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 24. 09:58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마음 공부하는 법> 사람들은 흔히 「어떻게 공부해야 합니까?」하고 묻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물음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수행>이란, 「먼저는 미혹했다가 나중에야 깨닫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혹했다>는 말의 참뜻은 「'성품'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미혹했다」고 말하는 것이지, 결코 <미혹한 마음>을 바꾸어서 <깨달음의 마음>으로 변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미혹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성품>이란, 곧 <마음>을 말합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마음>말입니다. 이 <마음>은 영겁 이래로 일찍이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이 <항구 불변하는 마음>을 놓쳐버리고는, 이 마음에 비친, 저 바깥의 끊임없이 변화 변천을 거듭하는 형상들을 나의 마음인 줄 잘못 알고 집착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이 아니라, <마음에 비친 그림자(생각)>인 것입니다. 만약 진정한 스승이라면 반드시 「당신 자신을 깨달으라」고 말할 것입니다. 즉, 항상하고 참된 <본래 마음>을 되찾아 가져서 자재하게 쓰는 것이야말로 <참된 깨달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만이 참되고, 그 밖의 온갖 법은 모두 이 <마음>에 본래 구족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 이 <마음>을 밝히는 데는 아무런 노력도 시간도 필요치 않습니다. △ 이 <마음>은 본래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으므로 아무것도 밖에서 얻을 것이 없습니다. △ 어떤 특정한 방편(명상이나 좌선 등)에 의지하여 반복적으로 갈고 닦는 것이 아닙니다. △ 아무리 좋은 것도 없는 것만 못하니, 그 무엇에도 집착하거나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 지금에 인행(因行)을 닦아서 나중에 과보(果報)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 <미혹함>을 여의고 <깨달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지금껏 밖으로 내달으면서 온갖 이상(理想, 解脫 涅槃 등)을 추구하여 마지않던 그 마음을 안으로 되돌려서, <본래 스스로 맑고 깨끗한 마음>을 몰록 깨달음으로써(頓悟) 영원한 대자유인의 지복(至福)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수행법> 1. 모름지기 생사심(生死心)을 깨뜨려야 한다. 2. 짐작하여 헤아려서는 끝내 이르르지 못한다. 3. 시끄러움을 피하여 고요함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큰 병이다. 4.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5. 간절함이 가장 힘이 있다. 6. 마음을 가지고 깨달아지기를 기다리지 말라. 7. 실오라기만한 '딴 생각'도 집착하지 말라. 8. '영리한 마음' 하나가 가장 두려운 것이다. 9. 남이 일러주기를 기다리지 말라. 10. 인정(人情)을 가까이하지 말라. 11. 죽었다가 깨어나지 못할까를 두려워하지 말라. 12. 문자나 말을 좇지 말라. 13. '고요한 경지'를 탐내지 말라. 14. 옛사람의 공안을 망령되이 해석하지 말라. 15. 공부가 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16. 또렷또렷하게 분명히 하라. 17. 마음을 기울여서 시나 게송을 짓지 말라. 18. 들어 제창하는 곳에서 긍정하지 말아야 한다. 19. 여러 공안을 풀이하여 알려고 하지 말라. 20. 정념(正念)을 잃지 말라. 21. 의정(疑情)을 일으켰거든 다시 그 의정을 쳐부숴야 한다. <修行法> 1. 모름지기 生死法을 깨뜨려야한다. 저 바다는 종일토록 물결치면서도 끝내 '바다' 그 자체에는 전혀 아무 변화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일상의 경험을 통해서 쉽게 알 수 있다. 즉, 그 겉모습의 물결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 본체인 '바다'는 늘 그대로인 채로, 늘고 주는 일도 없고, 가고오고 하는 일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엄연한 사실을 깨닫는 데는 전혀 아무런 이론이나 학식의 도움이 필요치 않다. 즉, 진실이 스스로 본래 그런 것이다. 