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학습된 길들여진 인간이기에 항상 무언가 불만족하고 불편함을 갖게 됩니다. 모든 인간의 본성이 같을 수 없기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엘렌 랑거(Ellen Langer)는 인간의 자율성과 자기 결정권에 관한 연구를 많이 했는데 '텍스트 복제'에 관해 말했습니다. 동일한 교육을 받으면 동일한 사고체계와 언어를 구사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각자 900명의 인간들이 ~ ) 이것의 결과로 겉은 다르지만 그 내용물은 같아지는 실험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나의 사고, 내 생각이 정말 나의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붓다는 이에대해 No!라고 말합니다. 네가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은 본래의 바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떤 복제된 사고에 의한 표출일 뿐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내 생각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회로부터 복제된 것일 뿐입니다. 이왕 복제될 것이라면 명품을 복제해야 할 것이지요. 그런데 복제자가 기술이 시원치 않으면 복제제품이 좋을리 없습니다. 밤새 명품을 복제했는데 물건이 시원치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나보다 나은 복제품을 만들려면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마음을 변혁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변혁이 없는데 몸이 변혁될리 만무하고, 몸의 변혁이 없는데 어찌 배움의 변혁이 있을 것입니까? 율곡도 '말로서 가르치면 말썽이 생기고 마음과 몸으로 가르치면 말하지 않아도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철저히 나의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중국의 백장스님이 말한 '제자와 스승*'의 비유도 이를 시사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의 변혁이 없이는 배움의 변혁도 없습니다. 그런데 불만족을 벗어나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붓다의 말씀은 간단합니다. 너의 마음과 몸, 배움을 변혁시켜라! 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습관입니다. 사람은 마음에 정보를 각인하고 축적합니다.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행동이 세포에 축적됩니다. 자신의 습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범죄자는 항상 그 현장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신의 마음 움직임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달팽이가 달팽이집을 나오지 못하고 거북이가 등판을 벗어 던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변해야 몸이 변하고, 몸이 변해야 배움이 변하는 것입니다.
이번 부처님 오신 날에 많은 신도들이 오셨는데 법당이 하도 넓어 저 마당에 서 계신 법우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그때 많은 꽃과 풀들이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비가 오니 다시 일어섰습니다. 억제하고 누르는 것은 일순간 가능하지만, 인간은 기계가 아닙니다. 억지로 눌러 놓으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긴장은 거기에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10분 입니다. 10분이 지나면 집중력이 떨어지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요사이 초등학교 쉬는 시간을 5분만 줘서 교실에서 소변을 보는 어린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므로 몇시간씩 집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의 변혁이 없으면 보지 못합니다.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집중력도 내가 마음이 편하고 하고 싶을때 해야 효율성이 높아집니다. 마음이 변하지 않아 불안하고 초조한 강박증을 느낌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집단 강박증을 앓는 거와 같습니다. 기계가 아닌 사람들을 기계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2등은 할 수 있으나 1등은 하지 못합니다. 요사이 거리의 사람들이 좀비처럼 보입니다. 자동화 벨트 위에 놓인 부속품들...,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똑같은 복장에다 똑같은 사고와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나쁜 취미가 하나 있는데 바로 사람의 움직임을 보는 것인데, 사람의 걸음걸이와 몸짓이 비슷한 것을 느낌니다. 이는 복제된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 좀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천연지성은 진심입니다. 변혁은 무엇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내가 가지고 있는 학습, 흔적, 복제된 것을 내 스스로 변혁시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나의 관점, 나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붓다도 '너의 눈으로 보라'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눈으로 보지 못합니다. 누군가의 말을 통해 나의 눈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법정스님이 가신지 두달이 돼 가는데 법정스님 열풍이 불었습니다. 법정스님의 말에 공감한다는 말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법정스님의 관점일 뿐입니다. 법정과 나는 다름니다. 첫째, 나는 먹여살려야 하는 처자식이 있습니다. 둘째, 나는 그만큼 글재주가 없습니다. 셋째, 법정은 그리살면 살수록 빛나고 내가 그렇게 살면 찌질이 궁상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주부를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집에 들어 갔을때 몇 시간이나 안정되는가?하는 질문에 들어가는 순간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대답이 제일 많았다고 합니다. 애들과 남편이 다 찡찡거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언제가 제일 행복한가?하는 질문에는 친구를 만날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2시간 남짓정도만 그렇다고 답했답니다. 아내는 남자에게는 어머니가 복제된 젊은 여자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부인들께서는 자기 신랑을 잘 다독여 재우시기 바랍니다.
