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무차별의 세계|******@불교의우주론@

2019. 1. 27. 11:17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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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이정하

<57>무차별의 세계

- 진공이란 ‘없음’아닌 입자 가득찬 상태 -
- 색은 인연의 화합일뿐 본체는 평등한 不二 -

과학이 발달하여 가면서 자연을 보는 시각이 점점 통일적이 되어 간다는 점을 지난 주에 이어 계속 다루어 보도록 하자. 현대물리학의 두 기둥은 양자역학과 상대론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디랙이라는 물리학자는 이 두 이론을 상대론적 양자역학으로 통합하였다. 이 상대론적 양자역학에서의 진공이란 어떤 에너지 준위 이하의 상태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입자가 가득 차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진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상태 즉 색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입자들로 가득 찬 상태 즉 색으로 가득 채워진 상태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상대론적 양자역학이라는 물리 이론이 성립됨으로써 비로소 색과 공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틀이 마련되었으며 색즉시공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자연 세계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특히 강조하여야 할 것은 색즉시공이란 색이 시간이 지나면서 성주괴공의 단계를 거쳐 공의 상태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색이 공으로 변하고 공이 색으로 변한다는 것이 아니다. 색의 본성 그 자체가 그대로 공이요 또 역으로 공이라는 것도 색을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무의 양변을 멸하고 유무의 차별을 떠난 중도에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이 있다고 하여서, 유와 무와 중도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가중이 삼제원융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용수보살은 대지도론에서 “유를 떠나고 무를 떠나고 유가 아님을 떠나고 무가 아님을 떠나서 어리석음에 떨어지지 않고 능히 바른 도를 행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차별을 떠난 세계상은 물리학에 한하는 것이 아니다. 프리고진은 우주의 구조를 평형 구조와 산일 구조 (dissipation structure)로 구분하였다. 평형 구조란 정태적이고 안정적인 것이어서 더 이상의 변화가 없는 구조를 말하며, 산일 구조란 불안정하게 변화하는 구조로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리 우주가 바로 이런 구조이다. 산일 구조에서 계의 요동이 있을 경우, 그 요동의 정도가 경미하면 계가 그 요동을 흡수하여 요동이 점차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요동의 정도가 심하여 분기점을 넘어서는 경우에는 요동이 점차로 증폭되다가 마침내는 이전의 구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구조가 출현하게 된다는 것을 그는 알아냈다. 요동을 통하여 새로운 질서가 창출된다는 그의 이론은 우리가 이전에 살펴보았던 생명의 진화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하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요동을 통하여 무기물의 계에서 유기물 의 계로 유기물의 계에서 생명계로 전혀 다른 구조가 창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이론은 우주의 진화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프리고진은 이를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라고 하였다. 이렇듯 제반 과학이 성숙하여 감에 따라 심 지어는 색과 공, 생물과 무생물에 대한 차별상마저 무너지게 되었다.

이렇듯 색이라고 내 눈 앞에 나타난다 하여도 그것은 오직 인연의 화합일 뿐이어 서 실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는듯 하여도 그것은 결코 허무 단멸이 아니니 어찌 색과 공을 차별하겠는가?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은 일체의 상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어서 색을 버리고 공을 취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자아를 버리고 무아를 취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문수사리보살은 마하반야바라 밀경에서 “반야바라밀을 닦으면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즐겁다고 여기지 않는 다. 왜냐하면 생사를 보지 않는데 어찌 다시 싫어하여 여의겠으며, 열반을 보지 않 는데 어찌 즐겨 염착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렇듯 일체의 허망한 차별상을 여 의어 일체 법에 자성이 없다는 올바른 지혜를 증득하게 되면 제법의 본체는 불이 (不二)하고 평등 하다는 것을 알게된다 한다.

그래서 유마거사는 천녀가 뿌린 꽃을 떼지 못하는 승려들을 향해 보살의 몸에 꽃 이 붙지 못하는 것은 분별을 모두 끊어 버린 까닭이니, 분별심 때문에 꽃이 떨어 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를 채근담에서는 “산림에 숨어 사는 것을 즐겁다 하는 것은 산림의 참 맛을 못 깨달음이요, 명리의 이야기를 듣기 싫다함은 아직도 명리 의 미련을 다 못 잊은 때문”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