이것이 곧 「일체만유가 생겨나는 일도 없고 사라지는 일도 없는 진리」(無生法忍)인 것이다. 우리들 보통 사람들을 극도로 혼란스럽게 하고, 곤혹스럽게 하는 ․․․ 저 이른바 「불생불멸 불래불거의 이치」(不生不滅 不來不去), ․․․ 불법(佛法)의 근본을 이루는 이 난해한 이치는, 사실은 전혀 난해할 것도 없는, 지극히 당연하고도 평범한 우리들의 일상사 바로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우리들은 이 단순하고도 분명한 사실 앞에서 왜 그렇게도 혼란스러워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들 인간이 사물을 관찰하는 방식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애매모호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우리들이 일상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고 있는 것들은 그것이 모두 <진실의 겉모습>뿐인데도 우리들은 마치 '진실' 전체를 남김없이 몽땅 보고, 또 이해하고 있는 듯한 착각 속에서 나날을 살고 있는 것이다. 모두(冒頭)에서 <바다와 물결의 비유>를 들었는데 ․․․ 일부 뛰어난 과학자들이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적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지금부터 이른바 <사고실험>(思考實驗)을 해 보기로 하자. ․․․ 즉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바다>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이것을 불가(佛家)에서는 <하나의 참된 성품 바다> (一眞性海)라고 부른다. 왜 <하나의 참된 ․․․>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우리들이 모두에서 알아보았듯이, '바다' 전체로 볼 때에는 전혀 변화하고 이동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매일같이, 아니, 매순간마다 경험하는 이 현실세계의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마치 저 바다가 다만 바람을 따라 물결치면서 그것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바다는 쉬지 않고 늘 출렁 인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과 흡사하다. 분명히 '바다'는 바람이 불거나 말거나, 항상 자기의 <성품과 모습>(고요함과 움직임이 둘이 아닌)을 유지하면서 생멸하거나 증감하는 일이 없다. 즉 '바다'는 상주(常住)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사는 이 세계도 사실은 그런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실상은 상주(常住)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다만 무수히 많은 인연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면서, 마치 저 바다가 <바람 따라서 물결치는 허망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멸하는 모습을 연출하여,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의 실상(實相)은 결코 생멸하지 않는다. 인연의 바람이 일거나 말거나 항상 변하지 않기 때문에 <진실되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연 따라 항상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모든 이 세상의 변천상은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전혀 '참된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인연 따라 생멸하는 ․․․ 따라서 생겨나도 생겨나는 일이 없고, 생겨난 일이 없으므로, 사라지는 일도 없는, 이 <불생불멸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한 인간이 <진실>에 눈을 뜨는, 즉 '깨달음'을 얻는 순간인 것이다. 이 경지를 불가(佛家)에서는 <부동지>(不動地)라 하며, 또한 <동진지>(童眞地)라 한다. 왜냐하면 이 세계가 외견상 엄청나게 변화 변천을 거듭하는 것 같지만, 진실은 전혀 움직이는 일이 없으므로 <부동지>요, 무지몽매한 범부가 처음으로 참된 지혜가 열리는 순간이므로 <동진지>니, 마치 어린이(童蒙)가 처음으로 이 세상의 진실상(眞實相)을 깨닫는 것과 같다고 해서 이렇게 이름 하는 것이다. 이 <하나의 참된 성품 바다>에 들어가 무애자재(無碍自在)한 활동을 일으켜서, 무명 중생을 제도하는 일을 쉬지 않는 것, 이것이 곧 <일승 법문>(一乘法門)이다.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에 대해 알고 있다. 