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6. 30. 15:42ㆍ사상·철학·종교(당신의 덕분입니다)/노장사상
혼돈에는 질서가 없다 / 릴라님
<장자> 내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남해의 제왕을 숙(?)이라 하고, 북해의 제왕을 홀(忽)이라 하고,
중앙의 제왕을 혼돈(混沌)이라 했다.
숙과 홀이 어느 때, 혼돈의 땅에서 만나게 되었다. 혼돈이 이들을
매우 잘 대접하여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을 갚을 방법을 의논하여 말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을 가지고 보고 듣고 먹고 숨 쉬고 있는데,
혼돈만은 이것을 가지고 있지 않소. 그에게도 구멍을 뚫어 줍시다."
그리고는 혼돈의 몸에 하루에 한 구멍씩 뚫어 나갔는데,
칠 일 만에 혼돈은 죽고 말았다.
혼돈(混沌)은 마구 뒤섞이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태 혹은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기 이전을 말합니다. 이것을 '창세전' 또는 '카오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혼돈은 분별 이전의 일입니다.
이 세계는 각각의 대상들이 객관적으로 독립성을 가지면서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별된 세상은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마음에서 이렇게 창조되고 있습니다.
분별은 이렇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별이 일어나는 곳을
찾아보려 하면 이미 분별이 되어버려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렇게 시시각각
분별이 일어나 세계가 펼쳐져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곳, 즉 분별 이전의 세계를 혼돈, 창세전,
카오스라고 하지만 이것도 한계가 있는 말입니다.
분별된 말, 분별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혼돈은 이렇게
시시각각 경험되지만 혼돈이라는 어떤 것도 아니고, 그 다른 이름도 아닙니다.
말할 수 없고, 볼 수 없고, 생각할 수 없지만 지금
이렇게 말하고 보고 생각하는 가운데 분명합니다.
혼돈은 '혼돈'이라는 어떤 것이 아니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분별은 눈, 귀, 코, 혀, 피부, 생각으로 일어납니다.
일곱 개의 분별하는 구멍을 뚫자, 혼돈이 죽고 말았다는 것은 분별 이전의
일인 혼돈이 본연의 상태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분별될 수 없는 것이 혼돈인데, 분별하는 어떤 것으로 만들어버렸으니
진정한 혼돈이 아닙니다. 혼돈은 바로 지금 이 일을 가리킵니다.
온갖 분별로 세계가 펼쳐지는 듯 보이지만, 이 본 바탕은 눈으로, 귀로,
코로, 혀로, 피부로, 생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을 여러 가지 분별로 알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일곱 개의 구멍을
뚫은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분별로 알 수 없는 이 사실을 분별로 알려는 마음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늘 일곱 개의 구멍으로 분별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모든 것을 분별로 알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깨닫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별로 알려는 마음을 돌이키면 바로 그 자리가
분별없는 자리이기에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분별 이전' 또는, '본래 마음'은 말이 아니고 생각이 아닙니다.
분별 이전에는 말이 없고, 생각이 없고, 여러 가지 알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혼돈에는 질서가 없고, 나뉠 수 없으며, 개념으로 정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말과 생각과 앎이 평등한 혼돈입니다.
'혼돈이 무엇일까?' 이 생각 자체가 혼돈이지 무슨 혼돈이 있는 것이 아니며,
'혼돈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하는 이 자체가 혼돈을 증명하고 있지
달리 찾아내야 할 혼돈이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든 이 모습, 이 질서, 이 어지러움 그대로 아무런
말이 없고, 질서가 없고, 나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계 그대로 눈도 귀도 코도 입도 감촉도 생각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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