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박자 수행|…… 혜천스님설교

2019. 1. 6. 12:3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728x90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불기2555년 10월16일 

삼박자 수행

 

경에 보면, 진실불허(眞實不虛)라는 글귀가 나옵니다. 반야심경에도 진실불허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 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이와 똑같은 주문은 그 어디에도 없는 주문이니, 늘 외우게 되면 모든 괴로움을 없애주고, 또 진실하여 거짓이 없으리니, 이제 크나 큰 지혜를 많이 펼칠 수 있는 주문을 말하리라.) 진실불허는 진실해서 거짓되지 않는다, 진실해서 거짓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진실해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진실해야 합니다. 거짓이 없는 것이 진실입니다. 진실이 무엇인가요? 진실해야 거짓이 없다는 것은 몽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망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환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현실적으로 실증되는 것, 와서 보라고 확인시켜 줄 수 있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진실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실증시켜 주고, 확인시켜 줄 수 있는 것이 진실입니다. 실증시키지 못하고, 확인시켜 줄 수 없다면, 진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학이라고 하는 용어를 씁니다. 과학이 무엇입니까? 과학은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실험했을 때, 똑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안되면, 환상에 불과합니다. 실증되고 확인되는 것이 진실입니다. 진실이라고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실증되지도 않고 확인되지도 않으면,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경전 중에 우다나(Udana)라고 하는 자설경잉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대개 문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니까야에 보면, 이 말씀과 저 말씀이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데, 그 이유는 질문자가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답하기 때문입니다. 자설경이란 누가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설하셨다고 해서, 자설경(自設經)입니다.

 

실증되지도 확인되지도 않으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자설경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일구월심 사유하던 붓다에게 모든 존재가 밝혀지던 그 날, 모든 의문은 사라졌다. 연기의 도리를 알았으므로."  여기서 연기의 도리를 알았다고 하는 것은 실증하고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실증하고 확인하는 것, 이것이 진실입니다. 부처님은 스스로 확인하고 실증한 것을 45년간 설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무엇을 확인했을까요? 그것이 연기입니다.

 

우리는 수행한다고 앉고, 걷고, 눕고, 먹죠. 우리가 수행할 때 수행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사실 우리는 수행의 의미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앉죠, 수행의 의미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경행을 합니다. 수행의 의미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먹죠. 수행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면, 의문을 갖는 것입니다. 수행에 의문을 갖는 것, 그리고 그 의문에 질문하는 것,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 답을 구하는 것, 그것이 수행입니다.

 

부처님이 보리수좌에 앉은 것은 의문을 갖고 앉은 것입니다. 그리고 답을 구했다는 것은 실증하고,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의문을 갖고, 질문을 하고, 답을 구하는 것은 수행의 3박자입니다. 의문을 갖지 않고, 질문하지 않고, 답을 구하지 않는 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그것은 테크닉에 불과합니다. 수없는 사람이 수행을 한다고 앉고, 걷고, 눕지만,그들이 거기에만 그치는 이유는 의문을 갖지 않고, 그 의문에 질문하지 않고, 그 질문에 답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행이 일종의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형식화한 것입니다. 만약 부처님이 의문을 갖고 질문하지 않았다면, 실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보리수좌에서의 깨달음을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부처님이 무슨 의문을 갖고, 무슨 질문을 했으며, 어떻게 답했는지,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오늘날 수행에는 의문이 없습니다. 의문이 없으니,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답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아이들은 3~4살 때, 끊임없이 엄마에게 의문을 가지고 질문합니다. "엄마 왜? 엄마 왜 그것하면 안되는데?" 처음에는 대답하지만, 나중에는 성가시고 귀찮아지죠. 내가 답하기 어려워 질문을 잘라 버리죠. 이렇게 되면, 아이는 더 이상 의문을 갖지고 않고, 질문도 하지 않죠. 지금 불교가 그렇죠. 

 

끊임없이 의문을 가지고, 그 의문을 질문하고, 거기에 답을 구해야 합니다. 어느 날 부터인가 우리는 의문도 품지 않고, 질문도 하지 않고, 답을 구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확인할 수도, 실증할 수도 없습니다. 실증할 수도 확인할 수도 없는 것은 거짓입니다. 

 

소위 황우석 사건을 보면, 지지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이 나눠져 격렬한 논쟁을 했죠. 왜 황우석의 주장이 거짓으로 판명났나요? 황우석의 주장을 다른 사람들이 실증하고, 확인해야 하는데,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황우석 본인조차 그의 주장대로 결과를 보여주지 못했으니까요.  과학은 거짓이 아닙니다. 과학은 속일 수 없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실험하면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합니다.