지금부터 불과 300 여 년 전, '코페르니쿠스'라는 천재가 나타나서, "하늘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땅이 움직인다"고 설파했을 때, 당시의 사람들은 얼마나 한 충격을 맛보았을까? 그러나 오늘날 '지동설'(地動說)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보아도 결코 움직이는 모습이 없는, ․․․ 말 그대로 요지부동인 이 땅이 지금 맹렬히 소용돌이치면서 이 우주공간을 헤엄치고 있다는 사실을 ― 우리들의 시각적 경험과는 상관없이 ― 지금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멀게는 2500 여 년 전 '붓다'에 의해서, 또 가깝게는 20 세기 초엽, 많은 천재적 과학자들에 의해서 제창된) "모든 존재가 존재인 채로 존재가 아니고, 모든 움직임이 움직임인 채로 움직임이 아니다" 라는 말을 듣고, 이 말에 믿음을 내고, 믿어 들고, 받들어 행하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다. 이 말을 단지 어떤 특정 종교의 <오묘(?)한 교리>쯤으로 치부하고, 숫제 깊이 살펴보려고도 하지 않는 게 작금의 실정이다. 심지어 그 '불교'(佛敎) 집안에서조차 이 엄연한 진실 앞에서 여전히 망령되게 존재론적인 관념의 유희만을 거듭할 뿐, 이 '일승법문'에 깊은 믿음을 내고, 믿어 들어서, 올바른 <진리의 길>에 들어서 수행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려우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모습이 있고, 이름이 있는 일체 존재가 모두 자체의 성품이 없어서,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허망하여, 실다운 존재가 아닌 세계, ․․․ 이른바 합리적인 상식으로는 전혀 헤아리거나 짐작할 수조차 없는 이 세계의 <광대한 지혜의 바다>(作用 없는 根本智와 凡夫의 分別智가 완전히 혼융된)에 들어서, 이지(理智)에 맡겨 마음대로 종횡하면서 대자대비의 원력을 발휘하여, 까닭 없 이 고뇌의 바다에 빠져서 헤매는 중생을 건져낼 수 있다면 이 어찌 대장부의 본분이 아니겠는가? 뜻이 있고 힘이 감당할 만한 수행자라면 모름지기 힘써야 할 일이다. 2. 침잠하여 헤아려서는 하나도 이루지 못한다. 공부를 하되, 짐작하여 헤아리는 일이 가장 두려워할 바다.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구정거리면 도(道)와는 더욱 멀어져서, 미륵(彌勒)이 나실 때까지 공부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만약 의문 덩어리가 활짝 일어난 사람이라면, 마치 은산철벽(銀山鐵壁) 속에 갇힌 사람이 오로지 활로(活路)를 찾으려고 애쓰듯 할 것인데, 만약 활로를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이렇게 철저히 하여, 시절이 오기만 하면 자연히 끊어지는 소식이 있을 것이다. 일찍이 황벽(黃蘗) 선사가 송했다. 티끌 번뇌를 멀리 벗어남이 예사롭지 않으니 고삐를 바싹 잡고 한바탕 겨룰지라. 한 차례 혹한이 뼈에 사무치지 않았다면 코를 찌르는 매화 향기를 어찌 얻을 수 있으랴? 이 게송이 가장 친절하다. 만약 이와 같이 때때로 경책(警責)하면 공부가 자연히 늘어날 것이다.
3. 시끄러움을 피하여 고요함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큰 병이다 공부를 하되, 시끄러움을 피하여 고요함을 향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두 눈을 감고 귀신 굴속에 앉아서 살아날 계책을 꾸미지 말아야 한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흑산(黑山, 지옥) 밑에서 썩은 물에 잠겼다" 하였으니, 어찌 구제할 수 있겠는가? 다만 경계를 반연(攀緣)하는 가운데서 공부를 지어 나아가야만 비로소 이것이 힘을 얻을 곳이다. 한 구절의 화두(話頭)를 몰록 일으켜서 눈썹 위에 모으고, 다닐 때나, 앉을 때나, 옷을 입고 밥을 먹을 때나, 손님을 맞고 보낼 때나, 항상 오직 이 한 구절의 <화두의 낙처(落處)>를 밝히려 할지니, 하루아침에 세수를 하다가 <콧구멍>(자기의 生緣處)을 만지고 보니, 원래가 너무나 가까운 곳에 있었다. 4.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공부를 하되,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무엇이 의심인가? ․․․ ▷ 태어났으나 어디서 온 줄 모르면 '온 곳'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고, ▷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면 '가는 곳'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생사(生死)의 관문'을 깨뜨리지 못하면 의심이 문득 일어나리니, 눈썹 위에 매달려서 털어도 떨어지지 않고, 쫓아도 가지 않다가, 홀연히 하루아침에 의단(疑團)이 박살나면 생․사 두 글자가 다 부질없는 물건이다.
