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과 부처/성철스님
2018. 8. 19. 18:10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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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과 부처(1)/성철스님▒ 불교라고 하면 부처님이 근본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부처냐”하고 물으면 여러가지로 대답할 수 있으나,실제로 어떤 것이 부처라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기는 좀 곤란하다고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근본 원리원칙을 생각한다면 곤란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번뇌망상 속에서 생활하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일체의 망상을 떠난 것을 부처라고 합니다. 또 모든 망상을 떠났으므로 무심(無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중생이라는 한계선은 어디까지인가? 저 미물인 곤충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람을 비롯하여 십지(十地;보살이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 점차인 52위(位)중 제41위로부터 제50위까지 를 말함) 등각(等覺; 보살의 수행단계중 51위의 이름. 부처님의 묘각까지 1등급이 있으므로 등각이라 함)까지 모두가 중생입니다. 참다운 무심은 오직 제8아라야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끊은 구경각(究竟覺) 즉 묘각(妙覺:온갖 번뇌를 끊어버린 부처님의 자리)만이 참다운 무심입니다. 그러면 망상 속에서 사는 것을 중생이라고 하니, 망상이 어떤 것인지 대강 좀 알아야 되겠습니다. 보통 팔만사천 번뇌망상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크게 구분하면 두가지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의식(意識)입니다. 생각이 왔다 갔다 하며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의식입니다. 둘째는 무의식(無意識)입니다. 무의식이란 의식을 떠난 아주 미세한 망상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의식을 제6식(六識)이라 하고 무의식을 제8식(아라야식)이라고 하는데 이 무의식은 참으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8지보살도 자기가 망상 속에 있는 것을 모르고 아라한(阿羅漢)도 망상 속에 있는 것을 모르며 오직 성불(成佛)한 분이라야만 근본 미세망상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 이야기 했듯이 곤충미물에서 시작해서 십지,등각까지 전체가 망상 속에서 사는데, 7지보살까지는 의식 속에서 살고 8지이상 10지,등각까지는 무의식 속에서 삽니다. 의식세계든지 무의식세계든지 전부 유념(有念)인 동시에 모든 것이 망상입니다. 그러므로 제8 아라야 망상까지 완전히 끊어버리면 그때가 구경각이며, 묘각이며, 무심입니다. 그러면 무심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본래의 마음자리를 흔히 거울에 비유합니다. 거울은 언제든지 항상 밝아 있습니다. 거기에 먼지가 쌓이면 거울의 환한 빛은 사라지고 깜깜해서 아무 것도 비추지 못합니다. 망상은 맑은 거울 위의 먼지와 마찬가지이고 무심이란 것은 거울자체와 같습니다. 이 거울자체를 불성(佛性)이나 본래면옥(本來面目)이니 하는 것입니다. 모든 망상을 다 버린다는 말은 모든 먼지를 다 닦아낸다는 말입니다. 거울에 끼인 먼지를 다 닦아내면 환한 거울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동시에 말할 수 없이 맑고밝은 광명이 나타나서 일체만물을 다 비춥니다.우리 마음도 이것과 똑 같습니다.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고 제8아라야식까지 완전히 떨어지면 크나 큰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구름 속의 태양과 같습니다. 구름이 다 걷히면 태양이 드러나고 광명이 온 세계를 다 비춥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도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면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서 시방법계(十方法界)를 비춘다 이 말입니다. 이처럼 일체 망상이 모두 떨어지는 것을 적(寂)이라 하고 동시에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조(照)라고 합니다. 이것을 적조(寂照) 혹은 적광(寂光)이라고 하는데 고요하면서 광명이 비치고 광명이 비치면서 고요하단 말입니다. 우리 해인사 큰법당을 대적광전(大寂光嚴)이라고 하는데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란 뜻입니다. 이것이 무심의 내용입니다. 무심이라고 해서 저 바위처럼 아무 생각없는 그런 것이 아니고 일체 망상이 다 떨어진 동시에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사람이 죽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데 죽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다 떨어지면서 동시에 광명이 온 법계를 비치는 적조가 완전히 구비되어야 참다운 열반입니다. 만약 고요함(寂)만 있고 비춤(照)이 없는 것은 불교가 아니고 외도(外道)입니다. 일체 망상을 떠나서 참으로 견성(見性)을 하고 열반을 성취하면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난 대자유인이 되는데 이것을 해탈(解脫)이라고 합니다. 