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 31. 11:10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삶은 있는 그대로 완전하기에 삶을 통째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술, 담배, 약물 중독이나 고통이나 분노나 폭력 성향이 있는 사람들도 그런 성향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런 성향을 인정하고 변화시키려고 애쓰지도 않은 채 그냥 내버려 둬야 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지 않고 개선하고 노력해야 한다면 ‘받아들임’과 배치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궁금해 한다.
먼저 중독에서 벗어나려면 중독적인 대상에 에너지를 과도하게 투여하지 말아야 한다. 보통 중독된 사람들을 보면 중독된 것에 과도한 에너지를 쏟기 때문에 그 에너지가 도리어 그 사람을 지배해 버리고 만다.
보통 사람들은 중독되었을 때 중독에서 놓여나는 방법으로 중독적인 것과 싸워 이기는 방법을 택하곤 한다. 정신력으로 그것과 싸워서 영광스럽게 승리를 거두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 방법은 정말 어렵다. 그리고 사실 그다지 권장하고 싶은 방법도 못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중독적인 대상을 적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싸워 이겨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면서, 나와 중독적 대상 둘을 나누어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로 나누게 되면 그 중에 하나는 선택받고 하나는 소외되며, 둘 중에 하나는 적이 되고 하나는 아군이 되고 만다. 둘로 나뉘는 곳에는 언제나 분리감, 다툼, 갈등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싸워 이겨야 겠고, 끊어버려야겠다는 생각은 그 중독적인 것을 거부하는 생각이다. 중독과 싸워 이기려는 그 에너지로 인해 우리는 늘상 에너지가 낭비되고 탈진될 수밖에 없다. 또한 마음속에서 강하게 거부를 하게 되면 사실은 그것이 더욱 큰 에너지를 받게 된다. 거부하는 그 마음이 오히려 에너지를 키우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중독적인 것들은 그것을 '절대' 하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더 하고 싶어진다. 거부하려 애쓰면 애쓸수록, 오히려 거부하는 바로 그것이 지속된다. 중독적인 것에 더 중독되는 결과를 초래하곤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거식증과 폭식증이 반복되는 사람이 있다. 음식을 안 먹겠다는데 집착이 심한 사람은 안 먹고 안 먹는데 너무 에너지를 많이 쓰게 된다. 먹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 참는데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쓰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 가면 결국 눌러 참고 참다가 그냥 에너지가 폭발하는 것이다. 폭발해서 그 때부터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는 계속해서 미친 듯이 먹어 대는 것이다. 거식증에 집중된 에너지가 도리어 다른 극단인 폭식증으로 뒤바뀌는 것이다.
이처럼 극과 극은 통하는 법이다. 어느 한 쪽에 극단적으로 집착하면 그 반대편, 반대급부도 상승하는 것이다. 이 우주는 모두가 파장이라고 하는데, 파장이라는 것의 특성이 어느 한 쪽이 크게 올라가면 반대로 내려가는 파장도 증폭이 커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반대는 어떨까? 중독적인 것을 끊어 없애려고 싸워서도 안 된다면, 그냥 중독적인 것들을 계속 좋아하고 빠져들어 계속 중독된 삶을 넋놓고 그저 중독된 채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그 또한 중독적인 모든 것들을 좋아하고 집착하고 소유하려는 쪽으로 에너지를 쓰는 것이기에 마찬가지로 에너지 낭비가 심해진다. 담배를 구하고, 마약을 구하려고 온갖 짓을 다 하러 뛰어다니느라 힘이 빠지고, 또한 술담배며 약물을 취하면서 더욱 더 생명력은 땅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된다면 어찌해야 할까? 중독적인 것을 어떻게 다루면 좋을까?
담배나 술이나 약물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여 보면 어떨까? 좋아해서 구하고 취하려고 애쓰지도 말고, 싫어해서 거부하고 싸워 없애려고도 하지 않고 그냥 그것이 거기에 있음을 인정하고 바라보는 것이다.
이 중도적인 방법은 전혀 폭력적이지 않은 자비의 방식이다. 참된 자비란 무엇일까? 참된 자비는 둘 중에 어느 하나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둘로 나누지 않음으로써 나뉘지 않은 전부를 평등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둘로 나누지 않는 불이(不二)의 방식이고,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취하거나 버리지 않는 방식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바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다만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받아들임’과 ‘알아차림’이라는 놀라운 연금술이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 그 마음을 없애려고 싸우거나, 그 마음에 현혹되어 끌려가는 대신, 담배 피우고 싶은 마음을 아무런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것이다. 약물 중독된 나 자신을 심판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나는 다만 술담배에 중독되었고, 약물에 중독된 사람일 뿐 ‘나쁜’ 사람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것은 곧 나 자신에 대한 참된 용서이며 참회이기도 하고,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독을 따라가도 괴롭고, 중독을 거부해도 괴롭다. 이 두 가지의 대응방식 대신 중독이 거기에 있음을, 내가 중독되어 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고,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그 어떤 판단도 하지 않고, 심판하지도 말고, 그저 받아들이고 관찰 해 보라.
있는 그대로의 중독된 나를 다독거려 주고, 괜찮다고 말해 주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을 사랑한다고 속삭여 주라. 담배 피우고 싶은 내가 기꺼이 되어 주는 것이다. 잠시 담배 피우고 싶은 그 마음과 함께 있어 주는 것이다. 그 욕구를 가만히 판단하지 않고 바라봐 주는 것이다.
이것은 중독이라는 병을 치료하는 가벼운 약방문 같은 것이 아니다. 전에는 중독을 병이라고 생각하고 문제라고 생각해 치료해서 없애버릴 것으로 바라보았다면, 이 방식은 중독이라는 현 상황을 전혀 ‘문제상황’으로 낙인 찍지 않음으로써 획기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보는 방식이다. 중독을 보는 방식 자체가 근원에서부터 달라지는 것이다. 이것은 방법이 아닌 방법이며,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아닌 무위(無爲)의 방법이다.
이것은 전혀 애쓸 필요가 없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노력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판단하지 않은 채 그것과 함께 있어주는 것이다. 취하려 해도 괴롭고, 버리려 해도 괴롭다. 양 쪽 다 힘이 든다. 그러나 그 어느 한쪽에 힘을 부여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현실 그 자체로써 존재해 주는데는 어떤 힘도 들지 않는다. 힘이 들지 않지만, 근원에서는 그렇기에 더욱 강력한 무위의 힘이 저절로 상황을 이끌어 간다.
이처럼 ‘받아들임’은 무기력이나 나약한 수동적 대응방식이 아닌 진정한 본래적 힘을 끌어오는 능동적이고도 주도적인 삶의 자세다. 우리는 참된 받아들임을 통해 중도적이고 자비로운 무위자연의 근원적 힘에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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