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무공용행(無功用行)
일체 만유는 오직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 스스로는 체성이 없어서 남(生)이 없으며, 따라서 현실적으로 마치 '작자'(作者)가 실제로 있어서, 그가 뜻을 세우고 생각을 내어서 애써 작용을 일으키고 있을 때에도 이 모두는 실제로는 전혀 성취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거듭되는 이야기지만, 이 모두가 오직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이요, 진실로 '작용의 주체'가 있어서 그가 작용을 일으키는 일은 없는 것이다. 예컨대, 바람이 불기 때문에 물결이 이는 것이지, '물결' 스스로가 힘이 있고, 생각이 있어서 제 멋대로 춤추는 게 아니라는, 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사람들에 의해서 말끔히 외면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끔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모든 '진실'이라는 게 다 그렇듯이, '진실'은 항상 분명하게 늘 코앞에 펼쳐지고 있는데, 다만 사람들의 미혹한 마음 때문에 잠시 잠깐 헷갈린 한 생각이 '진실'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고 가버리는 것이다. ․․․ 그러므로 수행자가 이 엄연한 '진실'을 깨달아서 그에 명합(冥合)하려면, 모름지기 온갖 법에 공력을 들이는 일이 없이, 오직 인연을 따르면서 스스로 이루어지는 '공용 없는 지혜'(無功用智)를 증득하여 <작용하되 작용함이 없는 작용>(作無之作)을 자재하게 굴릴 줄 알아야 비로소 이를 일러서 <'부처의 집안'(佛家)에 태어난 참된 '부처 자식'(佛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수행자가 참된 수행의 길을 따라서 정진(精進)한 끝에 설사 '불성'(佛性)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이 '공용이 없는 행'(無功用行)을 드러내어서, <'고요함'과 '작용'이 둘이 아닌 도리>를 자재하게 굴릴 수 없다면 그는 참된 '불자'(佛子)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엔 끝내 능․소가 다하지 못해서 여전히 범용한 '자아'가 허망한 '유위행'을 그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신령스러운 성품'(靈性)을 등지게 되기 때문이다.
'여래 지혜의 업'(如來智業)이 드러나면 '이와 사'(理事), '성과 상'(性相), '범부와 성인'(凡聖), '참과 허망'(眞妄) 등이 홀연히 원융(圓融)되게 서로 사무쳐서, 그 '자비'가 지극히 크지만 결코 애착하는 마음에 얽매이는 일이 없고, 종일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면서도 도무지 중생을 제도한다는 생각조차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래 근본지'의 '공용이 없는 행업'(無功用行業)으로, '공용'이 없으니 '고요함'(寂)이요, '행'은 바로 '작용'(用)이므로, 이것이 바로 <고요함과 작용이 둘이 없는 '지혜'의 업> (寂用無二智業)인 것이다.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등 삼승(三乘)은 아직 방편의 가르침을 여의지 못했기 때문에 성인이 어쩔 수 없어서 '수행'과 '증득'을 권한 거지만, ― 지금에 열심히 '인행'(因行)을 닦아서 훗날 그 공덕의 보람으로 '결과'를 '증득'하게 된다는, ― 이와 같이 <'공용이 있는 것'(有功用)은 결코 실다움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오랜 세월 동안 애써 이룩한 일체의 보람은 무상(無常)하여 끝내 허물어지고 만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따라서 붓다가 49년 동안 동분서주하면서 애쓴 보람도 결국은 그 '성스러운 가르침'(聖敎)를 대하는 중생이 제 마음 속에서 능․소의 자취를 완전히 쓸어내지 못한 상태에서 곧, ― '설함'(說)이 있고, '들음'(聽)이 있는 한 ― 그것이 '방편의 가르침'(權敎)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며, 따라서 실답지 못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49년에 걸친 화신불(化身佛)의 가르침도 권교(權敎)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것은 결코 세존의 가르침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성스러운 가르침'(聖敎)의 참된 뜻을 밝힘으로써, 오직 '말'과 '문자'에만 매달려서 <끝내 말로써 드러낼 수 없는 '성스러운 뜻'(聖旨)>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경책하자는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이 위대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이, '부처의 가르침'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서슴없이 천명함으로써, '부처' 자신의 존재마저도 넘어선 경지를 드러내고자 한 점이다. 결코 그는 "나를 따르라"는 식의 눈먼 가르침을 편 일이 없기 때문에 그의 위대함이 만세에 떨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17. 해야 하는가 하지 않아야 하는가?
