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 옴 |…… 혜천스님설교

2018. 3. 4. 13:2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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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돌아 옴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 떠오르는 때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라는 얘기도 있고 양희은의 하얀 목련이라는 노래도 있습니다만 저 밖의 목련 꽃은 비바람부는 요즈음의 날씨로 채 피워보지도 못하고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강론 주제는 '되돌아 옴'입니다. 부처님 생애 중 가장 주목받는 붑분이 붓다의 성도와 관련된 것입니다. 현전하는 니까야들도 대부분 이 것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성도는 무엇인가?  많은 분들이 이것을 이야기하고 관심을 보이십니다. 저 또한 그랬었는데 요즈음은 보리수 나무아래서 깨달은 것이 무엇이었는가? 보다는 그 전단계에 대해 더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29살에 출가하여 여러스승을 모셨고, 그 스승으로부터 인가도 받았습니다. 그때 내놓은 것이 '비상비비상'처입니다. 이것은 생각 그 자체까지 끊어진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6년간의 고행했던 자취를 치우고 네란자르(나이란자나) 강에서 목욕을 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고타마 싯달타는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정도로 초인적인 수행을 했으며, 이 때문에 동료들로부터 존경을 받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싯달타가 그간의 명성을 뒤로하고 네란자르 강에서 목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를 두고 그의 동료와 이웃들로부터 '타락한 자'라는 비난을 듣게 됩니다. 왜 붓다는 어느날 갑자기 주위로부터의 비난을 감내하며서까지 그의 생각을 바꾸었던 것일까요. 나는 사실 여기에 관심이 있습니다. 왜 그의 생각이 어느날 갑자기 바뀌어서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인간이 가장 두려워 하는것은 무엇인가요? 죽음일까요, 병드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입니다. 동시에 나와 가까운 동료들에게 버림받는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사람들은 가까운 이와 가족들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에게, 쉽게말해 내 적으로부터 공격받는 것은 아무런 위협을 주지 못하지만  나와 내 가족, 동료로부터 버림받는 것은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동료 집단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무한한 충성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유독 '선명성'을 강조하는 사회이기도 합니다. 전체적인 입장에서 보면 여러가지 정황상 자신에게  불리해지는 것을 알면서도 조직에 충성을 보이기 위해 경쟁을 합니다. 서양의 격언에 '좌파는 스스로 분열해서 망한다'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원래 좌파 우파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프랑스 대혁명이 끝나고 과거의 질서를 어느 정도 유지하자는 사람들은 오른쪽에 앉고, 급진적인 자코뱅당인 현체제를 뒤엎자는 세력은 왼쪽에 앉게 된 것에서 유래합니다. 그런데 좌파는 스스로 분열하여 대중을 상대로 해서 자기들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집단만을 보고 일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좌파는 더 재미있습니다. 좌파는 스스로의 집단에서 인정받기 위해 일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파는 어떻습니까? 우리나라 우파도 재미있습니다. 우리나라 우파는 오로지 누가 권력을 잡는가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박정희 서거후 전두환을 보면 압니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총애속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럼에도 전두환은 선배, 동료들을 짖밟습니다. 같은 세력이 집권했는데 자기를 후견했던 그 세력을 짓밟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별로 없는 일입니다. 전두환 뒤로 노태우를 후계로 하려고 하자 측근에서 만류를 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전두환은 '노태우는 내가 잘 알아'하며 일축하며 노태우를 후계자로 내세웠는데 노태우가 집권하자 마자 철저하게 전두환 세력을 제거했으며, 전두환은 백담사에 위리안치 되는 신세로 전락한 것입니다. 전두환은 육사시절부터 자기에게 'NO!'라고 하지 않았던 노태우에게 배신당하면서 '모든 인간은 용서해도 토태우만은 용서하지 못하겠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후 김영삼은 또 철저하게 노태우를 짓밟습니다. 