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용행 / 대우거사

2019. 1. 13. 14:0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유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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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용행,인과는 동시이다  / 대우거사

16. 무공용행(無功用行)


 일체 만유는 오직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 스스로는 체성이 없어서 남(生)이 없으며, 따라서 현실적으로 마치 '작자'(作者)가 실제로 있어서, 그가 뜻을 세우고 생각을 내어서 애써 작용을 일으키고 있을 때에도 이 모두는 실제로는 전혀 성취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거듭되는 이야기지만, 이 모두가 오직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이요, 진실로 '작용의 주체'가 있어서 그가 작용을 일으키는 일은 없는 것이다. 예컨대, 바람이 불기 때문에 물결이 이는 것이지, '물결' 스스로가 힘이 있고, 생각이 있어서 제 멋대로 춤추는 게 아니라는, 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사람들에 의해서 말끔히 외면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끔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모든 '진실'이라는 게 다 그렇듯이, '진실'은 항상 분명하게 늘 코앞에 펼쳐지고 있는데, 다만 사람들의 미혹한 마음 때문에 잠시 잠깐 헷갈린 한 생각이 '진실'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고 가버리는 것이다. ․․․ 그러므로 수행자가 이 엄연한 '진실'을 깨달아서 그에 명합(冥合)하려면, 모름지기 온갖 법에 공력을 들이는 일이 없이, 오직 인연을 따르면서 스스로 이루어지는 '공용 없는 지혜'(無功用智)를 증득하여 <작용하되 작용함이 없는 작용>(作無之作)을 자재하게 굴릴 줄 알아야 비로소 이를 일러서 <'부처의 집안'(佛家)에 태어난 참된 '부처 자식'(佛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수행자가 참된 수행의 길을 따라서 정진(精進)한 끝에 설사 '불성'(佛性)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이 '공용이 없는 행'(無功用行)을 드러내어서, <'고요함'과 '작용'이 둘이 아닌 도리>를 자재하게 굴릴 수 없다면 그는 참된 '불자'(佛子)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엔 끝내 능․소가 다하지 못해서 여전히 범용한 '자아'가 허망한 '유위행'을 그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신령스러운 성품'(靈性)을 등지게 되기 때문이다.


'여래 지혜의 업'(如來智業)이 드러나면 '이와 사'(理事), '성과 상'(性相), '범부와 성인'(凡聖), '참과 허망'(眞妄) 등이 홀연히 원융(圓融)되게 서로 사무쳐서, 그 '자비'가 지극히 크지만 결코 애착하는 마음에 얽매이는 일이 없고, 종일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면서도 도무지 중생을 제도한다는 생각조차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래 근본지'의 '공용이 없는 행업'(無功用行業)으로, '공용'이 없으니 '고요함'(寂)이요, '행'은 바로 '작용'(用)이므로, 이것이 바로 <고요함과 작용이 둘이 없는 '지혜'의 업> (寂用無二智業)인 것이다.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등 삼승(三乘)은 아직 방편의 가르침을 여의지 못했기 때문에 성인이 어쩔 수 없어서 '수행'과 '증득'을 권한 거지만, ― 지금에 열심히 '인행'(因行)을 닦아서 훗날 그 공덕의 보람으로 '결과'를 '증득'하게 된다는, ― 이와 같이 <'공용이 있는 것'(有功用)은 결코 실다움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오랜 세월 동안 애써 이룩한 일체의 보람은 무상(無常)하여 끝내 허물어지고 만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따라서 붓다가 49년 동안 동분서주하면서 애쓴 보람도 결국은 그 '성스러운 가르침'(聖敎)를 대하는 중생이 제 마음 속에서 능․소의 자취를 완전히 쓸어내지 못한 상태에서 곧, ― '설함'(說)이 있고, '들음'(聽)이 있는 한 ― 그것이 '방편의 가르침'(權敎)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며, 따라서 실답지 못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49년에 걸친 화신불(化身佛)의 가르침도 권교(權敎)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것은 결코 세존의 가르침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성스러운 가르침'(聖敎)의 참된 뜻을 밝힘으로써, 오직 '말'과 '문자'에만 매달려서 <끝내 말로써 드러낼 수 없는 '성스러운 뜻'(聖旨)>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경책하자는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이 위대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이, '부처의 가르침'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서슴없이 천명함으로써, '부처' 자신의 존재마저도 넘어선 경지를 드러내고자 한 점이다. 결코 그는 "나를 따르라"는 식의 눈먼 가르침을 편 일이 없기 때문에 그의 위대함이 만세에 떨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17. 해야 하는가 하지 않아야 하는가?


  우리는 뭔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하고 궁리하게 된다. 즉 '문제'에 대한 묘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행위는 너무나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미 '공용 없는 지혜'(無功用智)를 이룬 '큰 보살'들은 결코 '수'를 내기 위해 애쓰는 일은 없다. ― 이와 같은 말을 들으면, 아직 '법에 대한 집착'(法執)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머리가 혼란스럽고, 시비득실(是非得失)의 엇갈린 길목에서 지견이 마구 소용돌이치면서, 도저히 그 의증(疑症)이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이 '마음'이 그대로 '법'이요, '마음' 밖에는 알아야 할 법도 없고, 지녀야 할 법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난 다음에도 이와 같은 현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범부들이 걸려든 올가미 중에서 가장 벗어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해야 하는가'(有爲), '하지 않아야 하는가'(無爲) 하는 두 갈래 길에서 늘 이쪽 저쪽 하면서 서성이기를 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지음 없는 지음'(無作之作)의 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늘 이와 같은 갈림길에서 지견에 지견이 꼬리를 물고, 머리를 굴리기를 쉬지 못하기 때문에 '바른 생각'(正念)을 잃게 되는 것이다.


