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1. 11:15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혜천嵆瀳 스님의 대념처경大念處經 新講(4회)
불기 2554년 3월 3일
대념처경 大念處經
마음챙김의 확립(Mahaasatipat*t*haana Sutta, D22)
초기불전연구원 각묵스님이 빠알리어에서 한글로 직접 번역.
(실상사 화엄학림 강사, 초기 불전 연구원 지도법사)
경의 차례
I. 서언
II. 몸의 관찰[身隨觀]
II-1.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
II-2. 네 가지 자세[四威儀]
II-3. 분명하게 알아차림
II-4. 몸의 32가지 부위에 대한 혐오
II-5.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
II-6. 아홉 가지 공동묘지의 관찰
III. 느낌의 관찰[受隨觀]
IV. 마음의 관찰[心隨觀]
V. 법의 관찰[法隨觀]
V-1. 다섯 가지 장애[五蓋]
V-2.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
V-3.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處]
V-4.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
V-5.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
V-5-1.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V-5-2.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集聖諦]
V-5-3. 괴로움의 지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
V-5-4.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道聖諦]
VI. 결어
I. 서언
1-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는 꾸루 지방의 깜맛사담마라는 꾸루족들의 읍에 머무셨다. 그곳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1-2. “비구들이여,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기 위한 것이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이다.”
1-3. “무엇이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受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心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II. 몸의 관찰[身隨觀]
II-1.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
2-1.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외진 처소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몸을 곧추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마음챙겨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겨 숨을 내쉰다. 길게 들이쉬면서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pajānāti), 길게 내쉬면서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짧게 들이쉬면서 ‘짧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 ‘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온 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sikkhati) 온 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신행(身行)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신행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2-2.“비구들이여, 마치 숙련된 도공이나 도공의 도제가 길게 돌리면서 '길게 돌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돌리면서 '짧게 돌린다'고 꿰뚫어 아는 것처럼, 그와 같이 비구는 길게 들이쉬면서는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 '신행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혹은 밖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팍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그는 '몸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사견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해설
대념처경은 불교수행의 핵심 가르침, 초급, 중급, 고급으로 나눈다면 초급, 중급을 뛰어넘는 고급반. 고급반 이전의 수행을 사마타 samatha 수행이라 함. 사마타 수행은 다름 아닌 집중 수행으로 안반수의경에서 말하는 수식관의 수행법이다. 수식관은 들숨과 날숨을 세는 것으로, 1에서 10까지 세고, 다시금 거꾸로 10에서 1까지 세어 의식을 집중하는 방법이다. 수식관은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 하는 수행법으로 경전에 의하면 붓다 역시 산만한 사람에게는 수식관부터 가르쳤다.
불교의 수행은 8정도를 닦는 것이다. 수행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집중 수행이라고 할 수 있는 사마타이고, 다른 하나는 위빠사나이다. 중국에서는 사마타를 止, 위빠사나를 觀으로 표시하였다지만, 지관수행법은 위빠사나 수행을 말한다. 이 위빠사나 수행(지관 止觀)을 하기 전 단계가 사마타수행이다.
불교에서는 명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명상이란 집중해서 몰아, 망아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데, 즉 무념무상의 사태가 명상의 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무념무상을 비판한다. 프로이드의 용어를 빌리자면 무의식과 비슷한데, 불교에서는 무의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불교에서의 무의식이란 의식을 다만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이라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마음을 보기 위한 것이다. 마음을 보아야 다르마를 본다.
사마타를 止, 위빠사나를 觀으로 표시하였다지만, 그것은 이원적으로 분리되기보다는 단계의 수행이다. 중국으로 간 위빠사나는 천태(天台)스님에 의해 지관쌍수(止觀雙修) 혹은 정혜쌍수(定慧雙修)가 되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새롭게 접목하였다. 그러므로 定=止이며, 慧=觀인 것이다. 지를 뜻하는 사마타는 '통 속에 물을 가라앉히는 것'이라면, 관을 뜻하는 위빠사나는 '통 속에 가라앉은 물을 비워 버리는 것'이다.
용어해설
사마타(奢摩他)
범어 samatha의 음사. 지(止), 지식(止息), 적정(寂靜), 능멸(能滅)이라고 옮긴다. 번뇌의 망념을 몰록 쉬어서 마음의 산란함을 그치는 것. 관(觀)이라고 옮겨지는 비발사나(毘鉢舍那, vipasayana)와 함께 지관쌍운(止觀雙運)이라고 숙어로 사용된다.->비발사나(毘鉢舍那)
불도를 닦기 위하여 잡념을 버리고 정신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일.
안반수의경
이 경전은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대안반경> <안반경> <수의경> 등으로 불리는 경전이다. 한역으로는 후한시대 안세고(安世高)가 상하 두 권으로 번역한 것이 있다. 안반수의(安般守意)란 범어 아나빠나싸띠(Anapanasati)를 소리와 뜻에 따라서 한자로 번역한 말이다. 이 의미를 분석하면 아나(ana)는 들숨이고, 아빠나(apana)는 날숨이고, 싸띠(sati)는 의식집중이다. 한자로 보면 안반은 들숨과 날숨이고 수의는 의식집중이므로 안반수의란 곧 들숨과 날숨에 정신을 집중하는 선정 수행이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경의 제목으로 본다면 초기 선정수행의 오정심관(五停心觀) 중의 하나인 수식관(數息觀)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방법적으로도 이 선정은 들어오고 나가는 숨을 세는 것부터 시작하나, 내용상으로 볼 때 이 선정법은 안반수의법 또는 안반념법이라고 하는 것이 합당하다. 전체의 내용을 보면 상권은 안반수의법의 이론과 실제를 설명하고 하권은 상권의 내용을 강조하면서 그 공덕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행법만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안반수의법을 통하여 많은 교학적인 사상을 함께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일견 매우 복잡한 듯하나 그 전체의 구성은 상하권이 다음과 같이 유기적인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8정도
중생이 고통의 원인인 탐(貪) ·진(瞋) ·치(痴)를 없애고 해탈(解脫)하여 깨달음의 경지인 열반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실천수행해야 하는 8가지 길 또는 그 방법. 8정도는 불교의 실천 덕목인데 다음과 같다.
① 모든 존재의 실상을 바르게 관찰하는 정견
② 생각할 바와 않을 바를 잘 분간하는 정사유
③ 바르게 말하는 정어
④ 바르게 행동하는 정업
⑤ 정당한 방법으로 바르게 생활하는 정명
⑥ 물러섬이 없이 끊음없이 바르게 노력하는 정정진
⑦ 꼭 생각할 것을 잊지 않고 바르게 기억하는 정념
⑧ 바르게 마음을 집중하는 정정
I. 서언
1-1.
세존: 제자들이 붓다를 부를 때 세존(원어:바가와또)라 함.
비구: 붓다가 제자를 부를 떼 비구라 함. 비구(원어 비쿠)는 고대 인도 베다고 사제들이었던 바라문을 지칭하던 용어였다.
비리문교라는 용어 역시 근대 일본이 붙인 이름이다. 힌두교 역시 인도의 종교를 총칭하는 것으로힌두교하는 특정 한마의 종굥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브라만을 뜻하는 바라문계급 역시 인도의 사성계급의 하나로 사제계급인데, 크샤트리아와 함께 인도의 지배계급이다. 이 바라문의 일생은 4단계의 주기로 나눠진다.
1)범행기(학습기): 바라문 남아 8세가 되면 입법식이 행해지는데, 예를 들면 조선시대 양반 자제가 15세가 되면 치르던 관례의식과 비슷한 것이다. 바라문 자제는 입법식이라는 종교의식을 통해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이를 재생족이라 한다. 이런 의식은 머리에 물을 붓는데 관정식이라 하여, 불교의 수계의식과 비교된다. 이것은 노예계급인 수드라에게서는 행해지지 않는 것으로, 상위계급의 특전이다. 입법식을 거치게 되면 이제 훌륭한 스승을 찾아 공부를 시작하게 되는데, 그것은 곧 베다 성전을 학습하는 것이다.
베다에는 4종류가 있다
<리그 베다(Ṛgveda, Rigveda)>: 자연 찬미의 서정시가를 집대성한 가장 오랜 문헌. 신들의 덕을 찬탄하는 찬가집. 시(운률)로 이루어짐. 이를 관장하는 제관이 따로 있다. 수학기간은 12년이 걸린다.
<사마 베다(Sāmaveda, Samaveda)>: 가곡을 위한 것 .가영집으로 신에 대한 찬가. 선율에 따라 부름. 찬송가나 찬불가로 이해하면 될 듯.여기에는 율동도 첨가된다.
<야주르 베다(Yajurveda)>: 제식(祭式)을 위한 것. 제식집으로 제사 순서와 제단을 차리는 방법을 기록. 조선시대 <의궤집>을 생각하면 된다. 조선시대의 노론과 소론은 서로 의복 착용법도 달랐다. 예를 들면 소론의 아녀자는 젖가슴이 드러날 정도지만, 노론은 저고리 길이가 길었다.
<아다르바 베다(Atharvaveda)>: 재앙을 털어버리고 복을 비는 것. 주술집. -부처는 진언을 외워서는 안된다고 비판한다. <천수경>은 인도의 신을 찬양하는 내용.
그런데 이 베다 학습은 모두 12년이나 걸린다. 그것은 문자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암송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불경이 문자화되는 것도 부처님 입멸 후 500년이 지나서였다. 베다는 그보다 훨씬 뒤에 문자화된다. 성스런 말을 문자화하면 성스런 성격이 훼손되기때문에 인간의 머리에 넣어 암기하는 것이다. 4가지 베다를 학습하는데 각12년, 총48년이란 기간이 걸린다. 그래서 4가지 베다를 한 사람이 아닌 여럿이 전승하는 것이다.
2) 가주기: 한가지의 베다 학습이 끝내고(12년 뒤) 집에 돌아오게 된다. 고대 마누법전에 의하면 베다학습이 끝나면 돌아와 결혼하게 된다. 8살부터 각 베다의 12년간의 학습을 해서 모든 베다학습을끝마치려면, 56세의 나이가 된다. 그러니 집으로 돌아와 장가들 시간이 없는 것으로 독신이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존경을 받게 된다. 일본 불교의 전통을 보면 출가라는 개념이 없다. 결혼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아내는 부주지의 지위를 얻는다. 승려신분과 주지 신분도 세습된다. 집집마다 불단을 차려놓고, 스님을 모셔 독경을 하는데, 이 때 독신스님이 수행이 깊다하여 인기가 높다. 현재 불교의 스님 독신은 이러한 사정에서 유래한 듯.
3) 임서기: 마누법전에 이르기를 "가서자가 피부에 주름이 보이고, 모발에 흰 것이 보이며, 자식이 자식을 보면 바라문은 물러나 숲에 들어가야 한다" 고 되어 있다. 이 때 혼자일 수도 아내를 동반하기도 한다. 이것이 임서기인데 이때는 오직 신에게 기도와 명상만을 한다.
4)유행기: 마누법전에 이르기를 "3가지 부채를 다하면 숲에서 나와야 한다." 즉 3가지 부채는 선승에 대한 베다 학습의 부채, 신에 대한 제사의 부채, 조상에 대한 가계유지의 부채이다. 조사에 대한 가게유지의 부채는 아들의 가계유지를 뜻한다. 인도에서는 부모가 죽어 8일이 지나면 부모를 위해 의식을 주관하는데, 이 주관자가 바로 아들이다. 그렇게 하면 부모는 신도나 조도에 태어나게 되는데, 만약 아들이 없어 이러한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되면, 떠돌이 귀신으로 남아 지옥에 떨어져 거꾸로 매달려 있게 된다. 우리가 말하는 염라대왕은 야마로 조도의 우두머리인데, 조도에 조차 못간다는 것이다. 인도 신화에 의하면 최초의 인간은 야마, 즉 염라대왕이다.
숲에서 나올 때 떨어진 옷 하나, 지팡이, 밥 그릇, 물거름망 하나만 지닌 채 인도대륙을 유행하면서 신을 찬양한다. 이것이 유행기이다. 유행기의 바라문을 부르는 명칭이 비구(비쿠), 사문(사라마나), 행자인 것이다.
이시기의 바라문이 문 앞에 서 있으면 그릇에 음식을 담는다. 그러니 여기서 유래한 탁발은 엄밀한 의미에서 걸식이 아니다. 바라문은 살아있는 신으로 그 집 문앞에 서잇는 것이며, 그에게 제물을 올린다는 것은 살아있는 신에게 제물을 올리는 것이어서 제물을 바치는 나 또한 복을 받는 것이다. 처음에는 바라문만이, 후기에는 크샤트리아도 유행과 탁발이 가능했는데, 그 중 하나가 고타마 싯타르타이다. 미얀마에서는 지금도 스님만이 탁발할 수 있다.
그래서 비바라문을 사라마나(사문)이라 부르는 것은 오류이다. 바라문은 현직에 종사하는 경우, 비구(비쿠), 사문(사라마나)는 유행 바라문을 뜻한다.
경전에 붓다를 부르는 명칭에는 103가지나 된다. 고타마 싯타르다가 성도한 이후에는 그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붓다가 더 이상 인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1-2. “비구들이여,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기 위한 것이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이다.”
도(道): 진리. 도는 중국적 개념이다. 불교에서는 도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 불교에서의 진리인 깨달음과 중국에서의 도는 다른 의미이다. 중국의 도는 만물 생성 또는 존재의 근본적 원리를 의미한다.
유일한 길: 부처님을 유일한 분이라고 하는 것처럼 여기서 유일한 길이란 '이 이외의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이 길은 '다르마' 또는 '열반'을 뜻한다. 그래서 유일한 길은 다르마를 실현하거나 열반을 체현하는 것이다.
