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 보이고 들리고 생각나는 모든 현상은 모두가 허망하고 덧없는 것이다
만약 모든 현상이 현상이 아닌 줄 알면 곧 여래(如來)를 보는 것이다.
是法平等無有高下 是名 阿辱多羅三藐三菩提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修一切善法卽得 阿辱多羅三藐三菩提
- 이 법이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나니 이것이 ‘아뇩다라먁삼보리’이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는 마음으로써, 일체선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沆非法
내가 설한 모든 법문은 마치 뗏목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법이라 하더라도 버려야 마땅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響味觸法生心 應無所住而生其心
- 마땅히 다음과 같이 청정한 마음을 써야하나니... 보이는 것을 구하기 위해 마음을 쓰지 말며, 소래 냄새 맛 감촉 기분의 만족을 위해 마음을 쓰지 말며, 마땅히 구하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써야한다.
若而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 만약에 모습에 의해서 나를 보려하거나 음성에 의해서 나를 찾으려 한다면 이 사람은 삿 된 도를 행하고 있는지라 결코 여래는 볼 수가 없느니라
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 여래는 온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다. 그러므로 여래라 하느니라.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꿈이나 물거품이나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은 것이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할 것이니라.
萬法是心光 諸緣唯性曉 本無迷悟人 只要今日了
- 만법은 이것이 <마음의 광채>요, 모든 인연은 다만 <성품의 비추어냄>일 뿐이라. 본래 미혹하거나 깨달은 사람이 없나니 오직 지금 당장 깨달아 마칠 일이다.
欲識解脫道 諸法不相到 眼耳絶見聞 聲色鬧浩浩 * 鬧 시끄러울뇨
- 해탈의 道를 알고자하면 모든 법이 서로 도달하지 못함을 알라.
눈과 귀가 보고 들음이 끊겼거늘 소리와 빛은 끝없이 시끄럽다.
居一切時不起妄念 於諸妄心亦不息滅
住妄想境不可了知 於無了知不辨眞實
- 언제나 망념을 일으키지 말 것이며, 온갖 망념을 또한 쉬려고도 하지 말며, 망상 속에 있을지라도 따져 알려고 하지 않으며, 앎이 없는 곳에서 진실을 밝히려고 하지도 않느니라.
心隨萬境轉 轉處能幽 隨流認得性 無喜亦無憂
- 마음이란 만가지 경계를 따라 움직이나 움직이는 곳마다 실로 그윽하다. 흐름을 따라 성품을 깨달으면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다.
若人欲識佛境界 當淨其意如虛空 遠離諸取及妄想 令心所向皆無碍
- 사람이 만약 부처 경계(境界)를 알기 바라거든 마땅히 그 뜻을 허공처럼 깨끗이 하고 모든 집착과 망상(妄想)을 멀리 여의어서 마음이 향하는 바에 도무지 걸림이 없게 하라.
卽此見聞非見聞 無餘聲色可呈君 個中若了全無事 體用無妨分不分
- 이 보고 들음이 보고 들음인 채로 보고 들음이 아니니 그대에게 빛깔과 소리를 드러내 보일 길이 없도다. 만일 이 가운데서 전혀 아무 일 없음을 깨닫는다면 체와 용을 나누건 나누지 않건 방해로움이 없으리라.
捫空追響 勞汝心身 夢覺覺非 竟有何事
-허공을 더듬고 메아리를 좇으니 그대의 심신이 까닭 없이 피로하구나.
꿈도 깨어남도 모두 아닌 줄 깨달으면 끝내 다시 무슨 일이 있으리오.
法人은 항상 三毒과 같이하고, 불성은 항상 六情과 함께 한다.
이렇게 믿고 마음을 참구하면 묘한 보배 나오리니 어찌 번거로이 옥속의 명주를 찾으리.
천진이라 원래 구족하거늘 닦고 증득하면 더욱더 어긋나매...