우리는 뭔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하고 궁리하게 된다. 즉 '문제'에 대한 묘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행위는 너무나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미 '공용 없는 지혜'(無功用智)를 이룬 '큰 보살'들은 결코 '수'를 내기 위해 애쓰는 일은 없다. ― 이와 같은 말을 들으면, 아직 '법에 대한 집착'(法執)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머리가 혼란스럽고, 시비득실(是非得失)의 엇갈린 길목에서 지견이 마구 소용돌이치면서, 도저히 그 의증(疑症)이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이 '마음'이 그대로 '법'이요, '마음' 밖에는 알아야 할 법도 없고, 지녀야 할 법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난 다음에도 이와 같은 현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범부들이 걸려든 올가미 중에서 가장 벗어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해야 하는가'(有爲), '하지 않아야 하는가'(無爲) 하는 두 갈래 길에서 늘 이쪽 저쪽 하면서 서성이기를 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지음 없는 지음'(無作之作)의 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늘 이와 같은 갈림길에서 지견에 지견이 꼬리를 물고, 머리를 굴리기를 쉬지 못하기 때문에 '바른 생각'(正念)을 잃게 되는 것이다.
'있다'고 하면 있는 줄로만 알고, '없다'고 하면 없는 줄로만 아는, 이 범부의 '이분법적 사고'의 틀은 지독하리만큼 고질적이다. <'공용 없는 지혜'(無功用智)를 이룬 '큰 보살'들은 결코 '수'를 내기 위해 애쓰는 일은 없다>고 들으면, 금방 <해결책을 모색해야 하는가 아니면, 모든 걸 그냥 사태의 흐름에 맡기고 조작하지 않아야 하는가?> 하는 두 갈래 길에서 고민하던가, 아니면 그 중의 어느 하나를 취해서는 그것으로써 '올바른 뜻'이라고 여기면서 망식(妄識)을 굴리기를 쉬지 못하니, 어느 세월에 <회심(廻心)의 묘한 이치>를 알 수 있겠는가?
<지금처럼 그렇게 '하는 것'(有爲)이 바로 '하지 않는 것'(無爲)이라는 사실>을 바로 지금 그 자리에서 당장 깨달아 마쳐야 한다. 모름지기 '참된 가르침'이라면 <지금 있는 그대로의 것>을 버리고, <그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취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속절없이 인연을 따르면서 이쪽 저쪽 하는 '유위행'(有爲行)이요, '생사법'(生死法)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찌 '참된 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이러한 글을 읽으면서도 여전히 그 글 가운데서 어떻게든 규범을 만들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바로 범부의 고질적인 근성이니, 만약 지혜로운 이라면 어찌 황금을 가지고 황금을 바꾸기 위한 궁리를 계속하겠는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8. 지금 모든 유위가 무위다
