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5. 11:17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바카리의 행복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불기2554년 12월 19일
오늘 강론의 주제는 '바카리의 행복'입니다.
바카리는 부처님의 제자 이름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니까야가 많지만, 읽을 때 언제나 감동을 주는 이야기는 '바카리 비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의 제자 중 바카리는 옹기장이 집인 옹기막에서 안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비구들이 일반인의 집에 안거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입니다. 중국의 임제스님도 사가나 관부에 안거한 기록이 있고, 인도에서도 사리불 존자가 조카의 집에 머물다가 타계한 것으로 나옵니다. 많은 비구들이 단월의 집에 머룰렀습니다.
바카리 비구는 옹기막에 머물고 있었는데, 몸이 아파 다시 일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이제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붓다를 뵐 수 있다면 한이 없겠다. 내가 아파 갈 수 없으니 베르바나(죽림정사)에 가 이 이야기를 전해 주시요" 바카리 비구가 간호하는 사람에게 부탁했습니다. 간호하던 사람이 이 이야기를 부처님께 전하자, 부처님이 친히 옹기장이 집으로 오게 됩니다. 바카리는 부처님을 보자 마자 일어나 앉으려고 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말합니다.
"바카리야! 누웠있거라, 썪을 몸을 보아 예배하여 무엇 하겠느냐? 바카리야, 법을 보는 사람이 나를 볼 것이요, 나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볼 것이다" 여기에서 부처님이 '썪을 몸'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 육신은 언젠가 죽습니다. 죽으면 썪어서 없어지죠. 부처님은 지금 그걸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새 인간 붓다를 강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인간 붓다를 강조해서 책을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들은 사악한 견해입니다. 붓다는 육신을 가진 붓다를 얘기하지 않습니다. 붓다는 육화된 붓다일 뿐입니다. 그래서 썪을 몸을 보아 무엇 하겠느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을 가진 붓다를 붓다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육신을 가진 붓다는 2,500년 전에 존재했을 뿐입니다. 붓다는 육화된 붓다입니다.
'마음이 붓다'라는 말 역시 사악한 견해입니다. 부처에 대해 '인간의 붓다' 또는 '마음의 붓다'라고 하는 것은 사악한 견해입니다. 그런 말은 어느 니까야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썩을 몸을 보아 예배해 무엇 하겠느냐? 진리를 보는 자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 진리를 본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은 붓다란 진리라는 걸 얘기하고 있습니다.
바카리가 일어나 앉으려 한 것은 부처님께 정례(頂禮)하기 위해서입니다. 부처님의 존안을 우르러 보고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는 것이 정례입니다. 원래 삼배의 유래가 이것입니다.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는 것은 지극한 존경의 표시입니다. 부처님이 '진리를 보는 자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 진리를 본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바카리에게 하고 싶은 말입니다. 바카리에게 진리로서의 붓다를 보라는 것입니다. 참다운 붓다를 보라는 것입니다. 바카리는 그 날 비로소 참다운 붓다를 봅니다. 진리의 붓다를 보게 됩니다. 바카리는 비로소 진리에 눈을 떴죠. 바카리는 비로소 행복을 얻었습니다. 왜냐구요? 참다운 붓다를 봤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강론 주제가 '바카리의 행복'인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진리란 무엇입니까?
나는 진리란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한 것이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행복한 것이 진리라는 뜻은 행복한 자만이 붓다를 볼 수 있고, 붓다를 보는 자만이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한 것이 진리이며, 행복하지 않은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비록 경전에 기록된 부처님의 말씀이라도 행복과 배치되면 그 말을 따르면 안됩니다. 경전에 기록된 말이 행복과 배치되면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리란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떠난 진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진리를 보는 자가 나를 본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런 말씀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원문에는 비구로 되어있음) 내 가사자락을 붙들고 내 발자취를 그림자처럼 따른다 할지라도, 만약 그가 욕망을 품고,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며, 그릇된 소견에 빠져있다면 그는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고 나 또한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거나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법을 보지 못하고, 법을 보지 못한 자는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나와 함께 하는 것이며, 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는 나와 함께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도 진리를 보는 자는 부처님과 함께하는 자이며, 진리를 보지 않는 자는 부처님과 함께 하지 않는자라는 것입이다. 부처님은 오직 진리를 보라는 것입니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진리라는 말을 들으면 그저 어안이 벙벙해져서 불교사전을 뒤집니다. 사전에서 다르마, 담마라는 원어의 진리란을 보면 한 50여개 뜻이 나올 것입니다. 어안이 벙벙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그런 복잡한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복잡하게 얘기할 이유도 없습니다. 다르마(진리)가 복잡해진 이유는 돈벌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르마는 행복입니다. 이렇게 간단히 얘기해서는 강의료로 돈을 받을 수 없을 것 아닙니까?
