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운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 - 죄의 업보를 피하는 방법|마음공부 생활수행

2018. 8. 25. 16:4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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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운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 - 죄의 업보를 피하는 방법


죄를 지으면

반드시 그 죗값을 치러야 할까?

 

부처님이나 하느님은, 혹은 진리는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하실까

아니면 벌을 주실까?

 

사실 진리는, 부처님과 하느님은

죄 지은 사람을

단죄하는 법칙을 만들지 않았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오로지 대자대비한 사랑으로 용서할 뿐이다.

 

그렇다면

인과응보는 뭐고,

잘못한 사람이 받는 과보는 뭐고,

천벌은 무엇이며,

지옥은 또 무엇일까?

 

그리고,

나쁜 짓 한 사람도 다 용서 받는다면,

왜 애써 착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부처님이 오히려 잘못하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선인선과 악인악과라고 말하는 편이

더 진리와 가깝게 느껴진다.

물론 그 또한 진리이고 진실이다.

 

인과응보도 진실이고,

잘못한 사람은 그에 합당한 죗값을 치르는 것도 진실이다.

 

뭐라고?

왜 이렇게 이랬다 저랬다지?

그 모두가 다 진실이다.

 

인과응보의 목적은 무엇일까?

보통 사람들은 인과응보의 목적을

단죄 혹은 죄 지은 사람을 벌할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죄 지은 사람은 벌을 받고,

선을 행한 사람은 상을 받는 것이야말로

이 우주적인 인과응보의 아름다운 균형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맞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인과응보를 받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목적은

단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이 뜻을 음미해 보자.

인과응보의 목적은

단죄가 아닌 깨달음에 있다.

 

인과응보가 일어나는 이유는

그 사람에게 ‘잘못했으니 당해도 싸다’거나,

‘죄를 지었으니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거나 하는 이유가 이니라,

죄를 지은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깨닫고 참회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한 목적으로

인과응보가 일어나는 것이다.

 

즉 인과응보가 일어나는 이유는

단죄라거나, 벌 받는다는 등의 분별, 판단, 평가가 개입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사람을 깨닫도록 하기 위한

무한한 자비와 사랑의 이유로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것이 우주법계의 특성이며,

진리의 근원적 본성인 까닭이다.

진리의 성품은

판단, 평가, 생각, 분별이 아니라,

언제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이다.

 

이처럼 이 우주는

무한한 자비와 사랑으로 계획되었다.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지른 죄인이라 할지라도

우주법계는 그를 용서하고 사랑한다.

 

그에게 죗값을 치르게 할 목적이거나,

단죄하고 벌 받게 할 목적으로 벌을 주지는 않는다.

다만 그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깨닫게 해 주고 싶기 때문에

그가 깨달을 때까지 그에 합당한 과보를 받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동체대비의 사랑이며,

부모님의 자식 사랑의 매와도 흡사한 방식이다.

 

부모님은 자식이 죄를 지었더라도 미워서 벌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식을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다음부터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깨닫게 해 주기 위해

벌을 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벌을 받는 것은 똑같은 것 아니냐고 하겠지만,

이것을 깨닫는 것은

삶의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한다면

단죄가 먼저가 아니라

깨달음이 먼저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죄업을 지었을지라도

벌을 받기 전에

먼저 그 죄업에 대해 참회하고 깨닫게 된다면

그 죄의 과보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불교에서의 인과응보는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기계적으로 무조건 받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깨달았느냐에 따라,

더 크게 혹은 더 작게 받게도 되고,

다른 방식으로 받음으로써,

받지 않는 효과를 얻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소금물의 비유도 이 원리를 표현하고 있다.

그릇에 소금(죄업)이 가득 담겨 있으면

어떻게든 그 소금물을 다 자신이 먹어야 한다.

그러나 그릇을 크게 키우게 되면

소금물을 계속 마시더라도 크게 짜지 않게 먹을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릇을 키운다는 것이 바로

깨닫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깨닫게 되면 지혜가 성숙되고,

그것은 곧 자비와 사랑이 깊어짐을 의미한다.