5. 간절함이 가장 힘이 있다. 공부를 하되, 가장 긴요한 것은 '절'(切) 자이니, 이 <간절할 절>자가 가장 힘이 있다. 간절하지 않으면 곧 게으름이 생기고, 게으름이 생기면 방종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만약 마음을 쓰되 ‘참으로 간절(親切)’하면 방종과 게으름이 어찌 생기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이 '절'(切)자는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할까를 근심하지도 않고, 생사를 깨뜨리지 못할까를 걱정하지도 않는다. 이 '간절하다'는 한 마디 말은 당장에 선악(善惡)과 무기(無記)와 삼성(三性)을 초월하니, 마음 쓰기를 간절히 하면 선(善)을 생각하지도 않고, 악(惡)을 생각하지도 않아서, 범하지도 떨어지지도 않나니, 화두(話頭)가 간절하면 마음이 들뜨지도(掉擧) 않고 혼곤히 가라앉지도(昏沈) 않는다. 이 '간절하다'는 한 마디는 가장 친절한 구절이라, 마음 쓰기를 간절히 하면 틈이 없어서, 마(魔)가 침노하지 못하고, 유무(有無) 등을 계교(計巧)하여 헤아리지도 않으므로 외도(外道)에 떨어지지 않는다. 6. 마음을 가지고 깨달아지기를 기다리지 말라. 공부를 하되,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어떤 사람이 길 위에 멈추어 서서 집에 도달하기를 기다린다면 끝내 집에 이를 수 없듯이, 다만 모름지기 집에 이르도록 해야만 한다. 만약 마음을 가지고 깨달아지기를 기다린다면 끝내 깨달을 수 없으니, 다만 곧장 다그쳐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달음을 기다릴 일이 아니다.
7. 실오라기만한 '딴 생각'도 집착하지 말라. 공부를 하되, 실오라기만한 <딴 생각>도 집착하지 말라. 행주좌와(行住坐臥) 간에 다만 본래부터 참구하던 화두만을 들어서 의정(疑情)을 일으켜 분연히 그 귀결처만을 찾으려 해야 한다. 만약 한 올만치의 딴 생각이라도 있으면 옛사람이 말한 "잡된 독이 심장에 들어가니, 혜명(慧命)이 위태롭도다." 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삼가 해야 한다. 내가 말한 '딴 생각'이란 비단 세간 법뿐 아니라, <마음 깨치는 일>을 제하고는 불법 가운데의 온갖 훌륭한 일들까지도 모두 <딴 생각>이라 한다. 어찌 불법 가운데의 일뿐이겠는가? <마음의 본체> 위에서 취하고, 버리고 집착하고, 교화하고 하는 모든 것을 <딴 생각>이라 한다.