어떤 동영상 법문을 보았더니, '함이 없이 하고'라고 법문을 합니다. 행동을 했는데 무슨 '함이 없이 했다'고 하는가? 그 스님의 도는 높을 지 몰라도, 불교의 '불'자도 모르는 것입니다. 의도하는 마음조차 없으면 이렇게 코도 풀지 않습니다. (오늘도 스님이 강론 중 코를 푼다) 예쁜 여자를 보면 고개를 돌리는 것 역시 볼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의도하지 않으면 눈썹 하나도 까딱하지 않습니다. 의도하지 않으면 꿈을 꾸더라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만약 꿈을 꾸면서 움직이면, 이건 문제가 됩니다. 몽유병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잠이 들면 신경세포가 차단됩니다. 만약 이것이 안되면 자다가 옆의 부인을 후려쳐 눈이 밤탱이 되는 주먹질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의도가 있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이 없이 한다'는 거짓입니다. 뇌가 지시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뇌신경과학의 정설입니다. 잠 자는 것도 지시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법문을 한 스님이 도는 높을 지 모르나 불교이 '불'자도 모릅니다.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란 행복한 것입니다. 행복하지 않으면 진리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진리를 성취하면 최상을 행복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행복은 설익은 행복입니다. 설익은 행복이란 마치 선잠을 깬 것과도 같습니다.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어리벙벙 한 것과 같죠.
시조 시인 중에 조종현이라고 하는 분이 있죠. 스님입니다. 그의 아들이 더 유명하죠. 소설가 조정래가 그의 아들입니다. 그가 시조 시집을 하나 냈죠. <남대문>이라는 시집입니다. 그 시조집의 '남대문 문턱'이라는 시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남대문 문턱을 베고 실컷 잤나 보다. (근데 남대문이 뭐야?) /아마도 그럴 게다. 그럴게야/ 선 잠을 깨고 보면 그럴게야'.. 우리는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설익은 행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설익은 행복이기 때문에 근심 있는 날도, 우울한 날도, 짜증난 날도 많습니다. 그저 '저 인간 벼락 맞아 안죽나? '생각이 들기도 하죠. 부처님은 진리를 보는 자가 진정한 행복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부처님의 행복은 이런 일상의 행복+ α(알파)입니다.
인간이 태어나자 마자 가장 먼저 깨닫는 것이 물성(物性)입니다. 그 동안 돈, 사랑, 명예라고 말해왔던 본성들이 물성입니다. 그러한 물성은 특별히 가르치지 않아도, 배우지 않아도 깨우치죠.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성인이죠. 왜냐구요? 생이지지를 얻었기 때문이죠. 공자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것, 생이지지라고 했습니다. 공자는 생지(生知)는 생이지지(生而知之)니 성인(聖人)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生而知之者 上也 學而知之者 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 (나면서 저절로 아는 사람은 최상이요 /배워서 아는 사람은 그 다음이며 /막힘이 있어 배우는 자는 또 그 다음이라 /막힘이 있으면서도 배우지 않는 사람은 하등이다 ☞ 공자(孔子), ≪논어(論語)≫ <계씨(季氏)>편] 그런데 우리는 물성을 가르치지 않아도 알게 되니, 길거리 가득한 것이 성인입니다. 물성은 가르치지 않아도 깨닫습니다. 유치원생도 세종대왕을 좋아합니다. 신사임당은 더 좋아합니다. 아이들도 퇴계선생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 또한 신사임당 초상화 모으는게 취미입니다. 이건 날씨도 춥고 하니 재미있자고 하는 얘깁니다. 인간은 가르치지 않아도, 배우지 않아도 물성에 눈을 뜹니다.