깨닫는다는 것은 곧 자비로와 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상대방을 괴롭혔고,

과보를 받기 전에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하고

깨닫게 된다면,

상대방을 괴롭힌 것에 대해 반성하면서

상대방을 향한 자비와 사랑이 여물게 될 것이다.

 

즉 그릇을 키운다는 것은

곧 깨달음과 사랑, 지혜와 자비가 깊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과응보가 일어나는 이유,

끌어당김의 법칙, 황금률의 법칙,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일어나는 이유가

바로 깨달음과 사랑, 지혜와 자비를

당신에게 배우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어떤 잘못인지 잘 알지 못할지라도,

만약 당신의 삶에 어떤 역경, 고난, 괴로움, 병이 찾아왔다고 해 보자.

그런 괴로움이라는 과보가 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당신을 깨닫게 해 주고 싶기 때문이다.

 

이 우주법계가 드디어 감사하게도

당신에게 깨달음과 사랑이라는 축복을 전해 주고 싶어진 것이다!

 

다만 당신이 경전으로는, 말로는, 책으로는,

지금까지의 삶에서는

여전히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좀 더 실질적이고, 체험적인 사건을 통해서만

당신이 깨닫게 되리란 것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고통스러운 사건을 보내준 것이다!

 

당신을 자기 몸처럼 동체대비로써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깨닫게 해 주고 싶은 것이다.

 

당신은 지금까지의 삶에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경전으로부터,

선생님이나 책으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지혜롭고 자비롭게 살아야 하고,

사랑하고 나누며 살아야 하고,

집착과 욕망을 내려 놓고 살아야 하고,

말과 생각과 행동을 선하게 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들어 왔지만,

여전히 체험으로 깨닫지는 못하고 있다.

 

이제 그런 방식으로는

더 이상 당신을 깨닫게 할 수 없음을

우주법계는 직시하게 된 것이다.

 

진리계에서는 어쩔 수 없이

다소 잔인하거나, 힘들거나, 고통스러울지라도

체험적이고, 직접적이며, 스스로 직접 부딪쳐 깨달을 수 있는

상황과 조건을 만들어 줌으로써

당신을 깨닫게 해 주고 싶은 것이다.

 

인기 많고, 돈 잘 벌고,

무엇하나 부족한 것 없이

세상 사람의 부러움과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연예인이,

자칫 거만해지고, 아집에 사로잡히고,

더 이상 그런 삶에서 배울 것이 없어졌을 때,

그를 깨닫게 해 주기 위해

역경을 하나 만들어 주는 것이다.

 

한참 잘 나갈 때는

아무리 좋은 조언을 해 주고,

금구성언의 말씀을 들려 주더라도

그것이 좋은 줄 모르기 때문에,

이제는 ‘말로 해서 안 되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우주법계는 안하무인으로 저 잘난 줄 아는 그를

자비심으로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와 역경을 던져 줌으로써

잠시 괴로울지라도 그것을 통해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몸 관리도 안 하고, 운동도 안 하고,

매일 술 담배에 찌들어 살면서,

일에만 매달려 있거나,

앞만 보고 성공만 향해 달려가던 사람에게

적당한 ‘초기 암’ 정도의 병을 진단해 줌으로써

그의 속도전 같던 삶에 브레이크를 걸어 주는 것이다.

 

잠시 삶의 속도를 멈추고,

나와 남을 돌아보고,

집착과 욕망을 비우면서

삶이 보내주고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그 작고 소박한 즐거움들을 좀 누려보길 권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괴로움은

언제나 깨달음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찾아온다.

 

누군가가 당신을 괴롭히고 욕한다,

남편이 아내를 괴롭힌다,

하는 일마다 잘 안 된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돈이 잘 안 벌린다,

진급도 안 되고, 성공도 요원해 보인다,

삶이 힘겹고 되는 게 하나도 없다,

큰 병이 찾아 왔다!

 

그런 고통은 도대체 왜 온 것일까?

왜 하필이면 나에게 찾아 온 것일까?

