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두 날개|…… 혜천스님설교

2018. 4. 8. 10:5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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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두날개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6월 1주차: 불기2554년 6월 6일)  


 

 

오늘은 날씨가 좋습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는 '새의 두 날개'입니다.

불경에 보면, 새의 두 날개, 수레의 두 바퀴라는 용어가 많이 나옵니다. 새의 두 날개, 수레의 두 바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왜 새의 두 날개, 수레의 두 바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올까요?

 

새는 두 날개로 날죠. 수레는 두 바퀴가 있어 짐을 싣고 나릅니다. 이영희씨의 <새는 두 날개로 난다>는 책이 있던가요. 이 책에에서 말하는 새의 두날 개는 불경에서 말하는 것과 의미가 같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다릅니다. 같지만 동시에 다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새의 두 날개, 수레의 두 바퀴는 평형을 의미합니다. 즉 중도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새는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두 날개로 납니다. 한 쪽 날개 만으로는 날 수 가 없습니다. 수레도 두 바퀴가 있어야 짐을 싣고 구를 수 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처음으로 제자에게 설법한 것이 익히 알고 있듯이, 중도의 가르침입니다. 중도는 평형을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양극단을 벗어난 것을 중도로 이해하는데, 그것은 옳은 이해가 아닙니다. 그저 먹줄을 세는 사람들의 이해일 뿐이죠. 부처님이 말하는 것에는 언제나 핵심적인 의도가 있습니다. 이 핵심적인 의도를 읽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경전을 아무리 달달 외워도 소용이 없습니다. 즉 경전을 읽어도 이해를 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요즘 법정 스님의 책이 베스트 셀러입니다. 나는 법정스님의 책이 그렇게 많이 팔려 나가는 것을 보고, 법정스님의 채글 쌓아 놓아도, 그 책을 이해하는 사람이 몇 분이나 될지 궁금합니다. 우리같은 사람은 그 분의 책을 보면, 숨이 막힙니다. 좋은 말이란 말음 모두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봄이 되어 꽃이 피는데, 그걸 즐지지 못하느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 이런 식이죠. 많은 분들이 법정스님의 책을 읽는데, 그걸 얼마나 이해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침묵은 죄악이다'라는 법정 스님의 말을 독자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99%가 이 말조차 읽어 봤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책의 핵심은 침묵은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그 뜻은 본질을 보지 못하는다는 것입니다. 본질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평형감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불경에서 생의 두 날개, 수레의 두 바퀴를 말하고, 부처님이 중도를 말하는 것은 모두 그것이 평형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는 것은 평형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즉 평형있는 사고를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 없는 말과 글귀를 쏟아 내지만, 평형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평형을 유지하는 것은 고사하고, 평형의 뜻조차 잘 모릅니다. 우리는 여기서 부처님이 말하는 중도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결국 인간의 행복은 평형이라는 두 글자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즉 평형감각을 유지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많이 듣는 말 중, 그리고 자연스러워 하는 우리의 전통 중에 선비의 안빈낙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강원도백인 김진선 지사도 언젠가안빈낙도가 조선의 선비정신이라고 말하는 걸 본적이 있습니다. 안빈낙도!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시 해야 할 것은 인간의 본성은 부귀공명을 꿈꾼다는 것입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안빈낙도는 거짓입니다. 조선의 선비들은 권력과, 명에와 부를 원합니다. 즉 부귀영화를 추구합니다. 그들이 안빈낙도라고 하는 것은 그럴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처했을 때 하는 말입니다. 그저 안비낙도를 말하는 사람은 몽둥이로 사정없이 패야 합니다. 그 작자들이 안빈낙도를 말하는 순간, 그의 아내는 굶주린 채 길쌈을 하고, 남의 집 빨래를 하고 밭을 맵니다. 그들의 자식이 굶주려 죽어나가기도 합니다. 그가 입으로 얘기하는 안빈낙도 속에는 그의아내의 피땀과 한숨이 들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부귀 공명을 꿈꿉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물질보다 정신이 우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치고 실제로 정신을 추구하며, 물질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보적이 없습니다. 나는 돈을 사랑합니다. 돈을 부끄러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부, 권력, 명에를 원합니다. 그들이 아무리 정신적 가치를 강조해도, 그 본성은 물질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만 정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부귀공명을 탐하게 되어 있습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법정스님이 무소유를 말하는 것도, 그가 명예를 탐했기 때문입니다. 나 역시 부귀공명 모두르르 탐합니다. 그렇지만 그걸 이룰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일찌감치 그 생각을 접었습니다.