 '있다'고 하면 있는 줄로만 알고, '없다'고 하면 없는 줄로만 아는, 이 범부의 '이분법적 사고'의 틀은 지독하리만큼 고질적이다. <'공용 없는 지혜'(無功用智)를 이룬 '큰 보살'들은 결코 '수'를 내기 위해 애쓰는 일은 없다>고 들으면, 금방 <해결책을 모색해야 하는가 아니면, 모든 걸 그냥 사태의 흐름에 맡기고 조작하지 않아야 하는가?> 하는 두 갈래 길에서 고민하던가, 아니면 그 중의 어느 하나를 취해서는 그것으로써 '올바른 뜻'이라고 여기면서 망식(妄識)을 굴리기를 쉬지 못하니, 어느 세월에 <회심(廻心)의 묘한 이치>를 알 수 있겠는가?

 

 <지금처럼 그렇게 '하는 것'(有爲)이 바로 '하지 않는 것'(無爲)이라는 사실>을 바로 지금 그 자리에서 당장 깨달아 마쳐야 한다. 모름지기 '참된 가르침'이라면 <지금 있는 그대로의 것>을 버리고, <그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취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속절없이 인연을 따르면서 이쪽 저쪽 하는 '유위행'(有爲行)이요, '생사법'(生死法)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찌 '참된 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이러한 글을 읽으면서도 여전히 그 글 가운데서 어떻게든 규범을 만들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바로 범부의 고질적인 근성이니, 만약 지혜로운 이라면 어찌 황금을 가지고 황금을 바꾸기 위한 궁리를 계속하겠는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8. 지금 모든 유위가 무위다

  범부의 안목으로 이 세상이 <지금 있는 이대로> 적멸한 열반(涅槃)이라는 사실을 납득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늘 보다 나은 어떤 경지, 보다 안정되고, 보다 편안하고, 보다 즐거운 경지를 얻기 위해, 지금 열심히 '원인행위'를 지어감으로써 훗날 이에 상응하는 '과보'(果報)가 얻어지길 기대하는 게 인지상정이고 보면, 오히려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세존(世尊)도 대각(大覺)을 이룬 후에, 세상에 나아가서 이 '깨달음의 경지'를 과연 중생들에게 설해줘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두고 이렛날 이렛밤 식음을 전폐하고 고민하셨다 하니, 이 길이 얼마나 험한 길인가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 목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아무리 믿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엄연한 '진실'이요, 한결같은 성인들의 말씀이고 보면, 당장은 잘 이해되지 않더라도 우선 성인의 말씀을 믿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신의 우매함을 탓할지언정, 함부로 <성스러운 가르침>에 까닭 없이 의증을 낸다거나, 자신의 지견으로 성인들의 말씀을 재단하려든다거나 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이들은 '무명'의 뿌리가 워낙 깊어서, 이 '작용의 주체'도 없고 '수용의 주체'도 없는, 따라서 '함이 없고'(無爲) '모습도 없는'(無相), 적멸한 실상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 마음은 여전히 <일정한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일정한 '결과'를 낳는다>는 고전적 세계관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낡은 물질관, 세계관은 '철학'이나 '종교'에서 뿐 아니라, '현대과학'에 의해서도 반증된 지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이 뿌리깊은 고정관념은 좀처럼 다할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성인들의 말씀은, 다만 지금의 이 모든 '유위행'이 사실은 '짓는 자'도 '받는 자'도 없는, 마치 꿈속의 일과 같은 것이므로 헛되이 집착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뿐이다. 만약 '유위행'과 '무위행'을 서로 상대되는 두 법으로 보아서, '유위행'을 여의고 '무위행'을 행하는 것으로써 옳음을 삼는다면, 이것은 가장 심한 '유위의 함정'에 빠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성교(聖敎)의 '무위'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의 모든 '유위'가 그대로 '무위'인 것이다. 즉 '유위'도 '무위'도 다 나의 '한 생각'으로 '지어낸 바'(所作)로서, 끝내 '빈 말'뿐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이 양변을 몰록 다 여의고는, 그 여읜 자리에도 머물지 않게 되면, 그 때에야 비로소 '무위'가 뭔지 조금은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조작이나 노력에 의해서 얻어지는 경지가 아니라는 것을 거듭거듭 명심해야 한다. 종일 세속의 '유위' 가운데 있으면서도 물 드는 일이 없고, 종일토록 온갖 '유위법'을 행하면서도 끝내 <종일 '없는 법'을 굴린 것임>을 분명히 알아서, 자취가 없으면 이것이 바로 성인이 말하는 '무위'인 것이다.



