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 법륭선사 심명(心銘)

2018. 11. 25. 11:0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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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 법륭선사 심명(心銘) 


참 본성은 생기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려고 하며, 보려고 하는가?

  


본바탕은 단 하나의 티끌조차  없는데

닦으며 익힌다고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



  

가고 되돌아 오는 것은 아무 까닭이 없이 저절로 그러하니

아무리 좇아 다니며 찾아보아도 전혀 볼수가 없다네.

  


온갖 행위를 억지로 짓지만 않는다면

밝고 고요한 본체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네. 

 

생각이 나오기 이전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그것을 안다고 말 한다면 본바탕은 잃어 버리네.

 

만물을 나눠서 비추어 본다면 경계만 만드는 일이니

비추어 보는 족족 따라다니면 멍청해지고 어두워만 진다네. 

 

한 생각이라도 걸림이 있다면               

모든 법이 통하지 못하고 막혀버리나니 

 

생각들이 오고 가는 것은 저절로 그러한 것이므로

생각을 비우려고 쫏아다니며 애쓰는 것은 헛수고 일 뿐일세.

 

생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서로 간의 관계만 일어나는 것이니

생기는 것과 그것을 주시하는 것은 다 똑같은 하나라네.

 

깨끗한 마음을 얻고자 하려면

생각이 전혀 없는 무심만이 쓸모가 있다네.

 

이것 저것 비추어 보는 것이 없어져야

가장 미세한 경지이고, 가장 신묘한 깨침이니,

  

만법의 이치를 깨닫는다는 것은 앎이 없는 것이며

알음알이가 없는 것이 앎의 요체이니라.  


만일 마음(생각)을 이용하여 억지로 고요함을 지켜려고 한다면

오히려 번뇌의 병에서 벗어나지 못하나니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마저 모두 잊어버린 무심경지,

바로 이것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참된 성품이라네.

 

완전한 진리는 말로 설명할 것이 전혀 없으며,

풀리는 것(해탈)도 아니고,얽히는 것(속박)도 아니네.

 

신령스럽게 전체에 통하고 만물에 응하는 것이지만

항상 지금 여기 내앞에 그대로 있는 것이네.

 

지금 여기 내앞에 아무것도 없으니

아무것도 없는 것이 있는 그대로 완연한 것이네.

 

지혜로 비추어 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본체 그 자체는  텅 빔이며, 깊고 깊은 어둠이라네.

 

생각들이 일어 났다 생각들이 사라지지만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과 사라진 이후는 다르지 않나니,

  

뒤의 주시하는 앎이 생기지만 않는다면

앞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생각들도 저절로 끊어질 것이네.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서 아무것도 없으니

마음도 없고 부처도 없느니라.

 

중생이 무심하면,

없음(無)에 의존해서 마음(心)이 나온다네

 

범부니 성인이니 분별하기 때문에

번뇌가 더욱 번성하는 것이니, 

 

헤아리고 생각하는 것이, 있는 그대로 불변인 것을 더욱 헤쳐놓으니,

참된 것을 구하려다가,  옳바른 길을 등져 버린다네.

 

상대적인 경계가 서로 합쳐져 사라지면

저절로 본바탕의 맑고 밝음 속에 잠기게 되나니. 

 

불필요하게 일을 억지로 만들어서 애쓰지 말고

갖난아이처럼 그냥 천진무구하게 지내시게.

 

분명하고 또렸하게 알아차렸다고 한다면

오히려 본다는 그물에 더 깊히 걸려드는 것이고,

 

고요 고요하여 아무것도 보는 바가 없다고 한다면

캄캄한 굴속에 파뭍혀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네.

 

또롯 또롯 깨어있으면서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으면

마음은 고요 고요 하면서도 밝은 지혜가 환하게 비춘다네.

 

온갖 다양한 모양들은 있는 그대로 참된 것이고

온갖 다양한 경계들은 모두가 다 똑 같은 하나라네.

