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 3. 14:30ㆍ일반/생물·과학과생각
<63>생명의 세계관
- 한송이 국화에도 35억년 전역사 담겨-
- 불교는 인간·자연 구별없는 생명철학-
생명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개개인의 성품이나, 문화, 역사, 사회 환경, 종교 등에 따라 대단히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 보통이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책에서 테니슨과 바쇼의 시를 비교한다. 테니슨은 “갈라진 벼랑에 핀 한 송이 꽃/ 나는 너를 틈 사이에서 뽑아 따낸다/ 나는 너를 이처럼 뿌리채 내 손에 들고 있다/ 작은 꽃 한 송이/ 그러나 내가 너를 뿌리와 너의 모든 것을/ 그 모두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신과 인간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으련만”이라고 쓴다. 환원주의적이며 너와 나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나타내는 이 시는 생명을 해체하여 진리를 얻으려는 자세를 보여 준다. 이러한 자세로 얻을 수 있는 것도 많고, 서구의 자연과학이 이에 근거하여 오늘날과 같이 발전하게 된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유기체적 전체로서의 하나의 세계는 결코 이렇게 부분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모르고 있다.
한편 바쇼는 “가만히 살펴보니/ 냉이꽃 한 송이가 피어 있다/ 울타리 옆에!” 라고 쓰고 있다. 그 뿐이다. 그저 그렇게 거기 한 송이의 꽃, 하나의 우주가 열려 있음을 그는 보고 있음이다. 여여함의 미라고나 할까.
무기물에서 시작된 생명의 역사는 유기물과 단백질, 원시적인 자기 복제 체제를 거쳐 최초 생명으로 연결되었다. 여기서 생명 진화의 역사가 시작되어 결국에는 자기 성찰이 가능한 그래서 깨달음의 가능성이 열린 인간이라는 생명종까지 지상에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 인간 모두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일체동근의 다른 모든 생명과 중중무진하게 연관되어 있다. 가이아에 대한 논의에서 살펴 보았듯이, 적어도 지구 전체는 하나의 생명이다. 테니슨의 시에서와 같이 나와 너가 구분되지 않는다. 이처럼 단절된 실체가 아니라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전체를 장회익 교수는 온생명이라고 부르면서,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는 철학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을 다 같이 존중하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처럼 바로 나 자신이 법계연기의 중심이듯이, 다른 모든 것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그 모두는 다 같이 평등하게 존중되어야 한다.
이 존중의 철학이 퇴색한 근세의 역사는 이제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 문제를 비롯한 수많은 난제를 던져 주기에 이르렀다. 이에 지관 스님은 “환경운동이라는 것도 자연파괴가 인간에게 위해되니까 아우성이지만 환경이란 말도 인간 중심의 서구적 사고 방식에서 나온 말”이라고 지적하면서 “동체대비의 자각으로 유정과 무정을 차별없이 사랑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 모든 문제가 우리의 탐욕에서 비롯되었음에, 프롬은 더 많이 소유하여서가 아니라 충실히 존재함으로써, 불교적으로 말하면 여여하게 존재함으로써 기쁨을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문제가 탐욕에서 시작되었다면 이의 해결은 생명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 생명을 존중하는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시대의 문명에 불교는 그 중심적인 역할을 하여야 한다. 그리고 오성만으로 작동되었던 우리의 세계를 이성의 세계로 그리고 더 나아가 여여함의 세계로 고양시키는 작업은 이제 우리들 모두의 몫이다.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며 피운 한 송이의 국화꽃, 거기에는 35억년의 전역사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한 잎파리의 꽃에서 장엄함을 보아야 한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래서 김용정 교수는 한 송이의 꽃, 한 포기의 풀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한 포기의 풀에서 얻을 수 없는 구원은 어디에서도 가능하지 않다. 관세음보살이 어찌 법당 안에만 계실 것인가?“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 그늘에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을 나누어 가진다.//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하지 않는다/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박남수의 시 <새>를 보며 부족한 사람의 부족한 글을 여기서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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