 

그저께 문수스님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그가 4대강을 말하며 분신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야기를 신문에서 읽고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것이 과연 분신할만한 가치가 잇는 것인가? 그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 ㅈ체가 도리가 아닙니다. 동양, 특히 한국사회에서 망자에 대해 비판하면 안됩니다. 죽은 사람에 대해 허물을 논하는 것은 간악한 자가 않니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가 선하지 않아서 입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부처님은 평형잇는 사고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가사를 걸쳤지만, 부처님의 이런 뜻을 잘 몰랐습니다. 그 분은 명예를 탐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보면, 중는 자리를 알았다고 할까요. 그가 그렇게 죽어 사람들이 온작 소동을 벌입니다. 소신공양의 논쟁도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죽을 용기기 있었으면, 나같으면 장난감가게로 달려가 M16장난감 총을 사겠습니다. 그리고 그걸 어께에 둘러메고 청와대로 갈 겁니다. 그러면 아무도 모르는 자들이 총을 난사해 죽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간악한 자들에 의해 죽은 것이 거룩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현충일입니다. 난 솔직히 이 말조차 맘에 안듭니다.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하다가 죽고, 그 죽은 사람들을  위해 현인들의 날이라는 뜻으로 날을 정해 기리는 모양인데, 그게 맘에 안듭니다. 국가주의라고 하는 것, 즉 일본이 야스쿠니 신사를 지어 참배하는 것이나 우리의 현충일이라는 날을 정해 기리는 것이 무엇이 다릅니까? 결국 같죠. 그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기리듯이, 국가를 위해 죽은 사람을 기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항상 오직 평형이라는 감각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평형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평형은 공감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흔이 지도자 하면, 카리스마, 리더쉽 등을 말하는데, 카리스마와 리더쉽을 갖춘 지도 아래 있으면, 국민들은 굉장히 힘듭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면 따라야죠.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 모토가 "안되면 되게하라" 였습니다. 군대에서 까라고 하면, 그저 밤송이라도 까야 한다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죠. 안되면 되게하는 것, 여기에는 공감이란 없습니다. 우리가 공감해야 하는데, 공감하지 않는 것입니다. 흘러간 노래 중에 <그대 그리고 나>라는 노래 제목이 있습니다. 그대 그리고 나, 나 그리고 그대, 이것이 평형입니다. 부처님의 중도 이야기도 평형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제자조차 평형감각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그들조차 평형의 사고를 못합니다.     

 

불경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히말라야 산에 머리가 두 개 달린 새가 삽니다. 왼쪽 머리를 가진 새는 카루다, 오른 쪽 머리를 갖빈 새를 우파카루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카루다와 우파카루다는 쉴새없이 시기합니다. 카루다가 잠들면 우파카루다가 일어나고, 우파카루다가 잠들면, 카루다가 깨어있고 이런 식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우파카루다는 카루다가 맛잇는 걸 먹게 되는 것을 봅니다. 우파카루다는 화가 납니다. 그런데 카루다가 잠들게 되고, 우파카루다는 그 옆에 독이 떨어져 있는 걸 보고, 그걸 먹습니다. 카루다가 깨어나면서 그걸 보고, "지금 무얼 먹었느냐?"라고 묻자 우파카루다는 "널 골려주려 독을 먹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카루다가 말합니다. "너와 나는 한 목숨이라는 것을 잊었니?" 그리고 그새는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은 한 목숨입니다. 이린 이런 이야기를 우화라고 합니다. 짐승의 얘길 빌어서 말하는 것이죠. 부처님이 왜 이런 우화를 말할까요? 카루다는 선하고, 우파카루다는 불선하다. 이런 걸 말해주기 위해서인가요. 단순히 얘기하면 선과 악을 말하기 위해서인가요. 부처님이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선악의 이분법으로 말하면,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평형의 사고입니다. 