아는 근본을 버리고 끝을 좇는 짓이니 한바탕 어리석음만 지킬 뿐이다.
이 마음, 마음이 그대로 부처라. 서방세계에서 으뜸가는 영물이거늘 또다시 자재하고 묘한 닥용을 구하니 가련하구나.
이 모두가 <한마음의 진실>만 못한 것을....
온갖 법, 온갖 마음이 어떻게 다르관데 어찌 수고로이 經의 이치만 찾는고... 심왕(心王)은 본래 많이 앎을 여의었으나 지혜로운 이는 다만 ‘배움 없는 지위 무학위(無學位)’를 밝힐 뿐이로다.
성품은 본래 남(生)이 없지만 구하는 사람을 대하여 말해 준다. 법은 이미 얻을 바 없거늘 어찌 깨침과 깨치지 못함을 걱정하랴.
항상 모든 감관(感官)에 응하여 작용하나 작용한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온갖 법을 분별하여 따지지만 분별한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 법은 둘이 없고 ‘마음’ 또한 그렇다. 도는 본래 청정하고 형상도 없다. 그대들은 행여 조촐함을 구하거나 마음을 비우려고 애쓰지 말라.
마음은 본래 청정하여 취하거나 버릴 것이 없으니 각기 힘쓰라.
오악(五嶽)은 가파른데도 높지 않고, 사명(四溟)은 광대한데도 깊지 않으며, 삼독(三毒)과 사도(四倒)인데도 범부(凡夫)가 아니요, 팔해(八海)와 육통(六通)인데도 성인(聖人)이 아니네.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뿐이요, 삼라만상이 한 법(法)에 찍힌 것이다.
무릇 보이는 형상은 모두가 마음을 보는 것이나, 마음이 스스로가 마음이라 하지 못하므로 형상에 의해서 마음이 있는 것이다.
난 것이 난 것이 아니니, 만일 이 뜻을 체득한다면 다만 때에 따라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면서 성인의 태를 기르며 인연 따라 세월을 보낼 뿐이리니 다시 또 무슨 일이 있으랴.
온갖 모든 법은 스스로가 말하지 않나니 공(空)이 스스로 말하지 않고, 색(色)도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시비(是非)와 구정(垢淨)도 사람을 속박할 생각이 없거늘, 사람이 스스로 허망하게 계교(計較)하고 집착하여 갖가지 견해를 짓는다.
만일 구정(垢淨)의 마음이 다하여 얽매임에도 해탈에도 머물지 않아서, 온잦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견해가 없어 평등한 마음으로 생사에 처한다면 그 마음은 자유로울 것이다.
‘들음’의 성품은 소리를 따라 나지도 않고 소리를 따라 멸하지도 않는다.
이 들음의 성품을 깨달으면 <소리의 티끌>에 끄달리지 않는다.
그러니 ‘참 들음’은 生滅이 없고 ‘참 들음’은 거래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마음을 알면 무념(無念)이 되고 성품을 보면 해탈(解脫)이 된다.
식심(識心)을 여의고 성품을 본다는 이 일 이외에 다시 어떤 법문으로 무상(無上)의 보리를 체득한다 함은 옳지 못하니라.
경계(境界)인 인연은 본래 좋고 나쁨이 없건만 좋고 나쁨이 다만 마음에서 일어난다.
마음이 억지로 이름과 뜻을 짓지 않는다면 망정(忘情)이 어떻게 일어나겠는가? 망정이 일어나지 않으면 참마음이 항상 두루 하리니, 그대는 다만 마음에 맡겨서 자유로이 하되, 더는 대처하려하지 말라.
온갖 번뇌와 업장이 본래 공적(空寂)하고, 온갖 인과가 모두 꿈과 같다.
따라서 삼계(三界)를 벗어날 것도 없고, 보리를 구할 것도 없다.
사람과 사람이 아님이 성품과 형상에서 평등하고 대도(大道)는 비고 드넓어서 생각과 걱정이 끊어졌다.