그런데 인간은 진리성에 대해서는 잘 눈을 뜨지 못합니다. 물성에 눈 뜨서 행복한 것은, 미안한 얘기지만, 절반의 행복입니다. 나는 물성에 눈 뜨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물성에 눈 뜨는 것을 욕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부처님이 '탐욕을 버리라'고 말한 것에서 '탐욕'은 뒤틀린 욕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물성 추구를 반대한 적이 없습니다. 물성은 절반의 행복만을 가져다 줍니다. 그 물성에 보태어 진리성에 눈을 떠야 절반의 행복이 더해져 완전해 집니다. 물성에 눈 뜨는 것은 생이지지 입니다. 즉 저절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성에 눈 뜨는 것은 학이지지(學而知之), 즉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성에 눈뜨는 것은 절반의 행복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성에 눈떠야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를 보는 자가 진리를 보는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제가 '바카리의 행복'입니다. 여기서 바카리는 어떤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바카리입니다. 왜냐구요? 우리 모두 병을 앓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의 병, 어떤 사람은 육신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 또한 온전히 앓아 이 둘 모두를 앓고 있는 사람도 있죠. 온전해지기 위해 육신의 병, 마음의 병 둘 다 앓을 필요는 없죠. 아픈 사람은 모두 바카리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병 혹은 몸의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행복이 예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의 병, 마음의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바카리가 그랬던 것처럼 부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바카리 비구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바카리 비구에게 직접가서 진리를 보게 합니다. 그 진리가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우리가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부처님의 진리의 품에 안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카리가 그랬듯이 우리 또한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이 보기에 우리 모두는 바카리입니다.
부처님은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모들도 자식에 대한 사랑을 말할 때, 흔히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라고 하지만, 이것은 거짓입니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게 한입니다. 이걸 꼭 물어 봤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내가 보기로는 막내만 제일루 이뻐했습니다. 그걸 속일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감정을 속일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가는데 어쩔 것이여? 그러나 부처님은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차별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 붓다는 차별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이신 붓다는 차별심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특별히 정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히 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히 끌리는 사람이 있으니 결혼한 것 아닙니까? 물론 살다가 보면, 그 정내미라는 것이 떨어지도 하지만 말입니다. 인간이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이신 부처님은 차별심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차별심이 없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바카리입니다. 우리의 몸이 아픈 것, 또는 마음이 아픈 것은 좋은 징조입니다. 상스러운 징조입니다. 왜냐구요? 부처님이 나에게 다가오실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많이 아플수록 더욱 다가옵니다. 그렇다고 꾀병을 부려서는 안됩니다. 부처님 앞에서는 거짓이 통하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몸과 마음이 앓기 때문에 부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아프지 않다면, 부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새삼스럽게 무엇을 닦아야만 진리에 눈뜰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수행을 해야 진리에 눈뜰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성에 눈뜨지 못해서, 우리가 진실하지 못해서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행복이 진리입니다. 5부 니까야의 경전 말씀이라도 행복과 배치되면, 그것을 믿고 따르면 안됩니다. 부처님이 고행을 했기에 도를 얻었다고 말하는 스님이 있습니다. "행복하지 않으면 해탈할 수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부처님은 "내가 극심한 고행을 하기 이전에 잠부나무 아래에서는 행복했었다. 내가 고행을 하고 나서 그 행복이 깨졌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진리를 못 본다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도 진실하지 못해서 못 봅니다. 진실하지 못해서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는 경전을 읽으면서 '이 구절이 여기 있었던가?' 하고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똑 같은 책인데도 말입니다.