 

전에 제가 강론에서 매와 비둘기 이야기를 한적이 있습니다. 그 때 주제가 '저울 위의 붓다'였습니다. 매와 비둘기는 비대칭입니다. 부처님이 말하는 평형은 대칭입니다. 새의 두 날개, 수레의 두 바퀴는 모두 대칭입니다. 새의 두  날개중 하나가 부러지고, 수레의 주 바퀴 중 하나가 망가지면, 비대칭이 됩니다. 부처님이 자타카의 형식을 빌어 매와 비둘기의 얘기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비둘기를 위한다고 매의 날개를 꺽으려 합니다. 또 매를 위한다고 비둘기의 날개를 꺽으려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각각 비둘기 또는 매는 행복할까요? 어떤 분은 비둘기를 이용해 매의 날개를 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분들은 적자생존, 약육강식은 당연하다며 비둘기를 몰아 매에게 갖다 주죠. 그런다도 매가 행복할까요? 왜 부처님이 저울 위에 올라 갔을까요? 비둘기를 위해 매의 날개를 꺽는다고 비둘기가 행복하지 않고, 매를 위해 비둘기를 몰아줘도 매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나찌 독일이 행했던 우생학 실험이 있습니다. 장애자, 동성애자와 같은 열성을 몰아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열성을 골라내다보면, 마지막에는 한 사람만이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성의 입장에서 보면, 그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열성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학교에 40명의 학생이 있다고 할 때, 꼴찌를 쫓아내 보십시요. 처음에는 40명 중40등, 그 다음은 39등... 맨 마지막에는 2명만이 남겠죠. 거기서 2등은 꼴찌가 될 것이며, 그 또한 좆겨날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남는 사람은 한 사람인데, 그가 교실을 혼자 지키게 되겠죠. 이 순간 이 곳은 학교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하나를 제거하는 순간, 또 다른 하나 역시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걸 우리는 '연기'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는 하나를 제거하죠. 문제는 그 순간 나머지 하나인 우리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매를 제거하는 순간 비둘기의 날개도 꺾여 버립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비둘기와 매가 공감하도록 해야 합니다.각각 매와 비둘기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공감대를 이끌어 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랑, 사랑, 매일 외는데, 도대체 사랑이 무엇입니까? 남궁옥분의 노래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에서 처럼, 우리는 맨날 사랑타령을 하는데 사랑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나는 사랑은 공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와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그와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공감할 수 있으면, 우리가 공감하면, 사실 문제의 해결은 간단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공감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공감하려면, 평형의 사고, 즉 평형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비대칭입니다. 오늘은 현충일입니다. 국가는 개인에게 희생을 강조합니다. 작년인가요. 우리나라 소위 지도다들이 모여 성명을 내어 한탄했습니다. '대한 민국 군대가 좌빨의 소굴로 변했다'여기서 좌빨은 좌익 빨갱이입니다. 왜 빨갱이인지 아세요? 빨아도 지지 않아서랍니다.  그들은 군대의 좌익 빨갱이의 척결을 외쳤습니다.그런데 군대가 왜 그 분들이 탄식할 정도로 좌빨의 소굴이 되었을까? 간단합니다. 부잣집 아들들이 군대를 안갔기 때문입니다.양쪽이 하난 한쪽만이 군대를 갔다는 것입니다. 웃자고 하는 얘긴데, 아무도 안 웃는군요.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이 모든 것이 평형감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들 얘기대로라면, 군대가 좌빨이라는 것인데, 그건 좌빨들만 군대에 가서 그런 것이라는 거죠. 즉 그 분들 자제는 군대에 가지 않고, 좌빨만 군대에 간다는 거죠. 

 

대한민구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국가와 개인, 집단과 개인,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등. 이것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힘의 비대칭입니다. 여기서 국가, 집단, 부모, 남자가 힘이 쎕니다. 그래서 비대칭입니다. 여성분들에게 욕머글지 몰라도 그게 현실 아닌가요. 우리집은 안그래 하는 분도 계신것 같군요. 내가 아는 얘길 하난 하겠습니다. 서울의 어느 아파트에 노부부가 살고 있는데, 복도형 아파트라 옆집의 부부싸움도 다 들리더랍니다. 그런데 5살안 아이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엄마! 아빠 때리지마". 그제서야 그 집 남자가 얼굴이 푸르딩딩하던 것이 아내에게 맞아서였다는 걸 알겠더랍니다. 이런 집은 굉장히 긍적적입니다(?) 대부분은 그와는 반대입니다. 힘에 의해 비대칭이 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나라에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 전반에 흐르고 있습니다. 절집도 비대칭입니다. 비구보다 비구니 스님이 더 많은데, 비구니 스님이 총무원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저 총무원 부장자리 하나 내어주는 정도입니다. 구우일모, 아홉마리 소에 털 하나일 정도로 드물다는 겁니다. 그 만치 대칭관계가 깨졌다는 얘기입니다.