내가 사랑하게 되면 보이게 되고, 보이면 알게 됩니다. 대룡산 뒤에 극락세계가 있다 한들, 내가 보고 알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오대산에서 나물캐는 사람들이 산삼을 밟고 있어도 알지 못하면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알고 보는 것은 마음이 알고 보는 것입니다. 나의 관점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남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갱년기 우울증도 존재감에 대한 허망함에 기인합니다. 주부는 주부대로 마당에 있는 강아지와 나와 비슷한 신세라는 존재감 부재에 대한 허망함을 앓고, 남편은 남편대로 애완견은 씻겨 주는데, 나는 그 신세보다 못하구나 하고 낙망합니다.
어느 날, 문득 나의 존재가 어디에 서 있는가? 나 자신의 부재를 느끼고 다른 사람으로 살아 왔음을 알게 됩니다. 나 자신의 관점이 없슴을 알게 됩니다. '내 마음, 몸, 배움의 변혁을 이루면 아침, 점심, 저녁이 행복해진다' 너 자신을 변화시키고 바꾸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학습되고 복제된 너에서 본래의 너 자신을 발견하고 진심으로 돌아가서 진심에 처하라. 그것이 너 자신이다. 너 자신으로 살때 진정 행복한 것입니다. 타자의 삶, 타자를 통해 행복을 구했으면 더 많은 속박과 집착을 갖게 됩니다.
특히, 남성들이 웃기는 짬뽕 열그릇입니다. 사람들은 혼자 놀 줄을 모릅니다. 공간의 지배력은 빈공간에서 나만이 있는 공간을 즐길즐 아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tv, pc가 없어도 내가 여유롭고 행복하게 지낼줄 알아야 합니다. 불안, 초조, 우울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홀로 남은 공간에서도 행복을 연출해야 합니다. 이러한 공간 지배력을 확장하는 과정이 마음, 몸, 배움의 변혁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강좌의 주제를 말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네 마음과 네 몸과 네 배움을 변혁시켜라. 그리하면 아침, 낮, 저녁이 행복하리라'입니다. 감사합니다.
백장스님 : 스승의 가르침을 이으려면 스승보다 뛰어난 제자가 되어야 하고, 부모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는 부모를 넘는 아들이 돼야 한다.
두시간 전에 것도 잊어버리기 일쑤인 그야말로 석두가 어언 5일전 강의를 되살리며, 자기가 써놓고도 지가 못알아 보는 글씨로 괴로워하며 겨우 윤곽을 갖췄습니다만, 혹여 눈밝은 선우들께서 정정해야 할 부분이나 보강할 부분이 있다면, 댓글 등에다 명명백백하게 적어 주시길 바랍니다. 요사이 날씨가 금쪽같습니다. 늘 즐거우시삼~~, 석두 _()_
보유 책상을 정리하다 예전 일요강론 필기가 있어 보론으로 올립니다. 이 날은 지각 참석하여 뒷 부분만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석두님이 이미 상세히 올렸습니다. 제가 올린 것은 석두님이 정리한 10번째 문단 이후 좀비 얘기부터가 되겠습니다. 보론은 석두님이 정리한 글 뒤에 보론으로 붙여 놓았으니, 혹 강론 이해에 도움이 되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석두님이 오래되어 제대로 정리되었는지 염려하지만, 이건 그보다 훨씬 오래되어 한 달이 다 되었으니, 스님의 오리지널 싸운드트랙이 잘 전달되는지 걱정입니다. 아니면 중언부언에 첨언이 아닐런지... 문혜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5월 4주차: 불기2554년 5월 23일) 변혁하라
오늘은 그 분의 1주기 입니다. 그래서 하늘도 슬퍼하는지 비가 내립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는 '변혁'입니다. 니까야를 보면 붓다께서 '아침에 정심, 정행, 정언하면 아침이 행복하고, 점심에 정심, 정행, 정언하면 점심이 행복하고, 저녁에 정심, 정행, 정언하면 저녁이 행복하다. 항상 이와같이 하면 언제나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정심은 올바른 마음이고 정행은 올바른 몸을, 정언은 올바른 언어를 뜻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올바른 마음이냐? 그것은 바로 마음을 새롭게 바꾸는 것이고 몸을 새로이 하는 것이고, 가르침과 동시에 배우는 언행을 지키는 즉 변혁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변혁, 몸의 변혁, 언어의 변혁, 이 세가지로 우리는 언제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의 조건은 자명해집니다. 마음, 몸, 배움의 변혁, 이것이 행복의 이유이기도 하고, 행복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침과 낮과 저녁에 항상 마음과 몸과 배움을 변혁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교란 무엇인가?'할때 여러가지 정의를 내립니다. 남방에서는 분식(分識)의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다시말해 '분별하는 것'을 불교라고 하는데 이는 서양 철학으로 보면 이성, 비판한다는 뜻입니다. 붓다께서도 "나를 비판하라. 나의 잘못을 비판하라. 설사 나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네가 정심하고 정행하고 정언하는 것에 비추어 받아 들일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불교는 이성을 중요시 하여 비판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부분이 바로 기독교와 상극을 이루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에는 이성이 없습니다. 