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시대|…… 혜천스님설교

2018. 12. 29. 21:4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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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유:

역시 일상에 늘 있는 것은 잘 보이지 않아 귀한 줄 모르나 봅니다. 여차저차한 사정으로 몇 주 만에 법회에 나와 스님의 강론을 듣는데 아 좋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세븐이라는 영화 보면 성경에 나오는 7가지 계율인가 어기는 것에 대한 보복으로 일어나는 살인 얘기가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탐욕과 탐식은 구분 되더이만, 탐식도 크게 보면 탐욕이겠습죠. 스님께서 계율을 지키느라 오후불식을 하실 때 그저 스님일이겠구나 싶었는데, 다이어트를 결심하고 저녁식사 이후 불식을 지켜보려는데, 이것조차도 왜이리 힘들까요? 저녁 이후에 고기안주에 게율에 금하는 술까지 곁들이니 일상에서는 새로운 결심은 고사하고 일상을 유지하는 것도 어렵사와요. 내 일 바쁘다는 핑계로 이 글 업데이트가 빨리 안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탐욕일까요?  새로운 강론이 시작되려는 이 즈음에야  지나간 스님의 말씀을 올립니다. 말이 글로 옮겨지는 순간 그 말에 대한 진의조차 흐려질까 저어됩니다. 부디 제가 느낀 감동 만큼이나 스님 강론의 메시지가 여러 선우님들께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강론한 지가 일주일이 되 되었다고 해서, 그 말씀의 온기나 윤기까지 바래겠나이까?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불기2555년 10월09일 

탐욕의 시대

  

 

인간이 지구에 거주하기 시작한 이래 지금보다 더 탐욕한 시기가 있었던가요? 인간이 지구에 살면서 탐욕을 지니게 된 것은 오래된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보다 탐욕한 시대는 그 이전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탐욕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인간이 탐욕하지 않았던 적은 없지만, 지금보다 더 탐욕스럽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과거의 탐욕이라 그려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만족하는 그런 탐욕입니다. 과거의 탐욕은 탐욕이라 부르기 조차도, 탐욕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기도 어려울 지경입니다.

 

우리는 사각의 링안에서 경기를 하고 있죠. 이 사각의 링은 마지막 한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링이기도 하죠. 사각 링 밖에서는 끊임없이 탐욕을 부추키고, 조장합니다. 사각 링 자체가 탐욕의 링입니다. 사각링을 구성하는 하나의 각은 기업이죠. 사각을 구성하는 또 다른 각은 각각 정치, 언론, 종교입니다. 기업인도, 정치인도, 언론인도, 종교인도 오직 탐욕을 조장하고, 부추키고, 찬양하죠. 사각의 링, 탐욕의 링 안에는 수없는 사람들이 경기를 벌이는데, 왜 싸우는지도 모르고 싸우죠. 기업과, 정치와, 언론과, 종교가 세상 사람들을 탐욕으로 몰아넣고 있죠. 우리 눈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까? 전 세계가 경제위기로 전전긍긍하는 것은, 탐욕의 게임이 사각의 링위에서 승자도 없는 게임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게임에 승자는 없습니다. 오직 마지막 한 사람이 살아남죠. 사실 그도 마지막에는 주저앉죠. 

 