 

(이때 현충일이라고 싸이렌이 울린다)    

이 민족, 이 국가는 날짜와 시간을 정해 한꺼번에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추모를 하게하는 희한한 나라입니다. 시간을 정해 놓지 않으면 못할까봐 그런가?  우리가 평형의 사고가 되어야 합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가 평형의 사고를 갖지 않으면, 그 어떤 것을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거짓이고, 허언입니다. 정신을 강조하더라도 물질을 추구하고, 부귀공명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그걸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일신하라고 말하면 됩니까? 즉 마음을 닦으라고 말하면 될까요. 그렇게 말하면 나의 입도 부드러워 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거짓입니다. 

 

부처님은 현실을 직시하라고 했습니다. 현실을 직시한다는 것은 현실을 비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을 비틀죠. 누가 현실을 비틉니까? 우월한 힘을 가진 자들입니다. 선비들의 안빈낙도 얘기로 돌아가 볼까요. 선비들은 특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일반 백성이 아닙니다. 유교사회에서 일반 백성, 즉 평민이 정치에 간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주왕(紂王)은 하(夏)나라 걸왕(桀王)과 더불어걸주(桀紂)라 하여 전형적인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걸주가 비간(比干)을 죽인 것도 그가 평민이면서, 정치에 관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양반이라는 특권층이 있지만, 중국은 그런 특권층이 없습니다. 그들은 공부하면 누구나 관료가 될 수 있습니다. 비간 등은 그럴 여력이 없어 관료가 될 수 없었를 뿐입니다. 우리는 공부를 해도 양반이 아니면, 관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우리는 마치 그들이 가난을 즐긴것 처럼 말하는 것은 왜곡입니다. 

 

부처님이 중도를 말하는 것은 평형입니다. 평형은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한 쪽에 치우쳐서 비틀지 않는 것이 중도이고, 평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비틉니다. 틀림없이 비대칭인데도, 대칭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매의 날개를 꺽습니다. 또 다른 어떤 사람은 비둘기를 매에게 바칩니다. 부처님이 말하는 것은 공감입니다. 평형은 공감하는 힘입니다. 생의 두 날개, 수레의 두 바퀴는 평형입니다. 새의 날개에서 깃털을 뽑아내고. 수레의 바퀴에서 빗장을 풀면, 평형이 깨집니다. 우리 사회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입니다. 새의 깃털을 뽑지 않고, 수레의 빗장을 풀지 말아야 평형을 이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평형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각도에 따라 평형이 달라 집니다. 부처님은 한 가운데서, 즉 중심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문수스님 얘기도 그래서 한 것입니다. 그 어떤 것을 내세우더라도 생명을 버리는 것은 안됩니다. 그것은 반불교적입니다.

 