모름지기 이 온갖 비춤의 작용(照用)으로 보고 들음(見聞)에 맡겨 자재하라. 웃고 울고 말하는 것이 모두 <부처 지혜>를 이룰 뿐이다.
이렇게만 이해한다면 한 시도 성불하지 않은 때가 없고, 한사람도 득도하지 않은 이가 없으리라.
원래가 천진(天眞)이요, (自然)이거늘 조작(造作)에 무엇하러 상관하랴.
진(眞)을 말하며 속(俗)을 거슬리고 속을 말하며 진을 어긴다.
진을 어기기 때문에 성품은 미혹하여 돌아오지 못하고 속을 거슬리기 때문에 말이 담담(淡淡)해서 아무 맛이 없다.
성지(聖旨)의 ‘앎이 없음’은 <반야의 없음>이요, 속지(俗智)의 ‘없음을 앎’은 <참 이치의 없음>이다.
- 앎이 없음은 체요, 없음을 앎은 용이다- 그러므로 <반야와 참 이치는 작용으로 보면 같으면서도 다르고 고요함으로 보면 다르면서도 같다>.
같기 때문에 ‘이것’과 ‘저것’에 생각이 없고 다르기 때문에 언제나 ‘비추는 공’을 잃지 않는다.
몸과 입과 뜻(身口意)을 굴리는 주재자(主宰者)가 없으며, 따라서 ‘짓는 자’도 없고 ‘받는 자’도 없다.
한 생각이나마 조작 없는 성품(無作之性)에 맡길 수만 있으면 ‘부처지혜’는 곧 앞에 나타나서 <얻음도 없고 증득함도 없는(無得無證)> 이것이 바로 부처이니라.
‘만화(萬化)의 근원’을 궁구하여 하나의 <참된 주처(一眞住處)>를 얻었도다. 본체가 공하면서도 분명하여 <감관을 거치지 않고 비추어 다하되(照盡)>, 면면하여 ‘티끌경계’라는 생각을 완전히 벗어났도다.
곧장 광명과 경계를 모두 끊고 마음도 법도 모두 잊으니, 우뚝하게 홀로 존귀하고 활짝 트여서 원만하고 담연(淡然)하도다.
생명과 거래에 있어서 ‘변천하는 주체’가 없으니, 문득 인연을 따르되 걸림이 없고 고요히 비추되 <공용이 없도다>(無功用).
<안팎이 서로 어울려서 비추는 공(功)을 이루는> 이것은 거룩하여 그 작용을 같게(同) 할 수 없는 바요,
안으로는 비록 비춘다 하여도 앎이 없고, 밖으로는 비록 존재한다고 하여도 형상이 없어서 <안팎이 모두 고요하여 함께 없는> -이것은 거룩하여 그 고요함을 다르게(異) 할 수 없는 바다.
지극한 치이(致理)는 문자(文字)가 없고 해탈도 속박도 아니면서 <신령(神靈)하게 통하는 것>이 물건에 응하면서 언제나 눈앞에 있다.
눈앞에는 물건이 없는데도 분명하게 나타나서, 사람이 이르를(至) 필요도 없으며, 그 체성은 스스로 비고 오묘하다.
옛 부처의 도법(道法)이 본래 생멸법이 아니므로 따라서 조작(造作)도 없고 ‘베풀어 행함(施爲)’도 없다. 따라서 닦는 자(修行者)와 방일한 자(施逸者)가 다 지음이 있는 자이다.
그러므로 ‘공적함’을 기뻐함도 온당치 않고 방일함도 또한 그릇됨이니, 이 모두가 자기의 정견으로 묶어 놓음으로써 ‘성스러운 성품(聖性)’을 어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수도자는 ‘정혜의 힘(정혜력)’으로써 스스로 잘 관찰하여 모름지기 그 ‘일’에 체(滯)하지 말지니라.