19. 일체의 차별 법은 본래 망령된 분별일 뿐이다

 '법의 본래법'은 오직 '참된 하나'(眞一)일 뿐이요, 선․악, 시․비, 득․실 등의 일체의 차별법이 싹도 트기 이전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본래 움직임이 없는 '참 마음'(眞心)이요, 순일(純一)하고 여여한 '참 성품'(眞性)이며, '하나의 법계'인 것이다. 그러나 범부의 마음속에는 망령된 정식(情識)으로 분별된 온갖 망식(妄識)들이 뒤섞여서, ― 선(善)을 배제한 악과 악(惡)을 배제한 선, 옳음(是)을 배제한 그름과 그름(非)을 배제한 옳음 등 ― 온갖 망정(妄情)이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고 충돌하면서 도무지 조용할 날이 없다.

 

하지만 그 분별이 있게끔 한 정식에 대해 조금만 깊이 생각해본다면 그 갈등과 충돌이 전혀 밑도 끝도 없는 것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선'(善)이 있을 때에는 '악'(惡)에 의지해서 '선'이 있게 되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악'도 역시 '선'에 의지해서 '악'으로 인지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둘은 다 독립적인 실체가 없는, 순전히 '망식'(妄識)만으로 허망하게 지어진 허상인 것이다. 이와 같이 서로 서로 의지해서 세워지는 것을 '인연법'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렇게 인연으로 말미암아 나는 모든 법은 자체로는 성품이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선'과 '악'은 이렇게 각각으로는 <'성품'이 없기 때문에>(無性), 그래서 이것을 '둘'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둘'을 막무가내로 서로 다른 것이라고 고집하기 때문에 우선 급한 대로 방편으로 <'둘'이 아니라>고 말했을 뿐이지, 사실은 알고 보면 이 '둘'이 모두 망상으로 지어진 허깨비 같은 것이기 때문에 '둘'이랄 것도 없고, '하나'랄 것도 없는 게 진실인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내내 토끼의 왼쪽 뿔과 오른쪽 뿔이 서로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하고 논의를 거듭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그 끔찍한 무명(無明)이라는 것도 마치 허공에 꽂힌 말뚝에 넝마를 걸어놓은 것과 같은 것이니, 뭘 다시 걷어내고 말고 할 게 있겠는가?

본래 아무 일도 없는데, 결국 '무명'이 그대로 '도'인 것이다.


 이 대목이 곧 '실상의 해탈'을 이룰 수 있는 요체이다. 만약 이 세상이 온통 '선'뿐이라면 '선'이라는 말이 왜 생겼겠는가? 또, 만약 이 세상이 온통 '고요함'뿐이라면, '고요함'이라는 말은 왜 생겼겠는가?

'움직이는 모습'을 취했기 때문에 '고요한 모습'이 마음 속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선현들도 말하기를, 「<'움직임' 없는 '고요함'>이 '작용'에서 주(主)가 되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유추해서 '있음'과 '없음'까지를 포함한 <모든 형상(形相) 있는 것들>은 이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의 정식(情識)으로 지어진 허망한 그림자일 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따라서 경에 이르기를, 「모든 있는 바 '형상'은 이 모두가 허망한 것이다. 만약 온갖 '모습'이 곧 '모습'이 아닌 줄로 보면, 곧 '여래'(如來)를 보리라」고 했던 것이다. 때문에 실상(實相)이라는 말은 결국 '모습 없음'(無相)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결국 이 경지에 이르면 항상 저절로 '같음' 가운데의 '다름'이요, '다름' 가운데의 '같음'이어서, 이 동이법문(同異法門)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코 그 마음의 흐름이 자재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이 '동이법문'을 요달하게 되면, 모든 차별법이 서로 뒤섞이면서도 전혀 혼란스럽지 않을 것이니, 일체의 시비득실(是非得失)의 와중에 있은들 무슨 방해로움이 있겠는가?



20. 상락아정의 참마음은 학인에 의해 증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참된 열반'은 학인에 의하여 증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증득된 것, 즉 '얻은 바'가 있는 것은 '생사 법'이지 이것은 결코 '참된 법'이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서, 먼저는 미혹해서 '생사 법'에 갇혀 있다가 나중에 깨달아서 '열반'에 드는 것이 아니다. 설사 일체의 생각이 완전히 쉬어서 아주 '고요한 경지'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의근(意根)으로 법진(法塵)을 분별하는 것일 뿐이다.


 수행자가 알맞게 공부가 익어서 어느 날 문득 생멸 없는 '본래 마음'을 깨쳐서, 법성(法性)을 보고 나면, 마치 오랜 겁(劫) 동안 일찍이 한 번도 깨어나 본 적이 없었던 오랜 꿈에서 깨어난 것과 같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어떻게도 설명이 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세계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일찍이 생사고해(生死苦海)에 빠져서 허덕였던 적도 없고, 거기에서 헤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던 일도 없으며, 또 그러는 가운데 나름대로 터득했던 갖가지 그럴싸한 '지혜'들도 모두가 꿈속에서의 허망한 잠꼬대였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해방감이다. 오직 순일(純一)한 허공성으로서의 '신령한 앎'(靈知)이 있을 뿐이요, 도무지 일체의 상대가 끊어져서, 그저 자기 혼자서만 알 뿐, 누구에게 말 할 일도 아니다.