 

걱정하지 말라.

당신에게 ‘한 번 당해봐라’ 하고

이 우주가 당신을 미워해서 죗값을 치르게 하려고

그런 고통을 보내 준 것이 아니다.

업이 많아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이 온 것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이 진리의 법계에서

당신을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과 진리는 둘이 아닌 몸이기 때문에,

진리가 진리 자신을 내 몸처럼 돌봐주고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

그 고통을 가장한 깨달음의 가능성을 보내 준 것이다.

 

당신을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괴로운 일들이 당신에게 온 것이다.

 

그러니 그 어떤 고통 앞에서도

괴로워하거나,

나약해지거나,

자기 자신을 미워하거나,

이 세상을 원망하지 말라.

 

그것은 고통의 탈을 쓴

자비요 사랑이 나타난 것이다.

 

모든 사건이나 문제는

그것 자체로써는

우주법계의 대자대비한 사랑이 투영된,

당신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한 목적으로 계획된

감사한 일이지만,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것은 좌절로도

희망의 씨앗으로도 바뀔 수 있다.

 

모든 인류의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고통과 역경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었다.

 

심지어 흔한 TV 토크쇼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힘들었고, 고통스러웠던 때를 회상하며

오히려 그 때의 고통이 현재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 역경에게 감사하고,

나를 무너뜨린 그 사람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삶에서 성공하는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괴로움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지혜로운 이는 그것의 목적을 바로 알아 깨닫고,

어리석은 이는 그 고통에 빠져 좌절하고 무너진다.

 

만약 당신이 과거에 지은 죄업으로 인해

죄의식 속에 빠져 있거나,

용서 받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빠져 있거나,

참회해야 할 어떤 것이 있다면,

혹은 지난 날의 악업을 털어 내고 싶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이제 이러한 진리와 이치를 아는 이라면,

더 이상 죄의식에 시달리며

두려움 속에 빠져들어야 할 아무 이유가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 죄업의 과보를 받지 않아도 된다.

어떻게 하면 될까?

깨달으면 되는 것이다.

'좋은 말로 할 때' 깨달으면 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경전의 말씀을 듣고,

설법을 듣고,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용서를 구하고,

참회하고,

그럼으로써 삶을 변화시키면 된다.

 

가르침을 듣고,

참회하며,

수행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음공부를 통해

삶의 이치를 깨닫고,

인과응보의 이치를 깨닫게 되면

더 이상 과보를 받지 않아도 된다.

 

아랫사람을 혹사시키고 괴롭혀 오던 사람이

어느 순간 진리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고,

괴롭힘을 당하던 이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깨닫고,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고통을 준 자기 자신을 용서 해 주고,

참회함으로써,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괴롭히지 않고

사랑과 자비와 나눔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면,

그는 더 이상 죄업의 과보를 받을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사실 그는 1년 뒤부터

직장 상사에게 자신이 행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괴롭힘을 당해야 할 일이 과보로써 예정되어 있었지만,

이제 깨달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 과보를 받을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이 세상을 고해(苦海)라고 한다.

말 그대로 고통의 바다다.

그러나 그 고통에는 다 이유가 있다.

당신이 고해라는 인간계를 선택해 태어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천상세계에만 있으면

너무 좋은 조건, 완벽한 조건만 있기 때문에

삶의 성숙과 깨달음이 더딘 것이다.

 

우린 본래부터 인간이 아니라,

우리의 바탕은 누구나 천사이며 신이고

천상세계의 풍요와 완전함을 누리며 살던 이들이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행복을 박차고

고해인 인간계를 선택해 태어난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고통의 바다인 인간계에서

고통을 통해 크게 성숙하고 깨닫겠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인간들의 공통된 생의 목적인 것이다.

 

그 생의 목적을 생각한다면,

우리 앞에 놓인 고통 앞에서

더 이상 좌절하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원망할 일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고맙고도 감사한

괴로움을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감사해 하고’

‘사랑해 주자’

 

그것이야말로

이 고해의 인간계에서 태어난

생의 목적을 완수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