지혜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지혜는 사악한 것이고 신은 맹목적으로 믿는 거일 뿐입니다. 충성스러운 종을 원할뿐 주인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붓다는 너희 스스로가 이성적으로 비판하여 받아들일수 있어야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우리나라 불교는 호국불교를 얘기합니다. 얼마전 마곡사의 한 스님이 금강 개발과 관련하여 4대강 반대논리를 펴면서 호국불교 운운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불교는 자비의 가르침이자 깨달음, 지혜의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불교는 변혁의 가르침입니다. 마음과 몸과 배움을 변혁시키는 것입니다. 일테면 '너 자신을 변혁시켜라'가 불교라는 상품의 브랜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변혁시키는 것, 이것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고 늘 타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흉내를 잘 내는 것으로 침팬지만한 것이 없습니다. 바둑으로 치면, 프로9단인 셈이지요. 어떤 조사에서 6살 먹은 아기와 6개월된 침팬지를 같이 키우며 이를 관찰,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침팬지가 아기를 따라했지만, 어느 순간 아기가 침팬지를 따라 하더랍니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인간은 학습되고 길들여지는 것을 반증합니다. 프로이드의 말처럼 '타자화'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는 태어날때부터의 본성을 운운하지만 환경, 교육에 따라 달라집니다. 인간은 학습된 존재입니다.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규칙과 법칙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는 흡사 6개월 된 침팬지를 따라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타자로서의 삶을 삽니다. 변혁한다는 것은 '나 자신으로 돌아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학습된 길들여진 인간이기에 항상 무언가 불만족하고 불편함을 갖게 됩니다. 모든 인간의 본성이 같을 수 없기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엘렌 랑거(Ellen Langer)는 인간의 자율성과 자기 결정권에 관한 연구를 많이 했는데 '텍스트 복제'에 관해 말했습니다. 동일한 교육을 받으면 동일한 사고체계와 언어를 구사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각자 900명의 인간들이 ~ ) 이것의 결과로 겉은 다르지만 그 내용물은 같아지는 실험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나의 사고, 내 생각이 정말 나의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붓다는 이에대해 No!라고 말합니다. 네가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은 본래의 바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떤 복제된 사고에 의한 표출일 뿐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내 생각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회로부터 복제된 것일 뿐입니다. 이왕 복제될 것이라면 명품을 복제해야 할 것이지요. 그런데 복제자가 기술이 시원치 않으면 복제제품이 좋을리 없습니다. 밤새 명품을 복제했는데 물건이 시원치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나보다 나은 복제품을 만들려면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마음을 변혁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변혁이 없는데 몸이 변혁될리 만무하고, 몸의 변혁이 없는데 어찌 배움의 변혁이 있을 것입니까? 율곡도 '말로서 가르치면 말썽이 생기고 마음과 몸으로 가르치면 말하지 않아도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철저히 나의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중국의 백장스님이 말한 '제자와 스승*'의 비유도 이를 시사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의 변혁이 없이는 배움의 변혁도 없습니다. 그런데 불만족을 벗어나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붓다의 말씀은 간단합니다. 너의 마음과 몸, 배움을 변혁시켜라! 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습관입니다. 사람은 마음에 정보를 각인하고 축적합니다.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행동이 세포에 축적됩니다. 자신의 습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범죄자는 항상 그 현장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신의 마음 움직임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달팽이가 달팽이집을 나오지 못하고 거북이가 등판을 벗어 던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변해야 몸이 변하고, 몸이 변해야 배움이 변하는 것입니다.