모든 것이 그저 맑고 고요할 뿐이어서 '법락'(法樂) 만이 가득하다. ― 그런데 이 때, 등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하기를, 「지금 꿈에서 깬 것은 누군가?」 하는 게 아닌가. 뒤돌아보니 아무도 보이진 않고, ― 실로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는 순간이다.

 

그는 자신이 여전히 의근(意根)으로 법진(法塵)을 희롱하고 있었을 뿐이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하마터면 그것을 '구경'인 줄 알고 거기 머물뻔 했으니, 참된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마음'이 어찌 학인에 의해 증득될 수 있겠는가?


<본래 스스로 청정하여 움직임이 없는 '한 마음'>은 공부하는 사람에 의하여 증득되는 것이 아니며, 본래 스스로 온전히 이루어져서 늘 환히 눈앞에서 밝게 빛을 놓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항상 그 '참 마음' 위에 나타나는 허망한 그림자를 오인해서, 저 바깥에 있는 경계인 줄로 잘못 알고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다.


                      

21. 그 마음자리는 늘 활기차고 생기발랄하다


 불가(佛家)에서 그 사용빈도가 가장 높은 단어 몇 개를 든다면, 그것은 아마 '없다(無)', '비었다(空)' 혹은 '아니다(非)' 정도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모든 경계를 의심할 여지없는 실제(實際)인 줄로 여기고,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범부들로 하여금 그 미망(迷妄)에서 헤어나게 하기 위해, 옛 성인들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가를 짐작케 해준다. 그러나 요즘은 그러한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가 그 참 뜻을 깊이 사무치지 못한 채, 그저 불가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상투적인 말' 정도로 치부(置簿)해 버리거나, 혹은 이분법적인 사고로 그러한 말들을 멋대로 재단해 버리기가 일쑤이다.


 이렇게 마음 씀씀이가 외통수인 사람들은 지금까지 '나'의 안락한 삶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열심히 궁리하고 노력하며 살아온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이 '나'였는데, 그런데 이 '나'가 '실체'가 없고, '지혜'도 '힘'도 없는 허깨비와 같은 존재라는 말을 듣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만,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파악하는 이승(二乘) 근기의 사람이라면 아마도 강한 거부감을 느끼면서 그와 같은 주장을 묵살해 버리거나, 아니면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심각한 무기력증에 빠지던가 하는 것을 종종 목도하게 되니,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름지기 <진실된 법>은 중생의 망령된 사량계교(思量計較)가 미칠 바가 아니며, 따라서 거기에는 <두 법>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엄격하게 따지자면 「두 법이 있을 수 없다」는 이 말도 벌써 '진리'에 상응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아직 안목이 열리지 못한 학인들이 <종문(宗門)의 전통적인 방편의 틀>에 갇혀서 치우치게 <생각 없음>(無心 無念)을 추구하던가, <말함이 없음>(無言)이나 <함이 없음>(無爲) 등에 떨어져서 그 속에 안주한다면 이야말로 <일 없음>(無事)의 수렁에 빠져서 전혀 운신이 자재하지 못할 것이니,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 당하여 선현(先賢)들은 「고인 물속엔 용이 깃들지 않느니라」 하여 그 허물을 경책했던 것이다.


 요약컨대, '법의 본래 법'은 '법'(法)도 아니고, '법 아님'(非法)도 아닌데, ― 옛 성인들은 이와 같이 어떻게도 표현할 수 없는 '법'을 가지고 널리 교화문(敎化門)을 베풀어서 미혹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그 숱한 방편의 말씀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본분납자'(本分衲子)라면 결코 말이나 문자에 떨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며, 따라서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그들은 <있다>만 보내는 것이 아니고, <없다>까지 마저 보냄으로써 그 청정한 '본래 마음'에 티끌만한 한 법도 붙여두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승보살'(一乘菩薩)은 <있음>에 집착하여 헤어나지 못하는 범부들과도 다르고, 또한 모든 세간법을 미세하게 깨달아 살펴서, 그것들이 다 '자체의 성품'이 없는 것이라고 보아, 막무가내로 털어 버리는 이승(二乘)들과도 다른 것이다.

 

그리하여 헛되이 과보(果報)를 챙기는 일이 없는 일승보살은 누진통(漏盡通)을 증득하는 일도 없으며, 시끄러운 시장바닥을 종횡하면서도 결코 물드는 일이 없는 '청정한 제 성품'(淸淨自性)을 회복하여, <원만한 기틀>(圓機)을 갖춤으로써 다만 <'앎'에 즉하여 '앎이 없고'>, <'함'(爲)에 즉하여 '함'이 없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 <신령한 성품>(靈性)을 결코 망령된 정식(情識)으로 어둡히는 일이 없는 것이다.


  요즘의 출가한 사람들이 세속의 부귀영화를 모두 마다하고,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인생 일대사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다.

그런데 대뜸 「'마음'이 그대로 '법'이요, '마음' 밖에는 알아야 할 만한 단 하나의 법도 없다」고 하던가, 「'마음'이 그대로 '부처'니 결코 '마음' 밖에서 '부처'를 구하지 말 것이며, '마음'을 가지고 '부처'나 '보살'에게 예경(禮敬)하지 말라」고 한다.