범부의 안목으로 이 세상이 <지금 있는 이대로> 적멸한 열반(涅槃)이라는 사실을 납득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늘 보다 나은 어떤 경지, 보다 안정되고, 보다 편안하고, 보다 즐거운 경지를 얻기 위해, 지금 열심히 '원인행위'를 지어감으로써 훗날 이에 상응하는 '과보'(果報)가 얻어지길 기대하는 게 인지상정이고 보면, 오히려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세존(世尊)도 대각(大覺)을 이룬 후에, 세상에 나아가서 이 '깨달음의 경지'를 과연 중생들에게 설해줘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두고 이렛날 이렛밤 식음을 전폐하고 고민하셨다 하니, 이 길이 얼마나 험한 길인가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 목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아무리 믿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엄연한 '진실'이요, 한결같은 성인들의 말씀이고 보면, 당장은 잘 이해되지 않더라도 우선 성인의 말씀을 믿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신의 우매함을 탓할지언정, 함부로 <성스러운 가르침>에 까닭 없이 의증을 낸다거나, 자신의 지견으로 성인들의 말씀을 재단하려든다거나 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이들은 '무명'의 뿌리가 워낙 깊어서, 이 '작용의 주체'도 없고 '수용의 주체'도 없는, 따라서 '함이 없고'(無爲) '모습도 없는'(無相), 적멸한 실상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 마음은 여전히 <일정한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일정한 '결과'를 낳는다>는 고전적 세계관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낡은 물질관, 세계관은 '철학'이나 '종교'에서 뿐 아니라, '현대과학'에 의해서도 반증된 지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이 뿌리깊은 고정관념은 좀처럼 다할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성인들의 말씀은, 다만 지금의 이 모든 '유위행'이 사실은 '짓는 자'도 '받는 자'도 없는, 마치 꿈속의 일과 같은 것이므로 헛되이 집착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뿐이다. 만약 '유위행'과 '무위행'을 서로 상대되는 두 법으로 보아서, '유위행'을 여의고 '무위행'을 행하는 것으로써 옳음을 삼는다면, 이것은 가장 심한 '유위의 함정'에 빠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성교(聖敎)의 '무위'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의 모든 '유위'가 그대로 '무위'인 것이다. 즉 '유위'도 '무위'도 다 나의 '한 생각'으로 '지어낸 바'(所作)로서, 끝내 '빈 말'뿐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이 양변을 몰록 다 여의고는, 그 여읜 자리에도 머물지 않게 되면, 그 때에야 비로소 '무위'가 뭔지 조금은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조작이나 노력에 의해서 얻어지는 경지가 아니라는 것을 거듭거듭 명심해야 한다. 종일 세속의 '유위' 가운데 있으면서도 물 드는 일이 없고, 종일토록 온갖 '유위법'을 행하면서도 끝내 <종일 '없는 법'을 굴린 것임>을 분명히 알아서, 자취가 없으면 이것이 바로 성인이 말하는 '무위'인 것이다.
19. 일체의 차별 법은 본래 망령된 분별일 뿐이다
'법의 본래법'은 오직 '참된 하나'(眞一)일 뿐이요, 선․악, 시․비, 득․실 등의 일체의 차별법이 싹도 트기 이전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본래 움직임이 없는 '참 마음'(眞心)이요, 순일(純一)하고 여여한 '참 성품'(眞性)이며, '하나의 법계'인 것이다. 그러나 범부의 마음속에는 망령된 정식(情識)으로 분별된 온갖 망식(妄識)들이 뒤섞여서, ― 선(善)을 배제한 악과 악(惡)을 배제한 선, 옳음(是)을 배제한 그름과 그름(非)을 배제한 옳음 등 ― 온갖 망정(妄情)이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고 충돌하면서 도무지 조용할 날이 없다.