이번 부처님 오신 날에 많은 신도들이 오셨는데 법당이 하도 넓어 저 마당에 서 계신 법우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그때 많은 꽃과 풀들이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비가 오니 다시 일어섰습니다. 억제하고 누르는 것은 일순간 가능하지만, 인간은 기계가 아닙니다. 억지로 눌러 놓으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긴장은 거기에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10분 입니다. 10분이 지나면 집중력이 떨어지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요사이 초등학교 쉬는 시간을 5분만 줘서 교실에서 소변을 보는 어린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므로 몇시간씩 집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의 변혁이 없으면 보지 못합니다.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집중력도 내가 마음이 편하고 하고 싶을때 해야 효율성이 높아집니다. 마음이 변하지 않아 불안하고 초조한 강박증을 느낌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집단 강박증을 앓는 거와 같습니다. 기계가 아닌 사람들을 기계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2등은 할 수 있으나 1등은 하지 못합니다. 요사이 거리의 사람들이 좀비처럼 보입니다. 자동화 벨트 위에 놓인 부속품들...,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똑같은 복장에다 똑같은 사고와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나쁜 취미가 하나 있는데 바로 사람의 움직임을 보는 것인데, 사람의 걸음걸이와 몸짓이 비슷한 것을 느낌니다. 이는 복제된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 좀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천연지성은 진심입니다. 변혁은 무엇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내가 가지고 있는 학습, 흔적, 복제된 것을 내 스스로 변혁시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나의 관점, 나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붓다도 '너의 눈으로 보라'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눈으로 보지 못합니다. 누군가의 말을 통해 나의 눈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법정스님이 가신지 두달이 돼 가는데 법정스님 열풍이 불었습니다. 법정스님의 말에 공감한다는 말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법정스님의 관점일 뿐입니다. 법정과 나는 다름니다. 첫째, 나는 먹여살려야 하는 처자식이 있습니다. 둘째, 나는 그만큼 글재주가 없습니다. 셋째, 법정은 그리살면 살수록 빛나고 내가 그렇게 살면 찌질이 궁상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주부를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집에 들어 갔을때 몇 시간이나 안정되는가?하는 질문에 들어가는 순간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대답이 제일 많았다고 합니다. 애들과 남편이 다 찡찡거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언제가 제일 행복한가?하는 질문에는 친구를 만날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2시간 남짓정도만 그렇다고 답했답니다. 아내는 남자에게는 어머니가 복제된 젊은 여자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부인들께서는 자기 신랑을 잘 다독여 재우시기 바랍니다.
내가 사랑하게 되면 보이게 되고, 보이면 알게 됩니다. 대룡산 뒤에 극락세계가 있다 한들, 내가 보고 알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오대산에서 나물캐는 사람들이 산삼을 밟고 있어도 알지 못하면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알고 보는 것은 마음이 알고 보는 것입니다. 나의 관점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남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갱년기 우울증도 존재감에 대한 허망함에 기인합니다. 주부는 주부대로 마당에 있는 강아지와 나와 비슷한 신세라는 존재감 부재에 대한 허망함을 앓고, 남편은 남편대로 애완견은 씻겨 주는데, 나는 그 신세보다 못하구나 하고 낙망합니다.
어느 날, 문득 나의 존재가 어디에 서 있는가? 나 자신의 부재를 느끼고 다른 사람으로 살아 왔음을 알게 됩니다. 나 자신의 관점이 없슴을 알게 됩니다. '내 마음, 몸, 배움의 변혁을 이루면 아침, 점심, 저녁이 행복해진다' 너 자신을 변화시키고 바꾸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학습되고 복제된 너에서 본래의 너 자신을 발견하고 진심으로 돌아가서 진심에 처하라. 그것이 너 자신이다. 너 자신으로 살때 진정 행복한 것입니다. 타자의 삶, 타자를 통해 행복을 구했으면 더 많은 속박과 집착을 갖게 됩니다.
특히, 남성들이 웃기는 짬뽕 열그릇입니다. 사람들은 혼자 놀 줄을 모릅니다. 공간의 지배력은 빈공간에서 나만이 있는 공간을 즐길즐 아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tv, pc가 없어도 내가 여유롭고 행복하게 지낼줄 알아야 합니다. 불안, 초조, 우울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홀로 남은 공간에서도 행복을 연출해야 합니다. 이러한 공간 지배력을 확장하는 과정이 마음, 몸, 배움의 변혁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강좌의 주제를 말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네 마음과 네 몸과 네 배움을 변혁시켜라. 그리하면 아침, 낮, 저녁이 행복하리라'입니다. 감사합니다.
