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 망상 번뇌가 바로 지혜다 / 우룡 스님

2018. 7. 15. 11:5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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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 망상 번뇌가 바로 지혜다  / 우룡 스님

 

거듭 강조하건데 불교를 착각하여 엉뚱한 생각을 갖고 엉뚱한 기대를 걸면

옆길로 새게 됩니다. 이것이 망상(妄想)입니다.

중생이 앞이 깜깜할 때는 그게 전부 망상(妄想)입니다. 저 밑의 계단에 있을

때는 망상 속에 서로 얽혀들어 허우적거리며 방황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염불이나 화두나 간경 등의 공부를 꾸준히 지어나가면 언젠가는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와 계단 끝에 올라오게 됩니다.

물 흐르듯이 쉬임없이 노력하면 결과적으로 망상이 지혜로 바뀝니다. 

노력의 결과, 어떤 차원에 도착하고 나면 어리석고 어두웠을 때의 망상이

바로 지혜로 바뀌게 됩니다 망상이 똑떨어져 나가버리고 그 자리에

다른 곳에 있던 지혜라고 하는 것이 딱 들어와 앉는 것이 아니라

본래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자체의 지혜를 회복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 분별심이 떨어져버리는 차원에 가면 행동

하나하나는 물론이요, 성을 내는 것까지도 그대로 지혜가됩니다.

우리불교계에서 천진도인으로 유명했던 혜월(慧月:1862~1936) 노스님의

일화는 우리의 망상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혜월스님께 한 신도가 찾아와 아버지의 49재를 청하면서 일금

1백원을 시주하였습니다. 당시로서는 거금인 1백원을 가지고 재 준비를

하기위해 시장을 보러 가는 길에, 한 여인이 길에 앉아 넋을 잃고 울고

있는 모습을 본 스님이 우는 까닭을 물었습니다.

"남편이 빚보증을 잘못 서서 살던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빚쟁이들에게

시달려 죽을 지경입니다."

"그 빚이 얼마나 되느냐?" 

 "80원입니다. 가난한 저희로서는 만져보기조차 힘든 큰 돈입니다."


혜월스님은 재 지낼 돈 1백원 중에서 80원을 그 여인에게 주었습니다.

"이 돈으로 빚을 갚고 용기를 내어 사시오. 바른 마음으로 열심히 살면

잘 살 날이 올 것이오."

여인에게 용기를 심어준 혜월스님은 당장의 생활비조차 없는 딱한 사정을

불쌍히 여겨 나머지 20원까지 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빈손으로 절로

돌아왔습니다.

또 한 번은 신도가 낸 49재 비용을 들고 시장으로 가다가, 양쪽 다리가

없는 걸인이 길가에서 달달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 혜월스님은 아무생각

 없이 그 돈을 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재 잘 지냈다. 진짜 재를 잘 지내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이 자주 있게 되자 노스님 밑에서 절 살림을 맡고 있던 맏상좌

스님은 답답한 마음에 가끔씩 항의를 하였습니다. 그

러면 혜월스님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며 말을 막았습니다.

이에 운암스님은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습니다.

"도인스님에게도 화를 내는 마음(진심 嗔心)이 있습니까?" 

"이놈아, 이것이 어찌 진심이냐? 방광(放光)이지 광명을 발하는 방광이니라."

도인 혜월스님은 조금도 걸림 없이 즉석에서 말했습니다.

참다운 재가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신 혜월노스님의 고함소리!


우리에게는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일이 번뇌 망상이 되지만,

마음에 집착이나 미련이 떨어져 나가버리면 우리 생각이 그대로 지혜가

되고 중생을 위하는 길이 됩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지만 지금 지니고 있는 이 생각이 딱 떨어져 나가 버리고 다른 깨끗한 마음이

들어온다거나  다른 지혜가 들어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금반지를 녹여 금목걸이를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금반지 때의 금이 딴 데로 가버리고 다른 곳에 있던 금을 가지고 목걸이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금가락지가 그대로 금목걸이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차별념(差別念)을 일으켜 분별 번뇌 망상을 키우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중생임을 자처하는 우리는 분별 번뇌 망상이 일어나면

거기에 그대로 휩싸여 갇혀있을 뿐,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갈 수 없다고

생각해버립니다.

왜냐하면 '나는 어리석은 중생'이라는 생각 속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중생과 부처 둘로 갈라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금가락지와 금목걸이는 같은 금으로 만든 것이라 했습니다.

일체의 장애가 결국은 깨달음, 곧 구경각(究竟覺)이 됩니다.

좋은 생각, 나쁜 생각이 모두 해탈이고, 법을 이루고 법을 어기는 것이 모두

열반이며, 어리석음과 지혜가 모두 반야일 뿐 아니라, 무명, 진여가 한 경계입니다.

하지만 자꾸만 차별념(差別念)을 일으키고 분별심을 내어 번뇌망상에 빠져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요 지금의 우리 모습입니다.


일본 북부의 후쿠리쿠[北陸]에 있는 염불종의 한 사찰에는 대처승이지만

대학교수요 박사요 일본에서 손꼽히는 화가이신 노스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법회가 끝날 무렵, 그 절에 다니는 한 할머니가 노스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스님, 이해가 된다고 하면 구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이해가 된다는 것 자체가 벌써 구제를 받은 것이지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할머니는 반박을 했습니다.