같은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끼리 철저하게 짓밟는 행위는 정말로 이상한 일입니다. 이는 노무현도 마찬가지로 집권하자마자 '대북송금'문제로 전임 김대중 대통령을 옥죄였다.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같은 집단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하여 이렇게까지 골몰하고 충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따마 싯달타는 기득권을 버리고 목욕을 한 것임. 네란자르 강가에 살며 어찌 목욕을 그때만 했겠는가. 그렇다면 이 때의 목욕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물은 범세계적으로 죄를 사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의식을 치룰 때 두루 사용되고 있습니다. 고대 중동, 인도 등 물은 이러한 종교의식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지금도 갠지스 강가에서 목욕을 하는 많은 순례자들이 있습니다. 이는 과거의 죄업을 씻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따마 싯달타의 네란자르 강에서의 목욕이 상징적일 수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강변에서 수행을 하며 싯달타는 그동안 목욕을 안했을까? 그 동료들은 한번도 그 강가에서 목욕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이 목욕에 대해 경전에서 이렇게 강조하는 목적은 무엇일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왜 동료들은 목욕하는 그를 두고 '타락한 자'라고 비난했을까.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생각의 변화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나와 늘 생각을 함께하던 사람이 '생각의 변화'를 이야기 하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그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부처님이 이렇게 네란자르 강에서 그 물에 몸을 담갔다는 것은 그의 생각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의 목사이자 신학자인 디트르히 본회퍼*는 "잘못된 기차에 올랐다면 통로 반대 방향으로 뛰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라는 말을 남긴 사람입니다. 본 회퍼 목사는 히틀러가 권력을 쟁취하기 시작할 때 부터 일관되게 히틀러를 반대하고 급기야 암살을 기도했다가 처형을 당한 사람입니다. 잘못된 기차에 탔다고 그 진행 반대방향으로 뛰어봐야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보통 이런식으로 이해합니다. 잘못된 기차에 올랐다면 그 기관사를 끌어내면 됩니다.이 이야기에서 각자가 느낀대로 새기면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차에서 뛰는 행동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네란자르 강에서의 목욕은 붓다가 잘못된 기차에 올라 탔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붓다의 출가가 잘못된 현실에 대한 비판에서였다면, 네란자르 강에서의 목욕은 현실로 되돌아 오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경전에 보면 붓다의 출가 동기를 이렇게 얘기 합니다. 동서남북 4대문 나설때마다 동문에서는 늙은 노인을 보고, 서문에서는 병든자를 보고, 남문에서는 죽은 사람의 장례식을 보고, 북문에서는 수행자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붓다가 출가를 결심했다고 합니다. 붓다의 출가는 생노병사의 해결이라고 경전에는 기록돼 있습니다. 과연 붓다의 출가가 생로병사의 해결이라고 봅니까? 생로병사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태어나면 나이들고 병이들게 마련입니다.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아프고 어느 날 숨을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생로병사는 자연의 현상입니다. 그 생로병사가 젊은 싯달타를 짓눌렀을까요, 그래서 그가 출가를 했을까요. 붓다의 출가 이유는 이와 같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아마 이것은 경전편찬자가 윤색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니까야가 100%붓다의 말씀을 기록했다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출가 동기는 사실 더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아주 현실적인 것, 무슨 말인가 하면, 붓다는 크샤트리아로 태어났습니다. 왕자였지요. 그의 부친을 대왕이라 하였지만 카필라국은 작은 나라였다. 붓다의 모국은 코살라국에 속해 있다라고 얘기되는데 한 나라로서 독립은 했지만 영향력은 미미했던 것입니다. 