청정: 원어는 우뻭카사띠빠리숫디로 사념청정. 사선정 중 최고의 경지로 마음이 평정되어 있는 상태
고통: 불교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 번역은 사실 맘에 들지 않음. 원어는 두카로 '불만족스럽다'는 의미이므로 '불만족'으로 번역해야 함.
옳은 방법: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의 8정도
열반: 원어 빨리어로는 닛빠나, 산스크리스트어로는 니르바나. 아함경 중의 '바차구타화유경'에서는 열반을 '탐진치의 소멸'로 봄. 열반은 '불어서 끄다'의 뜻. 원래의 어근은 '흔들리지 않는 것' 탐진치 삼독을 타는 불에 비유하고, 열반은 탐욕, 분노, 어리석이라는 3독의 불꽃이 꺼진 상태를 말한다. 즉 마음이 평정되어 평화로운 상태이다. 그러므로 열반의 경지라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체험으로 가능하다.
바차구타 화유경에 보면 바차가 부처님께 열반이 무엇이야고 묻는데, '열반은 지혜가 있는 사람만이 안다. 이교도는 이해할 수 없다'고 답한다. 열반은 통상적으로 번뇌의 불꽃이 꺼진 상태를 말한다. 열반을 위해 사념처가 필요한 것이다.
마음챙김(원어 sati): 불교의 수행과 불교 이외의 다른 수행의 차이는 이 사티의 여부에 달려 있다.
sati라는 용어는 불교 용어 중에서 우리말로 옮기기 어려운 용어 중의 하나이다.
명상원 <고요한 소리>에서는 마음집중, 거해 스님은 마음챙김으로 번역했는데, 이는 사실 사티보다는 사마디Samadhy의 뜻에 가깝다.
빨리어 성전협회는 마음새김, 미안마에서는 알아차림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삼매, 즉 사마디 중에도 사띠가 있어야 한다. 소위 명상은 무념무상, 몰아를 의미하는 것으로 나의 존재를 잊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수행에서는 나의 존재를 잊으면 안된다. 사마디 상태에서도 사티가 있어야 한다.
위의 번역 용례들 중에서 마음새김은 가장 잘못된 번역어이다. 새긴다는 것은 銘으로 원어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사티(sati)의 원뜻은 기억, 생각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쓰는 용법이 다르다. 사티가 불교에서는 기억, 생각의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기억이란 과거형인데, 그러므로 이는 인식의 의미에 가까운 산냐이다. (상(相,빠알리어로는 산냐sanna,산스끄리뜨어로는 산즈냐samjna). 그 동안 한국 불교는 사티의 의미를 몰랐다. 불경을 번역한 사람들도 수행을 통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티를 기억, 생각으로 번역한 것이다.
사티(sati)는 '깨어 있음'이 가장 가까운 번역. 일요강론에서 마음깨움이라고 말한 것이 이 용어이다. 사티는 '언제나 어느 상태에서나 마음이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사티를 '알아차림'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알아차림은 '정지'라는 용어가 따로 있다. 일본학자 이우에 위마라는 (井上 ウィマラ, 2005) 『입출식념경(Ānāpānasati sutta)』을 『호흡에 의한 알아차림의 가르침-빨리 원전 「아나빠나사띠 숫따」』(『呼吸による気づきの教え―パーリ原典 「アーナーパーナサティ・スッタ」』)를 번역하면서,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번역하고 있다.148년 중앙아시아의 안식국(安息國)의 사람 안세고(安世高)에 의해 번역된 경전 안반수의경( 安般守意經 Anapana sati)에서는 사티를 "수의(守意)" 로 번역한다. 이 안반수의경이 중국불교와 중국의 불교 수행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사티는 '마음이 깨어 있는 상태" 즉 '마음을 한 곳에 두는 것'을 뜻한다.
1-3. “무엇이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受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心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몸을 떠나 몸 밖을 볼 수 없다. 몸 밖에 마음, 마음 밖에 몸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몸과 마음은 그것이 하나인가 둘인가 논쟁하지 않는다. 몸을 떠나 마음이 존재할 수 없고, 마음을 떠나 몸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챙기는: '사티'라는 용어로 고쳐야 함
세상에 대한 욕심: 인간에게는 5가지 욕망이 있다. 즉 재색신명수 財色身命壽 ,
財는 물질, 色은 성욕, 身은 먹는 것, 命은 명예, 壽는 오래 살고자 하는 것 또는 자고 싶은 것
인간의 존재 목적 또는 이유는 2세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출가: 세상을 떠난다는 생각은 비불교적이다. 불교는 현실로 돌아온다. 출가는 고대 바라문의 유행기에서 현실을 떠나는 것에서 유래한다. 부처님의 전도선언에 따르면,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고 되어있다. 비구에게는 이런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비구는 세상을 떠날 수 가 없는 것이다. 지금의 불교는 불교와 많이 떨어져 있다.
싫어하는 마음: 세상을 떠나고 싶은 마음
여기서는 신수심법을 말하고 있다.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도 사마타 수행이지, 사티수행이 아니다.
II. 몸의 관찰[身隨觀]
II-1.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
2-1.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외진 처소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몸을 곧추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마음챙겨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겨 숨을 내쉰다. 길게 들이쉬면서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pajānāti), 길게 내쉬면서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짧게 들이쉬면서 ‘짧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 ‘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온 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sikkhati) 온 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신행(身行)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신행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전면(前面)에: 현장스님은 '대면(對面)'으로 번역. 전면이라고 번역하면 얼굴 앞을 의미하는데, 들숨 날숨을 마음에 두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전면은 '마주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무엇을 마주하는? 전면은 '앞에 신수신법을 둔다'는 뜻이다. 즉 사념처의 대상을 앞에 둔다. 즉 사티를 두고 숨을 들이쉬고, 사티를 두고 숨을 내쉰다.
수행할 때 반드시 눈을 감고 수행하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모든 감각 기관을 닫고 하난의 감각기관만을 연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고양이가 쥐구멍을 지키는 것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코 점막에 산소가 스치는 것을 사티를 두고 드는 것이다.
들 숨/ 날숨이 바뀔 때 숨이 끊어질까요? 이어 질까요? 끊어지는 것이 정상
몸을 보는 것: 몸을 보는 것은 마음을 보기 위한 것이다. 몸을 보는 것은 크게 움직여 보기사 쉽다. 그러나 마음의 움직임은 고도의 사티가 없으면 못본다.
많은 사티수행에서는 실제 들숨날숨이 미세하여 무호흡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사실은 호흡 중이다. 무호흡 상태에서 3분이면 뇌사에 이른다. 앉아서 들숨, 날숨을 관찰하는 기초이다. 불교수행은 동적인 것으로 움직이면서 수행하는 것이다. 앉아서 수행하는 것은 기초이자, 기본이다. 이 상태에서는 사티를 두기도 쉬운 것이다. 흔한 표현대로 좌선해서 안 좋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건 기본이라는 것이다. 불교수행은 일상생활에서 사티가 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소위 화두를 참구하는 명상은 집중명상으로 사마타이다.
꿰뚫어 안다: 통찰한다. 통찰자로 안다.
좌선하고 있다고 해서 들 숨/날숨만 보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그것을 본다. 그러다가 들숨 날숨의 변화를 본다. 이 변화를 본다는 것은 무상과 무아를 본다는 것이다. 들숨과 날숨은 실제 수행해보면 엄청난 변화가 있다. 그래서 수식관은 쉽고 간화서는 어려운 것이다. 들숨/날숨을 느끼다가, 즉 몸의 느낌에 대한 변화를 보다가 몸에서 더 강한 작용인 무상과 무아를 보는 것이다. 여기서 호흡을 의도적으로 control해서는 안된다. 그건 힌두교 요가의 방식이다. 들숨/날숨을 의도적으로 만들면 안된다. 불교에서의 수행은 즐숨/날숨을 자연스럽게 해야 한다. 길면길다고 알고 짧으면 짧다고 알 뿐, 느끼면 안된다. 소위 명상캠프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유치한 수준이다.
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숨/날숨을 관찰하면 가렵고 열나고 하는 등 몸에 여러 현상이 일어난다. 강하면 강한 그걸 보면 된다. 보게되면 사라진다. 저리면 저린 대상을 보고, 그 마음을 본다.
신행(身行): 몽에서 일어나는 느낌
2-2.“비구들이여, 마치 숙련된 도공이나 도공의 도제가 길게 돌리면서 '길게 돌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돌리면서 '짧게 돌린다'고 꿰뚫어 아는 것처럼, 그와 같이 비구는 길게 들이쉬면서는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 '신행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혹은 밖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팍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그는 '몸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사견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도공의 도제가 길게 돌리면서 '길게 돌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돌리면서 '짧게 돌린다'고 꿰뚫어 아는 것처럼:
도공이 물레를 돌려 도자기를 짓는 것, 야구에서 던지고 치는 것이 카메라 랜즈의 역할인데, 이것이 사티다. 즉 피사체를 비춰줄 뿐 의도가 없다. 카메라 랜즈는 피사체를 비춰보일 뿐, 주관적이지 않다. 즉 그것이 좋고 나쁘다는 관년이 없다. 다만 사티를 두고 알면 된다.
안으로: 나 자신. (안이비설신의 眼耳卑舌身意 ) =내입
밖으로: 대상(색성향미촉법 色聲香味觸法)=외입 또는 육입 色은 사물, 聲은 소리, 香은 향기, 味는 맛, 觸은 피부가 느끼는 감촉, 法은 마음(意)의 대상.
그러나 불교에서은 이 안과 밖을 이원론으로 나누지 않는다. 안은 나, 밖은 대상. 그러나 이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내 자시이 대상이요, 대상이 곧 나이다. 내가 대상과 함께 한다. 나와 대상은 분리할 수 없다. 왜? 몸과 마음이 함께 하듯이 대상없는 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
현전: 몸을 볼 때 몸만 있는 것(=즉 사티만 있는 것)
움켜쥐지 않는다: 대상에 속박되지 않는다. 스스로도 속박되지 않는다.
남에게 속으면 벗어날 길 있지만, 스스로에게 속으면 벗어날 길이 없다.
수행을 하다보면 스스로에게 걸려 넘어진다, 즉 이 말은 자칭 깨달은 자가 많다는 것이다. 자신이 깨달았는지를 인가받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모순이다. 나 이외에 누구도 인가할 수 없다.
몸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현상을 그대로 본다. 흔히 수행에서 보는 것은 전부 관념이다. 개념이 없으면 보지 못한다. 마치 영화 메트릭스에서 처럼 가상공간에 실제 사람이 산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사릴 그건 프로그램되어진 가상공간일 뿐이다.
나의 스승 미안마의 밍군사에도는 깨달았다거나 알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열반, 해탈, 평정심이라는 용어가 뒤섞여 쓰여지는데,
해탈에는 심해탈과 혜해탁이 있다. 사티는 마음이 아니라 지혜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혜해탈이다. 즉 마음이 변화되어 하는 해탈인 것이다. 빠사나가 이것이다. 경전에 이르기를 부처님은 한 순강에 해탈을 한다. 이것이 심해탈인 것이다.
보통 수행은 집중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사마타이다. 중요한 것은 집중, 즉 삼매상태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ㅇ는 그걸 버리고 보리수좌에 앉앗다. 마음을 본다는 것은 다르마를 복 위해 수행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은 삿된 견해이다.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말도 잘못된 것이다. 마음을 보는 것은 다르마를 보기 위한 것이다. 불성이라는 용어가 열반경에 등장하는데, 불성는 아트만이다. 불교는 아트만을 부정한다. 그것이 안아트만이다. 불교는 교리가 없다. 이 말은 불교가 신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붓다의 체험이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 그 체험에 대한 말씀이 존재하는 것이다
嵆瀳의 대념처경 大念處經 新講義
불기 2554년 3월10일
II-2. 네 가지 자세[四威儀]
3.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걸어가면서 ‘걷고 있다’고 꿰뚫어 알고, 서있으면서 ‘서있다’고 꿰뚫어 알며, 앉아있으면서 ‘앉아있다’고 꿰뚫어 알고, 누워있으면서 ‘누워있다’고 꿰뚫어 안다. 또 그의 몸이 다른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든 그 자세대로 꿰뚫어 안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II-3. 분명하게 알아차림
4.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나아갈 때도 물러날 때도 [자신의 거동을] 분명히 알면서[正知] 행한다(sampajāna-kāri). 앞을 볼 때도 돌아 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구부릴 때도 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가사·발우·의복을 지닐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걸으면서·서면서·앉으면서·잠들면서·잠을 깨면서·말하면서·침묵하면서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II-4. 몸의 32가지 부위에 대한 혐오
5-1.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 몸이 여러 가지 부정(不淨)한 것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바닥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그리고 머리털에서부터 내려가며 반조한다. 즉 ‘이 몸에는 머리털·몸털·손발톱·이빨·살갗·살·힘줄·뼈·골수·콩팥·염통·간·근막·지라·허파·큰창자·작은창자·위·똥·쓸개즙·가래·고름·피·땀·굳기름·눈물·[피부의] 기름기·침·콧물·관절활액·오줌 등이 있다’고.