<남의 말을 배척하는 것도, 남의 말만을 좇는 것도 모두 정수(正修)가 아니다>. 참된 학인 이라면 모름지기 도를 얻은 후에 정수(正修)하여 편안히 ‘법의 흐름(法流)’을 따르면서 부처 법계의 묘한 장엄바다(妙莊嚴海)에 들어야한다>.
그럼에도 미혹한 자들은 한갓 예전에 들었던 몇 마디 그럴싸한 말의 명자만을 집착하면서, 의행의 진실 됨을 미혹하여 조급하게 <배움을 끊고 함이 없음(絶學無爲)>으로써 옳음을 삼으면서 <닦아 가나는 정취(進修正趣)로써 그름을 삼으니, 마침내 스스로 교(敎)를 꾸짖고 수행을 잊어서 질탕하면서 의거할 바가 없다.
따라서 <화엄(華嚴)의 진실된 말씀과 성품에 칭합한 수행법>이 다 헛된 시설이 되어버리고, 헛되이 발무지호(撥無之狐)와 축괴지류(逐塊之類)가 천하에 분분하니, 학자들은 삼가히 생각할 지어다.
유마경(維摩經)에 이르기를.....
“대저 법을 구하는 자는 모든 법에서 모름지기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하며, <내지 몸의 실상을 관하매> 부처를 보는 것도 그러해야 하리니, 내가 여래를 관하매 전제(前際)가 음도 아니요, 후제(後際)가 감도 아니며, 또한 지금에 머무름도 없음이라” 했다.
대의로 논하면, 부처몸과 뭇바다가 가없는 법계(無邊法系)에 겹겹이고 하나하나의 몸이 널리 일체를 모두 함용하여 가가 없어서, <이 한 몸은 법계로>써 양이 되므로 자타의 경계가 도무지 없고 <법계는 바다 자신의 두루함인지라> 내외(內外)의 능소(能所) 등 범정의 집착(情執)이 번듯하게 끊어졌느니라>.
선남자야! 나의 몸이 널리 모든 법계에 두루 나되, 일체 중생의 차별된 색상과 같고, 일체중생의 각기 다른 말(殊異言音)과 같고, 일체 중생의 갖가지 이름과 같고, 일체중생의 즐기는 바의 위의(威儀)와 같아서, 이와 같이 세간을 따르면서 교화조복(敎化調伏)하느니라.
그리하여 모든 청정한 중생의 생을 받음을 나타내 보이는 것과 같고, 모든 범부 중생의 짓는 바 사업과 같고, 모든 법부 중생의 짓는 바 사업과 같고, 모든 중생의 생각과 같고, 모든 보살의 윈하는 바와 같아서, 이와 같이 그 몸을 나투어 법계에 충만하였노라.
<법성의 ‘성품 없음(無性)’으로써 ‘승한 바(所乘)’를 삼음을 이름하여 도(道)라 하고>, ‘성품 없는 선정’으로써 능히 ‘의지한바 온(蘊)’을 다스리는 것을 이름하여 장(場)이라 한다(道場).
또한 신(神)이란 <의지함도 없고 성품 없는 가운데의 ‘큰 지혜’이니>, 생각하지도 않고 하지도 않으며(作爲) 형질이 없어서 평등하게 법계에 두루하여 만유(萬有)를 다 환히 아는 것을 이름하여 신이라 한다.
미혹에는 두 가지가 있다. 곧....
첫째 마음 밖에서 경계를 취하여 생각을 냄으로써 도리를 어기기 때문에 모양없는 부처를 볼수가 없고....
둘째, 안으로 쌓임(五蘊)의 모양을 취함으로써 제 성품(自性)을 분명히 모르기 때문에 마음의 부처를 보지 못한다.
깨침에도 역시 두 가지가 있다. 곧....
첫째, 모든 법이 곧 마음의 제 성품이요, 이 성품 또한 성품이 아닌지라 모든 망정이 다하여 진리가 나타남을 분명히 알면 노사나(盧舍那; 부처의 진신, 편일체처遍一切處)의 몸을 보고, 법성에 일치하여 안팎이 없다.