하지만 그 분별이 있게끔 한 정식에 대해 조금만 깊이 생각해본다면 그 갈등과 충돌이 전혀 밑도 끝도 없는 것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선'(善)이 있을 때에는 '악'(惡)에 의지해서 '선'이 있게 되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악'도 역시 '선'에 의지해서 '악'으로 인지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둘은 다 독립적인 실체가 없는, 순전히 '망식'(妄識)만으로 허망하게 지어진 허상인 것이다. 이와 같이 서로 서로 의지해서 세워지는 것을 '인연법'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렇게 인연으로 말미암아 나는 모든 법은 자체로는 성품이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선'과 '악'은 이렇게 각각으로는 <'성품'이 없기 때문에>(無性), 그래서 이것을 '둘'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둘'을 막무가내로 서로 다른 것이라고 고집하기 때문에 우선 급한 대로 방편으로 <'둘'이 아니라>고 말했을 뿐이지, 사실은 알고 보면 이 '둘'이 모두 망상으로 지어진 허깨비 같은 것이기 때문에 '둘'이랄 것도 없고, '하나'랄 것도 없는 게 진실인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내내 토끼의 왼쪽 뿔과 오른쪽 뿔이 서로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하고 논의를 거듭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그 끔찍한 무명(無明)이라는 것도 마치 허공에 꽂힌 말뚝에 넝마를 걸어놓은 것과 같은 것이니, 뭘 다시 걷어내고 말고 할 게 있겠는가?
본래 아무 일도 없는데, 결국 '무명'이 그대로 '도'인 것이다.
이 대목이 곧 '실상의 해탈'을 이룰 수 있는 요체이다. 만약 이 세상이 온통 '선'뿐이라면 '선'이라는 말이 왜 생겼겠는가? 또, 만약 이 세상이 온통 '고요함'뿐이라면, '고요함'이라는 말은 왜 생겼겠는가?
'움직이는 모습'을 취했기 때문에 '고요한 모습'이 마음 속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선현들도 말하기를, 「<'움직임' 없는 '고요함'>이 '작용'에서 주(主)가 되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유추해서 '있음'과 '없음'까지를 포함한 <모든 형상(形相) 있는 것들>은 이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의 정식(情識)으로 지어진 허망한 그림자일 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따라서 경에 이르기를, 「모든 있는 바 '형상'은 이 모두가 허망한 것이다. 만약 온갖 '모습'이 곧 '모습'이 아닌 줄로 보면, 곧 '여래'(如來)를 보리라」고 했던 것이다. 때문에 실상(實相)이라는 말은 결국 '모습 없음'(無相)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결국 이 경지에 이르면 항상 저절로 '같음' 가운데의 '다름'이요, '다름' 가운데의 '같음'이어서, 이 동이법문(同異法門)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코 그 마음의 흐름이 자재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이 '동이법문'을 요달하게 되면, 모든 차별법이 서로 뒤섞이면서도 전혀 혼란스럽지 않을 것이니, 일체의 시비득실(是非得失)의 와중에 있은들 무슨 방해로움이 있겠는가?
20. 상락아정의 참마음은 학인에 의해 증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참된 열반'은 학인에 의하여 증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증득된 것, 즉 '얻은 바'가 있는 것은 '생사 법'이지 이것은 결코 '참된 법'이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서, 먼저는 미혹해서 '생사 법'에 갇혀 있다가 나중에 깨달아서 '열반'에 드는 것이 아니다. 설사 일체의 생각이 완전히 쉬어서 아주 '고요한 경지'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의근(意根)으로 법진(法塵)을 분별하는 것일 뿐이다.
수행자가 알맞게 공부가 익어서 어느 날 문득 생멸 없는 '본래 마음'을 깨쳐서, 법성(法性)을 보고 나면, 마치 오랜 겁(劫) 동안 일찍이 한 번도 깨어나 본 적이 없었던 오랜 꿈에서 깨어난 것과 같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어떻게도 설명이 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세계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일찍이 생사고해(生死苦海)에 빠져서 허덕였던 적도 없고, 거기에서 헤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던 일도 없으며, 또 그러는 가운데 나름대로 터득했던 갖가지 그럴싸한 '지혜'들도 모두가 꿈속에서의 허망한 잠꼬대였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해방감이다. 오직 순일(純一)한 허공성으로서의 '신령한 앎'(靈知)이 있을 뿐이요, 도무지 일체의 상대가 끊어져서, 그저 자기 혼자서만 알 뿐, 누구에게 말 할 일도 아니다.