춘추전국 신데 오자서는 "내가 죽거든 내 두눈을 선문 높이 달아 달라. 훗 날 오왕 부차가 죽는 걸 두 눈으로 봐야겠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오자서는 초나라 사람으로, 그의 아버지 오사는 태자 건의 스승이었다. 초평왕은 참언을 듣고 태자와 오사를 죽이려 한다. 오사를 옥에 가둔 평왕은 후환을 없애려 그의 두 아들을 부르라 시킨다. “아들을 오게 하면 살려 주겠다”는 꾐에 오사는 이렇게 말한다. “큰아들은 효자라 부르면 올 것이고, 둘째 아들(자서)은 야무진 아이라 오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장남은 부름대로 오고, 오자서는 “가봤자 세 부자가 모두 죽을 것”이라며 도주한다. 오나라로 망명한 자서는 오왕 합려를 보좌하여 강국으로 키운 뒤 초나라를 함락시킨다. 드디어 복수의 때가 왔으나 평왕은 이미 죽은 뒤였다. 오자서는 평왕의 무덤에서 시신을 파낸 뒤 쇠채찍으로 300번 내려침으로써 분을 풀었다. 굴묘편시(掘墓鞭屍)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서 유래되었다. 시신에 매질하는 것은 복수의 한 방법이 될지는 모르나 지나친 처사라고도 하겠다. 그것이 또다른 업(業)이 되었을까. 오자서는 훗날 합려의 아들 부차에 의해 죽임을 당했는데, 죽으면 눈을 도려내 문 위에 걸어 오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보게 해달라고 당부한 뒤 자결했다. 비록 선대의 원(怨)은 풀었다지만 저 또한 원을 품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부차는 와신상담의 고사성어에 나오는 그 부차입니다. BC 496년 오왕(吳王) 합려(闔閭)는 월(越)나라로 쳐들어갔다가 월왕 구천(句踐)에게 패하여 전사하였다. 그 아들 부차(夫差)는 이 원수를 갚고자 본국으로 돌아와 장작 위에 자리를 펴고 자며, 방 앞에 사람을 세워 두고 출입할 때마다 “부차야, 아비의 원수를 잊었느냐!”하고 외치게 하였다. 이것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를 낳았다.  부차의 이와 같은 소식을 들은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먼저 쳐들어갔으나 패하고 말았다. 《십팔사략(十八史略)》오왕 부차의 신하인 오자서는 오나라의 충신으로서 오왕 부차를 도와서 월나라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이 때, 오자서는 월왕 구천을 아예 죽여야한다고 말했지요. 그것이 아버지인 합려의 원수를 확실하게 갚는 것이고, 후환을 없애는 것이라고 주장했고요. 그러나 기고만장한 부차는 사로잡은 월왕 구천 내외를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누명을 씌워서 오자서를 죽였고요. 그 때 오자서는 이렇게 유언을 했답니다. "내 시체의 눈을 빼어서 성문 앞에 걸어 다오.월왕 구천이 오나라에 쳐들어와서 이 도성을 쑥밭으로 만들 텐데, 그것을 내 눈으로 보고 싶다."  오왕 부차는 와신(臥薪)하여 2년 후 회계에서 그를 항복시켰다. 구천은 명신 범려와 상담(嘗膽)하고 기원전 477년 부차를 고소(姑蘇)에서 포위하여 자살하게 하였다. 그 때 부차 역시 이렇게 유언했다고 전해집니다. "나의 얼굴에 먹물을 칠해달라. 오자서의 눈이 무섭구나! 그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또 당나라 조주선사에 관한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 어느 날 포악하기로 유명한 관리가 조주스님께 찾아와 이렇게 묻습니다. "스님같이 훌륭한 분도 지옥에 갑니까" 조주 왈 "그럼 가지!" "어찌 스님같이 훌륭한 분이 지옥엘 갑니까?"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어디서 너를 다시 만나겠느냐?" 무서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아마 그 관리는 등골에 식은 땀이 흐르지 않았겠습니까.   내가 오자서와 조주 스님 얘기를 하는 것은 왜 문수스님이 살아서 간악한 자의 말로를 보지 못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안타깝습니다. 

 

간악한 사람을 중히 쓰면아랫사람이 간악해지고, 선한 사람을 중히 쓰면 아랫 사람이 선해집니다. 그래서 간악한 자를 위에 써서는 안됩니다. 공감을 이끌어 내야 합니다. 너와 내가 함께 할 수 있는 공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 아무리 선한 의도에서 일이 이루어진다 해도, 공감을 이끌지 못하면 소용 없습니다. 장자에 이르기를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말라"고 합니다.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면 불행합니다. 학의 입장에서는 재앙입니다. 뱁새의 다리가 짧다고 그 다리를 잇게 되면, 뱁새의 입장에서 불행입니다. 평정이란 학의 다리가 길면 긴대로, 뱁새의 다리가 짧으면 짧은대로 놔 두는 것입니다. 비둘기를 사랑한다고 매의 날개를 꺽는다고, 비둘기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라는 종교가 처음 시작된 곳은 마가다라는 제국이었습니다. 그러던 불교기 부처님 입멸 후 150년 경에 아쇼카왕에 이르러 널리 퍼집니다. 불교가 제국의 안에 머무르지 않고 제국 밖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불교가 세계화되면서 불교는 본래의 모습을 잃게 됩니다. 불교가 마가다 제국의 밖에 있었던 이유는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입별후 150년 경 불교가 마가다 제국의 한가운데 서면서 불교는 평형을 잃습니다. 정교분리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문학, 예술 종교 등은 정치, 즉 권력의 하부구조입니다. 