 

또는 「'불성'은 모든 사람에게 본래 구족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니, 새삼 배우고 갈고 닦고 하는 것이 다 허물로 돌아가느니라」 하는 등의 말을 듣는다면, 그들은 중생의 치우친 집착을 떼어주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말한 이와 같은 성인들의 방편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얼핏 나름대로의 망령된 지견을 일으켜서, 「모든 법성(法性)이 공해서 한 법도 취할 것이 없다」는 또 하나의 치우친 지견을 짓고는 그 속에 들어 앉아버린다.

그리고 더는 닦으려고도 하지 않고, 혼침(昏沈)에 빠져서, 마치 고인 물이 썩듯이 아주 가라앉아 버리니, 이것은 바로 모든 학인들이 마땅히 삼가야 할, 이른바 저회주의(低徊主義)에 빠지는 우(愚)를 범하는 것이다.


  어찌 성인(聖人)들의 뜻이 이렇게 온기도 없이 식어버린 재(灰)처럼 되는 것에 있었겠는가? '불법'이란 결단코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활짝 깨쳐서 일체의 장애가 완전히 제거된 마음은 가장 활기 차고 생기 발랄한 마음이다. 경전에서는 이런 경우 '활발발'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살아 있는 물고기가 펄적펄적 뛰노는 형상만큼이나 생기 찬 모습을 이르는 것이다.

 

 본래 청정한 '마음'에는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중생'도 '부처'도 없으며, '생사'도 '열반'도 본래 없으니, 거기에는 없다는 것도 없어서 그저 맑디맑은 '허공성' 자체일 뿐이다.

 

그러나 저 '허공'은 아무런 지각도 작용도 없는 데 비해서, 우리의 '신령한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은 마치 두꺼운 먹구름이 활짝 걷힌 뒤의 맑은 하늘처럼 더욱 맑고 밝고 활기 찬 생동감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그곳에 무엇이 있어서, 무엇을 장애하고 무엇을 제약하겠는가? 도무지 시방삼세(十方三世)에 거칠 것이 없으니, 이쯤 되면 활발발이라는 말조차 구차해지는 것이다.


 끝내 상대(相對)가 끊어져서, 집착해야 할 만한 법도 없고 버려야 할 만한 법도 없는 것이니, 모름지기 '있다'는 생각도 '없다'는 생각도 다 놓고, 놓았다는 생각도 놓아서,  그 마음에 티끌 하나 붙을 데가 없어야,  그때 비로소

<깨달음의 성품>(覺性)에 새벽이 밝아오는 것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 終  / 대우거사님

인과는 동시이다 / 대우거사

11. 인과(因果)는 동시(同時)이다


 수많은 선지식들의 말씀을 늘 대하면서도, 대개의 수행자들의 마음 한 구석에 거의 예외 없이 뿌리박고 있는 '옹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래도 그렇지만․․․"이라는 거의 무의식적이고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업식(業識)의 항변이다.

 '깨달음'도 '미혹함'도 다만 인연을 따르면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허망한 그림자 놀음일 뿐이라는 사실을 늘 듣고 늘 되뇌이지만, 먼저는 미혹했다가 나중에 가서야 깨닫는 거라면, 그건 분명히 '생사법'(生死法)이요, '무상법'(無常法)임이 틀림없다고 다짐한다. 

 

늘 그렇게 다짐하지만, 그 다짐의 순간에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 어떤 논리도, 심지어 석가 세존의 '권위'를 갖고도 어찌할 수 없는 완강한 업의 항변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도 그렇지만․․․". 한 마디로 믿기 지를 않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지금도 여전히 그 결정적인 '깨달음의 순간'을 맞기 위한 온갖 유위행이 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름지기 큰마음을 내서 한 번 이 길에 들어선 수행자라면, 또한 선지식의 말씀이 정말로 옳다는 확신이 들었다면,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그래도 그렇지만 ․․․" 이라는 끈적한 업의 꼬리를 과감히 끊어 내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결국에는 그 누구도 이 '깨달음의 길'에 도움을 줄 수 없고, 또 남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전방(前方)으로는 도달해야 할 '마을'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고, 뒤로는 돌아가서 쉬어야 할 '고향'에 아직 돌아가지 못한, 바로 그 자리에서 몰록 활로(活路)를 얻어야 한다」고 한 고인(古人)의 말씀이 절실한 순간이다.


 물론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은 아니다. 화엄경에도 이르기를,

 『'불과'(佛果)에 드는 것이 '한 찰나'를 넘기지 않으나, 다만 근성의 <미혹함과 깨달음>(迷悟)이 막힘으로써 '무량한 겁'(無量劫)을 설하게 된 것이니, <통틀어 '한 때'를 옮기지 않는 까닭에>, 곧 '범부의 자리'에서부터 처음 '견도하는 지위'(見道位)에 이르기까지 인․과(因果)가 '한 때'(一時)라, 도무지 전후(前後)가 없느니라.

 

  따라서 <성불하지 못하는 때>를 보지 못하고, <'정각'을 이루는 때>도 보지 못하며, <'번뇌'를 끊은 때>도 보지 못하고, <'보리'(菩提)를 증득하는 때>도 보지 못하나니, 필경 조그마한 생각도 옮기지 않으면서 50위(位)를 원만히 수습하여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모두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총별동이성괴(總別同異成壞)가 일시(一時)에 모두 자재하여> 이 모두가 '세간의 범정'(世情)으로 볼 바가 아니기 때문에, 따라서 믿기가 어려운 것이니라.』라고 했던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 길이 얼마나 힘든 길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길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경회루'(慶會樓)에 앉아서 늘 '서울'로 가는 길을 묻고, 또한 빠르게 곧바로 가는 지름길을 찾는다면 그에게 무엇이라고 일러주어야 하겠는가?