 

오고 가며, 앉고 서 있을 때, 언제 어디서든

(경계에) 붙잡히지 않고 전체와 하나가 되나니,

 

특별하게 정해져 있는 방향과 처소가 없는데

어디를 들어가고 나가야 할 곳이 있겠는가?

 

하나로 합칠 것도 없고,사방으로 흩어질 것도 없으며

더디게 된다는 것도 없고, 빠르게 된다는 것도 없다네.

 

밝고 고요한 깨달음은 저절로 그렇게 있는 것이니,

도저히 말로는 이야기하기가 어렵다네

 

본마음 이외에 또 다른 마음은 없나니

탐욕과 음욕을 끊을 것도 없네

  

성품은 비어있어 (탐욕이) 스스로 떨어지니

흐름에 떠맡겨져 떳다 잠겼다 할 뿐이네.

 

(마음은) 맑지도 않고 흐리지도 않으며

얕지도 않고 깊지도 않느니라.

  

본래부터 있는 것은 옛것(낡은 것)이 아니며

현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현상)은 지금이 아니라네.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현상)은 머물러 있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현상) 자체가 본바탕의 마음일세 

 

본래부터 아무것도 없나니

본래부터 바로 지금이라네

 

깨달음은 본래부터 있는 것이므로

따로 지키고 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네.

  

번뇌는 본래부터  없는 것이므로

따로 제거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네.

 

신령스러운 지혜가 스스로 비추어                        

모든 법이 바탕으로 돌아가면                              

  

돌아갈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으니                        

본다는 것도 끊어지고 지킨다는 것도 잊어버리네.     

 

네 가지 덕은 생겨 난 적이 없고                            

세 가지 몸은 본래부터 (바탕에) 있는 것이니라.        

 

 육근이 경계를 대해서                                          

분별하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네.                           

 

한 마음에는 거짓됨이 없으니 

온갖 것과의 관계가 바르게 조화를 이루네.              

 

 마음의 바탕은 본래 가지런하여                            

함께 있지만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생겨 남이 없으나 만물에 응하고                              

곳곳마다 보이지 않게 스며 있네.                          

 

깨달음이란 깨닫지 못함 때문이니                         

깨달으면 곧 깨달음이 없느니라.                           

  

얻음과 잃음의 이원화 속에서                     

어떻게 좋고 나쁨을 논할 수가 있겠는가.

 

일체의 모든 작용이 있다는 것은

원래부터 조작됨이 없다는 것이네.

 

마음을 아는 것은 마음일 수가 없으니

병이 없으면 약도 없느니라.

 

미혹할 때는 다른 대상들을 버리려 하지만

깨달으면 깨달음마저 놓아 버리나니

  

본래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지금 버린다고 함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소위 마군(망상)이 일어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공허한 형상(몸)을 (자기자신으로서) 갖추고 있다는 말이네,

 

범부의 망정을 억지로 없애려고 애쓰지 말고

오직 그런 생각(없애려는 의지)들을 그치라고만 가르쳐 주는 것이라네.

 

생각(의지)이 없으면 마음도 없어지고

마음이 없으면 행동도 끊어지나니

 

쓸데없이 空을 체득하려고 애쓰지만 않는다면

자연히 밝고 분명해 지리라.

 

생사심(生死心)이 완전히 없어져 다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컴컴한 마음이 되어 그 본바탕으로 들어가고

 

눈을 뜨고 깨어 있으면 모양을 보게 되어

마음이 경계를 따라서 일어난다네.

 

마음의 주의를 경계(대상)에 두지 않으면

경계가 있을지라도 무심할 뿐이니,

 

만일 마음을 가지고 경계를 없애려 한다면

마음과 경계가 서로간에 영향을 주고 받게 된다네. 

 

마음이 고요하면 경계도 그대로 여서

구하려 하지도 않고 버리려고 하지도 않는다네.