 

불교의 출발점은 권력 밖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상가라는 조직도, 그 공동체 안에서 모두는 대칭관계입니다. 우리의 불교가 스승과 제자라는 비대칭의 모습을 띠게 된 것은 유교적 제도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한국 스승과는 반대의 길을 걷고 있으니, 패륜인가요. 그렇다는 것입니다. 제국 밖의 상가에서 부처님이 말하는 것은 대칭관계입니다. 부처님이 첫 설법에서 중도를 얘기한 것도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부처님의 입멸 시 아난다에게  "내가 너희를 가르친 적도 없고, 내 아래 복속해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오직 다르마를 스승으로 삼고, 사람을 스승으로 삼지 말라"고 했다. 왜 사람을 스승으로 삼지 말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평형, 대칭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부귀공명을 꿈 꿉니다. 매에게 충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비둘기를 말하지만, 그 본성 속에는 매가 따뜻한 눈길을 주기를 바랍니다. 경기도지사 후보 토론회에서 김문수씨가 유시민씨에게 침북 빨갱이라고 낙인을 붙입니다. 그가 그렇기 때문에 상대를 그렇게 규정하는 것입니다. 빨갱이는 빨아도 그 속성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가 위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법구경 첫 강의에서, "원수로서 원수를 갚지 말라" 는 구절이 나왔습니다. 왜 원수로서 원수를 갚지말라고 할까요? 거가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피로써는 피를 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피를 씻기 위해 피를 뒤집어 쓰는 짓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삶의 기회는 이번 딱 한번 뿐입니다. 시간 낭비할 여유가 없습니다.  원한으로 원한을 갚지 말라는 의미를 그렇게 이해합니다. 이 땅에 온 것도 딱 한번의 기회입니다. 뭔가를 이루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원가가 무엇읿니까? 행복입니다. 우리는 한 번의 기회에서 행복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형의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평형 감각이 없으면, 누가 이 말을 하면 이 말에, 누가 저 말을 하면, 저 말에 휙 쏠립니다. 새게게 두 날개가 있고, 수레에 두 바퀴가 있는 것은 평형을 유지하기 때문이죠. 이번 선거의 일등공신이 누군지 아십니까? 김제동이랍니다. 왜? 그가 노무현 추도식, 서거 1주년 추도식 사회를 본 것으로 공중파 방송에서 쫒겨난 것을 보고 젊은이들이 선거일 오후 집중 투표를 했다는 것입니다. 아, 이건 전문가들의 얘깁니다. 아, 물론 이 전문가들은 결과를 가지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설득력 있는 말입니다.  결국 평형을 유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평형을 유지 하지 않으며, 즉 '그대 그리고 나', '나 그리고 그대'가 안되면 내가 손해를 봅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아내가 행복의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내가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손해보는 것입니다. '그대 그리고 나'입니다. '나 그리고 그대'죠. 즉 너와 나의 관계를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와 나의 관게를 이분법적으로 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대 그리고 나'가 없어집니다. 새의 두 날개, 수레의 두 바퀴는 결국 두 개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두 개라는 것은 사고의 착시현상입니다. 자동차 바퀴가 넷이지만, 그것은 하나의 자동차입니다.

 

항상 평형의 사고를 유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서말을해 / 김 연숙

토요일은 밤이좋아 / 김 종찬

그래로 그렇게 / 휘버스

사랑사랑 누가 말했나 / 남궁 옥분

나비소녀 / 김 세화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 / 휘버스

제비처럼 / 윤 승희

피리부는 사나이 / 송 창식

꿈을 먹는 젊은이 / 남궁 옥분

한번쯤 / 송 창식

  

 

여고 졸업반 / 김 인순

한잔의 추억 / 이 장희

은지 / 배따라기

사랑의 눈동자/유 익종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 배따라기

 

  

사랑이 저만치가네 / 김 종찬

비와 찻잔사이 / 배따라기

해야 / 마그마

찻잔 / 노고지리

골목길 / 신촌부르스

동동주의파전 / 박도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