8. '영리한 마음' 하나가 가장 두려운 것이다. 공부를 하되, <영리한 마음> 하나가 가장 두려운 것이다. 이 <영리한 마음>은 마치 독약과도 같아서 한 번 중독되면 비록 진짜 약이 나타나더라도 구제하지 못한다. 만약 진정으로 공부하는 이라면, '눈'은 마치 소경 같고, '귀'는 마치 귀머거리 같고, 생각이 겨우 일어나기만 하면 마치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부딪친 것같이 해야 한다. 이렇게 공부해야 비로소 상응하게 된다. 9. 남이 일러주기를 기다리지 말라. 공부를 하되, 남이 설파(說破)해 주기를 기다리지 말라. 설사 설파해 주더라도 이것은 끝내 다른 이의 것이요, 자기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마치 사람이 서울로 가는 길을 물을 때 ․․․ 다만 길을 가르쳐 주기를 청할지언정 서울의 일은 묻지 말아야 한다. 설사 그가 낱낱이 서울의 일을 설명하여 줄지라도 끝내 그것은 그가 본 일이요, 길을 물은 이가 직접 본 것은 아니다. 만약 스스로 힘써 행하지 않고 남의 설명만을 구하는 것도 이와 같다. 10. 인정(人情)을 가까이하지 말라. 공부를 하되, 반드시 중심을 바르게 하고, 굳고 우뚝하여 인정(人情)을 가까이하지 말라. 인정을 따르면 공부가 늘지 않는다. 공부가 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반드시 속된 수행자 축에 들 것이 틀림없다. 공부하는 사람은 고개를 들어도 하늘을 보지 않고, 고개를 숙여도 땅을 보지 않으며, 산을 보아도 이것이 산이 아니고, 물을 보아도 이것이 물이 아니며, 다니되 다니는 줄 모르고, 앉되 앉는 줄 모르며, 수만 군중 속에 있더라도 한 사람도 보지 않는다. 몸의 안팎이 오직 하나의 의단(疑團)뿐이어야 하나니, 이 의단을 깨뜨리지 못하면 맹세코 쉬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공부의 요체다. 11. 죽었다 깨어나지 못할까를 두려워하지 말라. 공부를 하되, 죽었다가 깨어나지 못할까를 두려워하지 말고, 다만 살았다가 죽지 못할까를 두려워해야 한다. 과연 '의정'(疑情)과 함께 <한 곳> 에 꽉 묶어 두었는지 잘 살피라. 그렇게만 한다면 시끄러운 경계는 버리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버려질 것이요, 허망한 마음은 맑히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맑아질 것이다. 육근(六根)의 문전(門前)이 본래 스스로 텅 비었으니, 이 텅 빈 자리에서 손짓하면 곧 이르르고, 부르면 곧 대꾸하거늘 어찌 살지 못할까를 근심하랴?
12. 문자나 말을 좇지 말라. 공부를 하되, 문구를 찾거나 구절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도 말라. 아무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된다.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반연(攀緣)과 분별을 이루니 심행처(心行處)가 끊이기를 바란들 될 수 있겠는가? 13. '고요한 경지'를 탐내지 말라. 공부를 하되, '고요한 경지'를 탐내는 것을 가장 두려워해야 한다. (이 고요한 경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메마른 적멸>(枯寂) 속에 갇히게 하는데, (사람들이) 깨닫지도 알지도 못한다. 사람들이 흔히 <시끄러운 경지>를 싫어하고, <고요한 경지>를 좋아하는 것은 언제나 떠들썩한 속에서 시달리다가 문득 고요한 경계를 만나면 마치 꿀맛처럼 달고, 오랜 피로 끝에 단잠이 쏟아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어떻게 스스로 이렇게 치우친 마음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14. 옛사람의 공안을 망령되이 해석하지 말라. 공부를 하되, 고인(古人)의 공안(公案)에 대해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려 하지 말라. 