 

오직 제 자신이 영겁 전에서부터 일찍이 '그 자리'를 여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결코 '그 자리'를 여의는 일이 없을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각'을 이루는 '때'>인 것이요, 아득한 '과거'에서부터 영원한 '미래'에 이르기까지, '온갖 때'가 바로 이 <'정각'을 이룬 '때'>를 여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과거 현재 미래의 온갖 <시간의 본체>요, '깨달은 때'와 '깨닫지 못한 때', '성불한 때'와 '성불하지 못한 때'가 모두 이 '한 때'를 벗어나는 것이 아닌 것이다.


12. 지금 이대로가 정각(正覺)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속박'이나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것의 '원인'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찾아내어 그것을 뿌리째 끊어버려야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인연법의 '남(生)이 없는 도리'를 깊이 통찰하지 못한 결과이다.

'부처'의 <지음 없는 근본지혜>(無作根本智)에 의지하는 '일승의 길'은 <'함이 있음'(有爲)과 '함이 없음'(無爲)이 둘이 아닌 경지에서의 '번뇌 없음'(無漏)>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범부의 살림살이는 모두 <세간법을 따르는 행위뿐>이요, 삼승(三乘)은 오직 <세간법을 여의는 행위뿐>이다. 그러나 이 '일승의 길'은 <'세간'도 아니고 '출세간'도 아닌 것>이다. 이는 능히 이 '세간'을 따르면서 두루 행하나, 전혀 끄달리거나 물드는 일이 없는, 이른바 '보현행'(普賢行)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또한 '삼계'(三界), 즉 '탐욕이 치성한 세계'(欲界)와 '미묘한 형색의 세계'(色界) 그리고 '순수한 정신만의 세계'(無色界) 등은 그 모두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법>(思議法)이요, '삼승', 즉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 보살법(菩薩法) 등도 역시 마찬가지이니, 그것은 이들 모두가 전부 <얻을 바가 있는 법>(有所得法)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승의 지혜 경계'는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법>(不思議法)이니, 그것은 바로 <얻을 바 없는 법>(無所得法)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경우, 즉 삼계(三界)의 중생이건 혹은 이승(二乘)이나 정토보살(淨土菩薩)이건, 그 모두가 <과보가 있는 모습>(有報相)인데 비해, 오직 '일승의 불과(佛果)'만은 이미 '물들고 깨끗한 마음'(染淨心)이 소멸되었음으로 '과보'(果報)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다만 중생들이 즐겨하고 원하는 바를 따르면서 사물의 모습을 나투어 보이니, 이는 마치 둥글고 맑은 거울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가리지 않고 비추는 것과 같다.

 

즉, '부처 지혜'는 모든 중생과 더불어 '한 마음'을 같이 하면서, 전적으로 그 '마음'이 보는 바에 맡기는 것이니, '깨달은 사람'에겐 '법'이 본래 이와 같아서 그 작용이 가고 옴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도 이르기를․․․

  『무릇 진실한 법은 '제 모양'을 버리고 '다른 모양'을 취하지 않는다. 만약 <'정각' 아닌 것>(不覺)을 버리고 <평등한 바른 깨달음>(等正覺)을 이룬다면 이것은 <진실한 깨달음>이 아니니라.』라고 했던 것이다.

 

 이는 모든 중생이 <지금 있는 이대로> 모두 '깨달음의 자리'(覺位)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결코 '불각'(不覺)을 버리고 '정각'(正覺)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하나의 깨달음'이 '모든 깨달음'이어서, 항상 '정각'을 이루었고, '불각'일 때가 없는 것이다.


 

13. 완전한 이해에 자취가 없다


어떤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다.

 『요즘 그대의 살림살이는 어떠한가?』

 『티끌만 한 한 법도 마음에 붙여둘 것이 없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제자를 호되게 한 방망이 때렸다. 나중에 누군가가 그 스승에게 그때, 그렇게 말한 제자를 때린 까닭을 물었더니, 그 스승이 말하기를, ․

 『만약 그때 내가 때리지 않았으면, 나의 '견해'가 그와 같다고 알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불법에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는 수행자라면 「'모든 법'은 그 어느 것도 본래 '진리' 아닌 게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그 말의 참 뜻을 깊이 알지 못하고 소리만 외고 다녀서 그들의 공부가 늘 제자리를 맴도는 경우가 많다.

 

 그 근본 뜻은 한 가지 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많은 선지식의 방편의 말씀이나 각각의 실제적인 상황들을 접하게 되면, 처음 대하는 묘하고 새로운 경험쯤으로 여기고는 또 다시 그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쌓아 가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 대다수 수행자의 모습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철저히 이분법적인 사고에 길들여진 대부분의 중생들에게, 또 어딘가에 늘 속해 있다는, 이른바 '소속감' 가운데서 모종의 안정감을 찾는 중생들에게 이러한 말들이 절실하게 와 닿게 되기까지는 끝없는 의증과 깊은 참구가 따라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좀처럼 소화되기 어려운 일이다.

