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으로 태어난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 탄허스님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삶과 죽음일 것이다.
즉 생사 문제야말로 그 무엇보다 앞선 궁극적인 그리고 이 세상에서
몸을 담고 살아가는 동안 기필코 풀어내야 할 중심문제이다.
인간의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종교가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생사문제를 쉽게 말해서 이렇게 해결한다.
마음에 생사가 없다고 부연하면
마음이란 그것이 나온 구멍이 없기 때문에 죽는 것 또한 없다.
본디 마음이 나온 곳이 없음을 확연히 갈파한 것을 도통道通 했다고 말한다.
우리 자신의 어디든 찾아보라 마음이나 구멍이 있는지
따라서 나온 구멍이 없으므로 죽는 구멍도 없다.
그러니까 도道가 철저히 깊은 사람은 이 조그만 몸뚱아리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살 수가 있다.
그렇지만 어린 중생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며 천년만년 살고 싶어 하지
도인이나 성인聖人은 굳이 오래 살려 하지 않는다.
죽는 것을 헌 옷 벗는 것이나 한가지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굳이 때묻은 옷을 오래 입으려고 하지 않는다.
오래오래 살고 싶다는 것은 뭇 중생들의 어리석은 견해일 따름이다.
도를 통한 사람은 몸뚱아리를 그림자로 밖에 보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을 간밤에 꿈꾸고 다닌 것이나 같이 생각 한다고 할까.
간밤 꿈꾸고 다닌 사람이 꿈을 깨고 나면 꿈속에선 무언가
분명히 있 긴 있었으나 헛것이듯 그렇게 삶을 본다.
이와 같은 것이어서 이 육신을 굳이 오래 가지고 있으려 하지 않는다.
벗으려고 들면 향 한 대 피워 놓고 향 타기 전에 마음대로 갈(죽음)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중생에게는 나서 멸함이 있고(生住異滅)
몸뚱이에는 나고 죽음(生老病死)이 있으며
일년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세계에는 일었다가 없어짐(成住壞空)이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도인에겐 생사가 붙지 않는다.
혹자는 그 도인도 죽는데 어찌 생사가 없 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곁을 보고 하는 소리일 따름이다.
옷 벗는 것 보고 죽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옷 을 자기 몸으로 안다.
그러니까 죽는다 고 하면
도인이나 성인은 무엇을 자기 몸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몸 밖의 몸 육신 밖의 육체를 지배하는 정신 좀 어렵게 말하면
시공이 끊어진 자리 그것을 자기 몸으로 안다.
시공이 끊어진 자리란 죽으나 사나 똑같은 자리
이 몸을 벗으나 안 벗으나 똑같은 자리 우주가 생기기 전의
시공이 끊어진 자리 생사가 붙지 않는 자리란 뜻이다.
부처란 바로 이 자리를 가르쳐주기 위해 오셨다.
이 세상의 한마당 삶이 꿈이란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온 것이다.
덥고 춥고 괴 로운 경험을 꿈속에서 했을 것이다.
꿈을 만든 이 육신이 일점도 안 되는 공간에 누워 10분도 안 되는 시간의
꿈속에서 몇백 년을 산다.
그러고 보면 우주의 주체가 나 라는 것을 알 것이다.
곧 내 가 우주 를 만드는 것이다.우주 속에서 내가 나온 것이 아니다.
세간의 어리 석은 이들은 꿈만 꿈인 줄 안다.
현실도 꿈인줄 모르고 다시 말하거니와 성인이 도통 했다는 것은
이 현실을 간밤의 꿈으로 보아버린 것을 말한다.
우리는 간밤 꿈만 꿈으로 보고 현실을 현실로 보니까
몇백 년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고 싶다며 아등바등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성인의 눈엔 현실이 꿈 즉 환상이므로 집착이 없다.
그러니까 천당 지옥을 자기 마음대로 한다.
이 정도로 말해 놓고 나서 우리의 삶이 영원 하다면 영원하고
찰나로 보면 찰나일 수 있다고 말하면 좀 수긍이 될지 모르겠다.
요컨대 우주 창조주 즉 하느님 이라는 것은 우주 생기기 전의
면목을 타파한 것을 하느님 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이란 하늘 어느 한 구석 에 담요를 깔고 앉아 있는
어떤 실재 인물이 아니란 말도 이해가 될 것이다.
자 그럼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할까
내 얘기의 초점은 여기에 있다.
한반도에 태어난 젊은이라면 3천만 5천만의 잘못을 나의 잘못으로
즉 나 하나의 잘못이 3천만 5천만 명에게 영향이 미친다고 생각하고
나중에 어른이 되어 어떤 문제에 부딪히더라도 당황하지 않는
준비를 갖추며 살 일이다.
청년은 그런 자신을 길러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