대념처경 주석 2-4. 몸의 32부위
5-2. 비구들이여, 이는 마치 양쪽에 아가리가 있는 자루에 여러 가지 곡식, 즉 밭벼·논벼·콩·완두·기장·현미 등이 가득 담겨 있는데 어떤 눈 밝은 사람 이 그 자루를 풀고 일일이 헤쳐 보면서 ‘이것은 밭벼, 이것은 논벼, 이것은 콩, 이것은 완두, 이것은 기장, 이것은 현미’라 하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여러 가지 부정한 것으로 가득 차 있는 이 몸을 발바닥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그리고 머리털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반조한다. 즉 ‘이 몸에는 머리털·몸털·손발톱·이·살갗·살·힘줄·뼈·골수·콩팥·염통·간·근막·지라·허파·큰창자·작은창자·위·똥·쓸개즙·가래·고름·피·땀·굳기름·눈물·[피부의] 기름기·침·콧물·관절활액·오줌 등이 있다’고.”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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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2. 네 가지 자세[四威儀]
3.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걸어가면서 ‘걷고 있다’고 꿰뚫어 알고, 서있으면서 ‘서있다’고 꿰뚫어 알며, 앉아있으면서 ‘앉아있다’고 꿰뚫어 알고, 누워있으면서 ‘누워있다’고 꿰뚫어 안다. 또 그의 몸이 다른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든 그 자세대로 꿰뚫어 안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실제의 수행에서는 더 면밀하고 세밀하므로, 여기서는 다만 포괄적인것만 함. 강의 후 실제 수행단계에서 자세히 할 것임
걸어가면서 ‘걷고 있다’고 꿰뚫어: 걸을 때 사티를 밀착시키는 것. 그러면 걷고 있다는 걸 꿰뚫어 안다
마음챙김: 여기서 '챙김"은 화두를 챙긴다는 것인데, 그래서 마음챙김으로 오역한다. 그러나 사티와 마음챙김과는 거리가 있다. 신수심법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수행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여스님 이전에는 한 사람이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때 거여스님 역시 사티를 '마음집중'으로 번역했는데, 옳은 번역이라고는 할 수 없다. 체험이 있다고 책을 옿게 번역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얀마의 테자냐 샤아도는 대중설법을 하지 않습니다. 대중설법은 이론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 그것과 실제 수행과는 다르다. 실제수행은 1: 1문답(수행자가 실제 느끼는 것을 듣고 대답하거나 또는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이루어짐. 이에 비해 대중설법은 이해와 안목을 논하는 자리므로 교학적인 수준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 임제록은 탄탄해서 교학의 깊이가 있다. 대중설법시에는 논리가 치밀해야 하는데, 중국선사들은 교학)=이론)에 정통하다.
탁닛한은 걷기명상을 말하는데, 이 명상은 걸을 때 발가락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전체의 움직임에서 사티를 밀착시켜 보는 것. 불교에서는 '명상'이라는 말 금지.불교에서는 명상하면 안된다. '삼매'설명 때 자세히.
서있으면서 ‘서있다’고 꿰뚫어 알며: 정확히 수행의 단계에서는 몸의 동작보다는 마음의 의도를 먼저 본다.서려고 하는 그 의도를 먼저 보면서 사티를 두고 몸이 서 있는 것을 안다. 오래 서 있으면, 그것이 아닌 들숨/날숨을 안다.
걸어가면서 ‘걷고 있다’고 꿰뚫어 알고, 서있으면서 ‘서있다’고 꿰뚫어 알며, 앉아있으면서 ‘앉아있다’고 꿰뚫어 알고, 누워있으면서 ‘누워있다’고 꿰뚫어 안: 행주좌와(行住坐臥,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다(이 네 가지 동작(動作)을 불교(佛敎)에서는 사위의(四威儀)즉 여기서는 동작 하나 하난 안다는 것
아난존자는 부처님의 입멸시에도 아라한을 얻지 못하여 결집시 가섭이 배제하였다. 불법승 3보의 하나인 승의 상가는 본래의 의미는 아라한에 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교단이 형성될 때 비구계를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닌다.그래서 아난 존자는 밤새 걸었는데, 즉 경행의 수행을 했다. 그리고는 피곤해서 잠시 쉬려고 몸을 눕히면서 사티를 몸에 밀착시켜 앉는 순간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한다. 이처럼 짧은 순간 누워 있는 것 관찰하게 된다. 물론 이것도 오래 누워 있을 때는 들숨날숨을 관찰
또 그의 몸이 다른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든 그 자세대로 꿰뚫어 안다: 밭갈 때, 설덪이 할때도 안다. 즉 일상생활에서도 사티를 밀착시켜 안다는 것.
II-3. 분명하게 알아차림
4.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나아갈 때도 물러날 때도 [자신의 거동을] 분명히 알면서[正知] 행한다(sampajāna-kāri). 앞을 볼 때도 돌아 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구부릴 때도 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가사·발우·의복을 지닐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걸으면서·서면서·앉으면서·잠들면서·잠을 깨면서·말하면서·침묵하면서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나아갈 때도 물러날 때도 ~ 알면서 행한다: 정념(사티)-8정도에서는 삼마사티. 반드시 정념이 있어야 한다. 8정도의 각각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모장크처럼 붙어 있다. 사마타 자체는 사티가 없다. 삼마사마타는 사티가 있어야 한다.
사티수행은 그 어떠한 것을 하더라도 사티를 밀착시켜야 한다. 우리가 물을 마시면 일반적으로 꿀꺽 꿀꺽 마신다. 수행자가 물을 먹을 때는 구강의 움직임, 맛, 넘어가는 느낌을 본다. 대장의 느낌도 마찬가지. 변비 있는 사람이 대변을 볼 때, 사티를 두고 느낌을 보면 1달이면 변비를 고칠 수 있다. 먹고 싸는 것 자체가 사티 수행자에게는 수행일 뿐이다. 그러면 볼 수 있다. 말하면서도 알 수 있다. 즉 말의 의도, 입술 등의 움직임알 알고, 느낄 수 있다. 사물을 볼때는 안구의 움직임을 느낄(알) 수 있다.
미얀마의 어느 훌륭한 스승은 " 네 생각은 말하지 말라'하였다.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 제행(諸行)이 선(禪)이다 란 말에서도 -걷고 머물고 앉고 눕는 사람의 기본적인 동작에서부터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고요한 어느 상태에서도 선은 할 수 있다- 알 수 있듯이 오로지 여여(如如)하게 흐르는 내면의 의식세계를 한 순간이라도 놓치지 말것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몸과 마음을 올바르게 세울것을 강조한다. 성철스님의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오매일여(寤寐一如)도 바로 이런맥락으로 이해 하면 된다
行住坐臥 語默動靜- : 무엇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寤寐一如: 깨어 있을 때나 잠들어 있을 때도 같아야 하고 動靜一如 :움직일 때나 정좌(쉴)때도 같아야 하며, 夢中一如: 잠들어 있을 때도 內外明徹: 안팎으로 다 사티가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철 스님의 얘기지만, 원래 중국선시에 나오는 것.그러나 적어도 근대 대한민국에서는 성철 스님의 안목을 따라가는 사람이 없다.
경행에서 사티가 면밀하지 못하면, 무릎 아래보기도 힘들다.
순일한 사람은 발가락에서 머리끝까지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과 마음의 작용을 함께 본다.
임제종 중흥조로서 오조 법연선사(五祖法演禪師), 원오 극근선사( 悟克勤禪師), 대혜 종고선사(大慧宗 禪師), 이렇게 세 분이 삼대에서 임제종을 크게 진흥시켜 임제종을 천하에 널리 퍼지게 하였습니다. 이 중에서 대혜스님이 공부한 것은 좋은 참고가 됩니다. 대혜스님이 공부하다가 스무 살 남짓 됐을 때 깨쳤습니다. '한소식'해 놓고 보니 석가보다 낫고, 달마보다도 나아 천하에 자기가 제일인 것 같았습니다. '어디 한 번 나서 보자, 어디 누가 있는가'하고 큰스님들을 찾아가 보니 모두 별 것 아닙니다. 자기가 보기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자기가 제일이라고 쫓아다니는 판입니다. 당시 임제종 황룡파(黃龍派)에 담당 문준(湛堂文準)선사가 계셨습니다. 대혜스님이 그 분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병의 물을 쏟듯, 폭포수가 쏟아지듯 아는 체 하는 말을 막 쏟아부었습니다. 담당스님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자네 좋은 것 얻었네. 그런데 그 좋은 보물 잠들어서도 있던가?'하고 물어왔습니다. 자신만만하여 횡행천하(橫行天下)하여 석가보다도,
달마보다도 낫다 하던 그 공부가 잠들어서는 없는 것입니다. '스님, 다른 것은 전부 다 자신있습니다. 그런데 잠들어서는 그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잠들어서는 아무 것도 없으면서 석가, 달마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것은 병이야 병, 고쳐야 돼.'이렇게 자기 병통을 꽉 찌르니 항복 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죽자고 공부하다가 나중에 문준선사가 병이 들어 죽은 후에는 그 유언을 따라 원오 극근선사를 찾아갔습니다.
찾아가서 무슨 말을 걸어 보려고 하니 무슨 절벽같고 자기 공부는 거미줄 정도도 안되는 것입니다. 만약 원오 극근선사가 자기의 공부를 조금이라도 인정하는 기색이면 그를 땅속에 파묻어 버리리라,는 굳은 결심으로 찾아갔는데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하, 내가 천하가 넓고, 큰 사람있는 줄 몰랐구나.' 크게 참회하고 '스님, 제가 공연히 병을 가지고 공부인 줄 잘못 알고 우쭐했는데, 담당 문준선사의 법문을 듣고 공부를 하는데 아무리 해도 잠들면 공부가 안되니 어찌 해야 됩니까?' '이놈아, 쓸데없는 망상 하지 말고 공부 부지런히 해. 그 많은 망상 전체가 다 사라지고 난 뒤에, 그때 비로소 공부에 가까이 갈지 몰라.' 이렇게 꾸중듣고 다시 열심히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원오스님 법문 도중에 확철히 깨달았습니다. 기록을 보면 '신오(神悟)'라 하였습니다. 신비롭게 깨쳤다는 말입니다. 그때 보니 오매일여입니다. 비로소 꿈에도 경계가 일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원오스님에게 갔습니다. 원오스님은 말조차 들어보지 않고 쫓아냅니다. 말을 하려고 하면 '아니야 아니야(不是 不是)'말을 하기도 전에 부시 부시(不是 不是)라고만 계속합니다. 그러다가 화두를 묻습니다.'유구와 무구가 등칡이 나무를 의지함과 같다.(有句無句 女藤倚樹)'는 화두를 묻는 것입니다. 자기가 생각할 때는 환하게 알 것 같아 대답을 했습니다. '이놈아,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그것 아니야. 공부 더 부지런히 해!'
대혜스님이 그 말을 믿고 불차신명(不借身命), 생명을 다 바쳐 더욱 부지런히 공부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참으로 확철히 깨쳤습니다. 이렇듯 대혜스님은 원오스님에게 와서야 잠들어도 공부가 되는 데까지 성취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확철히 깨쳤습니다.
II-3. 분명하게 알아차림
4.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나아갈 때도 물러날 때도 [자신의 거동을] 분명히 알면서[正知] 행한다(sampajāna-kāri). 앞을 볼 때도 돌아 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구부릴 때도 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가사·발우·의복을 지닐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걸으면서·서면서·앉으면서·잠들면서·잠을 깨면서·말하면서·침묵하면서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소승교인 아함부의 경전에 여러 선법이 나와 있지만 사념처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사념처의 예비수행으로 오정심관(五停心觀)은 수식관, 부정관, 자비관, 인연관, 관불관[혹은 계방편(界方便)]이다.
오정심관은 사심(邪心)을 멈추게 하는 다섯 가지 관법을 의미합니다.
오정심관(五停心觀)
1)부정관(不淨觀) : 외계의 부정한 양상을 관(觀)하여 탐욕의 마음을 고칩니다.
2)자비관(慈悲觀) : 일체중생을 관하여 분노를 가라앉히고 자비의 마음을 생기게 해 줍니다.
3)인연관(因緣觀) : 모든 사상(事象)이 인연에 의해 생겨난다는 도리를 관하여 어리석은 마음을 고칩니다.
4)계분별관(界分別觀) :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십팔계(十八界)등을 관하여 사물에는 실체가 있다는 견해를 밝힙니다.
5)수식관(數息觀) : 호흡의 수를 세어 흐트러진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여기서 수식관은 대념처경에서 수식관은 상수의 단계와 지혜의 단계를 뛰어넘어 관을 말함.
II-4. 몸의 32가지 부위에 대한 혐오
5-1.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 몸이 여러 가지 부정(不淨)한 것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바닥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그리고 머리털에서부터 내려가며 반조한다. 즉 ‘이 몸에는 머리털·몸털·손발톱·이빨·살갗·살·힘줄·뼈·골수·콩팥·염통·간·근막·지라·허파·큰창자·작은창자·위·똥·쓸개즙·가래·고름·피·땀·굳기름·눈물·[피부의] 기름기·침·콧물·관절활액·오줌 등이 있다’고.( 대념처경 주석 2-4. 몸의 32부위)
5-2. 비구들이여, 이는 마치 양쪽에 아가리가 있는 자루에 여러 가지 곡식, 즉 밭벼·논벼·콩·완두·기장·현미 등이 가득 담겨 있는데 어떤 눈 밝은 사람 이 그 자루를 풀고 일일이 헤쳐 보면서 ‘이것은 밭벼, 이것은 논벼, 이것은 콩, 이것은 완두, 이것은 기장, 이것은 현미’라 하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여러 가지 부정한 것으로 가득 차 있는 이 몸을 발바닥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그리고 머리털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반조한다. 즉 ‘이 몸에는 머리털·몸털·손발톱·이·살갗·살·힘줄·뼈·골수·콩팥·염통·간·근막·지라·허파·큰창자·작은창자·위·똥·쓸개즙·가래·고름·피·땀·굳기름·눈물·[피부의] 기름기·침·콧물·관절활액·오줌 등이 있다’고.”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5-1,5-2에서는 부정관으로 몸을 해부학적으로 관찰해서 보는 것
부정(不靜): 정과 부정의 의미가 아니다
욕망, 번뇌, 집착, 탐욕-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
II-5.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
6.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 몸을 처해진 대로 놓여진 대로 요소[界]별로 고찰한다. ‘이 몸에는 땅[地]의 요소, 물[水]의 요소, 불[火]의 요소, 바람[風]의 요소가 있다’고.