* 백장스님 : 스승의 가르침을 이으려면 스승보다 뛰어난 제자가 되어야 하고, 부모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는 부모를 넘는 아들이 돼야 한다.
두시간 전에 것도 잊어버리기 일쑤인 그야말로 석두가 어언 5일전 강의를 되살리며, 자기가 써놓고도 지가 못알아 보는 글씨로 괴로워하며 겨우 윤곽을 갖췄습니다만, 혹여 눈밝은 선우들께서 정정해야 할 부분이나 보강할 부분이 있다면, 댓글 등에다 명명백백하게 적어 주시길 바랍니다. 요사이 날씨가 금쪽같습니다. 늘 즐거우시삼~~, 석두 _()_
보론
요즘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좀비처럼 느껴집니다. 마치 자동화된 벨트 위의 기계라고나 할까요? 저는 나쁜 취미가 하나 있습니다. 길을 갈 때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보면, 움직임이나 걸음걸이가 하나같이 비슷합니다. 그것은 복제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거기에는 ‘나’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좀비’입니다. 진심이란 무엇인가. 변혁은 무엇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내가 가지고 있는 학습되고 훈련되고 복제된 것을 내 스스로 변혁해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 변혁입니다. 즉 변혁은 나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도 ‘너의 눈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눈을 통해서 보는 것을 마치 나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나의 관점으로 봐야 합니다. 법정스님이 입적한 지 두 달이 되어 갑니다. 법정 스님 열풍입니다. 뻥을 좀 보태면, 법정 스님의 책들이 그저 서점에 쫙 깔렸습니다. 그것은 법정스님이 그마 만큼 공감되는 애기를 했다는 것이겠지만, 그것 역시 법정스님의 관점일 뿐입니다. 왜 그런가요? 우리는 법정스님처럼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첫째 먹여 살려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 우리는 법정스님같은 글재주가 없습니다. 셋째, 법정스님은 그렇게 살수록 빛나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면 지지리 궁상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여기 거사님들이 계시지만, 부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저 큰 애인 어린 자식일 수 있습니다. 미국주부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가 있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몇 시간 동안 마음의 안정을 갔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결과는 들어서는 순간 스트레스가 쌓인다는 답입니다. 그러면 언제 제일 행복하냐고 질문했습니다. 친구를 만날 때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고작 2시간 정도이며, 그 이후의 시간은 친구를 만나는 것도 스트레스가 쌓인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남편과 자식 자랑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연봉이 얼마라느니, 자식이 어느 대학에 들어갔다느니 하는 얘기는 오히려 스트레스를 줍니다. 우리가 그래서 집에 돌아오면 돌봐야 할 사람이 있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아내는 사실 어머니가 투열된 여자입니다. 아내는 복제된 어머니, 복제된 젊은 여자죠. 아내에게 엄마처럼 해달라고 징징대죠. 처사님들은 이걸 감안해서 남편들에게 자장가를 불러 재우십시오. 아내들의 스트레스는 아이들과 남편을 돌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해져야만 집중력이 생깁니다. 집중력이 생긴다고 하는 것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한다, 책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것에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보입니다. 보이면 알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극락세계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내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오대산에 나물 뜯으러 간 아낙들의 얘깁니다. 어떤 아주머니가 산삼을 밟고 있지만, 정작 그녀는 모릅니다. 그걸 본 옆 아주머니는 그것이 산삼인 줄 알고 ‘어서 발을 떼지’라고 속으로 바랍니다. 그저 그녀의 발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다 그녀가 걸음을 옮기자마자 “심봤다”라고 외칩니다. 보면 아는데, 산삼을 밟고 있어도, 보지 못하면 알지 못합니다. 본다는 것은 ‘마음이 본다’는 것입니다. 나의 관점으로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나의 관점으로 보지 못하면, 나는 영원히 다른 사람으로 존재합니다. 요새 갱년기 우울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존재감에 대한 허무입니다. 