조선조 비섯을 보면 전부 다 '유명~'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조선시대가 실제적으로 유형무형의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을 그 시대의 비석은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실 카필라국도 약소국이었고, 이것이 붓다 출가동기와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붓다께서 조용히 앉아있는데 마라가 이렇게 속삭였다고 합니다. "붓다여, 당신이 지배자가 되어 직접 이땅을 통치하는 것이  좋을 터인데, 무엇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가" 쌍윳다 니까야의 마라 장章 에 기록돼 있읍니다. 붓다의 출가는 엄격히 말하면, 현실로부터의 이탈, 즉 현실로부터의 도피였습니다. 붓다가 네란자르 강에서 목욕을 했다고 하는 것은 현실로 돌아 온 것입니다. 붓다가 잘못된 기차에 올라탄 것을 알아차리듯, 그때에 잘못된 판단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현실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고, 그 어느 누구도 현실을 떠나서 내 이상을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불교에서의 연꽃은 처렴상정(處簾常淨), 더러운 곳에서 피지만 항상 깨끗하게 꽃을 피웁니다. 왜 연꽃을 얘기 하는가. 연꽃에서 말하는 더러움은 무엇일까. 나는 현실이라고 봅니다. 현실은 낭만적이지 않고, 현실은 항상 꽃길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선택을 하고 있다. 선택에는 두가지 선택이 있읍니. 하나는 감성적인 선택이고, 또 하나는 이성적인 선택입니다. 얼마전 영국에서 재미있는 통계를 발표했는데, 우리나라는 이런 것이 돈이 안되어서인지 조사되고 있지 않은데 그래서인지 대학도 돈이 되지 않는 것은 폐지한다고 합니다. 어떤 것을 조사했느냐 하면 여자를 보고 사랑을 느낀 남자가 영원히 사랑 하겠다는 맹세를 하였는데 이러한 남자의 50%이상이 그 무릎의 흙이 떨어지기 전에 다른 곳에서 다른 여자에게 그러한 일을 되풀이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충동적인 것으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때 이성적인 것 보다는 감성적인 선택을 하고 그일을 갖고 후회를 하면서 산다. 우리의 현실은 항상 그와 같습니다. 연꽃을 피우는 오염된 흙은 현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오직 현실에서만 연꽃이 핀다는 것입니다. 오직 현실에서만 그 사랑도 꽃피는 것입니다. 우리 박청자 선생님이 화중연화전을 합니다. 불속에 연꽃이 피는 것도 결국 그 의미라 할 것입니다. 불이라는 것도 현실입니다. 현실을 떠나서 꽃이 필수가 없습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든, 모두 로맨틱한 사랑를 꿈꾸지만, 현실에 두발을 딛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현실에 두발을 딛고 있을때 의미가 있는 것임. 그런데 우리는 현실을 떠나고 싶어합니다. 네란자르 강의 목욕은 현실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 현실을 떠나서는 피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도피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1명의 비구들에게 전도선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구들아 전도를 떠나거라.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니까야를 보면 붓다가 이땅에 오시게 된 것도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해서라고 되어있음. 우리는 내가 싫든 좋든 내가 긍정하든 내가 부정하든 우리는 현실이라는 공간속에 존재합니다. 이 공간을 떠나서 이루어질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과연 오늘의 불교가 붓다께서 네란자르 강에 목욕한 의미를 진솔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아니 이해를 하고 있는지...., 삼봉 정도전은 불교를 비판하며서 "선(禪)은 선(善)과 악(惡)을 대하는 태도가 불분명"하다고 했습니다. 좀더 직설적인 표현을 하자면 선은 선악을 혼돈한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삼봉의 이 도전적인 말에 현대불교는 아니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적어도 네란자르강에서의 목욕을 생각한다면 삼봉의 이러한 질문은 아직까지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성철이 종정 취임 법회에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하였고, 그 사흘뒤 부처님 오신 날에는 "공장에서 일하는 부처님, 들판에서 일하는 부처님, 거리를 걷는 부처님"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시대는 많은 학생들이 아스팔트 위에서 시위를 하고 많은 학생들이 스스로 자기 몸에 기름을 끼얹던 하던 때였습니다. 전두환이 집권을 위해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는 시절이었습니다. 내가 20대에 딱 한번 4.19묘역에 가봤습니다. 거기에는 이은상의 싯구가 있습니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 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되살아 피어나리라  

