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11. 13:18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양심이라는 내면의 부처
직장인들이 선뜻 드러내 놓고 말하기 어려운,
누구나 있음직한 내밀한 고민이 하나 있다.
정직하고 투명한 분들께서
때때로 자신의 ‘양심’과 ‘욕심’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자신의 내면적 현실에 대해
토로하는 소리를 듣곤 한다.
공금을 사용할 때,
때때로 애매한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공금으로 쓸 수도 있고,
사비로 쓸 수도 있는 경우에
마음속에서 계속 갈등이 일어난다고 한다.
깊은 양심에서는
공금이 아닌 사비로 지출하라고 말하지만,
표면적인 욕심과 아상은
끊임없이 ‘괜찮아, 공금을 써도 되.’
‘그 정도는 괜찮을거야’
‘설사 누가 안다 해도 크게 문제될 건 없잖아’
라고 말하며 자신의 주머니 돈을 쓰지 말고
공금을 쓰라고 속삭여 댄다.
이런 정도라면 그래도 좋다.
때때로 좀 더 집요하게 아상과 아집은 속삭인다.
‘그 정도 공금은 사적으로 써도 괜찮아’,
‘공적인 것들이지만 이 정도는 누가 알겠어 그냥 사적으로 써 버려’
공과 사의 경계가 모호한 경우,
혹은 분명한 공적인 것이지만 사적으로 쓰고자 하는
미묘한 욕심이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는 일어나는 것이다.
특히 공직에 있거나,
공적인 직위나 소임을 맡고 있는 사람에게
이런 갈등은 더욱 많지 않을까?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다행히도 우리 안에는 참 고맙게도 ‘양심’이라는
내면의 진리의 소리, 정직한 소리가 늘 울리고 있다.
언제나 비추어 보라.
이것이 ‘양심’에 위배되는 것인가,
아니면 양심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것인가.
세상 사람들이 다 모른다고 할지라도
자기 안의 내면의 양심에 어긋난다면
그것은 이 우주법계가 이미 다 알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안 본다고,
혹은 아무도 알지 못 할 거라고,
나에게 이익이 될 듯하여,
자기 욕심 때문에,
혹은 알더라도 교묘히 빠져나갈 틈을 기어이 만들면서까지도
양심을 거스르고 싶은 충동과 욕구는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올라온다.
그것이 바로 표면의식,
즉 우리의 아상이며 무지이고 탐심의 실체다.
아상, 즉 에고는
‘나’를 아끼고 보호하고 늘리려는 끊임없고도 집요한 마음이다.
어떻게든 ‘나’에게 이익되는 쪽으로 온갖 머리를 굴리면서,
양심이야 어떻든,
교묘히 ‘나’라는 아상을 늘리려고 속삭여 대는 것이다.
지혜로운 이는
그런 아상의 교묘한 속삭임조차 없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인 이상, 완전히 깨닫지 못한 이상
언제가지고 아상과 에고는 우리를 끝까지 쫓아가 괴롭힐 것이다.
참으로 지혜로운 이는 아상이 거기 있음을 분명히 알고
아상이 속삭이는 집요한 아집과 욕망어린 소리에
굴복하지 않고
그 이면에서 진실로써 속삭이는 양심의 소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닐까.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는 삶을 살면
우리는 우주법계 앞에, 진실 앞에, 부처님 앞에, 신 앞에
당당하게 자유롭게 두려움 없이 근심 걱정 없이 설 수 있다.
그런 사람의 내면은 균형잡혀 있고, 두려움이 없으며,
죄의식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투명하고 고요하며 맑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작게라도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게 된 뒤에는
마음 속에 미묘한 두려움과 죄의식들, 이를테면
‘잘못되면 어쩌지’, ‘과보를 받지 않을까’, ‘심판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 속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런 내면이야말로 두려움과 죄의식이라는
가장 어리석은 내면의 부조화와 어두움을 키우게 된다.
양심이야말로 우리 내면의 진리이고,
불성의 소리이며, 신의 음성이다.
아무리 작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게 될 때
그것은 흡사 우주 전체를 대상으로 사기를 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부처님과 하느님, 진리계를 어떻게 속일 수 있겠는가.
설마 당신이라는 존재가
이 우주 전체를 완벽하게 속이거나,
자신의 행위를 철저하게 숨기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이 우주 전체와 완전히 연결되어 있으며,
부처와 신과 둘이 아닌 하나이기에,
내 안에서 어긋남이 있는 순간
그것은 우주 전체와의 관계가 어긋남을 뜻한다.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아무리 열심히 치열한 수행정진을 할지라도
‘깨달아야지’하는 마지막 ‘욕심’, ‘집착’까지 다 떨어내기 전에는
결정코 밝은 빛은 깃들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을 살펴봤을 때,
물론 명확하게 둘로 나눌수는 없겠지만,
아름다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지혜로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훌륭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기준은
탐진치 삼독에 있고,
그 중에도 첫 번째 덕목인 ‘탐욕’에 있다고 보여 진다.
아무리 훌륭하고 지혜롭고 아름다워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그 내면이 욕심과 집착으로 가득해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들이 계속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아직 먼 것이 아닐까.
세상 사람들을 살펴보건데,
아무리 지혜로운 척 해도, 아무리 수행자(성직자)인 척 해도,
아무리 자신을 치장하며 ‘척’하는 듯 보일지라도
그의 내면이 욕심과 집착의 행위를 일삼으며
스스로의 양심을 속이는 자라면
그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
지혜로운 사람인지를 검증해 보려거든,
자기 안의 욕심과 집착을 살펴보라.
자기 안의 양심을 들여다보라.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것이겠지만,
사실 이 요소야말로
우리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지혜로운 삶의 덕목이 아닌가 한다.
자기 안의 양심이라는 부처를, 신의 소리를
늘 안으로 비추어 보는 삶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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