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알겠는데, 체험이 없다? / 릴라님

2018. 8. 11. 13:5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증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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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알겠는데, 체험이 없다? / 릴라님


늘 홀로 다니고 늘 홀로 걸으니
통달한 이들은 함께 열반의 길에 노닌다.

-증도가

마음을 깨달으면 마치 통 밑이 빠진 듯이 속이 후련해지고,

눈앞이 확 밝아진다고 여깁니다. 체험하면 고요하고 열반적정이어서

아무 일이 없어진다고 여깁니다.

본래 자리에는 나도 없고 세계도 없다고 여깁니다.

또 체험하면 나와 세계가 하나가 된다고 여깁니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체험이 그동안 일상적으로 살아온 삶과

사뭇 다른 비일상적인 이벤트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의 삶은 초라하고 불안하고 갈등 속에 놓여있지만 본성을 체험하고 나면

이러한 어둡고 두렵고 갈팡질팡하는 삶이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씁니다.

달달한 과일이 언젠가 내 앞에 뚝 떨어질 것 같은 이벤트를 기다리며,

열심히 듣고, 열심히 앉고, 열심히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기다리던 일은 오지 않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1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고, 십수 년이 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한치도 움직이지 않는 그 자리에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법문을 열심히 들으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갑니다.

눈앞의 이것밖에 없다는 믿음도 생기고 이 길만이 스스로를 구원해줄 것이라는

기대도 더욱 커졌습니다. 그러나 바람뿐이지 그게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눈앞의 일이라 처음에는 금방 될 것 같았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지고

더 멀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그 사이 주변에서 깨어나는 사람들을 보면

시기심도 생깁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마음을 추스르며 자신이 그들보다

간절하지 않아서 아직 깨달음의 이벤트가 벌어지지 않았다고 여깁니다.

법문을 들으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는데, 이게 머리로 아는 것인지,

가슴으로 아는 것인지, 허공이 아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직 내게 이벤트가 벌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짠' 하며 밝아지거나, '확'하고 분명해지거나, '쑥'하고 내려가는 일은 아직 없습니다.

알겠는데 답답하고, 알겠는데 막막할 따름입니다.

우리가 깨닫지 않았을 때 기다리는 체험은 깨닫지 않은 안목에서 자기 생각으로

그린 상상입니다. 어떤 사람이 깨닫고 나니까 마치 통 밑이 빠진 듯

속이 시원하고, 세계가 하나이더라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자기 나름의 경험과

지식으로 그것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나의 일상과 너무도 다른 삶의 모습이고

반드시 그래야 지금의 삶에서 벗어난 자유가 도래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자기에게도 그러한 일이 벌어져야 공부의 관문을 통과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본성을 깨닫고 나면 그 순간 이전과 다른 변화가 동반될 수 있습니다.

갑자기 시야가 밝아지고, 속이 후련해지며, 막막했던 법에 대한 말씀이 소화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경험적인 변화가 본성을 자각하고 난 후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본성에 대한 자각과 시간적인 큰 차이 없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본성에 대한 자각, 이것의 분명함,

이것뿐임을 수용하고 나서 일어나는 심적 변화이지,

자각에 앞서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앞의 이 일뿐이라는 자각은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금 없는 미래의 깨달음의 체험에 매달려 있습니다.

미래는 시간 속의 일이고 시간은 망상입니다. 금강경에서 과거의 마음도 없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했는데,

이것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실재하지 않는 이름일 뿐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이 아닌 미래에, 또 그 시간 속에서도 현상적으로 일어날

체험이라는 것을 기다리는 것은 망상 중에서도 더한 망상에 빠진 일입니다.

미래를 설정하고 미래의 깨달음을 기다리는 것은 이름만 깨달음인 허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깨달음의 결과로 일어나는 비일상적인 경험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눈앞의 바로 이것이라는 말을 듣고 앞뒤가 꽉 막혀 잠도 안 오고 일상생활도

못할 정도로 답답한 상태에 있다가 문득 눈앞의 일 을 자각하고 나면

막혔던 답답함이 마치 수맥이 뚫린 것처럼 시원해지는 순간적인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공부를 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눈앞의 일이 선명해지는 경험을 합니다.

이 사람은 앞의 사람처럼 극적인 감정 변화를 겪지 않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가벼워지고 언제 그랬는지 모르게 법에 대한 말씀이 소화되는

변화를 경험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극적인 변화, 말로 할 수 있는 이벤트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의 사람과 뒤의 사람에게 분명한 것은

바로 지금 눈앞의 이 일 하나입니다.

깨달음의 징후가 어떻게 나타나든 이것은 크게 마음 둘 일이 아닙니다.

참된 깨달음의 체험은 눈앞의 이 사실이 분명해지는 것뿐입니다.

부처의 지혜가 열리는 것이지 부처의 경계는 역시 경계일 뿐입니다. 

 아무리 깨달음과 함께 동반된 변화일지라도 없던 것이 일어났다면

이것 역시 경계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에 어떠한 기대나 욕망이 없이

바로 지금 당장 눈앞의 이 일이기만 하느냐입니다.

 이것이 분명할수록 경계의 변화는 저절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경계의 변화를 욕망한다면 결코 눈앞의 일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 욕망이 지금 눈앞의 본성을 보는 눈을 가릴 것입니다.

본성은 언제 어디서나 지금 바로 이 순간에 항상합니다.

이것은 과거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으며, 드러나는 지금의 현상변화에서

어떤 모습으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당장의 깨어있음,

이것만이 변함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놔두고 미래에 일어날 체험의 꿈에

빠져 있다면, 이 자체가 마음의 밝음을 가로막는 것이고,

시간의 망상, 모습의 경계 속에 떨어진 일입니다.

'눈앞의 이것은 알겠는데, 깨달음의 체험이 없다'라는 것은 이것을 제대로

안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제대로 안 사람에게는 뒤의 일이 없으며,

뒤의 일을 마음에 두는 사람은 이것이 분명하지 않은 것입니다. 

 깨달음의 체험에 대한 욕망이나 자기 투사가 없이 앞뒤의 시간이 끊어지면

바로 이 일입니다. 오로지 지금 당장의 이 일에만 관심을 가질 일입니다.

이 일 하나가 홀로 분명하다면 열반의 길에 노닐게 될 것이지만,

열반의 길에 노닐 때는 그곳을 노니는 사람도 없고, 열반도 마음에 없습니다. 

 본래는 늘 이 일 하나가 여러 가지 모습과 변화 가운데서도 한결같고 한결같을 뿐입니다.

이 일의 분명함, 당연함, 의심 없음에만 마음을 둘 일입니다.

다른 모든 일은 환상과 같은 일이기에 달리 마음에 담아둘 이유가 없습니다.

 
좋은 노래 100곡모음 연속재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