 

 위의 말씀을 늘 되뇌이고 다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 자신이 그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에 속해 있다」는 말을 들을 때 -

이 말은 그에게 있어서 짊어지고 다녀야 할 또 하나의 짐일 뿐이다.


 지금 현재 우리 각자가 전적으로 그에 속해 있다고 믿고 있는 일체의 것, 즉 '국가'와 '민족'과 '신앙', '철학' 등, 심지어 나아가서는 '나'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에서조차도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겠는가?

 이는 결코 그것들과 결별하고 반대하라는 것이 아니다. 만약 반대하고 멀리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 '진리'일 수 없는 것이다.


 가령 그 전에는 좋고 싫은 게 너무 분명해서, 내가 싫은 것은 도저히 용납할 여지가 없었던 그 마음에 우선 조금이라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여지라도 마련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접근에서 시작해서, 마침내는 그 모든 것을 거리낌 없이 포용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즉, 나의 불찰로 인해 잃어버렸던 내 마음의 나머지 반쪽을 회복함으로써 원래의 '완전한 마음'을 되찾으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비록 마음에 합당한 것이건 아니건, 또한 좋은 것이건 싫은 것이건, ― 아직은 온전히 바닥을 사무치지 못해서, 여습(餘習)이 남아 있더라도, ― 그 모두를 평등하게 포용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회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본래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여기서도 항상 잊지 않아야 할 것은, 이 모두가 유위(有爲)의 억지놀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모든 법의 '남(生)이 없는 도리'와 '성품 없는 도리'를 철저히 사무침으로써, 일체의 분석적 지견이 다했을 때, 그 '본래 마음'은 저절로 찾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4. 성상(性相)이 함께 머무른다


 중생의 업은 너무도 뿌리 깊고 완고한 것이어서, 불자(佛子)이건 아니건, 배운 사람이건 못 배운 사람이건,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심지어 새장 속의 앵무새조차도 되 뇌일 수 있을 만큼 흔한 말이 되어버렸지만, 그 진정한 뜻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체의 변화하고 옮기고 하는 형상(形相)은 모두 인연을 따르면서, 마치 거울에 나타난 '빛의 얼룩'과도 같은 것으로, 실제로는 전혀 왕래하는 자취가 없는 것이며, 또한 신령스러운 '진여법성'(眞如法性)은 스스로는 조금도 변하고 옮기는 적이 없으면서, 다만 인연에 감응하여 만법을 두루 나툴 뿐이다. 그런데 이 세상의 일체만유가 모두 이 '진여법성'의 나툼이 아닌 게 없으니, 뭇 생령(生靈)과, 그것들의 온갖 생명활동, 그것이 '존재'이건 '일어나는 일'이건 간에 어느 것 하나 빠뜨림이 없이 고스란히 '부처 몸'의 천 백억 분신이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지에서 누가 '깨달은 사람'이며, 무엇이 '깨달은바'이겠는가? 이 온갖 것이 모두, 털끝만 한 한 법도 남김없이 '불사'(佛事) 아닌 게 없고, '부처' 아닌 게 없는, 그야말로 통틀어 '신령스러운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일 뿐인 것이다. 따라서 일찍이 '부처' 아니었던 적이 없으니, 지금에 새삼스레 '부처' 되기를 바랄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어느 날 앙산(仰山)이 위산 선사에게 묻기를, ․․․

 『어떤 것이 '참 부처'가 사는 곳입니까?』 하니, 선사가 대답하기를,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 이 묘한 이치로써 '신령스러운 불꽃'의 무궁한 자리를 돌이켜 생각하여(廻光返照), 마침내 생각이 다해서 '근원'으로 돌아가면, <'성품과 형상'이 항상 머물고>(性相常住), <이․사가 둘이 아니리니>(理事無二), 이것이 '참 부처'의 여여함이니라』고 했다.

 앙산이 이 말 끝에 문득 깨달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말을 듣고 나름대로의 지견을 말아내어 「'인과법'은 모두 빈 것이다」라거나, 「'인과법'은 엄연히 행해지고 있다」느니 하면서 '있고 없음'과 '옳고 그름'을 놓고 계속 시비를 벌인다면, 이것은 마치 왼쪽 '토끼 뿔'과 오른쪽 '토끼 뿔'의 길고 짧음을 놓고 실랑이를 계속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모든 시비가, 그 시비의 내용을 불문하고 모두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그저 지금 있는 이대로 '옳은 것'이다. 즉 '먼저'는 '먼저'이고, '지금'은 '지금'이고, '나중'은 '나중'이라고 하건, 또 한 생각 더 굴려서, 이 모두가 '동시'라고 하건, 이와 같은 말들이 다 '빈 말'일 뿐이라는 것이지, 이 중 어느 하나는 옳고, 다른 하나는 그르다는 말이 아닌 것이다. 물론 이러한 말에도 구애를 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종일토록 시비 가운데 있으면서도 결코 물드는 일이 없어야 진정으로 '시비를 벗어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화엄경에도 이르기를,

『<처음으로 '바른 깨달음'을 이루었다>(始成正覺)고 하는 것은, 자기의 몸과 마음으로 <온갖 삼세고금(三世古今)의 법이 '한 생각' 가운데 있어서, '오래 된 것'이라거나 얼마 되지 않은 것'이라거나 하는 '법'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만, 그러나 '한 생각' 가운데 또한 일체중생의 <삼세(三世)와 멀고 가까운 겁(久近劫)을 분별하는 지혜와, 온갖 차별된 지견의 지혜를 허물지 않음>을 증득하는 것이니라』라고 한 것이다.