비록 낱낱이 풀이하여 안다 하더라도 자기 분상(分上)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옛사람의 한 마디,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이 같아서, 가까이할 수도 없고, 건드릴 수도 없음을 알지 못한다. 하물며 그 속에서 앉거나 누울 수 있겠는가? 다시 그 가운데서 대․소(大小)와 상․하(上下)를 따진다면 신명(身命)을 다치지 않을 자가 없다. 15. 공부가 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공부를 하되, 공부가 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만약 공부가 늘지 않거든 다만 늘도록 하면 이것이 공부다. 만약 공부가 늘지 않는다 하여 후퇴의 북을 친다면, 비록 백겁 천생을 지낸다 해도 어찌할 수 없다. 의정(疑情)이 일어나서 놓아버릴 수 없는 곳, 이것이 바로 공부가 느는 길이다. 오직 생사(生死)의 두 글자를 이마 위에 붙여 두되, 마치 사나운 호랑이에게 쫓기듯 해야 한다. 만약 곧장 달려서 집에 이르지 못하면 생명을 잃을 터인데 어찌 걸음을 멈출 수 있겠는가? 16. 또렷또렷하게 분명히 하라. 공부를 하되, 화두를 들 때에 또렷또렷하게 분명히 하여,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듯 하라. 옛사람이 말하기를, 「만약 살쾡이(邪見)를 베지 못하면 맹세코 쉬지 않으리라」 하였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귀신굴 속에 우두커니 앉아서 어두컴컴하게 한 평생을 보내리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는 두 눈을 부릅뜨고, 네 다리를 팽팽히 버티고, 오직 쥐를 잡아먹고야 말리라고 벼르면서, 닭이나 개 따위가 곁에 있어도 돌아보지도 않나니 ․․․ 참선하는 사람도 그러하여, 오직 분연히 이 일을 밝히고야 말리라고 다짐해야 한다. 설사 팔계(八界; 利譽稱樂 四順, 衰毁譏苦 四違)가 면전에 어지러이 엇갈릴지라도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자칫 딴 생각이 일어나면 쥐뿐만 아니라 고양이까지도 달아나고 만다.
17. 마음을 기울여서 시나 게송을 짓지 말라. 공부를 하되, 마음을 기울여서 시(詩)나 게송(偈頌)이나 문장 등을 지으려는 일이 가장 두려워할 바다. 시나 게송을 지으면 시승(詩僧)이라 하고, 문장에 교묘하게 솜씨를 부리면 문자승(文字僧)이라 할 뿐, 이 모두가 <마음 공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무릇 역순(逆順)의 경계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곳을 만나거든 얼른 깨달아서 떨쳐버리고 화두를 들되, 경계의 반연을 따라 움직이지 않아야 비로소 옳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바쁠 것이 없다」 한다. 그러나 이 한 마디가 가장 사람을 그르치는 것이니 공부하는 이들은 삼가지 않을 수 없다. 18. 들어 제창하는 곳에서 긍정하지 말아야 한다. 공부를 하되, 들어 제창하는 곳에서 승당(承當, 肯定)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긍정하면 진짜 바보인지라 참구(參究)와는 상응하지 않다. 다만 모름지기 의정(疑情)을 일으키되, 긍정할 곳도 없고 긍정할 이도 없음을 사무친다면, 마치 공중누각이 칠통 팔달함과 같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도적을 잘못 알아서 제 자식으로 여기고, 하인을 잘못 알아서 상전으로 여기는 것과 같은 짓이 된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길, 「나귀의 안장을 보고 아버지의 턱이라 잘못 여기지 말라」 했으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19. 여러 공안을 풀이하여 알려고 하지 말라. 공부를 하되, 한 화두만으로 마음을 쓸지언정 여러 공안(公案)을 풀이하여 알려고 하지 말라. 설사 안다 하더라도 끝내 이것은 '지식'이요, <깨달음>은 아니다. 그러므로 법화경(法華經)에 이르기를 ․․․ 「이 법은 사량분별(思量分別)하는 마음으로 이해할 바가 아니니라」하였고, 또한 원각경(圓覺經)에 이르기를․․․ 「사유심(思惟心)으로 여래의 원각경계(圓覺境界)를 헤아리면 이는 마치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려는 것과 같아서 끝내 이루어질 수 없느니라」했으며,