비구들이여, 마치 솜씨 좋은 백정이나 그 조수가 소를 잡아서 각을 뜬 다음 큰길 네 거리에 이를 벌려놓고 앉아있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이 몸을 처해진 대로 놓여진 대로 요소[界]별로 고찰한다. ‘이 몸에는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가 있다’고.”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6은 인도의 세계관이자 물질관
인도: 지수화풍(地水火風)+ 공(空)까지 다섯 요소. 이 5가지가 세계의 물질을 이루고 있다. 불교에서는 空을 제외
우리 몸을 구성하는 물질의 4요소
1)땅: 단단하고 강하고 견고한 것
2)물: 부드럽고, 우리몸을 결합시켜 주는 것
3)불: 열의 에너지(체온)
4)바람: 우리를 성장 변화시키고 움직이는 것
마치 백정이 소를 잡아 부위를 뜨고 해체하여 펼쳐 놓은 것처럼 우리 몸을 해부학적으로 펼쳐놓고 몸의 4가지 성질을 본다.
II-6. 아홉 가지 공동묘지의 관찰
7. “다시 비구들이여, ① 비구는 마치 묘지에 버려진, 죽은 지 하루나 이틀 또는 사흘 된 시체가 부풀고 검푸르게 되고 문드러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그에 비추어 바라본다(upasamharati). ‘이 몸 또한 그와 같고,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백골관: 부정관에 속함
8. “다시 비구들이여, ② 비구는 마치 묘지에 버려진 시체를 까마귀가 마구 쪼아 먹고, 솔개가 마구 쪼아 먹고, 독수리가 마구 쪼아 먹고, 개가 마구 뜯어먹고, 자칼이 마구 뜯어먹고, 수없이 많은 갖가지 벌레들이 덤벼들어 파먹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그에 비추어 바라본다. ‘이 몸 또한 그와 같고,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반야심경에서 조견오온照見 五蘊 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조견이 바로 이에 해당
9. 다시 비구들이여, ③ 비구는 마치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해골이 되어 살과 피가 묻은 채 힘줄로 얽히어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④ 해골이 되어 살은 없이 피만 엉긴 채 힘줄로 얽히어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⑤ 해골이 되어 살과 피는 없고 힘줄만 남아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⑥ 해골이 되어 힘줄도 사라지고 뼈들이 흩어져서 여기에는 손뼈, 저기에는 발뼈, 또 저기에는 정강이뼈, 저기에는 넓적다리뼈, 저기에는 엉덩이뼈, 저기에는 등뼈, 저기에는 갈빗대, 저기에는 가슴뼈, 저기에는 팔뼈, 저기에는 어깨뼈, 저기에는 목뼈, 저기에는 턱뼈, 저기에는 치골, 저기에는 두개골 등이 사방에 널려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그에 비추어 바라본다. ‘이 몸도 또한 그와 같고,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10-1. “다시 비구들이여, ⑦ 비구는 마치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해골이 되어 뼈가 조개껍질 색깔같이 하얗게 백골이 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⑧ 해골이 되어 풍상을 겪어 단지 뼈 무더기가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⑨ 해골이 되었다가 다시 삮아서 티끌로 변한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그에 비추어 바라본다. ‘이 몸도 또한 그와 같고,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①~⑨: 구상 또는 구상관(九想觀)또는 9가지의 변화하는 모습)백골관은 시다림에서 실제 시체를 놓고 수행
인도의 장례법중 화장은 원래 상위 카스트들이나 할 수 있었다. 화장을 한 이유는 불은 성스러워 모든 걸 정화하는데, 시신은 부정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 인도는 정과 부정의 관념이 확실하여, 제물도 불에 태워 연기를 핑워 정화해서 올린다.
그런데 불에 대한 신앙은 인도의 힌두교나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일명 배화교拜火敎)의 근원이 같다. 불을 중심으로 여기는 조로아스터교에서 최고의 주재인 선신 아후라마즈다가 변해 인도에서는 악신인 아즈라가 되었다.
불에 태우면 영혼이 연기를 타고 올라간다고 여겼다.
인도의 대다수의 경우는 시신을 숲에다 버려 풍장 내지 조장을 했으므로, 시다림에 갖다 놓은 시신의 변화를 보는 것이 구상이다. 법구경 게송 147에 기생 시리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이 백골관이다. 아마 그녀의 미모가 중국의 서시를 버금가는 모양이었다. 한편 서시의 얼굴찡그리는 모습이 너무나도 고혹적이어서, 서시는 얼마나 얼굴 찡그리는 것도 예쁘다고 했더니 추녀가 분수도 모르고 서시의 흉내를 내어 效顰 효빈 또는 동시효빈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10-2.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혹은 밖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그는 ‘몸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사견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내외명철(內外明徹)
부정관을 시키는 목적: 무상과 무아를 보기 위해빠사나 가르침은 무상과 무아를 보기 위해서이다. 빠사나는 '보다'는 뜻, 위는 '무상과 무아"라는 뜻. 우빠사나는 무상과 무아를 본다는 뜻.
참나(眞我)를 찾는다, 불성을 찾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불교가 아니다. 여기서 참나라는 것은 아트만이다. 불교는 무상과 무아를 찾는 것이다.
불교에서 4전도라는 것이 있다. 여기에서 전도란 거꾸로 서있는 상태를 뜻한다. 그릇이 뒤집어져 있으면, 담지 못하므로 그릇의 가치, 그릇의 효용이 없다. 무엇을 담는 용기는 담을 때 가치가 있다. 전도란 용기가 뒤집어져 있어 쓸모 없다.
1)상전도(常顚倒): 영원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2)낙전도(樂顚倒): 즐겁다고 생각
3)아전도(我顚倒): 영원한 내가 있다고 생각
4)정전도(淨顚倒): 깨끗하지 않은데 깨끗하다고 생각
불교에서는 무상, 무아, 고를 말한다.
무상(無常)의 원어는 아니짜로 영원하지 않다는 뜻이다. 즉 변화한다는 의미이다. 보통 흐른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인도에서는 아트만을 강조하여, 불생, 불멸, 불변, 영원을 말한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아트만은 심장에 겨자씨만한 것으로 존재하는데, 지옥이이나 용광로에서도 안트만은 불멸의 존재이다. 그런데 그 아트만이 심장 어디에 도대체 있단 말인가?
무아(無我)는 '나라는 존재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불교는 신의 유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무아의 원어는 아나타인데, 어원은 '안아트만', 즉 아트만이 아니다라는 뜻. 다시 말하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아트만'이라는 뜻. 그런데 처음 중국에서 이것을 번역할 때 無我, 非我라고 번역해 오해의 소지가 생겼다.
무아는 불변, 불멸의 아트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나이다. 끊임없이 내가 변화하므로 존재하는 것이다.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팔십년전거시아 팔십년후아시거), 줄여서 渠是我 我是渠 (거시아 아시거) 라는 서산대사의 유명한 말은 원래 동상 양개스님의 말이다. 80년전의 내가 그대였고,80년후의 그대가 또한 나이다. 그렇다면 80년전의 나와 80년 후의 나가 같은가? 어렸을 때 나는 지금의 나와는 다르다. 지금의 나는 변화 유전하면서 지금의 나라는 존재이다. 변화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色(몸)은 영원한가? 아닌가? 답: 영원하지 않다-이것은 몸
영원하지 않은 가운데 영원한 것이 존재 -무아
영원하길 원하는 인간, 즉 인간은 영원하다고 생각하는데 영원한 것이 없다 고 느낄 때 - 두카(불만족)
무상과 무아를 느끼므로 두카, 즉 불만족스럽다.
불교의 수행은 무상과 무아를 보는 것. 그것은 바로 탐진치의 삼독을 벗어나는 것= 우베카 사띠 빠리사디 (upekkhā-sati-pārisuddhi) =마음이 평정한 상태에서 사티가 청정. 사티가 청정하다는 것은 사티만이 신수심법 대상과 존재. 이것이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선정이자 삼매
본래 인도에서 말하는 흔히 명상은 소마를 들이키고 하는 명상법을 말한다. 소마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규명된 바는 없지만, 유력한 설은 광대버섯의 추출물로 환각과 각성의 횩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짐. 인도에서 고행자란 리그베다에 의하면 단식과 들숨날숨을 control을 포함해 선정을 닦는 사람이라는 의미. 야키라는 인디언 무당들로 제사 때 이런 것을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며칠이고 행사를 치러야 했다. 그래서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말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낸다. 지금 바이올리니스트와 된장장사를 하는 돈연스님이 84년 힌두교 사두를 만나 명상법을 물었더니, 한대 하시라고 권했다고도한다. 중의에서도 침을 꽂기 전에 미량의 마약을 쓴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아편과 침을 통해 100%의 마취를 이룬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 그 가운데 영원불멸한 나는 없다는 것을 보는 것이 수행
II-4. 몸의 32가지 부위에 대한 혐오 에서'혐오'라는 번역은 용어가 잘못
부정관은 부처님 초기의 가르침. 세상에 참으로 살맛이 나지 않아야 자살하듯이 폐기
수식관은 수식관-숨쉬는 단계-상수-지-관-환정(관에 포함)의 단계를 거침
수행을 하는데 반드시 이것이 없으면 잘못 간다. 즉 '참나'를 찾는다는 주장이 생겨난다. 한국불교는 불교가 아니다. 불교는 무상과 무아를 아는 것=탐진치 삼독을 끊는 것 = 다르마를 보는 것이다. 직지인심 견성성불같은 말은 심리학의 얘기일 뿐이다
“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牆壁 可以入道”(외식제연 내심무천 심여장벽 가이입도)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 같아야 도에 들어갈 수 있다는 달마대사의 말 그 어디에도, 마음을 보라고 한적이 없다. 그리고 마음을 보는 것이 성불이라고 한 적도 없다. 즉심시불이라고 한 적도 없다.
기본적으로 내가 안목이 있어야 한다. 마주한 사람이 짖으니 다 짖는 것은 탁오 이지가 말한 견태론이다. 수행의 목적은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수행은 다르마를 보는 것이지 그 자체를 보는 것이 나니다. 동정일여에서처럼 정좌 즉 쉴때도 같다는 것은 보고 느끼고 안다는 것이다. 즉 사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외명철에서 명철은 분명한 것을 말하는데, 본인이 보고 느끼고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미국에서 있었던 숭산스님과 티벳고승과의 첫 대면에 있었던 일화.
저도 예전에 한 미국인으로 부터 들은 이야기라서 그 티벳고승의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를 않는군요. 달라이라마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아무튼 한국과 티벳의 내노라는 두 고승 둘이 처음으로 대면하는 자리에서 숭산스님은 인사대신 다짜고짜 탁자위의 오랜지를 집어서는 불쑥 티벳고승 앞에 디밀고 물었다. "이게 뭡니까?" 티벳고승이 아무 대답이 없자, 숭산스님은 재차 다그치듯이 물었다고 합니다."이게 뭡니까?"..."이게 뭡니까?" 티벳고승은 계속 침묵을 하다가 숭산스님에게 대답을 하는 대신 바로 옆에 자신을 시봉하던 다른 티벳승려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고 합니다."이보게, 한국에는 오렌지가 없는가?" 이 일화를 마치 한국의 불교가 티벳의 불교보다 차원이 높은 것처럼 선전하지만, 한국의 불교와 티벳의 불교는 차원이 다르다.
또 다른 일화. 언젠가 동남아 스님을 만나서는 대뜸 물병을 가리키며, 그 물병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느냐고 물었다. 즉 그 물병을 觸할 것인지 背할 것인지를 물은 것이다. 물병이라고 답하면(촉한다면) 하면 집착한다고 , 물병이 아니라고 하면(배한다면) 부정한다고 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사실 자신의 경지도 아닌 무문관 43칙에 나오는 수산죽비를 원용해 그 스님을 떠보는 것이다. 이것을 죽비라 부르면 걸리고, 죽비라 부르지 않으면 등진다. 그런데 그 스님이 답하지 않자 그를 향해 좌복(방석)을 던져버렸다는 것이다. 홍주(洪州) 백장(百丈) 회해(懷海) 선사의 법사(法嗣)와 담주(潭州) 위산 영우(靈祐) 선사의 물병에 관한 이야기를 동남아스님께 한 것이다. 남방에서는 달라이 라마, 탁닛한, 마하고사난다와 더불어 세계 4대 성불로 일컬어지는 숭산의 이런 행동은 특히 좌복(방석)을 던져 상대를 때리는 일은 비구라면 포살을 열어 징계를 할일이다. 동남아나 티벳의 불교는 중구이나 한국의 전통과 다르다. 동남아에서는 오히려 한국의 스님을 인정하지 않을 정도이다. 그런데 자신의 입장이 수승한 것처럼 자랑하는 이 일화를 보노라면, 한국불교의 장래가 암울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嵆瀳의 대념처경 大念處經 新講
불기 2554년 3월 17일
III. 느낌의 관찰[受隨觀]
11-1.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受隨觀]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고 꿰뚫어 안다.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서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고 꿰뚫어 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고 꿰뚫어 안다.
세간적인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세간적인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고 꿰뚫어 안다. 출세간적인 즐거운 느낌을 … 세간적인 괴로운 느낌을 … 출세간적인 괴로운 느낌을 … 세간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 출세간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서 ‘출세간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고 꿰뚫어 안다.”
