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1. 09:59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사실 그건 나에게 생겨난 어떤 문제가 아니라,
중립적인 어떤 일이
그저 존재 위를
가볍게 스쳐지나가고 있는 것일 뿐이다.
'나'에게
'온',
'큰 문제'가 아니라,
나라고 동일시 하고 있는 어떤 존재가
큰 문제라고 착각하며
거기에 머물러 사로잡혀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 뿐이다.
외부의 어떤 문제가,
내부의 나라는 존재에게 다가와
실제로 주먹을 한 방 날린 것이 아니다.
그저 공원의 의자에 앉아
온종일 오고 가는 다양한 사람들, 사건들을 구경하듯
그저 그 모든 일들이 그렇게 오고 가도록 내버려 둘 수도 있었다.
다만 그러지 못 한 채,
그 텅 빈 삶이라는 공원 속의
어떤 사람과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집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모든 문제는 생겨난다.
외부에서 온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만들어 낸 환영 같은 것이다.
문제를 당한 '나'도 진짜가 아니고,
그 문제라는 것 조차 진짜가 아니며,
그 문제가 내게 와서 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 또한 환상이며
이 모든 것이 마음이 꾸며낸 것에 불과하다면 어찌할텐가.
그 꾸며내고 조작하며 판단 분별하면서
온갖 문제와 고통을 만들어내는 놈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이제 관심가질 때도 되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우리는 당할만큼 충분히 당해줬다.
언제까지고 계속 당하고만 있을텐가.
그 놈이 뭔 짓을 꾸미고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나를 농락하고 있는지를
이제부터는 한 번 알아보자.
관찰 해 보자.
그러려면 내부로 들어가
마음을 관찰해야 한다.
붓다는 마음을 수상행식이라고 했으니,
느낌과 생각과 욕구와 분별을 낱낱이 관찰 해 보는 것이다.
느낌, 생각, 욕구, 분별이 일어날 때
그것을 나라고 동일시 하지 말고,
저만치 떨어져 바라보고 주시 해 보라.
그 마음들은 실체가 없이
그저 텅 빈 허공 위를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내가 그것을 붙잡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떤 특정 상황 속에서
인연따라 일어나는 감정과 생각과 욕구와 분별들을
나라고 여기며 붙잡지 말라.
앞 차가 끼어들기를 한다는
중립적인 한 사건이 삶 위를 지나간다.
곧장 마음은 문제를 양산해내는 작업을 시작한다.
먼저 감정이 앞장서서 화를 일으키고,
연이어 생각도 적극 나서서 거든다.
'저런 몹쓸 놈 같으니라구'
의지와 욕구는 한 발 더 나간다.
'경적을 길게 울리고,
뒤를 바짝 좇아가서는 창문을 열어 실컷 욕설을 퍼 부으라구!'
이 느낌, 생각, 욕구의 즉각적인 행동을 종합하여
분별심은 결론 내리듯 말한다.
'나쁜 놈 같으니라구. 나를 우습게 본단 말이지.
너같은 놈은 한 번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차에서 내려 한 방 먹여 줘야겠군.'
그러면서 또 다시 생각, 느낌, 욕구는
계속해서 돌고 돌며 더 크고 많은 마음의 작용을 만들어 낸다.
어쩌면 어떤 사람은 싸움이 붙어
경찰서 까지 갈 지도 모르고,
또 어떤 사람은 싸움이 붙었다가
병원신세가 될 지도 모른다.
최초 앞차가 끼어들었다는 단순한 상황이
이렇게까지 커지며 온갖 문제를 만들어 낸 것이다.
관세음보살!
이러면서 지금까지 우리 인생에 깊이 끼어들어
온갖 문제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 일도 아닌 것을 크게 부풀려
심각한 문제로 확대 해석해 만들어내고,
또 다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그런 소모적인 일상을 끝내고,
본래부터 고요하던 텅 빈 가운데
단순히 존재하는 깨어 있는 삶으로 회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로운 삶의 길이다.
그럴 때 온갖 종류의 삶이 흘러가기는 할 지언정
깊이 개입되지 않은 채
한 발 떨어져 영화 보듯
삶을 단순히 흥미롭게 지켜보는 관찰자가 될 것이다.
그 모든 사건, 사고, 벌어지는 일들 가운데에서도
당신은 언제나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
그 모든 것을
한가로이 구경하듯 바라보는
지구별의 여행자가 될 것이다.
삶에 개입하여
살아가기는 할 지언정
그것이 진짜라고 믿고,
화내고 욕심부리며
온갖 문제를 만들어 내지는 않을 것이다.
삶은
저만치서 흘러가고,
당신은
한 발 뒤로 물러나
관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