"스님처럼 거룩하신 분이라면 몰라도, 우리 같은 범부중생이 '이해하는

그 자체로 구제를 받았다'는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노스님은 한쪽 옆에 앉아 있는 자신의 아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나의 팬티를 하루에 두 번 이상 빨래 합니다."

 "예?"

 "나이가 많은 나는 대소변이 나오는 것도 미처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 때문에 아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대소변이 묻은 나의 팬티를 빨래합니다.

이러한 내가 무엇이 거룩합니까?"


그 말을 들은 대중이 숙연하게 있자 노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부처님이 하는 일이지. 똥을 싸는 나도 부처님이요,

나의 팬티를 하루에 두 번 세 번 씻는 저 사람도 부처님이야.

이곳은 부처님의 세상이야. 부처님들끼리 사는 세상이지."


'모든 것이 부처님이 하는 일!'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삽니다.

오히려 '나는 언제나 깜깜한 중생이니까 이런 실수 저런 죄를 짓고 살지만,

스님들이라면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살고 계실 것이다.'라는 착각을 합니다.

 스님의 삶이나 중생의 삶이나 모두가 법계(法界)의 일입니다.

법계의 일을 이렇게 갈라놓고 저렇게 따지는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을

하는 것은 망상(妄想)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로 똘똘 뭉쳐 있는데, 부처가 어디에  따로 있고

중생이 어디에 따로 있으며, 망상과 지혜가 어찌 따로따로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 세상을 분별을 해서 조각조각을 내니까 탈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누가 옆에서 분별심을 채찍질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자꾸만 분별심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좋은 것, 나쁜 것 가려내어 조각조각 나누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조각을 내고 나누는 일이 버릇이 되어버린 우리는 좋은 일 나쁜 일,

 잘한 일 잘못한 일 등으로 자꾸 조각을 내어 탈을 만들고 있습니다.


[원각경(圓覺經)]에서는 원각의 자성자리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모양도 없는

자리인데, 중생의 분별심 차별심으로 인해 보살성(菩薩性)이 생기고

성문성(聲聞性)이 생기고 연각성(緣覺性)이 생기고 부정성(不定性),

외도성(外道性)이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원각의 자성자리, 진리 자체는 특정한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닌데

개성(個性 개별성품)을 따라서 진리가 그대로 나타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진리는 고정된 어떤 모습이 없습니다. 그리고 진리는 고정된 모습이 없기

때문에 진리의 자성을 고집하지 않고 집착하지않고, 인연을 따라 개성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진리는 작은 모래 알갱이에게 가서는 모래라는 인연을 따랐고, 큰 바위에게

가서는 바위라는 인연을 따랐을 뿐입니다.

 도토리나무는 도토리나무대로 진리가 있고,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진리가 있습니다.

 대우주법계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생명력(生命力)이 어떤 인연에 의지해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원각(圓覺), 즉 진리 그 자체는 본래 평등하여 차별성이 없는데, 모든 성품을

좇아서 일어나기 때문에 낱낱의 개성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비유를 하건대 바다라고 하면 바다에는 큰 파도건 작은 파도건 물결이건

물거품이건 다 포함이 됩니다. 바다가 움직일 때에 파도가 일어나고 거품도

일어나는 것과 같이 진리 그 자체는 차별성이 없지만 개성을 따라서 파도가

 일어나고 거품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바다는 대우주의 본성(本性, 근본성품)의 자리이고 파도는 개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개성을 따라 개성에 맞추어서 움직이기 때문에 차별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원각(圓覺) 즉, 진리 자체는 하나일 뿐인데, 이 진리가 묘하게도 개성을 좇아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것이 분리 분별된 개성이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지만, 실제로 이 세상 모든 것의 개성은 없습니다.

실제로는 '보살이다, 중생이다, 성문이다, 연각이다'라는 개개의 성품은 없다는

말입니다. 진리에는 '보살이다 중생이다, 깨달았다 미혹했다'라는 분별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공부를 쉬임없이 지어가면 눈앞의 헛것이 없어지게 됩니다.

결국 대우주 진리의 자성은 그대로인데, 여기에 자꾸 차별상 분별상을 내는 것이

망상이 됩니다. 진리가 언제 '내가 진리이니까 너희들은 이제 나를 진리라고 불러라'

하는 소리를 한 적이 있습니까?

내 생각, 내 마음이 우상을 만들어 부처, 불교를 멋대로 생각하고 멋대로 판단을

하게 되면 여기에 병통이 붙어버립니다.


이제 한 번 돌아보십시오. 내가 하는 말이 어렵습니까?

누구나가 부지런히 연구하고 공부를 하면 불교의 이치는 전부 이해가 되는 쉬운

이야기가 되지만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쉽게 풀이를 해주어도

어려운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분별 망상 번뇌가 바로 지혜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 흐르듯이 끊임없이 공부를 하면 망상이 지혜로 바뀐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망상과 지혜는 진리 그 자체에서 보면 차별성이 없는 본래 평등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월간 [법공양]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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