해탈이란 결국 기신론(起信論)에서 간단히 요약해서 말씀한대로 “일체 번뇌망상을 다 벗어나서 구경락인 대지혜 광명을 얻는다 (離一切苦 得究竟樂)”이 말입니다. 이상으로써 성불이 무엇인지 무심이 어떤 것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참으로 불교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 근본이 성불에 있는 만큼 실제로 적조를 내용으로 하는 무심을 실증(室證)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는게 아니라 근본은 누구든지 다 평등합니다. 평등할 뿐만 아니라 내가 항상 말하듯이 중생이 본래 부처입니다.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명경(明鏡)을 예로 들겠습니다. 이것은 새삼 내가 지어낸 얘기가 아니고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말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명경은 본래 청정합니다. 본래 먼지가 하나도 없습니다. 동시에 광명이 일체만물을 다 비칩니다. 그러니 광명의 본체는 참다운 무심인 동시에 적조, 적광, 정혜등지(定慧等持)이고 불생불멸(不生不滅) 그대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중생이 참으로 청정하고 적조한 명경 자체를 상실한 것처럼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무리 깨끗한 명경이라도 먼지가 앉을 것 같으면 명경이 제구실을 못합니다. 그러나 본래의 명경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먼지가 앉아 있어서 모든 것을 비추지 못한다는 것뿐이지 명경에는 조금도 손실이 없습니다. 먼지만 싹 닦아버리면 본래의 명경 그대로 아닙니까? 그래서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은 명경이 본래 깨끗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자성(自性)이 본래 청정한데 어찌해서 중생이 되었나? 먼지가 앉아 명경의 광명을 가려버려서 그런 것뿐이지 명경이 부춰진 것도 아니고 흠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다만 먼지가 앉아서 명경의 작용을 완전하게 못한다 그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참다운 명경을 구하려면 다시 새로운 명경을 만드는게 아니고 먼지 낀 거울을 회복시키면 되는 것처럼 본래의 마음만 바로 찾으면 그만입니다. 내가 항상 “자기를 바로 봅시다”하고 말하는데 먼지를 확 닦아버리고 본래 명경만 드러나면 자기를 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라고 할 때에 마음의 눈이란 것도 결국 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표현은 천가지 만가지 다르다고 해도 내용은 일체가 똑 같습니다.(계속) ▒중생과 부처(2)/성철스님▒ 그러면 우리 불교에서 말하는 무심(無心)은 세속의 사상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겠습니다. 예전의 고인들의 책이나 얘기를 들어볼 것 같으면 유교, 불교, 도교 유불선(儒佛仙) 삼교가 다르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부당 만부당입니다. 유교라든가 도교등은 망상을 근본으로 하는 중생세계에서 말하는 것으로 모든 이론 모든 행동이 망상으로 근본을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망상을 떠난 무심을 증득한 것이 우리 불교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유교니 도교니 하는 것은 먼지 앉은 그 명경으로서 말하는 것이고 불교는 먼지를 싹 닦은 명경에서 하는 소리인데 먼지 덮인 명경과 먼지 싹 닦아버린 명경이 어떻게 같습니까? 그런데도 유, 불, 선, 이 꼭 같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교의 무심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십지등각(十地等寬)도 중생의 경계인데 유교니 도교니 하는 것은 더 말할 것 있습니까? 중생의 경계. 그것이 진여자성을 증득한 대 무심경계와 어떻게 같을수 있습니까. 그리고 예전에는 유·불·선 삼교만 말했지만 요즘은 문화가 발달되고 세계의 시야가 더 넓어지지 않았습니까? 온갖 종교가 다 있고 온갖 철학이 다 있는데 그것들과 불교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동서고금을 통해서 어떤 종교,어떤 철학할것 없이 불교와 같이 무심을 성취하여 거기서 철학을 구성하고 종교를 구성한 것은 없습니다.실제로 없습니다. 이것은 내가 딱 잘라서 말하는 것입니다. 서양의 어떤 큰 철학자, 어떤 위대한 종교가, 어떤 훌륭한 과학자라고 해도 그 사람들은 모두가 망상속에서 말하는 것이지 망상을 벗어난 무심경계에서 한 소리는 한마디도 없다 그 말입니다. 내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불교에는 부처님이 근본인데 부처님이란 무심이란 뜻 말입니다. 모든 망상속에 사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일체망상을 벗어난 무심경계를 부처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무심이 근본이니만큼 불교를 내놓고는 어떤 종교 어떤 철학도 망상속에서 말하는 것이지 무심을 성취해서 말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을 혼동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만큼 불교란 것은 어떤 철학이나 어떤 종교도 따라올 수 없는 참으로 특출하고 독특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망상속에서 하는 것하고 망상을 완전히 떠난 것 하고를 비교해서 생각해 봅시다. 다시 명경의 비유를 들겠습니다. 명경에 먼지가 앉으면 모든 것을 바로 비치지 못합니다. 먼지를 안 닦고 때가 앉아 있으면 무슨 물건을 어떻게 바로 비칠 수 있겠습니까? 