부처님은 탐욕을 불꽃에 비유합니다. 탐욕은 우리 자신을 불태운다는 거죠. 자신의 탐욕에 의해서 우리 자신이 불태워 진다는 것입니다. 마치 인간 공동체에 의해서 공동체 각자가 파멸하는 것과 같죠. 부처님은 탐욕심을 버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환경은 탐욕심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론인이 탐욕심을 부추키고, 정치인이 탐욕심을 부추키고, 기업인이 탐욕심을 부추키고, 심지어 종교인조차도 탐욕심을 부추키는 시대를 살고 있죠. 이 시대는 탐욕의 시대라 부르는 것조차 부족할 정도로 탐욕의 시대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탐욕스러운가요? 탐욕 때문에, 오세훈은 5년동안에 7조 5천억의 빚을 남겼고, 이병박은 4년 동안 100조의 빚을 남겼습니다. 김진선 전 강원도시자는 알펜시아 하나에 쏟아부은 빚이 8,000억원에 이릅니다. 전세계적인 금융위기는 이런 국가부채 때문입니다. 캘리포니아는 미국에서도 잘사는 사람들이 많이 거주합니다. 그런데 그런 주가 재정이 파탄 나 공무원의 월급도 못 줄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일본의 어떤 현은 빚더미에 현의 재정이 파탄났다고 합니다. 모든 복지가 축소되고, 버스비는 몇 배가 올랐습니다. 시민들이 살 수가 없어, 모두 떠나가 버려, 도시 전체가 공동화되었다고 합니다. 강원도 태백시는 파산이 나버렸습니다. 정부는 구조조정을 할 것입니다. 강원도도 이대로 가다간 올림픽이 끝나면, 거의 파산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오는가요? 탐욕때문입니다. 들어오는 물보다 나가는 물이 많으면, 당연히 저수지는 비게 됩니다.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많으면, 망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어느 누구도 이것을 잘못이라고 지적하지 않습니다. 언론도 자기와 이익을 공유하기 때문에, 정치도 자기 세력을 지지하기 때문에 이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좀비같은 국민만이 언론이 조장한 여론에 따라 춤을 춥니다. 어제 목욕탕에 갖더니, 두 분이 서울시장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 분은 나경원이 부잣집 딸이라서, 다른 분은 박원순이 변호사라서 사기꾼이라고 서로 욕을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찬양하는 나경원도 변호사입니다. 박원순이 변호사라서 나쁜 놈이라면, 나경원 역시 변호사라 나쁜 년입니다. 어떤 사람이 변호사이기 때문에 나쁜 놈이라면, 어떤 사람은 변호사이기 때문에 나쁜 년인 것입니다. 변호사라서 나쁘다면 다같이 나쁜 것이지 박원순만이 나쁠까요?  이런 논리가 성립하는 것은 스스로의 탐욕이 공유되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탐욕하게 되면, 대한민국이 파멸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강원도가, 대한민국이, 지구촌이 각각 탐욕하게 되면, 그들 자체가 파멸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시대가 지성의 길로 들어서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성으로 들어서는 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각동맹이 너무 강해 그 성채가 난공불락이라는 것입니다. 그 성채를 오르는 길도 없고, 그 성채는 어떤 폭파에도 파괴되지 않을 듯 합니다. 오죽하면 부처님이 탐욕을 모든 불꽃을 태우는데에 비유했겠습니까?

 

탐욕이 무엇인가요? 탐욕하면 우리는 먼저 소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법정스님이 무소유를 말한 것도 소유를 탐욕이라 생각해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소유를 탐욕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존재하는 한 소유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많이 소유한다고 해서 탐욕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탐욕이란 무엇일까요? 내 마음대로 하는 마음, 내 마음대로 하고픈 마음, 내 마음대로 하려는 마음이 탐욕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마음, 내 마음대로 하고픈 마음, 내 마음대로 하려는 마음, 그 마음이 탐욕심이고, 그리고  그것이 탐욕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게 웬 탐욕? 그게 탐욕의 근원이자 근본입니다. 

 

탐욕이 있으면, 물질과 사람을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죠. 내 마음대로 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물질을 소유하게 되고, 내 마음대로 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사람을 소유하게 됩니다. 뭔 얘기냐고요? 마음대로  하는, 마음대로 하고픈, 마음대로 하려는 그 마음이 잇으면, 물질과 사람을 경시하게 됩니다. 물질과 사람을 경시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소비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도 물질도 소비의 측면에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소비가 문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과소비가 문제입니다. 물질이나 사람을 경시하게 되면, 소비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이 탐욕을 불꽃에 비유한 이유가 거기 있죠.