 

확인되지도, 실증되지도 않으면, 그것은 망상, 몽상입니다. 저번에도 망상 얘기를 했습니다만, 망상은 현실세계에서 실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상상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확인시켜 주지 못하면 그것은 망상입니다. 현실에서 확인시켜 주면, 창의력이죠. 부처님이 가르침은 와서 보라고 해서 확인시켜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수행은 확인시키고, 실증시켜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관념의 유희가 아닙니다. 수행이 관념의 유희가 되는 것은 의문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문을 가지고, 그 의문에 질문하고, 그 질문에 답을 구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의문을 갖지 않고, 질문하지 않고, 답을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하나의 기술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경을 읽을 때, 경에 아무런 의문이 없으면, 그리고 의문을 질문하지 않으면, 그래서 질문이 없으면 답을 구할 수 없습니다. 경을 읽는다는 것은 의문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경을 읽는다는 것은 질문을 갖는 것입니다. 경을 읽는다는 것은 답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맹목적으로, 누가 그렇다고 해서 그걸 추종해서는 안됩니다.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 그걸 믿음으로 포장하죠. 그러나 맹목적인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을 믿는 이유에 대해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했습니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을 토마스 아퀴나스가 천주교 교리로 조직했죠. 신의 존재는 증명되지 않는다. 이것은 불합리하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교는 다릅니다. 불교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확인되고, 실증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불교는 불합리한 것을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실증할 수 있는 것, 내가 확인 할 수 있는 것, 그래서 내가 알 수 있는 것, 그게 수행이고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끊임없이 의문을 가지고, 그 의문을 질문하고, 그 질문에 답을 구해야, 실증하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수행한다고 앉아 있는 것이 보람있게 됩니다. 시간이 남아 돌아 앉아 있고, 경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문의 갖고, 질문을 하고, 답을 구하는 것은 3박자 수행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것에 적용되는 얘기입니다. 수행은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 일상의 삶 자체가 수행입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의문을 갖고, 그 의문을 질문하고, 그 의문에 답을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수행입니다. 일상을 떠나서 깨달아야할 다르마는 없습니다. 다르마는 우리 일상 속에 있습니다. 일상이 다르마의 법칙인 동시에 우주의 법칙입니다. 우리는 일상과 수행을 분리해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존재적 삶 자체가 그대로 수행입니다. 부처님은 끊임없이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갖습니다.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갖고, 질문을 하고, 답을 구합니다.

 

나라는 존재도 모르는데 무슨 우주를 논하는가?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겠습니다. 자기 한 몸도 주체하지 못하면서, 도대체 누굴 어쩌겠다고 하는가? 나조차 안심적요하지 못하면서, 누굴 안심적요하겠다고 하는가? 인간조자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슨 우주를 이야기 하는가? 도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천지자연과 우주를 논하죠. 왜 그런가요? 그것은 실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손해 날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그 의문을 질문하고, 그리고 답을 구해서 실증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데, 누굴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수행은 자기 자신을 만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의문을 가지고 자기자신을 만나는 것이 수행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만나는 것입니다. 나를 떠나서는 그 어떠한 것도 의문을 갖고, 질문을 하고, 답을 구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대상에 의문을 갖고, 질문을 하고, 답을 구하는 것은 잘 하죠. 그러나 나에 대해 의문을 갖고, 질문을 하고, 답을 구하는 것은 잘 몬하죠. 나조차 모르는데 어찌 대상을 알 수 있단 말입니까? 나를 알면, 대상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 존재를 알면, 우주를 알 수 있습니다. 아직 걸음마도 못뗀 아이가 우샤인 볼트처럼 씽씽 달리기를 바라는 것과 같죠. 나를 아는 것은 걸음마를 떼는 것입니다. 물론 우샤인 볼트도 걸음마부터 시작했습니다. 우샤인 볼트도 그와같이 달리기 위해서는 걸음마부터 시작하죠.

