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와 같다 /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2018. 10. 13. 11:0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시 [禪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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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살펴보면 현상은 있지만 실체는 없다.

현상이 그대로 실체이고, 실체가 그대로 현상일 뿐이다.

그래서 생겨나지만 실제로 생겨난 것이 아니요,

사라지지만 정말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허깨비 같은 변화는 원인도 없고 또한 생겨남 없으니     幻化無因亦無生
모두가 곧 저절로 그러하여 이와 같이 보아야 하네        皆卽自然見如是
모든 현상은 저절로 변화하여 생겨나지 않은 것 없으니  諸法無非自化生
허깨비 같은 변화는 생겨남 없어 두려울 것 없네          幻化無生無所畏

모든 것은 창공의 뜬 구름이나 물 위에 비친 그림자와 같다.

분명 작용하고 있지만 어디에도 그 실체는 없다.

그렇다면 그 작용마저 있어도 있는 게 아니다.

있어도 있는 게 아니요, 없어도 없는 게 아니다. 다만 그럴 뿐이다.

대 그림자 계단을 쓸어도 먼지 일지 않고 竹影掃階塵不動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물에는 흔적 없네. 月輪穿沼水無痕

(손바닥으로 바닥을 탁 !탁! 두드리며) 다만 이러할 뿐이고, 다만 이러할 뿐이다.

연못가에 홀로 앉았다가                       池邊獨自坐
우연히 연못 밑의 중을 만났네               池底偶逢僧
말없이 웃으며 서로 바라보는 것은          默默笑相視
그대에게 말해도 대답 않을 줄 알기 때문  知君語不應


- 몽지의 원각경 강설 30


●大同江 - 鄭智常 (대동강 -- 정지상)


雨歇長堤草色多 (우헐장제초색다)   비 개인 긴 언덕에 풀빛도 많은데

送君南浦動悲歌 (송군남포동비가)   남포로 님 보내는 구슬픈 노래 울리나니

大同江水何時盡 (대동강수하시진)   이 대동강 물은 언제나 다 마르리

別淚年年添綠波 (별루년년첨록파)   해마다 이별 눈물이 물결을 더하는 것을.


● 정지상

琳宮梵語罷 (임궁범어파)   임궁에 염불소리 끝나니

天色淨琉璃 (천색정유리)   하늘색이 유리같이 깨끗하구나.






 

+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 서정주

외할머니네 집 뒤안에는 장판지 두 장만큼한 먹오딧빛 툇마루가 깔려 있읍니다.
이 툇마루는 외할머니의 손때와 그네 딸들의 손때로 날이날마닥 칠해져 온 것이라 하니

내 어머니의 처녀 때의 손때도 꽤나 많이는 묻어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하도나 많이 문질러서 인제는 이미 때가 아니라

한 개의 거울로 번질번질 닦이어져 어린 내 얼굴을 들이비칩니다.
그래, 나는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되게 들어 따로 어디 갈 곳이 없이 된 날은,
이 외할머니네 때거울 툇마루를 찾아와, 외할머니가 장독대 옆 뽕나무에서 따다 주는,
오디 열매를 약으로 먹어 숨을 바로 합니다.

외할머니의 얼굴과 내 얼굴이 나란히 비치어 있는
이 툇마루까지는 어머니도 그네 꾸지람을 가지고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정희 3집 - 어젯밤 일기 / 하늘의 별이되어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