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소비는 줄이고, 두개의 소비는 늘려라|…… 혜천스님설교

2019. 1. 13. 14:1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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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스님 법문 2011 10 30

하나의 소비는 줄이고, 두개의 소비는 늘려라

 

 

우리가 불국정토라는 말을 씀니다. 불교가 지향하는 세상이자 부처님이 계시는 땅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에는 어떤 사람이 사는 세상일까요. 그곳에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이 불국정토입니다. 정과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이라 특별한 곳이지요. 정과 사랑이 강물처럼 흘러서 불국정토이지요. 불교의 지향이자 이루고자 하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세상은 미륵 부처님이 오실 때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화림원에서 그 세계를 완성한다고 했지요. 미륵이 와서 그런 세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세상을 원할때 미륵이 오신다고 했습니다.

 

불자란 부처님의 자식이라는 의미입니다. 불자란 그런 세계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미륵이 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이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의 소비는 줄여야 되고, 두개의 소비는 늘려야 합니다. 줄여야 되는 하나의 소비는 바로 물질의 소비를 의미합니다. 지구상에 인간이 존재하던 이래 지금보다 물질을 소비하는 세상은 없을 것입니다. 지난 시대를 탐욕의 시대라고 합니다. 기업과 정치, 언론, 종교..., 이렇게 네 세력이 물질소비를 찬양하고 소비를 조장해 왔습니다. 우리 인간은 물질을 지향하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과다하게 소비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돈, 사랑, 물질, 권력을 희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부처님은 이를 욕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한 욕망을 추구하는 것 자체는 나쁠것이 없지만, 다만 경계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욕망은 사랑스러운 것, 너무 사랑스럽게 때문에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욕망이 사랑스럽기 때문에 과도한 집착을 하게되고 과도하게 집착하다보니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물거품같은 포한을 남기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을 꿀 맛 같다고 말합니다. 욕망은 꿀과 같은 것입니다. 너무 사랑스럽기 때문에 밀쳐내기 어려운 것입니다. 욕망과 사랑은 같이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 소비에 대한 욕망을 줄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단식을 한번 해보십시오. 그리고 다시 음식을 먹게되면 밥먹고 돌아서면 헛헛함을 느끼게 됩니다. 배가 부른데 계속 허기가 지는 것입니다. 표현하자면, 웃고 있는데 눈물이 나는 격이지요. 이렇게 욕망과 물질의 소비는 먹고 있는데 끊임없이 헛헛한 갈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 소비를 줄이지 않는다면 욕망의 헛헛함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소비라는 말 자체가 무색할 지경입니다. 물질의 소비는 줄이고 몸과 마음의 소비는 늘려야 합니다. 몸을 많이 움직이고 써야 합니다. 시쳇말로 죽으면 썩어 없어질 몸입니다. 백장선사는 一日不作이면 一日不食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중국 선종 사상의 흐름입니다.  오조라 불리는 홍인선사는 일생을 노동하며 지냈고, 육조 혜능은 방아를 찧고 살았습니다. 선禪은 노동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행선이라는 말도 생겼습니다. 가만 앉아서 하는 것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움직이며 동적인 것으로 몸을 써야하는 것입니다.

 

미국서 시작한 경제위기가 유럽을 쓰나미처럼 위협하고 있습니다. 유럽 대표들이 중국에 돈을 빌리러 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독,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요. 80년대 이후 세계는 동일한 경제 정책을 쓰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금융강화죠. 전 세계가 금융을 확장하고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노무현 정부도 동아시아의 금융허브를 목표로 한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아일랜드, 아이스랜드도 모두 금융을 강화했습니다. 금융은 생산은 없습니다. 소비만 있을 뿐입지요. 결국 세계경제의 위기는 금융에서 오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인들의 땀위에 이룬 생산들이었습니다. 전세계가 그런 생산을 저가로 공급받았지요. 그동안 세계경제가 돌아갈 던 이유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런 저가의 공급은 없습니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 생산하지 않고 금융에 올인함으로서 유럽과 미국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세계경제는 회복 불능 상태입니다. 과거에 누려오던 물질의 회복은 없는 시대를 맞을 수 있습니다.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경제 측면에서도 그러합니다. 예전 빠사나비 왕이 심하게 헐떡거리며 살았다고 합니다. 빠사나비 왕은 유명한 식도락가 였다고 합니다. 참고로 저는 살이 안쪄서 고민입니다. 지금도 50kg이 안되는데, 예전에 미얀마 공항에서 붙잡혔던 기억이 있습니다. 미얀마가 맞아서 그랬는지 65kg쯤 나가 빵빵해지니 사람이 변했다고, 다른사람이라고 붙잡히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빠사나비 왕은 부처님에게 '제가 살이 너무 쪄서 움직이기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자 부처님은 "양을 알면서 음식을 먹으라"라고 했답니다. 궁에 들어와서 궁녀보고 식사때마다 '양을 알아서 먹으라'하고 소리치게 했답니다. 요즘말로 다이어트에 돌입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전의 날씬한 몸매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많이 먹으만큼 소비를 하면 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조선의 역대 왕들은 당뇨로 죽었습니다. 세종 등 대부분의 왕들이 종기가 나서 죽었는데 당뇨 합병증입니다. 살이 썩어 들어가는 것이지요. 몸을 놀리고 소비시키지 않아서 생기는 일입니다.      