11-2. “이와 같이 안으로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受隨觀] 머문다. 혹은 밖으로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느낌에서 일어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느낌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느낌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그는 ‘느낌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사견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문다.”
몸의 반응에서 느낌이 일어나는데, 그 하나하나에 사티를 두고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본다.
즉 몸과 대상, 마음을 본다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과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에 반응에서 일어나는 맘음의 느낌을 본다. 그리고 이것이 사라지게 되는데,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본다.
지혜: 통찰하는 힘: 8정도의 정견
마음챙김: 사티
정념, 정견은 한쌍이다. 마치 동전의 양면 또는 손바닥과 손등의 관계처럼 분리되지 않고 같이 움직인다.
IV. 마음의 관찰[心隨觀]
12-1.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心隨觀]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① 탐욕이 있는 마음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 꿰뚫어 안다. 탐욕을 여읜 마음을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 꿰뚫어 안다. ② 성냄이 있는 … 성냄을 여읜 … ③ 미혹이 있는 … 미혹을 여읜 … ④ 위축된 … 산란한 … ⑤ 고귀한 … 고귀하지 않은 … ⑥ [아직도] 위가 남아있는 … [더 이상] 위가 없는[無上心] … ⑦ 삼매에 든 … 삼매에 들지 않은 … ⑧ 해탈한 … 해탈하지 않은 마음을 해탈하지 않은 마음이라 꿰뚫어 안다.”
⑥ [아직도] 위가 남아있는 … [더 이상] 위가 없는[無上心]
위가 남아 있는: 번죄가 있다는 마음
⑦ 삼매에 든 … 삼매에 들지 않은 …
삼매: 중국의 용어로 <노자>에서 나옴, 어떤 대상을 집중하는데 일념의 상태가 되어 있는 것.
원어는 1) 사마타 2)사미디
삼매는 우베카 사띠 빠리사디 (upekkh-sati-prisuddhi: 마음이 평정되어 있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
불교에서는 반드시 사마디의 상태에서도 사티(정념과 정견)이 있어야 한다. 힌두교에서 무상정(無想定)을 말한다. 무상정이란 일체의 모든 지각이 끊어진 상태=육체의 신진대사가 멈춘 상태=동물들이 동면에 들어간 상태를 말한다. 불교에서는 이 상태를 멸진정(滅盡定)이라 함.
니까야를 살펴보면, 후대에 정리, 편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힌두교의 전통이 남있는 흔적이 발견된다. 즉 붇다가 알라라 카마라에게 무소유처정의 수행을 배웠는데, 바로 스승의 경지에 도달했고, 웃다카 라마풋타라는 다른 스승에게서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얻었음에도 궁극의 단계가 아니라고 비판하면서 독자적 수행을 떠났다고 하는데, 이런 용어들이 모두 비불교적인 용어이다. 삼매 상태에서도 사티가 있어야 한다.
간화선은 남송대 대혜종고스님(1089∼1163)에 의해 주창된 수행법이다. 학자들은 무사선, 문자선,묵조선의 폐풍을 극복하기 위해서 간화선이 등장했다고 말한다. 묵조선(默照禪)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임제종(臨濟宗)의 대혜 종고(大慧宗杲) 선사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으며, 묵조사선(默照邪禪)·무사선(無事禪)·고목사회선(枯木死灰禪)이라고 폄칭되었다. '아무 말없이 흑산(黑山) 아래 귀신굴에서 눈을 감고 앉아 있는 것’이라 비판했다. 바탕이 낮은 사람이 묵조선을 할 때, 이런 위험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혜 종고 선사가 굉지정각을 비판했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것이다. 대혜종고는 그의 스승인 원오극근이 굉지정각을 인가 출세시켰으므로, 스승인 원오극근이 인정한 사람을 제자인 그가 비판할 수 없다.
사티는 일념의 상태= 평정한 상태에서의 사티
⑧ 해탈한 … 해탈하지 않은 마음을 해탈하지 않은 마음이라 꿰뚫어 안다.”
해탈, 열반, 불사, 감로, 평온, 안온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는데 모두 같은 의미이다.
해탈: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남. 번뇌: 탐진치 삼독
수행에서 마음을 관찰한다는 것은 탐진치 삼독을 집중 관찰 하는 것. 탐진치가 있느냐 또는 없느냐를 관찰하는 것.
12-2. “이와 같이 안으로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心隨觀] 머문다. 혹은 밖으로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마음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마음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그는 ‘마음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사견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 머문다.”
마음 작용 하나하나를 관찰해서 보는 것몸-느낌-마음의 반응을 본다.
마음을 본다=마음의 작용을 본다. 마음의 작용=마음이 일어나고 없어지는 것
마음이 의도하는 것을 본다 . 마음이 의도하지 않으면 몸의 움직임도 없다.
즉 마음이 하나 하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는데 사티를 밀착시키는 것.
오정심관(五停心觀)은 사심(邪心)을 멈추는 다섯가지 방법
1)부정관(不淨觀) : 외계의 부정한 양상을 관(觀)하여 탐욕의 마음을 고치는 것. 그런데 이 부정관이 원래 대념처경의 일부인지는 의심.
2)자비관(慈悲觀) : 일체의 모든 생명을 자애심으로 바라보는 것. =섬김, 감사, 사랑.
3)인연관(因緣觀) : 모든 것은 인과 연이 있음= 연기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본다)
법구경에서 보면 사리불 존자가 제자에게 부정관을 시켰는데, 성과가 없자 연꽃이 피고지는 것을 보게 하였다. 또한 줄라반다까 존자는 한개의 게송도 외우지 못했는데,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게 함으로써 깨닫게 하기도.
연기를 본다- 즉 어렵게 알 필요 없다.
4)계분별관(界分別觀) : 12처를 설명할 때 자세히. 나와 대상을 면밀히 사티를 밀착시키는 것.
5)수식관(數息觀) : 호흡의 수를 세어 흐트러진 마음을 가라앉힘.
원래 부정관은 자기 몸에 대한 집착이 강하거나 성욕이 많은 사람에게 가르침.
부정관을 익힌 비구들이 몸이 무슨 별 것인가 여겨 자살하게 되었느데, 그래서 초기에는 부정관을 가르쳤지만 후기에는 안가르침.
몸의 관찰에 대한 질문: 몸의 32가지를 어떻게 관찰 할 수 있을까요? 특히 고름?
답: 몸에 대한 관찰은 실제 해부해서 보지 않는 한 관념이다. 내가 실제 수행에서 사물을 보면서, 안구의 움직임을 못 본다면 내장기관을 관찰한다고 말할 수 없다.
V. 법의 관찰[法隨觀]
V-1. 다섯 가지 장애[五蓋]
13-1.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다섯 가지 장애[五蓋]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다섯 가지 장애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자기에게 감각 욕망이 있을 때 ‘내게 감각 욕망이 있다’고 꿰뚫어 알고, 감각 욕망이 없을 때 ‘내게 감각 욕망이 없다’고 꿰뚫어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감각 욕망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감각 욕망을 어떻게 제거하는지 꿰뚫어 알며, 어떻게 하면 제거한 감각 욕망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꿰뚫어 안다.
13-2. 자기에게 악의가 있을 때 ‘내게 악의가 있다’고 꿰뚫어 알고, 악의가 없을 때 ‘내게 악의가 없다’고 꿰뚫어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악의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악의를 어떻게 제거하는지 꿰뚫어 알며, 어떻게 하면 제거 한 악의가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꿰뚫어 안다.
13-3. 자기에게 해태와 혼침이 있을 때 ‘내게 해태와 혼침이 있다’고 꿰뚫어 알고, 해태와 혼침이 없을 때 ‘내게 해태와 혼침이 없다’고 꿰뚫어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해태와 혼침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해태와 혼침을 어떻게 제거하는지 꿰뚫어 알며, 어떻게 하면 제거한 해태와 혼침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꿰뚫어 안다.
13-4. 자기에게 들뜸과 후회가 있을 때 ‘내게 들뜸과 후회가 있다’고 꿰뚫어 알고, 들뜸과 후회가 없을 때 ‘내게 들뜸 과 후회가 없다’고 꿰뚫어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들뜸과 후회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들뜸과 후회를 어떻게 제거하는지 꿰뚫어 알며, 어떻게 하면 제거한 들뜸과 후회가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꿰뚫어 안다.
13-5. 자기에게 회의적 의심이 있을 때 ‘내게 의심이 있다’고 꿰뚫어 알고, 의심이 없을 때 ‘내게 의심이 없다’고 꿰뚫어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의심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의심을 어떻게 제거하는지 꿰뚫어 알며, 어떻게 하면 제거한 의심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꿰뚫어 안다.”
13-6. 이와 같이 안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혹은 밖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법에서 일어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법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법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그는 ‘법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사견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다섯 가지 장애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다섯가지 장애가 있을 때 사티를 밀착시켜 바라볼 뿐, 거기서 어떤 생각을 일으키면 안된다.
V-2.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
14.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五取蘊]들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들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이것이 물질이다.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느낌이다.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느낌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인식이다. 이것이 인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인식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상카라[行]들이다. 이것이 상카라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상카라들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알음알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사라짐이다’라고 [관찰하며 머문다].
이와 같이 안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들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물질: 몸. 우리의 몸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즉 몸은 사대의 결합(일어남), 흩어짐(사라짐)이다. 여기서는 색수상행식을 몸으로 보면 된다. 몸의 원어는 루빠인데 여기에는 1)물질, 2)사람의 몸이라는 의미가 있다. 불교에서는 우리의 몸을 물질적 요소인 물질로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인식: 산냐를 '인식'으로 번역했는데, 이것 역시 우리말로 적당한 번역이 어렵다.
산냐는 불교사전에 의하면 표상, 상념, 개념, 관념으로 나와 있다.
우리가 영화를 본다는 것은 스크린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스크린에 비춰지는 것을 본다는 것은 전부를 보는 것이 아니다. 그기에는 대본, 연기, 시나리오 등이 들어잇는데, 이것이 산냐이다. 즉 표상은 보이는 것이고 산냐는 전체적인 것이다. '지작'으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다.
상카라: 니까야에서 무려 6,800여 회난 나올 정도로 불교에서는 중요한 용어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데, 어디에 붙어 있느냐에 따라 이해가 달라진다. 1)잠재적으로 무엇이 정신적으로 형성되는 힘=업을 형성시키는 잠재적인 힘 2)의지적인 형성력-의지작용, 의지
여기서 상카라는 단순하게 의도, 의도하는 마음으로 해석하면 된다.
상카라들이라고 복수로 번역하는데, 오온에서 복수로 해석하는 것이 적당한지는 의문.
알음알이: 생각. 한문으로는 보통 識으로 번역함.
원어 윈냐나로 종합 판단하는 의식, 대승불교의 유식학에서는 분별의식이 이에 해당
오온: 색수상행식. 다른 말로 하면 심신(=몸과 마음). 신수심
V-3.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處]
15.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六內外處]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눈을 꿰뚫어 안다. 형상을 꿰뚫어 안다. 이 둘을 조건으로[緣] 일어난 족쇄도 꿰뚫어 안다.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족쇄를 어떻게 제거하는지 꿰뚫어 알며, 어떻게 하면 제거한 족쇄가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꿰뚫어 안다.
귀를 꿰뚫어 안다. 소리를 꿰뚫어 안다. … 코를 꿰뚫어 안다. 냄새를 꿰뚫어 안다. … 혀를 꿰뚫어 안다. 맛을 꿰뚫어 안다. … 몸을 꿰뚫어 안다. 감촉을 꿰뚫어 안다. … 마노를 꿰뚫어 안다. 이 둘을 조건으로 일어난 족쇄도 꿰뚫어 안다. 법을 꿰뚫어 안다.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족쇄를 어떻게 제거하는지 꿰뚫어 알며, 어떻게 하면 제거한 족쇄가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꿰뚫어 안다.
이와 같이 안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여기서는 육처, 즉 6가지 안팎의 감각장소를 설명하고 있다.
육입: 안이비설신의-나
육처: 색성향미촉법 -대상
이 세상에는 딱 2가지만이 존재한다. 즉 안이비설신의라는 나와 색성향미촉법의 대상
오정심관의 계분별관은 이것을 보기 위함이다.
족쇄: 속박, 즉 번뇌
눈으로 대상을 본다: 눈과 대상(사물)의 조건(=연(연기))으로, 부딪치면 여러가지 갈애 같은 것이 일어난다. 부딪치면 여러가지 갈애같은 것이 일어나는 것이 족쇄라는 뜻. 이러한 모두를 보는 것
조건: 연(연기)조건에 의해 일어난 것은 조건에 의해 사라지는데, 이것을 본다.
눈으로 꿰뚫어 안다: 안구의 움직임을 내가 느끼는 것. 내가 보는 대상의 움직임에 따라 안구가 움직인다. 조리개가 닫히고 열린다.
참고: 깨달음-우리가 말하는 깨달음은 관념. 먼 산을 보면서 안구의 움직임을 못 본다면 관념. 여기서 관념이란 '실재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
대상(사물)보다: 사물의 본질, 속성을 파악하는 것. 컵을 본다고 할 때 단순히 컵을보는 것이 아님.
사티 수행자는 안구의 움직임을 느껴야 한다. 만약 느끼지 못한다면 보고 느낀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 수행은 실재적인 것을 말한다. 단순히 본다고 할 때 1)안구의 움직임, 2)사물의 본질 3)나와 대상 사이의 마음의 움직임를 본다. 이렇게 안되면, 살불살조를 얘기해도 허망한 것이며, 적어도 이 수준이 되어야 본다고 말할 수 있다.
귀: 귀로 듣는다는 것도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귀안의 감각기관, 이를테면 달팽이관의 작용, 움직ㅇㅁ과 마음에서 그 소리에 반으하는 것을 듣는다.