 - 4.19학생기념탑 비문 中 -

 

 

이러한 시대에 공장 부처님, 들판 부처님, 거리 부처님을 얘기하는 것은, 나는 공허하다고 봄. 나도 그시대에 절집에 몸담고 있었지만, 과연 그들이 이 현실에서 연꽃을 피우기 위해서 어떤 거름의 역할을 했는지, 깊은 산중에서 종이때기에 몇자 적는다고 그들이 행복해질까요? 그래서 그러한 부처님들 살림살이가 좀 나아졌는가. 적어도 붓다는 비겁하게 깨달음이라는 이름아래 자신의 비겁함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불교라고 하는 것은,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전에도 얘기했지만, 반드시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돌아와서 봄을 선고하는 진달래처럼 꽃은 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미안한 얘기지만그것은 불교가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스스로 불교라 해도 그것은 불교가 아닌 것입니다.

 

붓다께서 법사경(법의 계승자)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비구들이여 다르마의 계승자가 되어야지, 재물의 계승자가 되어서는 안된다"이라고 했습니다. 붓다는 다르마의 계승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붓다의 재물의 계승자가 되는 것은 나를 비난받게 하고 나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붓다가 말하는 다르마의 계승자는 무엇일까요, 나는 그것을 현실로 되돌아 옴을 뜻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꽃을 피우라는 것이라고 봅니다. 스스로 꽃이 되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의 존재이유는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해서 내가 그 자양분이 되는 것임, 이것이 다르마의, 법의 계승자가 되는 것임. 네가 네몸을 갖고 그 자양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르마의 길이요, 법의 길인 것입니다.

 

요사이 천안함 사건으로 봉은사 얘기가 묻혔있음. 이야기 안하고 싶은데 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무엇때문에 싸우는가? 정의를 위해서? 붓다의 법을 위해서? 아마 봉은사라는 절이 없으면, 아니 봉은사가 아니었다면 그 둘은 싸우지 않았을 것임니다. 시골의 작은 절에는 서로 주지로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돈이 없는 곳으로 가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 물론 내주위나 내가 아는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다른 분들은 가시겠지요. 그걸 보면 제가 어지간히 썩은 곳에 살고 있었나 봅니다. 그나물에 그 밥이라고 전들 다른 수가 있었겠습니까만, 명진스님은 왜 그렇게 밍기적 거리며 그자리에 있는 것인지, 그만두고 한나라당사 앞에서 법회를 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붓다는 법의 계승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재물의 계승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 불교가 붓다의 깨달음을 집중하다보니 현실로부터 자꾸 멀어지고 이탈하고 있습니다.

 