 

수행의 요체는 의문을 갖는 것입니다. 수행의 요체는 존재에 의문을 갖는 것, 나 자신에 의문을 갖는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해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것입니다. 수행은 나를 만나는 것입니다. 다음 주 토요일에 봉정암을 갈 것입니다. 가면서 행선을 할 것입니다. 봉정암을 가는 것은 누굴 만나러 가는게 아닙니다. 나를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나는 나를 모르고서도 대상을 알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 자신을 모르는데 어찌 대상을 알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신을 안심적요할 수 없으면, 대상을 안심적요시킬 수 없습니다. 수행은 관념이 아닙니다. 수행은 기술이 아닙니다. 수행은 환상이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수행에서 일관되게 삔냐타(Paññatta) 빠라마타(Pramatta)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삔냐타는 실재가 아닙니다. 관념, 환상입니다. 빠라마타는 실재하는 본질, 즉 확인되는, 증명되는 것입니다. 지금 수행에는 이 3박자 리듬이 없습니다. 이 3박자 리듬이 없으니 당연히 흥겹게 춤출 수 없죠. 아메리카로 건너간 백인들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사냥해 노예로 부렸죠. 흑인노예들을 열심히 일하게 하기 위해 감독관이 채찍을 들고, 매를 댑니다. 흑인노예들도 일하느라 힘들지만, 땡볕의 감독관들도 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감독관은 일터에서 돌아오면, 노예들에게 흥겹게 춤추고 노래하라고 했죠. 흑인 노예들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너희들 감독하느라 힘들었으니, 춤과 노래로 우리를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노예는 낮에는 노동을 하고, 해가 지면 감독관을 위해 춤추고 노래했죠. 흑인 음악은 거기에 기원합니다. 그러니 어찌 흑인 음악이 흥겹겠습니까?

 

수행은 춤을 출 때 리듬을 타듯, 흥에 겨워 춤을 추는 것입니다. 흥에 겨워 춤을 추면, 밤새도록 춥니다. 즐겁기 때문입니다. 의문, 질문, 실증은 3박자 리듬입니다. 우리는 이 리듬을 못타 30년을 수행했다는 사람도 헛소리를 늘어 놓습니다. 30년을 수행했으면, 뭔가 달라져야 합니다. 수행해서 달라지는게 없다면, 수행이 아닙니다. 수행을 30년 했는데도 달라지는 게 없는 것은 왜일까요? 그저 남이 앉으니 앉고, 남이 걸으니 걷는 것입니다. 의문이 없습니다. 의문이 없으니 질문도 없죠.

 