둘째 안으로 쌓임의 성품과 모양을 분명히 알면 바로 제 마음의 부처와 노사나가 하나도 아니고 다름도 아님을 본다.
<만약 있고 없음의 법(有爲法)을 분명히 통달하면 ‘온갖 것은 모두가 이것이 제 마음으로 보는 바일 뿐이며’ - 따라서 분별을 내지도 않고, 바깥의 경계를 취하지도 않으면서 항상 잠잠하게 제자리에 머무른다.>
이에 <제자리에 머무른다(自性)>하는 것은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이다(起卽無起). <무슨 이을 일으키지도 않고, 분별하지도 않는, 이것은 나의 법이요, 남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아직 ‘스스로 머무는 삼마지(自住三摩地 samabhi ; 마음이 밖을 향해 흩어지지 않음)’에 머물지 못하여 ‘마음밖엔 본래 법이 없는 자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이것은 마치 눈병을 앓는 사람이 공중에는 꽃이 없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과 같다>.
이 사람은 분별지(分別智)로 이해하는 마음이 도무지 없어지지 않는 것이니, 다만 밖의 다른 경계에 반연할 뿐이지요, 아직 제자리에 머물지 못합니다.
금강경에서 붓다가 이르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오고 가고 앉고 눕고 한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한 바의 이치를 알지 못하였느니라. 왜냐하면
‘여래란 어디에서 오는 바도 없고, 어디로 가는 바도 없으므로 여래라 하느니라’>라고 했다.
따라서 <사람이나 법이나 모두가 일여의 도(一如道)에서 벗어나지 않는 줄 알 것이다>. 그렇다면 六根으로 대하는 모든 것이 ‘제 성품의 여여한 부처(自性如如佛)을 보는 것이 아님이 없다. 이것은 <보지 않는 것으로서 참불(眞見)을 삼고 진실을 보는 것으로써 참 부처를 삼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禪宗에서는 이르기를...
<이제 십방(十方)의 모든 부처 몸의 출신처(出身處)를 알아야하나니, - ‘헛되이 부처가 있는 줄 알면 성불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 어떤 것이 부처의 출신처인가? 들소(石牛)가 코끼리 새끼를 낳고 나무계집이 애기를 밴다. 모든 부처는 그 속에서 나오고 이것이 바로 맨 처음 도를 이룩하는 때이다.
*
옛날 ‘있다’에 있을 적에는
늘 ‘있다’는 사람에 속아서
갖가지로 분별하며
보고 들음에 시비가 많았다.
그 뒤에는 ‘없다’는 데에 앉아서
다시 없다는 사람에 속았으나,
한결같이 마음을 살펴보면 앉았으니,
적멸하고 은미(寂滅隱微)하여도 도무지 ‘알바’가 없네.
‘있다 없다’ 함은 모두가 집착이라.
어느 곳이 이 함이 없음(무위(無爲) - 유위 무위가 둘이 아님)인가?
있고 없음은 동일한 체성이요, 모든 모양이 다하면 유무 모두를 여의네.
*
부처를 구하려거든
다만 마음을 밝힐지니
단지 <마음 그대로의 마음>이 곧 부처니라.
나, 마음을 구하려 하지만
마음은 본래 스스로가 본래 아나니
마음을 구하려면
마음으로 알아지기를 기다리지 말라.
부처의 성품은
마음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니니
마음이 문득 일어날 때가 죄가 생기는 때니라.
*
깨달음은 어렵지 않건만
다만 간택(揀擇)하는 마음이 탈이어라.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만 없으면
환하게 밝아질 것을.....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만큼이나 벌어지니
한순간 깨닫기를 바라거든
역순(逆順)의 마음을 두지 말라
역순이 서로 다투는 것이 곧이 마음의 병일진대
현묘(玄妙)한 이치를 알지 못하나
공연히 고요함만 생각하는구나.
- 현정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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