모든 것이 그저 맑고 고요할 뿐이어서 '법락'(法樂) 만이 가득하다. ― 그런데 이 때, 등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하기를, 「지금 꿈에서 깬 것은 누군가?」 하는 게 아닌가. 뒤돌아보니 아무도 보이진 않고, ― 실로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는 순간이다.
그는 자신이 여전히 의근(意根)으로 법진(法塵)을 희롱하고 있었을 뿐이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하마터면 그것을 '구경'인 줄 알고 거기 머물뻔 했으니, 참된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마음'이 어찌 학인에 의해 증득될 수 있겠는가?
<본래 스스로 청정하여 움직임이 없는 '한 마음'>은 공부하는 사람에 의하여 증득되는 것이 아니며, 본래 스스로 온전히 이루어져서 늘 환히 눈앞에서 밝게 빛을 놓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항상 그 '참 마음' 위에 나타나는 허망한 그림자를 오인해서, 저 바깥에 있는 경계인 줄로 잘못 알고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다.
21. 그 마음자리는 늘 활기차고 생기발랄하다
불가(佛家)에서 그 사용빈도가 가장 높은 단어 몇 개를 든다면, 그것은 아마 '없다(無)', '비었다(空)' 혹은 '아니다(非)' 정도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모든 경계를 의심할 여지없는 실제(實際)인 줄로 여기고,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범부들로 하여금 그 미망(迷妄)에서 헤어나게 하기 위해, 옛 성인들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가를 짐작케 해준다. 그러나 요즘은 그러한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가 그 참 뜻을 깊이 사무치지 못한 채, 그저 불가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상투적인 말' 정도로 치부(置簿)해 버리거나, 혹은 이분법적인 사고로 그러한 말들을 멋대로 재단해 버리기가 일쑤이다.
이렇게 마음 씀씀이가 외통수인 사람들은 지금까지 '나'의 안락한 삶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열심히 궁리하고 노력하며 살아온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이 '나'였는데, 그런데 이 '나'가 '실체'가 없고, '지혜'도 '힘'도 없는 허깨비와 같은 존재라는 말을 듣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만,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파악하는 이승(二乘) 근기의 사람이라면 아마도 강한 거부감을 느끼면서 그와 같은 주장을 묵살해 버리거나, 아니면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심각한 무기력증에 빠지던가 하는 것을 종종 목도하게 되니,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름지기 <진실된 법>은 중생의 망령된 사량계교(思量計較)가 미칠 바가 아니며, 따라서 거기에는 <두 법>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엄격하게 따지자면 「두 법이 있을 수 없다」는 이 말도 벌써 '진리'에 상응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아직 안목이 열리지 못한 학인들이 <종문(宗門)의 전통적인 방편의 틀>에 갇혀서 치우치게 <생각 없음>(無心 無念)을 추구하던가, <말함이 없음>(無言)이나 <함이 없음>(無爲) 등에 떨어져서 그 속에 안주한다면 이야말로 <일 없음>(無事)의 수렁에 빠져서 전혀 운신이 자재하지 못할 것이니,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 당하여 선현(先賢)들은 「고인 물속엔 용이 깃들지 않느니라」 하여 그 허물을 경책했던 것이다.
요약컨대, '법의 본래 법'은 '법'(法)도 아니고, '법 아님'(非法)도 아닌데, ― 옛 성인들은 이와 같이 어떻게도 표현할 수 없는 '법'을 가지고 널리 교화문(敎化門)을 베풀어서 미혹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그 숱한 방편의 말씀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본분납자'(本分衲子)라면 결코 말이나 문자에 떨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며, 따라서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그들은 <있다>만 보내는 것이 아니고, <없다>까지 마저 보냄으로써 그 청정한 '본래 마음'에 티끌만한 한 법도 붙여두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승보살'(一乘菩薩)은 <있음>에 집착하여 헤어나지 못하는 범부들과도 다르고, 또한 모든 세간법을 미세하게 깨달아 살펴서, 그것들이 다 '자체의 성품'이 없는 것이라고 보아, 막무가내로 털어 버리는 이승(二乘)들과도 다른 것이다.