 

지금은 소비가 미덕이라고 찬양받는 시대입니다. 나는 오래 전에 그런 표현을 했습니다. "지금 세대는 미래 세대를 저당잡혀서 화려한 파티를 하고 있다." 우리는 자식과 손자를 저당잡혀서 다 써버리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여기서 어떤 분이라는 것은 미국 사람인데 생각이 나질 않아서입니다. 요새는 머리 기능이 너무 좋아 머리 기능이 없는거와 같죠. 마치 칼날이 날카로와 날이 없는 거와 같죠. 요즘은 이런 거도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분이 말하기를, "미래에는 오직 스스로가 먹거리를 생산하는 자만이 생존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문명은 오직 석유라고 하는 자원 위에 세워진 문명입니다. 근데 석유는 머지 않아 완전 고갈될 것입니다. 완전히 고갈되지는 않더라도 현저하게 생산력이 줄어들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전기 쓰기도 어려워질 것입니다. 자동차를 굴리기도 어려워 질 것입니다. 전기를 사용하지 않고,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는다고 한 번 생각해 보셔요. 우리는 그 순간부터 생존하기 위해 투쟁할 것입니다. 스스로 농사 짓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운 시대가 올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비관적인 전망을 받아들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대는 몰라도 땅 몇 평 사두지 않으면, 우리 자식 세대에서는 부모에게 하이킥을 날릴지도 모르죠. 

 

기업인은 탐욕을 조장하고, 정치인은 스스로 그들의 울타리가 되어주며, 언론은 그 몇 푼을 얻어 먹으려, 그에 대한 찬양을 날립니다. 종교인들도 굶어죽지 않기 위해 그들에게 면죄부를 만들어서 도장을 찍어 넘겨주죠. 우리가 물질을 경시해 소비해 버리면, 그리고 사람을 경시해 소비해 버리면, 우리 삶이 먼지 풀풀 날리는 사막처럼 되죠. 우리 인간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무엇이 이상하냐고요? 목욕이나 얼굴을 세안하고 나서 피부가 건조해지면, 보습제를 바르면서, 삶이 건조해지는 것은 왜 보습하려 않는가요? 우리는 목욕하거나 세안하고 나서는 피부가 건조해지면 노화가 빨리 온다고 보습제를 부지런히 사서 바릅니다. 요새는 남자들도 얼굴과 몸에 피부 보습을 열심히 합니다. 왜 삶의 보습은 않는가요? 

 

내 마음대로 하려는 내 마음의 탐욕은 우리 삶을 건조하게 합니다. 요새 전 세계를 스티브 잡스가 석권하고 있죠. 지금 전세계는 스티브 잡스에 대한 숭배의  열풍이 휘몰아치고 있죠. 현대인들에게 스티브 잡스는 살아있는 신입니다. 그처럼 못되어서 그렇지 모두 그처럼 되고 싶어 합니다. 독창성, 혁신성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도 그를 따를 자가 없습니다. 빌 게이츠도 이 링위에 올릴 수 없습니다. 그는 한 시대의 획을 긋는 사람이죠. 즉 스티브 잡스 이전과 이후로 시대 구분을 합니다. 스티브 잡스가 죽자 애플의 주가가 떨어지는 것이 그 반증입니다. 애플은 이제 보통 기업이 되었노라고 선언할 정도입니다. 전자업계를 석권했던 소니가 그랬던 것처럼, 소니는 현재 여전히 있지만 더 이상 전자업계를 대표하지는 않습니다. 잡스 없는 애플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티브 잡스 한 사람만이 있다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이 두, 세명만 더 있으면, 우리 같은 사람은 세상 살 맛 안날뻔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스의 성공을 부러워하는 열기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에는 무언가 허전한 것이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의 삶에서 무엇인 허전할까요?  스티브 잡스의 삶에는 윤기가 없어요. 그가 성공하고, 독창성과 혁신성을 지녔지만, 그의 삶은 건조합니다. 매말라 있다는 얘깁니다. 우리 어렸을 때, 설이 되면 찹쌀떡을 그저 사정없이 떡메로 내리치죠. 이거 해보셨죠. 떡메로 사정없이 패면 팰수록, 찹쌀떡 맛이 최고입니다. 사정 봐주면 안 됩니다. 이 때는 동헌의 사또를 모셔야 합니다. 사또께서 말씀하십니다. "매우 쳐라!" 이걸 떼서 떡을 만들죠. 떡 만들고 필히 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기름을 발라야 굳지 않고 오래 보관할 수 있습니다. 유식하게 말하면, 성형하는 것입니다. 성형이 되면, 이때부터 찹쌀떡입니다. 찹쌀떡에 기름을 바르면, 눈으로 봐도 먹고 싶습니다. 음식의 맛은 절반은 눈으로 먹습니다. 혀로만 먹으면, 음식이 서운해 합니다. 그건 요리사에 대한 모독입니다. 음식은 절반은 눈으로 먹습니다. 눈으로 맛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뇌의 맛을 담당하는 기관을 자극하면 침이 나옵니다.  이처럼 음식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윤기입니다.  음식의 색깔, 그릇, 놓여 있는 상태, 이 자체가 윤기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한 시대의 획을 긋는 사람이지만, 그의 삶에는 윤기가 없어요.