주부가 그 나이에 이르면 애들 얼굴보기도 어렵고, 남편도 야근이다 뭐다 하면서 역시 얼굴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마당에 묶인 개를 바라보며, ‘너나 나나 똑같다’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묶인 개나 집안에 박혀있는 나가 같다는 것입니다. 존재감에 대한 부재입니다. 남편 역시 남편대로 우울합니다. 퇴직 후 아내는 힘이 넘쳐 바깥으로 돕니다. 아내가 밥상을 차려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밥을 찾아 먹어야 합니다. 여태까지 갖은 굴욕을 참고 이제야 퇴직을 했지만, 대접은고사하고 집의 애완견만도 못한 취급을 받습니다. 냄새나니 씻어요! 운동 좀 하지! 매일 방구석에 틀어박혀 무슨 잔소리가 그렇게 많으냐! 이런 소리가 듣기 싫어 밖에 나갑니다. 그런데 요즘은 친구도 머니가 없으면 곤란합니다. 보통의 퇴직 남편들은 자식을 결혼시키고 집을 사주고 나면 빈털터리가 됩니다. 삼척에 사는 어떤 할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았답니다. 그러니 친한 친구들과 중국여행에 가면서 여행경비를 다 대어주어 친구들로부터 대접을 받습니다. 애완견이나 그 할아버지의 친구가 뭐가 다르겠습니까. 할아버지의 입장에서는 그 친구들이 그렇게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할아버지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놀아줄 친구가 없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어느 날 나의 존재감이 없어집니다. 나라는 존재가 어디 있느냐? “누구누구의 남편, 아내, 아버지, 엄마를 빼고 ‘나라는 존재’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 실조철학자들의 얘깁니다. 나 자신이 부재합니다. 왜일까요? 다른 사람으로 사는데, 나로는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관점이 없습니다. 복제된 인간처럼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네 마음과 몸의 변혁을 이루면, 아침, 낮, 저녁이 행복합니다. 즉 언제나 행복합니다. 부처님께서 이르기를, 행복하려면 너 자신을 바꾸라고 합니다. 학습되고 복제된 너를 너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너 자신으로 살 때, 진정한 행복이 옵니다. 타자로 살다보니, 타자를 얻으려 하니, 타자를 속박하고 집착하게 됩니다. 그게 안 되면 불만족을 느끼게 됩니다. 불만족하게 되면, 몸과 마음이 아픕니다. 남성 동지들이 정년퇴직 후에는 아내의 치맛자락을 잡고 쫄쫄 따라다닌다고 합니다. 젊어서는 그렇게 바깥으로 돌더니 말입니다. 그러면 아내들이 이런다죠. “되었네, 이사람. 다른 데 가서 알아보시게. 웃기는 짬뽕 열 그릇이야” 재미 있으라고 말씀드리지만, 실제로 우리 주면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타자, 즉 다른 사람으로 살다보니 혼자 놀 줄을 모릅니다. 전에 말했듯이, 우리는 ‘공간에 대한 지배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공간에 대한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오직 공간과 나만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여유롭고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불안하고, 초조하고, 버려진 외톨이의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저녁 9시가 되어도 아내 돌아오지 않습니다. 흐르는 눈물에 비애감과 자괴감이 자리 잡습니다. 바로 거기서도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공간을 지배하는 힘입니다. 우리는 혼자 있을 때, TV를 켜고 애완견을 붙들고 있습니다. 이것을, 즉 공간을 지배할 수 없어서 입니다. 요즘은 필수품이 애완견입니다. 강아지가 도리어 싫어해도 좋아하는 척하는지도 모릅니다. 공간을 지배할 힘이 없으면 애완견이라도 끌어안아야 합니다. 남자의 힘은 경제력입니다. 여성은 경제력이 없어도 무한한 능력과 힘이 있습니다. 자식들의 엄마에 대한 높은 충성도가 그것입니다. 적어도 엄마는 새마을금고 정도 하나씩은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식입니다. 자식 10명 중 9명은 아버지가 아닌 엄마에게 용돈을 준다고 합니다. 남편은 아내가 받은 용돈을 기쁨조 노릇을 하며 다시 얻어 쓰는 형편입니다. 공간을 지배한다는 것은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마음과 몸과 배움을 변혁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네 마음과 몸과 배움을 변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행복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
|
'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 > 불교교리·용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회와 열반의 갈림길 (0) | 2018.03.18 |
---|---|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 (0) | 2018.03.18 |
불교(佛敎) (0) | 2018.03.11 |
되돌아 옴 |…… 혜천스님설교 (0) | 2018.03.04 |
인연 / 현정선원 대우거사님 (0) | 2018.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