모든 물건을 바로 비출려면 먼지를 깨끗이 닦아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망상속에서는 모든 사리(事理), 모든 원리, 모든 진리를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망상이 눈을 가려서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모든 진리를 바로 알려면 망상을 완전히 벗어나서 무심을 증(證)하기 이전에는 절대로 바로 알 수 없습니다.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하여 무심을 완전히 증득한 부처님경계(佛境界) 이외에는 전부 다 사지사견(邪知邪見)입니다. 대신에 모든 번뇌망상을 완전히 떠나서 참다운 무심을 증득한 곳, 즉 먼지를 다 닦아낸 깨끗한 명경은 무엇이든지 바로 비치고 무엇이든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정지정견(正知正見)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세상의 모든 종교나 철학은 망상 속에서 성립된 것인만큼 사지사견이고 정지정견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정지정견은 오직 불교 하나 뿐입니다. 결국 바로 보지 못하고 바로 알지 못한다고 하면 행동도 바로 못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눈감은 사람이 어떻게 바로 걸을 수 있겠습니까? 먼지 앉은 명경이 어떻게 바로 비칠 수 있겠습니까? 망상이 마음을 덮고 있는데 어떻게 바로 알 수 있으며 어떻게 바로 볼 수 있으며 바른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른 행동(正行)이라 하는 것은 오직 참으로 무심을 증해서 적광적조(寂光寂照)를 증하기 전에는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부처냐? 하고 물었을 때 바로 알고, 바로 보고, 바로 행하고, 바로 사는 것이 부처다 이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누구나 다 바로 알고 싶고, 바로 보고 싶고, 바로 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캄캄해서 눈 감은 봉사가 되어 있는데 어떻게 바로 살 수 있겠습니까? 쉽게 말하자면 바른 생활을 하자는 것이 불교인데 망상 속에서는 바른 생활을 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오직 무심을 증해서야만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지등각도 봉사입니다. 왜냐, 부처님께서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십지등각이 저 해를 보는 것은 비단으로 가리고 해를 보는 것과 같아서, 비단이 아무리 엷어도 해를 못 보는 것은 보통의 중생과 똑 같습니다. 그래서 십지등각이 사람을 지도하는 것도 봉사가 봉사를 이끄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바로 이끌려면 자기부터 눈을 바로 떼야하고, 바로 알아, 바로 행동해야 되겠습니다. 이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간추려 말해보면 망상 속에 사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모든 망상을 벗어난 것을 부처라 합니다. 모든 망상이 없으니 무심입니다. 그러나 그 무심은 목석(木石)과 같은 무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울의 먼지를 완전히 다 닦아 버릴 것 같으면 모든 것을 비치는 것과 같으며 구름이 걷히어 해가 드러나면 광명이 비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망상이 나지 않는 것을 불생(不生)이라 하고 대지혜 광명이 항상 온 우주를 비치는 것을 불멸(不澈)이라 하는데 이것이 무심의 내용입니다. 이 무심은 어떤 종교, 어떤 철학에도 없고 오직 불교밖에 없습니다. 또 세계적으로 종교도 많고 그 교주들의 안목도 각각차이가 있습니다만 모두가 조각조각 한 부분밖에 보지 못했단 말입니다. 불교와 같이 전체적으로 눈을 뜨고 청천백일(靑天白日)같이 천지만물을 여실히 다 보고 말해놓은 것은 실제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불자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노력해서 실제 무심을 증해야 되겠습니다. 밥이야기 천날 만날하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직접 밥을 떠먹어야지요. 그렇다고 해서 없는 무심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본래 무심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 입장입니다. 내가 자꾸「중생이 본래 부처다.」하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중생들밖에 없는데 중생이 본래 부처란 거짓말이 아닌가?」하고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아까 명경의 비유는 좋은 비유가 아닙니까. 먼지가 앉은 중생의 명경이나 먼지가 다 닦인 부처님 명경이나 근본 명경은 똑같습니다. 본시 이 땅속에 큰 금광맥이 있는 것입니다. 광맥이 있는 줄 알면 누구든지 호미라도 들고 달려들 것 아닙니까? 금덩이를 파낼려고 우리가「성불! 성불!」하는 것도 중생이 어떻게 성불하겠느냐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아닙니다. 본래 부처입니다. 그러니 본래면목, 본래의 모습을 복구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란 것을 확실히 자신하고 노력하면 본래 부처가 그대로 드러날 것이니 자기의 본래모습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화두만 부지런히 부지런히 하여 우리의 참모습인 무심(無心)을 실증(實證)합시다. 가슴시린 노래모음 100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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