 

이름도 없고, 유명하지도 않고, 명예도 없고, 권력도 없는 분도 삶의 윤기가 흐르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 왜 부처님이 탐욕이 모든 것을 불태운다고 했을까요? 모든 걸 태우는 불꽃은 우리를 건조하게 만들죠. 부처님은 탐욕심의 탐욕을 내려 놓으라고 말합니다. 탐욕심은 내 마음대로 하는 마음, 내 마음대로 하고픈 마음, 내 마음대로 하려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물질을 존중하고, 사람을 존중하는 자애로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물질과 사람을 존중하는 자애로운 마음이 있으면, 물질과 사람을 소유물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물질과 사람을 소비해 버리지도 않죠. 존중하는 마음, 그 자애로운 마음이 우리 삶의 보습제입니다. 우리 삶을 윤기있게 만들죠. 우리가정을 윤택하게 합니다.

 

나는 이 시대를 탐욕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어느 시대도 이 시대처럼 탐욕을 찬양한 적이 없습니다. TV를 켜 보세요. 드라마에 재벌 2세 아닌 남자 주인공이 있던가요? 요새 농촌 총각들이 장가 못가는 것은 다 드라마 때문입니다. 저런 억지나 어디 있나 하시죠. 나도 억지인 줄 알아요. 그러나 순전히 억지는 아닙니다. 어디 보통 남자들이 연애할 용기를 내겠어요? 옛날 드라마는 대개 맨발의 청춘이었죠. 스티브 잡스처럼 밑바닥 인생이 성공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신성일 주연의 맨발의 청춘을 아세요? 우리 주위에는 오직 탐욕을 부추키는 언론과 전파매체가 해일보다 거대하게 밀려와 우리를 휩쓸어 버리죠. 원래 정치는 돈 앞에 맥을 못 춥니다. 그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정치인은 탐욕스런 기업인과 동맹을 맺는 것입니다. 언론은 그렇다쳐도 종교조차 그러니 우리가 이 탐욕의 시대에 무슨 희망을 갖겠어요.  

 

탐욕때문에 이건희가 기소되었죠. 그러자 원불교가 교단 차원에서 탄원을 했습니다. 그 보답인지 몰라도 이건희는 원불교 재단에 150억을 기부했습니다. 그것이 오비이락일까요? 나는 그것이 댓가성이 있다고 봐요. 이건희의 사면복권을 탄원한 댓가로 원불교에 돈을 지불한 것입니다. 물론 종교기관도 돈이 있어야 합니다. 돈이 있어야 자선사업도 할테니까요. 그러나 적어도 종교기관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원불교의 탄원이 없더라도, 이건희를 구속, 기소하지는 못 합니다.이건희는 스스로가 구축한 권력으로도 그걸 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탐욕스러우면, 종교마져 이런 짓을 할까요? 