코, 혀, 몸: 이 모든 것도 마찬가지이다. 몸을 본다고 단순히 몸을 보는 것이 아니다.
마노: 意로 번역, 心으로 번역하기도. 원어 마노의 의미는 '짓다'
心과 意는 구별이 어럽다. 그래서 心=意=識은 동일하다고 하는 것. 이 때 심의식 동일하다고 하는 것은 앞에 나온 오온의 윈냐를 뜻함. 그러나 이 셋이 동의어일 수 없다. 나름 의미가 잇는데, 구별이 어려울 뿐이다.
법(法): 대상,. 여기서는 '다르마'의 의미가 아니다.
안이비설신의 외에는 모두 대상이다. 즉 색성향미촉도 대상이다.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이 조건에 의해 어떻게 일어나고, 조건에 의해 어떻게 사라지는지 본다. 이것이 ㄷ곧 부처님이 말한 연기법을 보는 것이다.
V-4.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
16-1.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들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들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자기에게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念覺支]가 있을 때 ‘내게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있다’고 꿰뚫어 알고,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없을 때 ‘내게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없다’고 꿰뚫어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어떻게 닦아서 성취하는지 꿰뚫어 안다.
수행에 대해서 마음챙김의 일곱가지 요소를 안다.
16-2. 자기에게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擇法覺支]가 있을 때 …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精進覺支]가 있을 때 … 희열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喜覺支]가 있을 때 … 편안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輕安覺支]가 있을 때 … 삼매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定覺支]가 있을 때 …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捨覺支]가 있을 때 ‘내게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있다’고 꿰뚫어 알고,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없을 때 ‘내게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없다’고 꿰뚫어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어떻게 닦아서 성취하는지 꿰뚫어 안다.
자기에게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擇法覺支]: 내입과 외입을 바르게 분별해서 보는 것
내입과 외입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낱낱이 치밀하게 보는 것(=택법)
정진: 부단하게 노력하는 것. 게으름 피우지 말고 노력하는 것
희열: 환희
수행을 고행이라고 하는 견해가 잇는데, 이것은 진정한 수행이 아니다. 수행은 즐겁고 재미있다. 즐겁고 재미있지 않다면 수행이 아니다. 한국 불교는 수행의 어려움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수행이 아니다. 무엇을 극복해야 한다면 그것은 수행이 아니다. 한국 스님들은 미안마에 수행을 배우는데, 어느 날 때자냐 사외도가 인터뷰를 청한다. 한국에서 영화관을 자주 가느냐? 자주 간다.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볼 때도, 그렇게 날이 선듯 앉아 있느냐? 아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본다. 수행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코리안들은 긴장이 팽팽해서 날이 서 있다. 발못하면 베여서 피가 흐른다.
수행은 즐겁고 재미 있는 것.
효봉스님하면 여러 분이 잘 모를텐데, 얼마전 돌아가신 법정 스님의 상좌이다. 선지식이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날 충치로 고생하는데, 이 망할 이, 이망할 이라면서 원망했다. 미안마 수행 후 그 고민을 충치치료로 간단히 끝냈다.
한암선사 제자 어떤 스님은 58년인가 68년인가대구의 파티마 병원에서 능막주사치료를 받는데, 선정으로 치료받고자 햇다. 그래서 선정삼매에 들어가 갈비뼈 두대까지는 참고 치료를 받았지만, 세 대째 치료하던 중 아파서 움찔하면서 능막이 터져 죽었다. 이건 수행 아니다.
수행은 고통을 견디고 인내하는 것이 아니다. 살불살조를 이야기하는 스님들도 실질적 경계에서는 모두 깨진다.
부처님은 부처님 이 외에는 누구도 인가할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은 부처님 외에 다른 사람의 스행에 대해 뭐라 딱 잘라 얘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는 스스로 안다. 어느 단계에 이른 수행자는 상대의 눈을 보기만 해도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미안마에서 한국의 어느 스님이 수행을 마치고 그 깨달음에 대해 인가여부를 청해 왔다. 그런데 깨달음은 알다시피 인가해주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다. 깨달았다면, 그 자신이 알 것이다. 그런데 인가가 없다고 행패를 부렸다. 깨달았다고 말을 하지 말든가. 아니면 행패를 부리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황룡혜남 스님의 표현대로, 관문을 지나간 자는 손을 흔들고 관문을 지나면 그만인데, 관문을 지나가지 못한 자는 관문이 어디냐고 묻는다.
미안마에서도 존경받는 아심 코알라 사외도에게 어느날 한 스님이 사진이 수다함과를 얻었다고 하면서, 봐달라고 햇다. 대답인즉, 수다함과를 얻었다면 네가 알 것이다. 어찌 나에게 묻는단 말인가?
어는 쪽집게로 소문난 스님에게 불자 한 분이 자신의 자녀가 서울대에 갈 수 있겠냐고 물어왔다. 무어라 답했을 까요? 답인 즉슨 서울데 응시한 사람 모두의 것을 가져오라.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 마음이 가볍고 경쾌한 것
수행에서 수행자가 명심해야 항 3가지가 있다
1) 잘 하려고 하지 말 것
2)되게 하려고 하지 말 것: 많은 수행자가 여기에 떨어진다. 어떤 때 수행을 해보면, 좌선이 좋을 때도, 행선이 좋을 때도 잇다. 어느 단계에 올라야만, 수다함과에 이르러야만 불퇴전, 즉 뒤로 밀려남이 없다. 이처럼 수행은 기복이 있는 것이다. 마치 야구에서 타자들이 기복이 잇는 것처럼. 타자들이 일반적으로 슬럼프에 빠지면 타격감이 좋았을 때를 찾으려 애쓴다. 그러나 타격감이 좋았을 때는 신체리드듬을 비롯한 내 몸의 몸든 조건이 맞아떨어지는 때이다. 그러나 지금은 슬럼프이고 그 존건이라는 것이 항상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즉 타격감 좋을 때의 리듬은 조건이 다 구비되지 않으므로 그 때처럼 찾을 수 없다. 그 때의 리듬을 찾는 것이 아니다. 이 순간을 알면 된다. 수행도 이런 것이다.
수행은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이 없다. 사티를 두고 알면 된다.
3) 억지로 하려고 하지 말라
성철스님의 10년 장좌불와에 자극받은 제자 한 사람이 스승을 본받아 따라하였다. 그런데 24시간 방아만 찧는다. 그에게는 그야말로 그것이 오매일여, 동정일여였다. 억지로 하니까 졸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16-3. 이와 같이 안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들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그 하나 하나에 대해서 단지 일어나고 사라짐을 내가 느끼고 보고, 사티를 밀착시키면 된다.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모든 현상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사티를 밀착시키고 보는 것이다.
무엇을 보느냐? 일어난 변화, 그리고 변화되어 사라짐을 사티를 밀착해 본다.
무상, 무아 즉 아니찌 아나타를 보고, 연기법, 즉 쁘라띠뜨야 사무뜨빠다(prat tya samutp da)를 본다
嵆瀳의 대념처경 大念處經 新講(종강)
불기 2554년 3월 24일
지난 주 강의에서 느낌, 마음, 법에서의 관찰을 살펴보았고, 5개(5가지 장애), 12처, 7각지, 오온을 살펴 보앗다. 오늘은 나머지 부분을 강의 할 차례
불교에서는 3가지를 반드시 갖춰야 한다.
1)체험: 반드시 체험되어져야 한다. 체험되지 않으면 살불살조를 말해도 의미가 없다.
체험이란 실제적으로 번뇌를 끊고 무상, 무아, 연기를 보는 것
살불살조 [殺佛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뜻이다. 혜연(慧然)이 엮은 《임제록(臨濟錄)》에 나온다. 먼저 앞부분에 ‘그대들이 참다운 견해를 얻고자 하려면 오직 한 가지 세상의 속임수에 걸리는 미혹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이는 곧 부처와 조사를 죽이라는 말이 속임수에서 벗어나라는 것임을 뜻한다. 부처와 조사라는 관념에 집착하면 현재를 망각해버릴 수 있음을 경계하는 말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2)이성: 옳고 그름의 판별.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나의 말이라 할지라도 너희가 이성적으로 판단해 옳고 그른지를 알아서 따를지 안따를지를 판단하라"고 했다. 무조건 믿고 따르라는 것이 아니다. 이성은 이성적 판단을 말한다. 왜 이러한 말을 하는가. 우리는 이성적 판단을 하기보다는 인간의 권위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권위 잇는 사람이 무슨 맗을 하면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따른다. 특히 종교가 그러한데, 일생을 망칠 수 있다.
중국의 정치가이자 문장가, 화가인 소동파의 경우가 그러하다. 호인 소동파로 더 잘 알려진 소동파는 동림상총(東林常總, 1025~1091, 임제종 황룡파)의 법자(法子)이기도 한데, 동림상총 선사에게 오도송을 바칠 정도여서, 소동파를 깨달았다고 한 동림상총 선사를 동문수학한 진정극문(眞淨克文)이 비판한다. 소동파는 늙어서 신선도를 닦는다. 그는 깨달음을 넘어서지 못했다. 진정 그문스님이 "선은 꿈에도 보지 못했다"고 한 것은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임제종의 중흥파인 오조법연, 원오국근, 대혜종고 선사는 모두 인가를 받았다. 이것은 이성적 판단이 있어야 가능하다. 옳은지 그른지는 자신이 안다. 대혜종고 선사의 "깨어 있을 때는 있는데, 잠들 때는 없다"는 것은 자기가 알아서 넘어선 것이다.
3)이론: 경전의 가르침.
경전의 가르침을 통해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안다. 이론에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소동파가 오도송을 읊었다고 해서, 그가 깨달은 것으로 이해하는 스님들이 있는데, 그들은 그가 말년에 신선도를 닦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이론이 박약해서 그렇다.
V-5.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
17.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여기 비구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지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지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사성제, 즉 고집멸도를 말하는데, 뒤에 나오므로 그 때 자세히 설명하겠음.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수행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주관적인 내 생각이 개재되지 않는 것, 즉 단지 바라만 보는 것, 마치 카메라 랜즈가 피사체를 비추듯 내가 대상을 바라 보는 것.
이 세계는 2가지만 존재한다. 나와 대상. 왜냐하면, 내가 대상 속에 있고, 대상이 곧 나이다. 대상과 나는 미안한 얘기지만 분리되어 있지 않다. 대상없는 나도 존재할 수 없고, 나없는 대상도 존재할 수 없다. 대상없는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인식할 수 있다. 즉 쉽게 알수 있는데, 나없는 대상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즉 내가 죽으면 대상이 없어지는 것이다. 내가 없는데 대상이 무ㅡ슨 존재의 의미가 있겠는가? 사막에서 목이 말라 내가 죽게 되었다. 지구의 2/3가 물이 넘쳐 흘러도, 내가 지금 당장 마실 물이 없다면, 그 물은 존재 의미가 없다. 내가 그 물을 마셔서 생명이 존재해야 , 그 물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대상과 나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수행이란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카메라는 피사체에 더럽다, 깨끗하다 따위의 아무런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사진의 랜즈는 비춰줄 뿐,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없다. 즉 내 생각이 개입되지 않는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 문제가 생긴다. 내 경험에 의해서 본다. 그러면 선입견이 생긴다. 프로이드나 융이 말한 무의식이 불교에서는 잠재의식, 심층의식이다. 그들의 심리학은 불교 마음 분석에 관한 논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우리는 자기가 익혀온 것, 즉 습(習)을 바탕으로 본다.
경전에 보면, 부처님의 최초의 설법이 5인의 비구에게 행한 사성제라고도 하고, 중도라고도 하는데, 사성제가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중도(中道)가 최초 설법일 가능성이 더 크다.
V-5-1.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 고성제
괴로움이란 번역이 맘에 안든다. 괴로움(苦)은 심신, 즉 몸과 마음이 굉장히 불편해 불안한 상태이다. 단순히 고통, 괴로움이 아니다. 심신이 뭔가 때문에 불안하고 불만족
18-1.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인가?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五取蘊]들 자체가 괴로움이다.”
태어나는 것이 왜 괴로운가?
태어남이 괴로움이라는 것은 불교가 인신난득(人身難得: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는 거시 어렵다. 즉 윤회의 과정에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도 축복)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돌한다.
'태어남이 괴로움'이라는 구절을 절었을 때는 이해되지 않았다. 태어남이 괴로움이라고 말한 이유는 생의 조건이 선택되어지는 것이기 아니기 때문이다. 즉 내가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므로 괴롭다. 불교의 6도(천국,아수라,인간,아귀,축생,지옥)는 논외로 치더라도,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도 조건이 중요하다. 즉 어떤 부모 아래서 태어나는 지가 중요하다. 지금도 인도 인구의 70%가 불가촉천민이라고 하는데, 부처님 당시에는 어떠했을까?
인도에서는 당시에 태어나면서부터 신분이 결정되나.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아 계급으로 태어나는 것이 최적의 조건.그리고 또 다른 조건은 아들로 태어나는가 딸로 태어나는 가도 중요하다. 인도에 약 3,500만의 과부가 버려지고 있다고 한다. 아슈람은 원래 수행하는 곳인데, 여기에 과부들이 넘쳐난다. 그러니 부처님 당시인 2,500년전에는 어떠했을까? 아들도 첫째인가 둘째인가에 따라 조건이 다르며, 지금도 딸을 임신하면 낙태하려 한다. 그것은 딸을 시집보낼 때 거액의 지참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지과학 또는 뇌과학에서는 영아의 6개월~24개월 사이의 교육여부가 뇌의 발달에 중요하다고 한다. 즉 아이 뇌의 뉴런이 증진되고 생성되는 기간이 이 때라는 것이다. 만약 영아가 태어난 채로 그대로 멈춰있게 된다면, IQ 70-80 수준에 머물러 있게 된다.