15. 인과법의 실상


 흔히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연기설(緣起說)의 깊은 뜻을 살필 때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이른바 인과법(因果法)이나, 또 물리학에서 말하는 인과율(因果律)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물의 존재성에 대하여 사람들이 외통수로 생각하고 있는가를 절감하게 해 준다.

 

 그 한 비근한 예로, 세속에서 가끔 논란거리가 되곤 하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웃지 못할 '말장난'을 떠올리면서 쓴웃음을 짓게 되는 것이다. 이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고리' 속에서 그 끄트머리를 좇으면서 요즘도 가끔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닭'과 '달걀'을 구체적인 고유의 실체성을 갖고 있는, 이른바 <존재론적인 실체>로 오인하는 데서 기인하는 부질없는 관념의 유희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같은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금방 "닭과 달걀이 실체가 아니라면, 그러면 무엇이란 말인가?" 하고 따지고 들 게 뻔한데, 사실은 이 대목이 바로 <속인>과 <올바른 수행자>의 안목이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사고(思考)의 분수령이 된다.

때문에 불가에서는 연기설을 가리켜 우매한 중생들의 존재에 대한, 즉 그 골치 아픈(?) 이른 바 '경계'에 대한 올바른 안목을 갖추게 함으로써 천년 묵은 속기(俗氣)를 벗어 던질 수 있는 훌륭한 계기로 삼는 것이다.

 거창한 이론을 빌릴 것도 없이,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원인'이 없으면 '결과'가 없다. 그렇다면 '결과'라는 것은, ―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 전적으로 타(他)에, 즉 '원인'에 의지해서만 세워질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 '결과'라는 것은 모두 '제 체성'이 없는,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결과'가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이 실체성이 없는 것이라면 '원인'인들 어떻게 혼자서 세워질 수 있겠는가?

 

'결과'가 있어야 '원인'도 비로소 '원인'이 되는 것이고 보면, 이 '원인'도 또한 똑같이 허깨비와 같은 것이다.

 결국 '원인'도 '결과'도 전혀 '정식'(情識)에 의해서 헛되이 세워진, '빈 이름'만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허깨비가 어떻게 허깨비를 부를 수 있겠으며, 허깨비가 어떻게 허깨비에 응수(應酬)할 수 있겠는가? ․․․ '닭'도 '달걀'도 모두 '빈 이름 뿐'인 것이다.


 이것은 '인과법'을 무시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분명히 '원인'이 계기가 되어서 '결과'가 나기는 한다. 그러나 다만 지금껏 우리들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원인'이 '결과'를 내는(生) 것이 아니고, 즉 '원인'으로부터 '결과'에로 무엇인가가 구체적으로 옮아간 것이 있는 게 아니고, 다만 그 '원인'은 '결과'를 낳을 계기가 되어준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다.

 

 분명한 사실은, 옛날 것'이 지금에 온 것이 아무것도 없고, '지금의 것'이 옛날로 간일도 없는 것이 엄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뭔가가 세월의 흐름을 따라서 끊임없이 가고 오고 한다는 생각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사물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즉 모든 존재는 자체의 성품이 없는 허깨비와 같은 것이고, 따라서 그와 같은 허망한 존재가 결코 존재를 낼 수도 없고, 존재를 받아들일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야기되는 이른바 무명의 방황인 것이다.


 '원인'이건 '결과'이건, 이 모두가 다 '빈 이름'일 뿐이어서, 이 세상에는 도무지 가고 오고 한 흔적조차 없는 게 진실이라면, 그렇다면 당연히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것이 유정(有情)이건 무정(無情)이건 간에 그 모두가 전혀 사람들의 허망한 분별에 의지해서만 존재하는, 마치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은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나는 것은 필연인데, 그 '원인'이 지금에 온 것이 없고, 따라서 '결과'도 과거로 간 것이 없다면, 이 어간에서 전혀 아무것도 가고 오고 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게 진실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이 바로 <옮김 없는 이치>(不遷論)이며, 「강물은 끊임없이 도도히 흐르는데 일찍이 한 방울도 흐른 일이 없다」고 하는, 얼핏 듣기에 황당하기 그지없는 말이 있게 된 논거(論據)인 것이다.


 따라서 진실을 알고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항상 그 모두가 순간순간 스스로 새로운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뒤가 항상 말쑥하게 끊어져서 전혀 앞뒤에 이어 닿는 것이 없으니, 거기에 무슨 '탈'이, 즉 무슨 '문젯거리'가 따라 붙을 여지가 있겠는가? 결국 이 세상의 삼라만상 모두는 일체의 '범정'(凡情)과 '이름'이 붙을 여지조차 없는, 그야말로 그 자체로서 스스로 청정한 존재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실상의 해탈'(實相解脫)을 얻는 첫걸음인 것이다.


- 대우거사


임종임 - 마음약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