어떤 젊은 수행자가 붓다라고 하는 스승께서 제자들을 지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를 만나보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여러 날 길을 가다가, 우리 식으로 하면 어느 주막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 날 그 젊은 수행자는 낯 선 수행자와 함께 잠들게 됩니다. 그 낯선 수행자는 다름 아닌 붓다였습니다. 그는 붓다를 만나고자 길을 따났지만, 정작 붓다를 만나 같이 자면서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는 붓다를 만나지 못해 만나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부분들을 의미있게 읽어야 합니다. 왜 그는 붓다를 만나면서 만나지 못했을까? 왜 붓다는 그가 붓다라고 그 젊은 수행자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빛의 속도를 돌아갈 수 있다면, '왜 서로 모른 척 했던거야?'라고 물어볼 수도 있겠죠. 수행자도 붓다를 알아보지 못했고, 붓다 또한 자신이 붓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이유가 특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인간인지라 특별히 정 가는 사람에게만 알려 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경전에서 읽지 못하는 것은 심도 있는사색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눈만 왔다 갔다 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라는 것이 특별히 무언가 닦아야 얻는 것이라면, 닦지 않으면 영원히 눈뜨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배우지 않으면 진리성에 눈뜰 수 없는 것인가? 진리성에 눈뜨지 못하는 것은 행복에 눈뜨지 못해서 입니다. 우리 모두는 바카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진리란 행복입니다. 행복한 것이 진리죠. 정말 우리가 진리성을 얻고 싶다면, 행복해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스스로만이 할 수 있죠.
저는 이 바카리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수 없는 이야기 중 이 이야기가 제일 감동스럽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모두 바카리처럼 병을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중생은 많은 사람이므로,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부처님이 이땅에 온 것입니다. 부처님은 언제나 아픈 바카리를 위해 움직입니다. 많이 아프면 더 빨리 찾아옵니다. 바카리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바카리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붓다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는 인간 붓다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육신에 예배한 것입니다. 그 이후 진리의 붓다를 봅니다. 그리고 나면 부처님이 어디 아닌 계신 곳이 있겠는가! 인간은 3차원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3차원은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붓다는 이 세계를 초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카리에게 다가가 안아서 눕힙니다. 비로소 바카리라고 하는 오감이 육신으로서의 붓다를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바카리가 만나는 것은 진리성의 붓다인 것입니다. 물성이 아닌 진리성으로서 붓다를 만나는 것입니다. 바카리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것은 부처님이 왔기 때문이 아닙니다. 진리성의 붓다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참다운 행복은 진리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물성은 우리에게 절반만의 행복밖에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진리성을 회복해야 온전한 행복이 이뤄집니다. 우리는 보통 물성을 추구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주머니가 빈 자는 주머니를 채우려 하고, 주머니가 찬 자는 주머니를 채우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안방에 누워 있는 자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으려 두 손가락을 펴지 않습니다. 그러면 담배 달라는 소리인 줄 알고, 부인이 담배를 꽂아 줄지도 모릅니다.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두 손가락을 펴 '따블'을 외칩니다. 행복이라는 것도 똑 같습니다. 진리성을 얻는 자는 행복합니다. 행복한자는 진리성을 얻죠. 진리성을 회복한 사람은 붓다와 함께 하죠. 몸과 마음이 아프다고 하는 것은 이제 행복한 열차를 올라 탔다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프지 않다는 것입니다. 느끼기 때문에 아픈 것입니다. 무엇을?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아픈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카리입니다. 바카리가 특정인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붓다를 만날 수 없습니다. 붓다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붓다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행복을 얻는 사람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동일한 조건 아래 있죠. 불교도를 예전에 인도에서는 바우또와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모두 바우또와라는 행복주식회사의 주주들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행복주식회사 주주들에게 언제나 열심히 그 주식과 그 이익을 배당해 줍니다. 우리는 주주입니다. 바카리는 몸과 마음이 붓다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만이 진리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왜? 아픈만큼 성숙해지닌까! 그런데 이 말을 여기다 끌어써도 되는가 모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바카리에게 '썩을 몸을 봐서 예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참 모습을 보라는 것이죠. 오늘의 불교가 불교로서의 자리매김을 잘 못하는 것은 진리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불교가 진리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붓다와 함께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부처님이 진리를 보는 자가 나를 본다고 얘기했을까요? 우리는 단순하게 생각하면 됩니다. 행복을 추구하면 됩니다. 진리가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가 '바카리의 행복'입니다. 우리 모두 바카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행복이라는 방 안의 문턱을 막 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문턱을 넘어가는 댓가를 치르는 중입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아픕니다. 몸과 마음이 아프다는 것은 행복을 얻은 첩경에 들어서서, 행복이라는 안방을 들어가려고 막 문지방을 넘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카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합니다. 오늘 강론은 여기까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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