 

우리는 탐욕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탐욕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탐욕하지 않기란 쉽지 않죠. 제가 이 시대가 탐욕의 시대라고 하는 것은 이 시대를 비난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좋은 시대를 만났다는 것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남북조 시대 말기에는 사회가 매우 혼란했습니다. 남북조 시대 말기는 전란의 시대로, 아주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 시대가 혼란하다고 하는 것은 삶이 송두리째 앗아가기 때문입니다. 중국 후한 시대의 인구는 5,000만명으로 추정합니다. 삼국시대를 거쳐, 진나라로 통일되는 과정에서 인구는 850만명으로 줄어 듭니다. 즉 5명 중 4명은 전란기에 죽은 것입니다. 이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얘기입니다. 인구의 대다수가 전쟁에서 굶어 죽고, 칼 맞아 죽고 한 것입니다. 남북조의 말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북조에서는 북위의 태무제가 불교를 없애려 사원을 파괴합니다. 스님도 강제로 환속시키고, 말 안들으면 죽였죠. 그 시대 스님들은 그 시대를 말법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드디어 종말의 시대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혼란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신행이 삼계교라는 불교혁신운동을 벌인 것도 이 기간입니다. 그 시대에 태동된 것이 중국의 선종입니다. 그 시대가 말법 시대이지만, 새로운 시대의 도래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중국불교의 새로운 불교시대가 열리는 것은  파괴의 시대, 전란이 휩쓰는 시기에 탄생합니다. 중국 불교 1,000년 영화의 기틀이 이 때 마련된 것입니다. 오늘날 중국불교가 쇠퇴하는 것은 이처럼 새로운 시대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탐욕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 탐욕의 시대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시대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 자식 세대로부터 뭐 같은 조상 세대라고 하이킥은 당하지 말아야 되지 않겠어요? 이렇게 탐욕스러웠던 시대는 없어요. 이렇게 전세계적으로 인간 존재를  위협한 적이 없어요. 우리가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는 물질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시대는 물질을 소비하고, 사람을 소비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소유가 문제가 아니라, 소비가 문제입니다. 소비는 그것을 없애버리는 것, 불태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옷도 입지 말고, 신도 신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 시대처럼 과소비한 적이 있었던가요? 왜 그럴까요? 물질에 대한 경시, 인간에 대한 경시 떄문입니다. 자애로운 마음이 잇어야 합니다. 자애로운 마음은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즉 경시하지 않는 마음이죠. 우리가 함부로 여기기 때문에 수없는 빚을 시장, 도지사들이 부풀려 놓는 것입니다. 아무 책임을 안지잖아요.

 

우리는 살면서 물질을 너무 함부로 하죠. 물질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사람도 함부로 합니다. 물질을 쓰는 것과 소비하는 것은 다릅니다. 소비는 문자 그대로 소비입니다. 좋은 의미의 단어가 아닙니다. 우리는 탐욕의 시대에 살면서, 새로운 시대를 만들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즉 삶의 윤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나는 스티브 잡스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또한 창의성, 혁신성 등에 공감합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윤기가 없습니다. 온기가 없습니다. 삶에는 온기, 즉 따뜻함이 있어야 합니다. 

 

옛날 선비들은 여름 날 뜨거우면,  대나무로 된 죽부인을 안고 잡니다. 안방의 부인은 뜨거운데, 바깥의 죽부인은 차갑기 때문입니다. 죽부인처럼 차가우면 안 됩니다. 스티브 잡스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그는 똑같은 일을 자신의 딸에게 했습니다. 딸이 태어나자 딸의 존재를 부정했습니다. 자신의 딸이 아니라고. 사람은 적어도 자기 자식은 자기 같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발전이기도 하죠. 스티브 잡스는 자기 부모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똑같이 했죠. 그가 성공한 사람이 아니었으면, 세상 사람들은 그를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나중에는 마지 못해 자기 딸임을 인정했죠. 딸과그 딸의 엄마는 우리 식으로 하면, 기초보호 대상자로 겨우 연명을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윤기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만든 회사 애플은 기부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않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물러나고 난 후, 회사의 기부 시스템이 마련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성공만이 중요했습니다. 그는 일중독자였죠. 그래서 윤기나 온기가 없는 것입니다.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따뜻함입니다. 나는 따뜻함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추운 겨울 날, 옛날에는 옷이 별로 튼튼하지 않았습니다. 내 어려서 잠바는 불똥이라도 튀어서 난 구멍을 보면, 그저 얇은 스펀지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요새 그런 잠바를 만들면, 살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요새 그런 잠바를 자식들에게게 사주면, 아마 유치원생도 엄마에게 하이킥을 날리려 들지 모르죠. 그저 눈보라에 안 얼어 죽으려면,  집에 뛰어 들어가서는 아랫목에 깔아 놓은 이불에 손을 넣죠. 행복감이 느껴집니다. 이것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왜 그럴까요? 따뜻해서입니다. 예전의 온돌방에 이불을 덮어 놓으면, 그 온기가 24시간을 가죠. 그 안에 들어가 보세요? 얼마나 행복한지. 그런데 이불 속 금기가 있습니다. 그 속에서 방귀를 뀌면 안됩니다. 냄새를 없애려 이불을 펄럭이면, 춥기 때문입니다. 그 따뜻한 방도 이불을 걷어내면 금방 식어 버립니다.

