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사람이 부처다

2019. 3. 10. 17:1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증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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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부처다



누가 생각이 없으며 누가 생멸이 없는가.

만약 진실로 생멸이 없으면 불생멸도 없다. 

나무로 만든 사람을 불러서 물어보라

부처가 되기 위해서 공을 들이면 언제 부처가 

이루어질 것인가를. 


誰無念誰無生滅  若實無生無不生 (수무념수무생멸  약실무생무불생) 

喚取機關木人問  求佛施功早晩成 (환취기관목인문  구불시공조만성) 


-『증도가』- 


증도가(證道歌)는 깨달음의 노래다.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 스님이 『유마경』을 보다가 

깨닫고는 조계산에 계신 6조 혜능 스님에게 가서 그의 깨달음을 인가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깨달음

에 대한 내용을 증도가라는 노래로 지어서 천하에 알렸다. 그 후 수많은 조사들이 모두 증도가를 

수지 독송하며 법문이나 저술에 많이 인용하였다


흔히 일반적인 불교 상식으로 부처가 되려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온갖 생각, 분별 망상 번뇌를 제거해서 

무념(無念) 무심(無心)의 경지에 이르러야 하고, 생멸(生滅)이 반복되는 현재의 상태에서 불생불멸(不

生不滅)의 경지를 터득해야 부처가 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영가 스님의 말씀은 다르다. 어느 누가 불법의 궁극을 무념(無念)이며 무생(無生)이라 했던가. 

실로 생각이 없고 생멸이 없다면 그것은 나무로 만든 로봇이다. 로봇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다. 


부처(佛)가 언제 목석(木石)이던가. 부처(佛)는 살아있는 사람이다. 살아있는 사람, 즉 부처(佛)는 

생각과 생멸이 활발발하게 작용하는 대기대용(大機大用)의 존재이다. 그런데 만약 어떤 수행 과정을 

거쳐서 생멸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그것이 제대로 된 공부라면 생멸만 없는 것이 아니라

불생멸(不生滅)도 없다. 불생멸이 없다는 것은 왕성하게 생멸한다는 뜻이다. 생각이 많고 생멸이 

왕성해야 부처(佛)라는 뜻이다. 


만약 무념(無念)과 무생(無生)이 불교 궁극의 경지라면, 무념 무생은 나무로 만든 로봇과 같은 존재

이니 나무로 만든 로봇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말하고 있다. 수행자들은 무념 무생이 되기 위해서 공을 

들이고 수행을 하며 좌선을 한다.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한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이른 경지가 나무로 

만든 로봇과 같은 존재라면 로봇에게 물어보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이다. 


부처란 본래 저절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임을 알면 그것으로 끝이다. 수행하기 이전부터 사람마다 본래

저절로 갖추고 있는 것이 부처(佛)이며, 그래서 개개인이 가만히 있어도 모두 완전무결한 존재이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 달리 무슨 방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쓰면 쓸수록

오히려 부처와 어긋나는 것이다. 이것이 불자의 견해며 선자의 안목이다.


출처 : 무비 스님이 가려뽑은 명구 100선 ③ [무쇠소는 사자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허깨비 같은 몸이 진리의 몸이다

허깨비 같은 몸이 진리의 몸이다 


배울 것이 더 이상 없고 할 일이 더 이상 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을 제거하려고도 하지 않고 진리를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무명의 실제 성품, 본성이 즉 깨달음의 성품이며 

허깨비 같이 텅~빈 육신이 즉 법신(진리의 몸)이로다. 


絶學無爲閑道人  不除妄想不求眞 (절학무위한도인  부제망상불구진) 

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무명실성즉불성  환화공신즉법신) 


『증도가』 


이 글은 증도가의 첫 구절로 영가 스님의 불교에 대한 높은 안목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증도가의 모든 내용은 이 첫 구절에 근거를 두고

설해진다. 이 첫 구절은 곧 대전제이다. 역대 조사들이 증도가를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 첫 구절의 파격적인 선언 때문이기도 하다. 


도인(道人)이라는 말은 불교가 중국에 와서 도교와 만나면서 중국내 기존의

비슷한 뜻을 지닌 말 즉, 중국 불교의 관점에서 이상적(理想的)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거의 모든 면에서 중국불교를 수용한 우리나라에서도

역시 같은 의미로 쓰여, 도인(道人)이란 부처님, 보살, 道를 통한 사람, 견성성불한

사람, 깨달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다.

불교를 공부하는 목적은 결국에는 도인(道人)이 되자고 하는 데 있다. 


도인(道人)은 한가해야 한다. 한가해야 한다는 말은 그냥 놀고 먹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중생들을 제도하느라 활발하게 활동하되 하지 않는 듯이 활동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인은 한가하다. 또 도인은 모든 것을 다 배워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할 일이 없어야 한다. 이 말도 역시 가만히 있고 그냥 노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열심히 살지만 조작이 없고 흔적이 없어서 일을 하는 것 같지 않게 일을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제일 문제가 되는 분별 망상 번뇌를 제거하려 하거나 

진리(마음)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망상이니 진리이니 하는 말은 이미 도인의 마음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이어지는 파격적인 폭탄선언은 분별 망상 번뇌라는 무명의 실제 성품(무명실성)이

깨달음의 성품(불성)이며, 실체가 없어 허깨비 같은 텅~빈 허망한 육신이 법신

(진리의 몸)이라는 말이다. 이전의 어떤 도인들도 쉽게 할 수 없었던 말이다.

진정한 도인의 관점에서는 번뇌가 불성과 다르지 않고 육신이 법신과 다르지 않다.

다르다면 바쁘고 복잡해진다. 골치 아파진다.

 바쁘고 복잡하고 골치가 아프면 도인이 아니다. 증도가는 도인의 삶을 전제로 하여

불교의 여러 면들을 짚어가면서 특유의 안목으로 분석해 해설한다. 


그 중에서도 이 첫 구절인 무명이 불성이며, 육신이 법신이라는 사상을 앞세우고

있다. 이 사상은 증도가의 열쇠이며 불교의 열쇠다. 붓다의 가르침이나 모든 조사들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이 열쇠(무명실성즉불성 환화공신즉법신)으로써 다 해결할 수 있다.

이 사상으로써 해결되지 않는 가르침은 모두가 방편(方便)상으로 하는 말일 뿐이다. 


그러므로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이 가르침을 기준 삼아서

이 사상에 어긋나지 않게 불교를, 마음을, 진리를, 깨달음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출처 : 무비 스님이 가려뽑은 명구 100선 ③  [무쇠소는 사자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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