실험을 통해서 보면, 운동하는 쥐와 그렇지 않은 쥐는 뇌세포인 뉴런의 생성과 성장에도 차이를 보인다. 전자의 쥐는 뉴런이 생성, 성장하지만, 후자의 쥐는 뇌세포가 쇠퇴한다. 그런데 억지로 운동을 시킨 쥐는 뉴런이 새롭게 생기거나 증진되도 않았는데, 자기가 하고 싶어 운동하는 쥐는 뉴런도 생성되고, 증진되었다.
어떤 조건에서 태어나느냐에 따라 삶이 좌우된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표현이 있는 것은 그만큼 개천에서 용이 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태어남이 괴로움: 어떤 조건으로 태어나느냐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경우도 크샤트리아 신분으로 태어났으며, 경전에 보면 도솔천에서 부모를 골랐다고 되어 있다.
괴로움: 자유가 박탈되는 것
인도의 사고에 따르면, 신은 불사이지만, 인간은 죽는다.
인생은 죽음을 향해간다. 다시 말하면 인생은 죽음을 향해가는 여행과 같다.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五取蘊]들: 5처, 즉 색수상행식= 몸과 마음
18-2.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태어남인가? 이런 저런 중생들의 무리로부터 이런 저런 중생들의 태어남, 출생, 도래함, 생김, 탄생, 오온의 나타남, 감각장소[處]를 획득함 ―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태어남이라 한다.”
감각장소[處]: 원어 ayatana 아야타나)
:신에게 제물을 올리는 제단을 놓기 위해 땅을 높이고 편평하게 만드는 것. 인식기관인 안이비설신의와 인식대상인 색성향미촉법이 만나는 지점. 인식대상과 인식기관이 만나는 지점으로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실제로 수행을 통해 체험해 봐야 한다.
18-3.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늙음인가? 이런 저런 중생들의 무리 가운데서 이런 저런 중생들의 늙음, 노쇠함, 부서진 [이빨], 희어진 [머리털], 주름진 피부, 수명의 감소, 감각기능[根]의 허약함 ― 이를 일러 늙음이라 한다.”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의 기능이 액해지는 것, 즉 몸의 기능이 약해지는 것
18-4.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죽음인가? 이런 저런 중생들의 무리로부터 이런 저런 중생들의 종말, 제거됨, 부서짐, 사라짐, 사망, 죽음, 서거, 오온의 부서짐, 시체를 안치함, 생명기능[命根]의 끊어짐 ― 이를 일러 죽음이라 한다.”
생명기능[命根]: 생명이 지속되는 힘
대념처경과 비슷한 경전으로 염처경이라는 것이 있는데, 염처경에서는 고집멸도, 즉 사성제에 관한 얘기 밖에 없다. 즉 대념처경처럼 상세한 설명이 없다. 그러므로 염처경에 없는 대념처경의 부분은 첨가된 것인지도 모른다.
18-5.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근심인가? 비구들이여, 이런 저런 불행을 만나고 이런 저런 괴로운 현상에 맞닿은 사람의 근심, 근심함, 근심스러움, 내면의 근심, 내면의 슬픔 ― 이를 일러 근심이라 한다.”
18-6.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탄식인가? 비구들이여, 이런 저런 불행을 만나고 이런 저런 괴로운 법에 맞닿은 사람의 한탄, 비탄, 한탄함, 비탄함, 한탄스러움, 비탄스러움 ― 이를 일러 탄식이라 한다.”
18-7.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육체적 고통인가? 비구들이여, 몸의 고통, 몸의 불편함, 몸에 맞닿아 생긴 고통스럽고 불편한 느낌 ― 이를 일러 육체적 고통이라 한다.”
생로병사(生老病死) : 근본 고(사고 四苦)-육체적 고통
여기에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득불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 정신적 고통, 넷을 더하여 8고라고 한다.
원증회고: 만날 수 밖에 없는 것, 즉 만나고 싶지 않은데 만나는 것
내가 어느 절에서 살며 공부할 때인데, 나이 많은 스님 중에서 괴각(乖角) 한 분이 있었다. 괴각이란 박정한 성격을 말한다. 그러나 절에서의 지위는 먼저 들어온 순서에 의하므로 내가 입승(立繩)죽비를 잡고 하는 것)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그 분이 얼마나 싫었든지 숟가락질 하는 것도 싫더라. 이런 내 자신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는데, 그런데 어쩔 수 없이 같이 앉아야 하는 것, 이런 것이 원증회고이다.
구득불고: 얻고 싶은 데 얻을 수 없는 것
존재하다는 것은 소유한다는 것이다. 법정스님은 무소유 한적이 없다. 그가 존경받는 것은 그는 누릴 수 있는데 누리지 않고 소욕지족했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고 살 수는 없다. 법정 스님도 무소유 한 것이 아니라 무소유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있는데 못쓰는 것과 없어서 못 쓰는 것은 차이가 있다. 구득불고란 가질 수 있는데 가지지 못하는 것, 가질 수 있는데 가질 수 없는 것
애별리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 즉 죽음이 그렇다.죽음=헤어짐
오음성고: 오음은 여기서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다섯을 오온(五蘊)
‘온(蘊)’은 범어 ‘스칸다(skandha)’, 팔리어 ‘칸다(khandha)’로 덩어리, 모임, 나무의 가지, 어깨, 구성요소 등을 의미
구역에서는 구마라습이 오음五陰으로 번역했고, 신역인 현장스님의 번역에는 오온五蘊으로 되어 있다.
왜 인간은 영원한 행복을 못 얻는가? 출가의 이유이기도 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불만족이다. 불만족이란 불만족 때문에 심신이 니그럽고 산란스럽다는 것이다.
사성제란 이 4고8고를 분석해 놓은 것이다.
18-8.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정신적 고통인가? 비구들이여, 정신적인 불편함, 마음에 맞닿아 생긴 고통스럽고 불편한 느낌 ― 이를 일러 정신적 고통이라 한다.”
18-9.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절망인가? 비구들이여, 이런 저런 불행을 만나고 이런 저런 괴로운 법에 맞닿은 사람의 실망, 절망, 실망함, 절망함 ― 이를 일러 절망이라 한다.”
18-10.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인가? 비구들이여, 태어나기 마련인 중생들에게 이런 바람이 일어난다. ‘오 참으로 우리에게 태어나는 법이 있지 않기를! 참으로 그 태어남이 우리에게 오지 않기를!’이라고. 그러나 이것은 원함으로서 얻어지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이것도 괴로움이다. 비구들이여, 늙기 마련인 중생들에게 … 병들기 마련인 중생들에게 … 죽기 마련인 중생들에게 …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을 하기 마련인 중생들에게 이런 바람이 일어난다. ‘오 참으로 우리에게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하는 법이 있지 않기를! 참으로 그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우리에게 오지 않기를!’이라고. 그러나 이것은 원함으로서 얻어지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이것도 역시 괴로움이다.”
18-9과 18-10
내가 원하던 원치 않던 온다. 그것이 괴로움
노병사(老病死)도 마찬가지 원하지 않는데 온다. 모든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 죽어서도 또한 천당이나 극락에 가기를 원한다. 지옥도 살만하다. 왜? 지옥에 갔다가 돌아왔다는 사람을 못봤다.
18-11.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요컨대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五取蘊]들 자체가 괴로움인가? 그것은 취착하는 물질의 무더기[色取蘊], 취착하는 느낌의 무더기[受取蘊], 취착하는 인식의 무더기[想取蘊], 취착하는 상카라들의 무더기[行取蘊], 취착하는 알음알이의 무더기[識取蘊]이다. 비구들이여, 요컨대 취착하는 이 다섯 가지 무더기들 자체가 괴로움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
취착: 생각을 일으켜서 집착하는 것
受想行識: 앞에서 설먕했으므로 여기서는 안함
존재한다는 것도 고(苦)이다. 왜냐하면 존재한다는 것이 불만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불만족을 내포하고 있는가? 내 몸과 내 마음인데도 내 뜻 대로 안된다.
이 세상에서 유일한 내것이 내 몸, 내 마음인데 내 뜻대로 안된다. =내 몸과 마으조차 내가 선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불만족스럽다. 왜 불만족스러운가? 불만족스러운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옛날이 그립다. 요즘은 나이가 들어도 모두 새까맣게 염색을 해 나이를 알 수 없다. 우리는 나이들어 머리가 희어지고 늙어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픈 걸 받아들이면 아프지 않다. 내가 예전에 뜸을 뜨면서 실제 이런 경험을 해봤다.
육체의 고통은 못 견딜 고통이 없다.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의 작용때문에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사티가 있으면 견딜만 하다.
V-5-2.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集聖諦]
19-1.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인가? 그것은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환희와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애[無有愛]가 그것이다.”
왜 심신이 니그럽고 불안하고 불만족 상태가 되는가? 갈애 때문이다
갈애: 원래 의미는 사막에서 물이 떨어져 목말라 미칠 지경을 이르는 말로 내마음이 끓어올라 타는 것
세 가지의 갈애
1)감각적 욕망: 오근(안이비설신)에 대한 감각적 욕망 또는 성욕
성욕이란 자기 복제 행위이다
2)존재에 대한 갈애: 생명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
불교적 세계관에 의하면 색계, 무색계, 욕계가 있다.
색계란 성욕, 식욕이 없는 곳으로 여기서 태어나는 것이 화생(化生), 태(胎)에서 태어나는 것은 동물. 그러므로 색계의 중생은 몸이 있으나 몸이 깨끗
무색계는 정신만 존재하는 세계
욕계는 성욕과 식욕의 욕망이 존재하는 세계
3)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조차 생각하지 않는 것. 윤회를 끊는 것은 아니다.
수타니파타에 이르기를 "깨달음조차 집착해서는 안된다"
일본의 조동종을 일으킨 도오겐(道元)선사도 이르기를 "다만 수행에 힘쓸 뿐, 깨달음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고 하였는데, 깨달은이 2차적이라는 것이다. 임제종과는 반대이다. 임제종은 오직 깨달음이 목적이다.
19-2. “다시 비구들이여, 이런 갈애는 어디서 일어나서 어디서 자리 잡는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거기서 자리 잡는다. 그러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인가? 눈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귀는 … 코는 … 혀는 … 몸은 … 마노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형상은 … 소리는 … 냄새는 … 맛은 … 감촉은 … [마노의 대상인] 법[法]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눈의 알음알이는 … 귀의 알음알이는 … 코의 알음알이는 … 혀의 알음알이는 … 몸의 알음알이는 … 마노의 알음알이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마노: 마음
법: 여기서는 "대상'의 뜻
법이 '다르마'를 의미할 때는 포괄적
알음알이: 識(원어 위냐나)의 번역
부파불교에서는 18계(界:육근 육경 육식:六根 六境 六識).
육근은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 의근/ 육경은 안경 이경 비경 설경 신경 의경/ 육식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1) 눈으로 대상을 본다
2)대상을 보는 순간 동시적으로 마음의 작용이 일어난다
사물이 움직이면 안구가 돌고, 조리개가 커지거나 또는 작아지면서 대상을 보게 되는데 여기서 마음이 작용한다. 이것이 보는 마음이다.
눈으로 대상을 볼 때 마음의 작용을 안식이라 한다.
그러나 육근, 육경, 육식, 근경식의 구분은 구분일 뿐 동시에 작용한다. 안근, 안경, 안식이 동시에 작용한다.
"장미가 붉다 또는 장미가 벌레 먹었다. "고 할 때 보면서 동시에 파악하는 것이다. 엄격히 보면 순차적으로 관계를 보는 것이지만, 시간을 잴 수 없다.
마음의 작용은 그만치 빨리 움직인다. "마음을 보라"는 것도 그 이유에서이다.
그걸보면 여기서 무엇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갈애이다.
우리는 산에 가서 며느리 밥풀꽃을 본다. 또는 매화밭에서 매화꽃을 본다. 그러면 그 꽃을 가지고 와서 심고 싶고, 매화를 잘라 어깨에 짊어지고 온다. 즉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일어나는데, 이것이 갈애이다. 사람들이 어떤 사람에 호감을 갖는지 실험해 보았는데, 남성들이 땀을 흘리고 난 후 그 옷을 세탁하지 않고 여성에게 호감가는 옷으로 고르게 했다. 그 생물학적 결과는 여성은 자기 DNA와 유사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먼 사람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건강한 2세를 위한 목적에서 그런 것이다. 예전에는 귀족이나 왕족에 남매결혼도 있었지만, 그것은 신성을 유지하기 우해서이지 건강한 2세를 위한 고려가 아니었다. 투탕카맨의 경우 DNA검사를 하였는데, 신체가 기형으로 조사되었다.
根,境,識은 동시에 상호작용한다.
이것은 수행상 실제 체험에서 보라는 것이지 이론이 아니다.
19-3. “눈의 감각접촉[觸]은 … 귀의 감각접촉은 … 코의 감각접촉은 … 혀의 감각접촉은 … 몸의 감각접촉은 … 마노의 감각접촉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눈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귀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코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혀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몸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마노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눈의 인식은 … 귀의 인식은 … 코의 인식은 … 혀의 인식은 … 몸의 인식은 … 마노의 인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19-4. “눈의 의도는 … 귀의 의도는 … 코의 의도는 … 혀의 의도는 … 몸의 의도는 … 마노의 의도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눈의 갈애는 … 귀의 갈애는 … 코의 갈애는 … 혀의 갈애는 … 몸의 갈애는 … 마노의 갈애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눈의 일으킨 생각[尋]은 … 귀의 일으킨 생각은 … 코의 일으킨 생각은 … 혀의 일으킨 생각은 … 몸의 일으킨 생각은 … 마노의 일으킨 생각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눈의 지속적인 고찰[伺]은 … 귀의 지속적인 고찰은 … 코의 지속적인 고찰은 … 혀의 지속적인 고찰은 … 몸의 지속적인 고찰은 … 마노의 지속적인 고찰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
일으킨 생각: 맘음의 작용 중에서 대상을 관찰할 때 거친 작용
지속적인 관찰: 마음이 미세한 것. 마음의 작용 중 미세하게 보는 것.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이 부딪치면서 느낌과 생각을 말하고 있다.