동산(洞山) 화상은 말하기를 ․․․ 「'마음'과 '뜻'을 가지고 <현묘한 종지(宗旨)>를 배우려 한다면, 이는 마치 서쪽으로 가려는 이가 동쪽을 향하는 것과 같도다」 하였으니, 무릇 공안을 따져서 알려고 하는 이들이여! 가죽 밑에 피가 흐르거든 마땅히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도(道)는 모름지기 조금도 여의지 말아야 하니 여의면 도가 아니요, 공부는 응당 간단(間斷)이 없어야 하니 짬이 있으면 공부가 아니다. 진정한 납자(衲子)라면 마치 눈썹에 붙은 불을 끄듯,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해야 할지니, 어찌 딴 일을 할 겨를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옛사람이 이르되, 「한 사람이 만 사람의 적(賊)을 만났을 때, 어찌 얼굴을 마주 대하여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을 겨를이 있으리요?」 하였는데, 이 말씀이 가장 요긴하니, 몰라서는 안 된다. 공부를 하되, 모름지기 아침저녁으로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자명(慈明) 대사는 밤에 잠이 오면 송곳으로 찌르면서 말하기를, 「옛사람은 도를 위하여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으셨거늘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인고?」 하셨다. 20. 정념(正念)을 잃지 말라. 공부를 하되, 잠깐만이라도 <정념>(正念)을 잃지 말라. 만약 참구(參究)한다는 일념을 잊어버린다면 반드시 이단(異端)에 빠져서 망망(茫茫)하여 돌이키지 못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정좌(靜坐)할 때, 오직 맑고 고요한 것을 좋아하여 <순수하게 맑고 티가 끊인 것>으로써 불법(佛法)이라 여긴다면, 이것은 <정념>(正念)을 잃고, <맑고 고요함>에 빠졌다고 한다. 또한 강설(講說)하고, 말하고, 움직이고 고요한 것 등을 불법이라 여긴다면, 이것은 <정념>을 잃고 식신(識神)을 잘못 알았다고 한다. 혹 망심(妄心)을 가지고 다시 망심을 억눌러서 망심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으로써 불법이라 여긴다면, 이것은 <정념>을 잃고, 마치 돌멩이로 풀을 짓누르듯이 한다고 하며, 또 파초 잎을 까듯이 하고 나서, 이 몸이 허공 같다고 관(觀)하여 딴 생각을 일으키지 않기를 마치 담벼락 같이 한다면, 이것은 <정념>을 잃고 <공망(空亡)에 떨어진 외도>라 하며, 또한 <혼(魂)이 흩어지지 않은 시체>라 하나니 ․․․ 통틀어서 말하건대, 이 모두가 <정념>을 잃은 것이다. 21. 의정(疑情)을 일으켰거든 다시 그 의정을 쳐부숴야 한다. 공부를 하되, 의정(疑情)을 일으켰거든 다시 그 의정을 쳐부숴야 한다. 만약 일으킨 의정을 쳐부수지 못할 때는 마땅히 더욱 확실하게 <정념>을 지니되, 큰 용맹을 내어서 간절한 위에도 더욱 간절하게 해야 비로소 된다. 경산(徑山) 화상이 말하기를 ․․․ 『 대장부가 이 <일대사 인연>(一大事因緣)을 결단코 궁구하고자 한다면․․․ 첫째로 일체의 체면(體面)을 타파하고, 성급히 척추 뼈를 곤두세우고는 인정(人情)을 따르지 말고, 오직 전부터 자기가 의심하던 바를 이마 위에 붙여 두어야 한다. 그리하여 항상 남의 돈 백만 관(貫)을 흠포(欠逋)낸 사람이 빚쟁이의 독촉을 받으면서도 갚을 길은 없고, 창피를 당할 것은 두렵고 하여, 급할 일이 없는데도 늘 급해지고 늘 바빠지며, 큰 일이 없어도 늘 큰일을 당한 것처럼 여겨야만 비로소 공부를 해나갈 분수가 있다.』 하였다. - 대우거사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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