 

우리 삶이 따뜻한 것이 행복입니다. 우리 삶이 윤기 흐르면, 행복입니다.성공하는 것이 행복이 아닙니다. 내 삶의 윤기와 온기가 흐르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부처님은 탐욕을 경계하라고 합니다. 왜? 삶이 건조해지기 때문입니다.  삶이 건조하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왜 사막을 사막이라고 부르는지 그 이유를 아세요? 윤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습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무와 풀이 자라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만 있다면, 사막이 가장 좋은 농토입니다. 가다피가 리비아에 수로를 놓아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었습니다. 화학비료는 쓰는 이유는 지력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땅들이 대부분 그러하죠. 사막도 물만 있으면, 옥토가 됩니다. 우리의 삶이 건조한 것은 사막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 것도 살 수 없죠.

 

우리가 탐욕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은 부처님의 축복을 받는 삶을 사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왜 그것이 축복일까요?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탐욕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마음, 내 마음대로 하고픈 마음, 내 마음대로 하려는 마음이 탐욕입니다. 세상을 내 뜻대로 하고 싶은 마음은 나는 우주선, 너희는 정거장이라는 마음과 같죠. 왜 나만 우주선이고, 모든 사람은 정거장이 되어야 하나요? 우리는 경시하는 마음때문에, 즉 물질을 경시하는 마음 때문에 물질을 소비하고, 사람을 경시하는 마음때문에 사람을 소비합니다. 이유는 그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자애로운 마음을 지니면, 존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탐욕의 시대가 행복의 시대로 바뀝니다. 탐욕의 시대가 행복의 시대로 바뀌려면, 자애로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과 물질을 존중하는 사람이 다수가 되면, 그 시대는 행복의 시대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다 그럴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말법의 시대에 미륵이 와야 그 시대 모든 사람이 행복한 시대인가요? 왜 이 시대를 인간 종말의 시대라고 할까요? 인간은 중생을 뜻하는데, 이 시대가 되면, 모든 인간이 성인이 되니 인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 강론을 하며, 지금 이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모든 사람이 성인 아닌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이 축복받은 것입니다. 나는 탐욕의 시대가 좋습니다. 왜? 욕할 수 있잖아요. 모두 성인인 시대면, 하이킥을 날릴 수 없잖아요. 그렇게 되면 뭔가 재미없지 않겠어요? 나는 부정적으로 탐욕의 시대를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탐욕의 시대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기회는 버스가 오듯이 항상 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는 언제나 한 번 뿐이죠.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가는 것도 한 번 뿐입니다. 두 번은 없죠. 새로운 삶을 만드는 그 순간 두 번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은 탐욕의 시대입니다. 오늘 강론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늘 어느 분이 기도를 이끌어 주실건가요? 기도를 이끌어주실 안계시나요?    

 

(청안이 계셨다면 손을 번쩍 들어 기도를 주도했을 터인데, 아니 계시니 아쉽고도 그립다. 자원자가 없는 사이 짧으되 긴 침묵이 흐른 후 스님의 기도가 이어진다. 그나저나 다음 주도 청안마저 감따러 가면 감감무소식 디도한 사람이 없네,,,우리는 그저 말미에 기어드는 목소리로  싸두,싸두, 싸두. 선재선재선재 그렇습니다 옳습니다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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