 

발권이 없는 나라는 금융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유통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이지요. 미국이 아무리 달러를 찍어내도 말리지 못합니다. 노동과 땀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땀의 의미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세계를 양분하는 것을 '이념'으로 봅니다. 그렇지만 이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어떤 체제도 물질을 어떻게 갖느냐의 문제로 천착됩니다. 분배냐, 성장이냐도 물질의 문제입니다. 간혹 영성 충만하신 분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너 밥먹지 마, 이슬만 먹고 살아~'하고 말입니다. 불교는 무소유 정신이라고 합니다. 꿈꾸는 헛소리이지요. 불교는 무소유가 아니라 소유를 부정해 본적이 없습니다. 비구들에게는 최소한의 소유를 얘기했고, 일반 사람들에게는 부를 축적해도 괜찮다고 해씁니다.

 

고대 종교에서는 이자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옛날 유대인이 박해 받은 것도 알고보면 이자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대 기독교는 물론 이슬람교에서도 이자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이것을 인정하였습니다. 당시 불교의 존립 근거가 상인계층이었기도 했습니다. 팔만 대장경에 쓰인 불교의 진정한 뜻을 모르고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을 완독한 승려나 학자가 없는 형편입니다. 기독교는 노예의 종교입니다. 유대교도 노예의 종교여서 권력을 탐하는 종교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불교는 권력자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권력을 버리는 쪽으로 갔던겨죠. 불교는 소유를 부정한 적이 없습니다. 소유를 긍정하지만 소비를 줄이라는 것이죠. 물질의 소비는 줄이고 몸의 소비는 늘리라는 것입니다. 비구들은 원래 한끼만 먹었습니다. 하는 게 없으니 굶어죽지 않을만큼만 먹으라는 것이죠.

 

우리가 팔만대장경을 어찌 해석하고 어떻게 써먹을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해봐야 합니다. 2천년전 레시피로 장사를 하는 것은 문제가 있겠죠. 일반 기업체 같았으면 벌써 망했을 겁니다. 다음은 마음의 소비입니다. 탐욕, 분노, 수치, 시기, 증오, 질투, 좌절, 절망감 등의 소비를 늘려야 합니다. 부처님은 선과 불선의 기준을 어떻게 두었을까요. 부처님은 탐욕, 분노,우치가 늘면 불선이고 이것이 줄면 선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분명한 구분입니까. 진리는 선악을 초월하다는 헛소리가 왜 나오는 겁니까. 선은 인간의 근본이자 윤리, 도덕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인간의 윤리와 도덕을 넘는 진리는 없는 것입니다. 있다면 금수같은 놈이 되는 것이겠지요. 부정적인 마음은 탐욕, 분노, 수치심이라고 하지만 나쁜것이 아닌 사랑스러은 감정입니다.  

 

요사이 통계가 아니면 말을 할 수 없는 시대인데, 남을 욕하며 쓰는 시간이 제일 많다고 합니다. 뒷담화가 늘어난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긍정적이다, 부정적이다 할게 없는 것이지요. 입사동기가 나보다 훨씬 진급이 빠른데도 성을 안내는 사람은 둘중의 하나이겠지요. 성인이거나 바보중 하나이겠지요. 成人이 아니라 聖人이지요. 成人은 중국 유교가 추구하는 단계이지요. 聖人은 공자이니 나도 공자같은 聖人이 되어 맞짱뜨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완성된 사람 成人을 추구하게 된 것이죠. 질투심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부정적인 것이 아니지요. 어떤 심리학자가 네살먹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였죠. 먹을 것을 나눠주고, 내가 잠시 나갔다 올테니 그때까지 먹지 않고 기다리면 하나를 더 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나갔다가 들어오니 3/1은 바로 먹어 치웠고, 3/1은 고민하고 버티다가 먹었고, 나머지 3/1은 먹지앟고 기다렸다가 하나를 더 받고 그제서야 먹더라는 겁니다.