의문은 악사와 같습니다. 훌륭한 악사의 연주는 질문과 같습니다. 처음으로 공간에서 김덕수 사물놀이패가 사물을 연주했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우리 국악은 낡은 것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머리 허연 노인들이 즐기던 것이었습니다. 사물놀이 연주는 국악의 새장을 열고 해외에 나가서 연주하기 시작했죠. 외국의 그들은 동양의, 한국이 사물놀이에 대해 아는 것이 없지만, 흥겨워 했습니다. 왜일까요? 음악은 만국의 공통어로 리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깨춤이 절로 나고, 저절로 엉덩이가 씰룩씰룩하는 것입니다. 의문은 악사입니다. 질문은 악기를 연주하는 리듬입니다. 춤을 추는 관객은 답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수행에는 리듬이 없습니다. 악사가 없습니다.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음악인들이 무엇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즐거워서 노래하고, 연주하는 것입니다. 즐거워서 연주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도 즐거운 것입니다. 그래서 연주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돈을 던져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결코 속일 수 없죠. 좋은 연주자, 좋지 않은 연주자는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왜 부처님께서는 진실을 와서 보라고 하고, 실증하는 것이라고 얘기할까요? 누구의 후신이라는 둥, 자기만이 깨달았다는 둥, 도를 깨쳐 하늘과 교통한다는 둥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그저 가을 낙엽처럼 많습니다. 뭐라고 주장해도 관계없습니다. 실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증되지 않고, 확인되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즉 국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거기서 아주 좋은 상을 받은 사람은 현장에서 시연해 보여줘야 합니다. 왜 그런지는 그림 그리신 분들은 다 압겁니다. 내 그림에 선생의 붓질 몇 번이면 확 달라집니다. 서당의 학동 글씨도 선생의 붓질 몇 번으로 확 달라집니다. 수행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삶 속에서 수행이 묻어나지 않으면, 수행이 아닙니다. 깨달았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낙엽이나 모래알 만큼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실증하고, 확인시켜 줄 수 있냐고 하는 것입니다. 직설적으로 표현하겠습니다. 그의 깨달음이 내게 이익을 주지 않으면, 그 깨달음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부처님의 깨달음, 즉 다르마의 체현이 가치있는 것은 우리에게 이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익을 주기 때문에 가치있는 것입니다. 그림 속 스포츠카가 아무리 좋아도 타고 갈 수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공재 윤두서는 말 그림 잘 그리기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의 그림 속  잘 그린 말도 우리집 조랑말, 노새만 못합니다. 그 그림을 다리에 끼고 서울을 갈수 없으니까요. 아마 끼고 가다가는 귀찮아 찢어버릴 것입니다. 그림 속 천리마보다 늙어빠진 내 노새가 서울가기에는 낫다는 것입니다. 실용적이라는 것입니다. 설사 그가 깨달았다고 해도, 그 깨달음이 그의 머리 속에만 있다면, 그래서 보여 줄 수도, 확인시켜 줄 수도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수행은 일상의 삶입니다. 수행은 일상의 삶에 의문을 갖고, 질문을 하고, 답을 구하는 3박자입니다. 악사, 악사가 연주하는 리듬, 관객과 같죠. 우리는 지금 자기만이 진정한 악사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만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경허는 줄이 없는 거문고를 연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내가 줄이 없는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는데, 네가 그 음악을 못 듣는 것은 네가 무지하기 때문이다." 거문고에는 줄이 걸려 있어야 연주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관념의 유희를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의문을 갖고, 답을 구하면 됩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수행을 한다고 다리를 꼬고 앉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과학과 달라 똑같은 과정을 체험해도 결과가 다릅니다. 성장과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부가 위빠샤나를 하면, 그들 식으로 확인합니다. 불교식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같다면 옳고, 나와 같지 않다면 옳지 않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는 수행이 일상에서 의문을 갖고, 질문을 하고, 답을 구하는 일상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3박자 리듬을 타세요. 그래서 부처님은 진실하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45년간의 설법은 하나의 단어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진실'입니다. 진실한 삶을 떠나서 무엇이 있습니까? 없잖아요. 우리가 수없는 미사여구를 동원해 말하더라도 '진실하라'는 말보다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진실되어 거짓되지 않다. 진실불허(眞實不虛)입니다. 그것이 다르마입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적나라하게 자기의 있는 모습 그대로, 진실된 모습 그대로 보여 주는 것, 그것이 수행입니다. 30년 도를 닦아도 사람에게 미움, 원망, 불신이 가득차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자애심은 진실한 마음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의문을 갖고, 의문에 질문하고, 답을 구하세요. 그러면 나는 언제나 안심적요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덜 행복한 이유는 맹목적으로 앞 사람의 등을 보고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이번 토요일에는 설악산에서 앞 사람 등만보고 가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우리 실상에서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탁오 이지는 "나는 한 마리의 개였다. 앞의 개가 짖으면, 따라짖는 한마리 개였다. 그러나 더 이상 따라 짖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경전향은 이런 탁오 이지의 반대파였습니다. 그는 당시에 권력과,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 지금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가 죽이고 싶어했던 탁오 이지만 기억하죠. 왜? 탁오 이지는 앞 사람의 등만보고 따라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은 누굴 추종한다는 것입니다. 답을 구하지 않는 것은 '나는 바보다'라는 겁니다.

 

 

우리는 경전을 읽을 때, 의문을 갖고, 질문을 하고, 답을 구해야 합니다. 수행도,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문과 질문과 실증은 수행의 3박자입니다. 이 3박자 리듬을 잘 타셔야 합니다. 그러면 스스로 흥겹고, 옆에 사람도 따라 춤을 춥니다. 2002년 월드컵 때 봤잖아요. 광화문 거리에서 어깨동무를 왜 했겠어요? 함께 리듬을 탓기 때문입니다. 수행의 3박자, 오늘 강론의 주제는 3박자 수행입니다. 

 

다음 주에는저희들 봉정암 행선이 있습니다. 봉정암서 법회를 하겠습니다. 저도 봉정암 가는게 걱정스럽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가는 것은 1년전 약속했기 때문입ㄴ다. 그저 입밖에 나온 것은 책임져야 해서 입니다. 오늘은 어떤 분이 기도를 이끌어 주실까요? 봉정암에 가는 것, 다른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저 일년 전에 약속한 입을 절구방망이로 어떻게 하고 싶습니다. 오늘 강론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늘은 어느 분이 기도를 이끌어 주실건가요? (자청하는 기도자가 없자) 우리 불자님들은 구하는게 없는가요? 그저 모두 무심의 경지에 이르셨군요. 자 그럼 합장하십시다. (스님의 기도). 우리는 오늘도 스님의 기도에 싸두, 싸두, 싸두.

 
7080 추억 속으로의 노래모음 - 서른 즈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