내가 양심고백하건데 산속이라고 이쁜 아가씨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깊은 산속에서 도딱으면 아무생각 없을 것 같지만, 알고보면 맨날 보는 것보다 더 보고싶은 것입니다. 매일 꽃길을 거닐면 꽃은 별게 아닙니다. 같은 칭찬도 세번만 듣게되면 짜증이 난다고 합니다. 칭찬받을 일을 하고 칭찬을 하면 좋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한두번입니다. 입만 열면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도 지겨워 집니다. 항상 그 자리에 있으면, 고마움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왜 붓다가 되돌아 온 것일까요. 비로소 현실로 되돌아 왔을때 이상이 살아 꿈틀거리기 때문입니다. 연꽃이 사랑받는 이유는 깨끗한 환경이 아닌데도 그 깨끗한 자태를 유지하고 그 향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한다고 가부좌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현실로 되돌아오지 않는 한 우리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제가 미얀마에 두번째로 들어갈 때는 사실 오래있을 생각이었습니다. 한국에 있어봐야 별볼일도 없고, 미얀마의 날씨도 좋고, 또 대접도 융숭합니다. 우리나라 큰 스님들도 그만한 대접을 받기 힘들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비구 앞에서는 무조건 무릎을 꿇습니다. 흙바닥이든 진흙창이든 관계가 없습니다. 미얀마에서 한국으로 오기 위해 공항을 갔는데 나를 환송나온 사람이 의자 밑에서 무릎을 꿇고 있어서 아주 혼난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탁발을 하러 나갔는데 저기 300미터쯤 앞에 다 쓰러져 가는 집에 다섯살, 일곱살 쯤 먹은 두 아이가 찌그러진 그릇에 밥을 담고서 무릎을 꿇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 밥을 받으면서 이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아이들에게 줄것이 무엇인가 이아이들은 찢어진 옷과 찌그러진 그릇을 들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내가 이 아이들에게 줄 것이 무엇인가'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나는 정사에 돌아와서 그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 나는 스승인 떼자냐 사야도에게 이런한 고민을 이야기 하자 그는 그런것은 잊고 사띠나 챙기라는 말씀을 남기실 뿐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얻겠다고 그에게 한 숟가락의 밥을 받는 것은 이건 죄악이다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항상 나도 환경, 조건만 좋으면 그렇게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여기서 할 수 없었다면 저기서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할 수 있었다면 저기서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같이 간 동료 스님들에게 돌아가야겠다고 하자 그들은 이 좋은 천국을 두고 왜 가려고 하는냐 하며 반대를 하였습니다. 이제 수행도 잘 되는데 왜 가려고 하느냐 하는 말을 들으면서 차마 여기에 앉아 죄악이라는 생각을 했다는 말씀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스님들은 비행기 삯도 들었으니, 여기에 온 이상 최소한 수다함과라도 얻어야 되는 것 아닌가?하는 말들도 있었습니다.

 

사실 미얀마에 가서 배운 것이 없습니다. 딱 하나, 그 아이들에게내가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수다함과나 아라한과를 얻어 무엇하겠는가 깊은 산골에 들어 앉아서 무엇을 깨닫고 얻었다 한들 그것은 관념일뿐입니다. 붓다는 모든 수행의 근본은 자애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생명체의 생명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마음이 수행의 대전제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나 혼자 터뜨려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붓다께서 주위의 찬양과 존경을 물리치고 왜 비난 받을 줄 몰랐겠고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홀로 버려져 남게되는 것을 왜 몰랐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네란자르 강에서 목욕을 하고 수자타가 준 우유죽을 먹었습니다. 이것의 의미는 되돌아 온 것입니다. 어디로? 현실로 돌아온 것입니다.

 

붓다의 출가는 현실로부터의 이탈이었다면 이제 그는 현실에 몸을 담금으로서 현실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기팔라 나무아래 앉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동심입니다. 붓다가 그 자리에서 12연기를 관했다? 기록에는 그렇게 돼있는지 몰라도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붓다는 부동심으로, 금강심으로, 향상심으로 앉았을 뿐인 것입니다. 어디에 앉았을까요, 바로 기팔라 나무라고 하는 현실에 앉은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붓다의 계승자인 것입니다. 붓다는 다르마의 계승자를 얘기합니다. 현실로 돌아와서 많은 사람들이 연꽃처럼 피어나도록 내 육신을 기꺼이 거름으로 돌아감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붓다가 과거 수행자 시절, 비둘기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육신을 저울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의 강론은 이것으로 마침니다. 봄인데 아침에 서리가 내렸습니다. 우리 모두 건강에 유의합시다. 저번 일요일에 추워서 감기를 얻었습니다.  

 

 

*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년 2월 4일~1945년 4월 9일)

독일 루터교회 목사, 신학자, 반 나치운동가.

그는 아돌프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제2차 세계 대전 때의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의) 외국 첩보국(Abwehr)의 구성원에 의해 진행된 계획에 가담하였다. 그는 1943년 3월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플로센뷔 수용소에서 1945년 교수형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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