 

경계는 마음을 따라서 없어지고

마음은 경계를 따라서 없어진다네.

 

마음과 경계 양쪽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고요하고 텅 비어 밝아질 것이네.

 

깨달음은 (물위의)그림자처럼 나타나지만

마음의 물은 항상 맑느니라

 

덕의 성품이 겉으로는 어리석은 듯이 보이나

친함과 친하지 않음을 마음에 두지 않으므로

 

칭찬과 모욕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며

따로이 머물 곳을 찾아 다니지도 않으니.

 

모든 반연을 단번에 쉬어 버려서

아무것도 생각하는 것이 없다네.

 

영원히 밝은 대낯은 어두운 밤같이 컴컴하게 보이고

영원히 어두운 밤은 밝은 대낯처럼 환해 보이나니,

 

겉으로는 어리석고 완고한 것처럼 보이긴 하나

내면의 마음은 곧게 비어 있다네.

 

경계에 맞주칠지라도 꿈쩍도 하지 않으니

이런 이가 바로 힘이 있는 대장부라네.

 

보는 주체가 없으니 봄의 작용도 없으며

봄이 없는 작용이 그대로 항상 (맑게) 드러나 있다네.

 

일체에 통달하면

두루하여 원만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만,

 

생각이 일어나면 미혹 속으로 들어가

정신이 혼란 속으로 빠지게 되나니

 

만약 마음으로 움직임을 그치려고 한다면

그 그침이 다시 시끄러움으로 변한다네.

 

만법은 일정하게 머무는 곳이 없으며

오직 단 하나의 문만이 있을 뿐,

 

들어감도 없고  나감도 없으며

고요함도 없고 시끄러움도 없다네.

 

성문,연각(중,하근기)의 지혜를 가지고는

이것을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네.

 

실제로는 한 물건도 없는데

미묘한 깨어있음은 홀로 남아 있나니,

 

근본에 이르르게 되면 텅빈 듯 꽉 차 있지만

마음으로는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 근본바탕이네.

 

옳바른 깨달음은 깨달았다는 느낌이 없고

참된 空은 空이라고 할 것이 없네.

 

과거,현재,미래 삼세의 부처님들이

모두가 이 바탕 종지에 의거했거늘

 

이 바탕의 한터럭 끝(점)에

온 시방세계를 모두 머금고 있느니라

 

어느 곳도 (밖으로)돌아 볼 것이 없나니

안정된 (바탕)마음은 머무르는 곳이 없네.

 

머무는 곳이 없으면 마음이 평안해 지나니

텅 비고 밝아져서 저절로 맑은 이슬처럼 된다네.

 

고요함이 고요하여 망상이 생기지 않으면

사방 팔방으로 두루하게 펼쳐져서 널리 비추나니.

 

(그렇게 되면) 하는 일마다 걸림이 없으므로

움직이든 머무르든 언제나 한결같도다.

 

지혜의 태양은 고요 고요하고

움직임 없는 빛은 밝고 밝나니

 

무상(無相)의 정원을 비추니

열반의 성 안이 밝아지네.

 

온갖 반연된 것을 잊는 것으로 끝내니

일체가 움직임 없는 절대 신이라고 말하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빈방에서 편안하게 잠든다네.

 

만일 도를 즐김이 이렇게 묶이게 된다면

넉넉하게 노니는 그대로가 참된 것일세

 

억지로 할일도 없고 얻을 것도 없으니

없음에 의지해서 저절로 (모든것이) 나타나게 되나니.

 

사성제와 육바라밀이

똑같이 일승의 길이나

 

만약 마음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법에는 서로간에 아무 차별도 없으리라.

 

나도(生) 남이 없는 (無生) 줄 알면

눈 앞에 항상 도가 있느니라.

 

지혜로운 이는 마땅히 알지니

말로써 깨우칠 바가 아니니라.










 
  [7080 애잔한 노래모음] - 홀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