갈애: 부처님은 갈애를 불에 비유한다.100명의 배화교도를 모아놓고
“비구들이여,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눈이 불타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불타고 있다. 눈의 시각이 불타고 있다. 눈에 닿음이 불타고 있다. 그리고 눈에 닿음에 인연하여 일어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겪기에 기쁜 것이든 괴로운 것이든 아니면 이도저도 아닌 것이든, 그 역시 불타고 있다. 무엇으로 불타고 있는가? 격정의 불로, 증오의 불로, 미망의 불로 불타고 있다. 내 말하거니와,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으로 불타고 있다. 슬픔으로, 탄식으로, 괴로움으로, 곤경으로, 절망으로 불타고 있다.
눈, 코, 귀, 등이 대상을 향해 불타고 있다 .무엇에 의해서? 탐욕, 분노, 어리석음에 의해서 불타고 있다.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보는데 있다. 즉 탐욕, 분노를 본다는 것이다.
탐진치는 수행의 단계에서 분리되지 않고 붙어 있다.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 것은 분노 때문이다.
세상이 불만족스럽지 않다, 인정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V-5-3. 괴로움의 지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
20-1.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지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인가?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지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지멸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
놓아버리면 된다
불이 타는 것은 연소할 품질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제거하면 타지 않는다.
어떻게 제거하는가? 답: 수행을 통해
20-2. “다시 비구들이여, 그런 이 갈애는 어디서 없어지고 어디서 지멸되는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거기서 지멸된다. 그러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인가? 눈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귀는 … 코는 … 혀는 … 몸은 … 마음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형상은 … 소리는 … 냄새는 … 맛은 … 감촉은 … [마노의 대상인] 법[法]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눈의 알음알이는 … 귀의 알음알이는 … 코의 알음알이는 … 혀의 알음알이는 … 몸의 알음알이는 … 마노의 알음알이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알면 사라진다: 사티 수행의 명제 -간단하다
20-3. “눈의 감각접촉은 … 귀의 감각접촉은 … 코의 감각접촉은 … 혀의 감각접촉은 … 몸의 감각접촉은 … 마노의 감각접촉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눈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귀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코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혀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몸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마노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눈의 인식은 … 귀의 인식은 … 코의 인식은 … 혀의 인식은 … 몸의 인식은 … 마노의 인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20-4. “눈의 의도는 … 귀의 의도는 … 코의 의도는 … 혀의 의도는 … 몸의 의도는 … 마노의 의도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눈의 갈애는 … 귀의 갈애는 … 코의 갈애는 … 혀의 갈애는 … 몸의 갈애는 … 마노의 갈애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눈의 일으킨 생각은 … 귀의 일으킨 생각은 … 코의 일으킨 생각은 … 혀의 일으킨 생각은 … 몸의 일으킨 생각은 … 마노의 일으킨 생각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눈의 지속적인 고찰은 … 귀의 지속적인 고찰은 … 코의 지속적인 고찰은 … 혀의 지속적인 고찰은 … 몸의 지속적인 고찰은 … 마노의 지속적인 고찰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지멸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
어디에서 없어지느냐?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이 만나는 장소에서
왜? 내가 보고, 듣고, 느끼니까
내가 내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행동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조선의 진묵대사, 경허스님의 술에 과한 일화는 여기에 비추어 본다면 허황된 이야기이다.
현대의 인지과학에 의하면, 마음의 신호이든 뇌의 신호이든 움직이라는 명령이없으면 우리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절대로 마음의 의도가 없다면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다. 행동을 해 놓고선 나의 마음에 아무 집착이 없었다는 식의 말은 소가 웃을 일이다. 한 마디로 관념의 유희인 것이다. 자기 마음의 작용을 못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는 것이다.
뭘 하고 나서 나는 꺼리낄 것이 없다 또는 나는 다르다는 식의 말은 안된다.
마음이 없으면 절대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내가 대상과 맞부딪쳤을 때 마음이 움직이면 그것이 행동이다. 만약이 상황에서도 느끼기만 한다면 행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알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수행을 해보면 알 수 있다.
허황된 얘기라고 말한 이유는 수행체험과는 별개의 것을 신화화하기 때문이다. 현실에 부딪치면 이러한 것들은 모두 깨진다.
살불살조라는 것도, 물론 좋다. 왜 그랬을까? 관념의 유희 때문이다. 여기서 관념이란 관상(: 밑그림이 있는 것)을 말하는데, 염불선의 기본이다. 부처의 형상이라는 밑그림을 가지고 있으니까 부처를 보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 해도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관상을 안보기 때문이다. 왜 관상을 보지 않는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기도나 수행에서 부처를 본다는게 도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그러한 일들은 모두 관상하기 때문에 보는 것이다. 즉 밑 그림이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V-5-4.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道聖諦]
21-1.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지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 즉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8정도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수행은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미안한 얘기지만 사마타이다.
빤냐(慧)가 없으면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으면 빤냐도 없다.
빤냐(慧)는 불교에서 말하는 정념의 지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지혜의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8정도가 나ㅝ져 있지만, 실제로는 분리되지 않는다.
21-2.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견해[正見]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지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지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에 대한 지혜 ― 이를 일러 바른 견해라 한다.”
정견[正見]: 정안(바른 눈)
불교에서는 안목을 중요시한다. 안목이란 올바름을 판단하는 눈이다
21-3.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사유[正思惟]인가? 비구들이여, 출리에 대한 사유,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코지 않음[不害]에 대한 사유 ― 이를 일러 바른 사유라 한다.”
출리: 해탈의 의미. 즉 3도심(탐진치)이 없는 것
정사유[正思惟]: 정심(바른 마음) 정안이 있어야 정심이 생긴다.
21-4.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말[正語]인가? 비구들이여, 거짓말을 삼가하고 중상모략을 삼가하고 욕설을 삼가하고 잡담을 삼가하는 것 ― 이를 일러 바른 말이라 한다.”
정어[正語]: 폭력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
칼로 입은 상처는 아물지만, 말로 입은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부부싸움을 하 때도 이 마지막 한 마디의 말을 아껴야 한다.
21-5.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행위[正業]인가? 비구들이여, 살생을 삼가하고 도둑질을 삼가하고 삿된 음행을 삼가하는 것 ― 이를 일러 바른 행위라 한다.”
정업[正業]: 정행
21-6.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생계[正命]인가?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삿된 생계를 제거하고 바른 생계로 생명을 영위한다. ―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생계라 한다.”
정명[正命] : 남을 속이지 않는 것.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
남을 속이려면 먼저 나를 속인다. 해결책은 간단하다. 스스로 속이지 않으면 된다.
21-7.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정진[正精進]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善法]들을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을 지속시키고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시키고 충만하게 하고 개발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정진이라 한다.”
정진[精進]: 부단한 노력. 여기서는 선법, 불선법
불교는 선악의 개념이 없다. 선한 것과 선하지 않는 것이 존재할 뿐이다.
즉 악은 없다. 다만 선하지 않을 뿐이다. 선하지 않을 뿐이기 때문에 돌이킬 수 있다. 즉 돌이켜서 선해질 수 있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왜냐하면 악은 돌이킬 수 없다. 지옥과 천국은 그 끝이 있다. 그러므로 교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문은 열려져 있다. 불교는 경계를 직거나 담장을 쌓지 않는다. 고정되어 있지도, 닫혀있지도 않다. 언제나 움직이고, 변화되고, 살아 숨쉰다. 언제나 열려져 잇다. 내가 문을 열면 된다. 천국이냐 지옥이냐도 내가 문을 열면 되는 것이다.
내가 언젠가 뼈 마디 마디가 분리되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몸의 고통은 견디지 못할 고통이란 없다.
21-8.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마음챙김[正念]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느낌들에서 … 마음에서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마음챙김이라 한다.”
바른 마음챙김: 삼마사티
21-9.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삼매[正定]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겼고, 희열[喜, pīti]과 행복[樂, sukha]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sampasādana)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正念正知]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이를 두고 성자들이 ‘평온하게 마음챙기며 행복하게 머문다’고 묘사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문다.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없앴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捨念淸淨]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삼매라 한다.”
정념정지: 평온하게 마음 챙기며 행복하게
사념청정 [捨念淸淨] : 우베카 사띠 바리사티( upekkhā-sati-pārisuddhi)=삼매. 우베카가 마음이 평정한 상태를 의미하므로. 사념청정이란 마음이 평정한 상태에서 정견, 정사, 정념, 정정진의 8정도가 있는 것. 즉 사티가 있는 것.
코끼리(부처님을 지칭하는 말)는 걸으면서, 서있으면서도(머물면서도), 누워서도, 앉아서도 선정(=삼매)에 들어 있다
= 행주좌와 어묵동정에도 삼매에 들어 있다.
우리는 앚아서 하는 좌선을 삼매라고 말한다. 그러나 앉아서 죽은 나무처럼 하는 것은 사선(邪禪), 즉 삿된 수행이다.
21-10. “이와 같이 안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혹은 밖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법들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법들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법들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그는 ‘법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사견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사성제, 팔정도를 설명하고 있다.
설명은 분리하여 하고 있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정정진[正精進]은 추진하는 힘이며,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은 따라온다.
VI. 결어
22.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을 이와 같이 칠 년을 닦는 사람은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구경지(究竟智)를 얻거나, 취착의 자취가 남아 있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不還果]를 기대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칠 년은 그만두고 누구든지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이와 같이 육 년을 닦는 사람은 … 오 년을 … 사 년을 … 삼 년을 … 이 년을 … 일년은 그만두고 누구든지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이와 같이 일곱 달을 닦는 사람은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구경지를 얻거나, 취착의 자취가 남아 있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를 기대할 수 있다.
일곱 달은 그만두고 누구든지 여섯 달을 … 다섯 달을 … 네 달을 … 세 달을 … 두 달을 … 한 달을 … 반달을 … 반달은 그만두고 누구든지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이와 같이 칠 일을 닦는 사람은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구경지를 얻거나, 취착의 자취가 남아 있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를 기대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기 위한 것이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이다.’라고 설한 것은 이것을 반연하여 설하였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그 비구들은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설법을 기뻐하였다.
(대념처경 끝)
불한과[不還果]: 아나함과. 아나함과에 올라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아라한과로 올라간다.
구경지(究竟智): 구경의 지혜: 아라한과를 얻는 것
여기서는 1주일만 닦으면 아라한과는 몰라도 불환과는 얻는다고 말한다.
경전에서도 1주일만에 아라한과를 얻었다는 말이 많이 나온다.
불교의 수행은 8정도이다.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쌍수를 주장하지만, 정(=선정)과 혜는 분리되지 않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매
한국 불교에서 주장하는 선정이 과연 부처님이 말하고 있는 선정과 같은 것인지는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오직 존재하는 것은 나와 대상 뿐, 나와 대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수행이란 나와 대상을 바로 사티를 밀착시켜 정견하고 정사유하는 것이다. 고통을 감내하고 인내하고 , 무엇인가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즐겁고 재미잇는 것이 수행이다. 어떻게 수행이 즐겁고 재미있을 수 있느냐? 즐겁고 재미있지 않다면, 수행이 아니다.
여기서는 개요만을 설명하고 있다. 다음 주에 실참을 해볼 것이다. 실제 수행을 하면서 잎사귀와 가지를 쳐야 한다.
지혜로서 바로 보는 것이다. 지혜가 없기 때문에 바로 보지 못하다. 그래서 하나 하나 학습하는 것이다.
제32칙 외도문불(外道問佛)
세존께 외도(外道)가 와서 "말 있음으로도 묻지 않고 말이 없음으로도 묻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니 세존께서 말 없이 앉아 계셨다. 이에 외도가 "세존께서 대자대비로써 미혹의 구름을 열어 나를 깨닫게 하셨습니다."라고 찬탄하며 절을 하고 물러갔다.
아난이 세존께 "저 외도가 무엇을 증득했기에 찬탄하고 갑니까?"라고 물으니 세존께서 "세상의 어진 말은 채찍 그림자만 봐도 달리는 것과 같다."라고 하셨다.世尊因外道問, 不問有言, 不問無言. 世尊據座. 外道贊歎云, 世尊大慈大悲, 開我迷雲, 令我得入. 乃具禮而去. 阿難尋問佛, 外道有何所證, 贊歎而去. 世尊云, 如世良馬, 見鞭影而行.
여세양마(如世良馬)는 견편영이행(見鞭影而行)
좋은 말은 채찍의 그림자만 보아도 달리고
그 다음 좋은 말은 채찍 소리만 들어도 달리고
그 다음 좋은 말은 채찍이 닿아야 달리고,
둔한 말은 채찍이 닿아 피가 튀어야 달린다.
질문: 알면 사라진다는게 이해가 안돼요?
수행은 몸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몸을 움직이게 하는 마음을 보는 것이다.
마음은 찰라에 일어났다 찰라에 사라진다.
그래서 마음을 보면, 즉 마음의 작용을 보면 사라진다.
마음을 본다는 것은 마음이 지나간 자취를 본다는 것으로
마음이 일어나는 단계를 보는 것이기도 하다.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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