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 관조하라

2019. 1. 13. 13:5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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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 관조하라



이 일원상 공부는  참으로 간단한 공부이나

자칫 복잡하고 어렵게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부처가 무엇입니까?하면

마음이 부처니라.이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처처가 불상이요

사사가 불공이다

 

원래 요란함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고 그름도 없다고

하면 그것을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고 깨달으면 되건만 그런데 그것을 잘 따르지 않습니다.

따를 능력이 없어서 그럴까요?

따르기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요란해지고 싶고 어리석어지고 싶고

그릇되어지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믿고 깨달아 세우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어렵게 사람의 몸을 받아서 부처님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는데

왜 단박에 받아드러내지 않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기능과 조건이

중생들에게 없어서 그런 것인가?

 

마치 초등학생의 머리로 대학교 공부를

배우는게 불가능한 것처럼 중생은 불법을 배울 수 없는가

아니면 누구든지 부처의 기능은 다 가지고 있는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부처를

깨달을 수 있는 기능이 이미 갖춰져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다 해보셨을 것입니다.

매실을 입에 넣었더니 매실 맛을 볼 수 있다.

매실 맛을 보니  침이 나오고 시큼합니다.

 

그러니 이것이 매실 맛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혀로 깨달아서

이제 눈으로 매실이 보일때

그 매실을 입에다가 넣은 것과 같은가 하는 부분입니다.  

매실을 입에 넣고 자각해서 매실을 눈으로 볼 때 

입에 넣은 것과  같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혜관조라고 합니다.

지혜로 본다고 합니다.

   그것이 이제 100프로 다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으로 봐도 입에 넣은 것과 같이

그맛이 다르지 않아야 합니다.

 

한 장교가 전쟁을 하는데

부하들과 사막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사막을 걷는데 물이 다 떨어져서

부하들이 쓰러지게 생긴 것입니다.

그러자 장교는 쓰러진 부하들을 앉혀놓고

자기 집의 뒤뜰에 있는 매실에 대해서

설명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퍼런 매실을 따서

입에 물었을 때 그 싱그러운 과즙이

혀를 시큼하고 달콤하게 감싸는 이야기를

사실처럼 하니 병사들이 그 소리를 듣고

입에 침이 나와서 목마름이 해결되어

무사히 사막을 건널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우리도 매실의 이야기만  듣고 매실을 입에 넣은 것과

같은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약간의 침은 나오지만 매실을

입에 물은 것과 완전히 같지 않다면

지혜관조가 다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원리가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사용하는데 그대로 적용되어 부처를 드러냅니다.

모든 사람은 언어도단의 입정처

이 침묵을 마음으로 깨달아 육근을 사용할 때

드러낼 수 있는 기능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언어도단의 입정처

요란함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고 그름도 없다는 것

나없음, 꿈 없이 잔다는 것이 만유의 실체라는 것은

의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 없음과 꿈 없이 잠자는 모습

언어도단의 입정처가 경계의 실상이라는

것은 의심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것을

다 드러내지 못하는 뜻은 의심을 해야 합니다.

 

화두를 의지한다거나

번뇌를 의지한다거나

염불소리를 의지한다거나

공을 의지한다거나 색을 의지한다거나

중생을 의지한다거나 반야바라밀을

의지한다거나 이렇게 수행방편에 의해서

그 자리를 다 드러내지 못하는 뜻은

지어놓은 업의 힘은 강하고 바라보는 힘인

지혜관조가 약하다는 뜻입니다.

 

언어도단의 입정처가

우주만유의 본원이며

처처가 불상인 것을 깨달았으나

어떤 경계를 당하여 아직 불편함이

남아있을 때 보는 힘이 왜 부족한지

의심을 화두를 해야 실상이다 드러납니다.

 

왜 경계를 볼 때

보기 전과 다르게 보이는고?

이때에 신분의성이라는 화두를 들어야

볼 때와 안볼 때 생각할 때와 생각 안할 때가

완전하게 눈으로 매실을 볼때도

입에다가 매실을 물은 것과 똑같아 집니다.

 

여러분들이 성품을 가지고 계시고

삶 속에서 나 없음이 끊임없이 드러나기

때문에 알기는 다 압니다.

 

생사의 바다를 통해서

끊임없이 나타났다 숨었다 하면서

나 없음이 드러나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그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각된 나 없음을 마음에 머금어서

눈을 사용할때 드러내야 합니다

마치입에 매실을 넣고

입을 인연하여 맛을 깨달은 바를

눈으로드러내는것처럼


만일 다  못보고 있음에는 화두로서

언어도단의 입정처를 드러 내야 합니다.

 

우리들의 삶은 그 어떠한 것도

전부 번뇌즉보리로 전개가 됩니다.

중생의 삶이 원래 부처의 삶입니다.

 

사람이 말을 할 때

말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냐면.

저 사람이 내 말을 이해하면 내 생각과

저 사람의 생각이 하나가 됩니다.

그렇게 하나를 드러내려고 끊임없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행동도 마찬가지고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배고픈 번뇌로 밥을 먹으면

번뇌즉 보리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배고프면 밥을 먹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번뇌즉 보리라는 것입니다.

그럼 결국 배고프기 전 자리로 간다는 것입니다.

 

현상이 전개 되는 것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현상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나타났다 숨었다 나타났다 숨었다 하면서

그 행위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본래 이상과 현상은 한 몸입니다.

  

그런데 그 이치를 모르고하기 때문에

유전을 하는 것이고 반복을 하는 것입니다.

알고 하면 처음부터 둘이 아닌 자리에서 하게 됩니다.

매실을 입에 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입정처를 표본삼아

늘 확인하고 공부하고 살기 때문에

그 자리는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지혜로움만 있으면 그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마음이 미혹해서 다 못 볼 수 없습니다.

어설프게 보고 어설픈 지혜로 머물러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보는 만큼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경계가 와서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완전한 구경을 드러내라고 옆에서 찔러주니

안되는 부분에 아 내가 구경에 이르지 못했구나

참회 반성하고 끊임없는 관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분의성의 화두 관조라고 합니다.

신분의성을 떳떳하게 드러내면 이 자리가

다 드러나게 됩니다.

 

이 의심이 끊어지면 안됩니다.

이 화두가 끊어지면 안됩니다.

 

어느 정도만 그냥 편안한 곳에서

둘로 보이다가 눈에 힘을 주니 하나로

보이는 정도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정확하게 내 삶에 완전히 드러내야 합니다.


일원상이라는 언어도단의 입정처를

정확하게 자각하여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작용하는 곳에서 그 맛이 정확하게 다 드러나야 합니다.

 

눈을 쓸 때 그러하고

귀를 쓸 때 그러하고

의식을 쓸 때 그러한지

정확하게 드러내야지

어설프게 하게 되면 반복이 생깁니다.

경계가 생기면 또 다스려야 하고

경계가 있으면 또 다스려야 하고

이렇게 반복이 생깁니다.

 

그러니 완성을 기준으로 잡아야 합니다.

매실을 완전히 자각하지 못해서

눈으로 매실을 먹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제 이러한 이치를

염두에 둬서 여섯가지 문중에

눈을 하나 사용하더라도 꿈없이 잠자는 모습으로

사용하는지 진짜 실상을 다 드러냈는지 이런 것을

정확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하나하나 어설프게 하지 않고

완전하게 다 드러내자는 것입니다.

그럼 구경각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임종님(들고양이들) 메들리 - 노래 실은 관광열차 2집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