 

실험이 여기서 끝나면 재미없겠죠. 한 걸음 더 나가야겠죠. 그 학자는 30년 후 실험했던 어린이들을 추적했다고 합니다. 30년 후 그 아이들의 삶이 어떻게 변해 있었나 궁금했던 것이죠. 그런데 즉시 먹은 아이들은 백수가 허다하고, 조금 망설인 아이들은 조금 형편이 낫게 살고 있었고, 기다리던 아이들의 대부분은 전문직이나 씨이오 등이 돼 있었다고 합니다. 이 실험결과를 두고 잘못하면 인내한 아이들만 괜찮았다는 평가를 내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래 기다리던 아이들의 얻고자 한 아이는 얻는다는 욕망의 확장과 작용을 눈여겨 보아야 할 듯 합니다. 바로 결정하는 아이들은 시기심이나 질투심, 조바심에 바로 반응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떻든 이렇게 마음의 소비를 늘려야 합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훔치거나 빼앗게 되는 것이죠. 어떻든 탐욕심들의 소비를 늘어나게 해서 나의 욕망을 충족시켜 나가는 것도 하나의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2,500년전의 갠지스 강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탐욕의 시대에 살고 있고, 소비를 미덕으로 알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물질의 소비를 줄이지 않으면 내 손자와 후대는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사실 궁금합니다. 내 후손들 잘 되게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어떻게 위험을 초래하는 물질의 소비는 늘리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초유의 관객을 불러 모았던 아바타라는 영화도 결국 행성간의 자원 전쟁얘기가 아닙니까. 물질의 소비에 대해 기업과 정치, 언론, 종교라는 4각 동맹이 부추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물질은 놔두고 몸을 소비해야 합니다. 땀흘려 노력해야 합니다. 놀고 먹는 사람은 있어서는 안됩니다. 일할수 없는 환자를 제외하고는 땀흘려 노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위에 운동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중 30%정도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운동을 안하면 불안하고, 초조해하는 강박증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 중 그런 것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유아 심리에 젖어 있다는 것이지요. 아직 엄마의 젖꼭지에서 덜 떨어진 것입니다. 勞動禪을 홍인과 백장이 주장했습니다. 그 자체를 즐기자는 것입니다. 굳이 그럴 이유가 뭐냐 하는 것은 묻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봉정암을 다녀왔습니다. 봉정암을 앞둔 마지막 깔딱고개가 정말 힘들더군요. 그래서 뒤로 돌아서려니까 다시 돌아가는 길이 더 멀기에 군소리 않고 올라갔습니다. 산행 다닐때도 꼭 정상을 올라야 합니까. 제 몸 상해가면서까지 갈일이 무엇입니까. 외국에서는 미친넘들을 의미할 뿐인 매니아를 우리나라에서는 굉잫이 선호합니다. 탐욕심 등의 마음의 소비를 늘리는 것은 생산을 높이고 돈 버는 일입니다. 물질의 소비를 줄이면 통장의 잔고가 올라갑니다. 찬양하자 통장잔고가 되는 거지요. 마찬가지로 몸의 소비를 늘리면 건강이 좋아지니깐 통장의 잔고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명상은 우리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자기자신을 사회밖에 둠으로써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소비 늘리면 명상센타 안가도 되니 이역시 돈 버는 것입니다. 마음고 몸을 소비 시키는 자체가 명상수행인 것입니다. 일하지 않는자 한끼만 먹는다는 것이 불교의 지향이자 목표입니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살며 정과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은 물질 소비를 줄이고 몸과 마음의 소비를 늘려야 가능해집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눈감고 명상한다고 그 세계가 이루어지겠습니까. 제가 강론을 재개하면서 한가지 맹세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얘기만 하자. 껄끄러운 얘기는 하지말자. 그런데 지금 이렇게 남 험담을 하고 있습니다. 생각을 바꾸지 못하면 행동을 바꾸지 못합니다. 가만 앉아 명상하는 것은 필요 없습니다. 어떤 불자님이 큰 계시를 받고 지리산 도인을 찾아가 삼천만원을 올리고 인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인가증을 받고 내려오는 지리산길이 꽃길이었다고 합니다. 내려와서 집에 가서 남편에게 이 얘기를 하니까 남편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고 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그 불자는 홀연 잠에서 깨어났다고 합니다. 현실로 돌아온 것이죠. 오늘의 강론주제는 하나의 소비는 줄이고, 두개의 소비는 늘리자 였습니다. 우리 선우님들 복 많이 받으시고, 기도를 이끌어주시기 바랍니다.

 
 
161001 부산 원아시아 페스티벌 「개막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