그리하여 헛되이 과보(果報)를 챙기는 일이 없는 일승보살은 누진통(漏盡通)을 증득하는 일도 없으며, 시끄러운 시장바닥을 종횡하면서도 결코 물드는 일이 없는 '청정한 제 성품'(淸淨自性)을 회복하여, <원만한 기틀>(圓機)을 갖춤으로써 다만 <'앎'에 즉하여 '앎이 없고'>, <'함'(爲)에 즉하여 '함'이 없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 <신령한 성품>(靈性)을 결코 망령된 정식(情識)으로 어둡히는 일이 없는 것이다.
요즘의 출가한 사람들이 세속의 부귀영화를 모두 마다하고,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인생 일대사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다.
그런데 대뜸 「'마음'이 그대로 '법'이요, '마음' 밖에는 알아야 할 만한 단 하나의 법도 없다」고 하던가, 「'마음'이 그대로 '부처'니 결코 '마음' 밖에서 '부처'를 구하지 말 것이며, '마음'을 가지고 '부처'나 '보살'에게 예경(禮敬)하지 말라」고 한다.
또는 「'불성'은 모든 사람에게 본래 구족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니, 새삼 배우고 갈고 닦고 하는 것이 다 허물로 돌아가느니라」 하는 등의 말을 듣는다면, 그들은 중생의 치우친 집착을 떼어주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말한 이와 같은 성인들의 방편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얼핏 나름대로의 망령된 지견을 일으켜서, 「모든 법성(法性)이 공해서 한 법도 취할 것이 없다」는 또 하나의 치우친 지견을 짓고는 그 속에 들어 앉아버린다.
그리고 더는 닦으려고도 하지 않고, 혼침(昏沈)에 빠져서, 마치 고인 물이 썩듯이 아주 가라앉아 버리니, 이것은 바로 모든 학인들이 마땅히 삼가야 할, 이른바 저회주의(低徊主義)에 빠지는 우(愚)를 범하는 것이다.
어찌 성인(聖人)들의 뜻이 이렇게 온기도 없이 식어버린 재(灰)처럼 되는 것에 있었겠는가? '불법'이란 결단코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활짝 깨쳐서 일체의 장애가 완전히 제거된 마음은 가장 활기 차고 생기 발랄한 마음이다. 경전에서는 이런 경우 '활발발'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살아 있는 물고기가 펄적펄적 뛰노는 형상만큼이나 생기 찬 모습을 이르는 것이다.
본래 청정한 '마음'에는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중생'도 '부처'도 없으며, '생사'도 '열반'도 본래 없으니, 거기에는 없다는 것도 없어서 그저 맑디맑은 '허공성' 자체일 뿐이다.
그러나 저 '허공'은 아무런 지각도 작용도 없는 데 비해서, 우리의 '신령한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은 마치 두꺼운 먹구름이 활짝 걷힌 뒤의 맑은 하늘처럼 더욱 맑고 밝고 활기 찬 생동감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그곳에 무엇이 있어서, 무엇을 장애하고 무엇을 제약하겠는가? 도무지 시방삼세(十方三世)에 거칠 것이 없으니, 이쯤 되면 활발발이라는 말조차 구차해지는 것이다.
끝내 상대(相對)가 끊어져서, 집착해야 할 만한 법도 없고 버려야 할 만한 법도 없는 것이니, 모름지기 '있다'는 생각도 '없다'는 생각도 다 놓고, 놓았다는 생각도 놓아서, 그 마음에 티끌 하나 붙을 데가 없어야, 그때 비로소
<깨달음의 성품>(覺性)에 새벽이 밝아오는 것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 終 / 대우거사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