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과학(신과 하느님)|******@불교의우주관@

2019. 4. 28. 08:25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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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옹

9. 불교의 우주관을 통해 본 하느님

우리는 불교의 우주관인 空의 세계를 통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의 속성을 찾을 수 있다. 이를 위해 먼저 불교의 우주관을 도식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여기서 각 그림의 사각형을 무한 영역으로 표시하도록 하겠다. 물론, 무한 영역을 그림으로 한정지어 표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우리의 사유형식이 무한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한정된 우리의 사유형식으로 무한영역을 표시하도록 한다. 또한, 영역이란 말도 공간적인 개념에 한정되지만, 도식적인 설명을 위해 영역이라는 말을 사용하겠다. 결론적으로 이와 같은 무한 영역을 불교에서 언급하고 있는 空의 세계, 절대무(絶對無) 그리고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먼저 [그림 1]을 보도록 하자. 이것은 신(神)을 대상으로 파악하는 신관(神觀)을 나타낸 그림이다. 일반적으로 서구(西歐) 전통에서는 이처럼 무한하고 절대적인 존재를 '나'라는 주관의 입장에서 대상화하여 신(神)으로 설명하였다. 따라서 신(神)은 나에게 있어 언제나 타자(他者)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과연 신(神)이 우리와 타자(他者)로 성립할 수 있는가? 만일 인간이 신(神)에 대해 타자(他者)라면, 신(神)은 자신 외의 타(他)에 의해 제한되어지고 한정되어지는 존재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무한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에 빠지게 된다. 무한 영역에서 스스로를 벗어난 영역으로의 유출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무한 영역은 유출된 타자(他者)도 그 영역 안으로 포함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신(神)은 이처럼 대상화된 타자(他者)일 수 없다. 신(神)으로부터 절대적으로 단절된 '나'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교에서는 현상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근원적 실체 개념을 부여하지 않는다. 현상계의 모든 우연유(偶然有)에 대해 근원적 실체 개념을 부여한다면, 그것은 신 (神)과는 대립하는 타자(他者)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현상계가 [그림 2]와 같이 자기 분열적인 존재라고도 볼 수 없다. 이는 각 요소들이 무한 영역의 각 부분들을 점유하여, 각 요소들 스스로 신(神)이라는 범신론과 각 요소에 실체성이 부여되는 다원론의 오류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 다음 그림들을 살펴보자. 이 두 그림은 불교에서 空과 色을 전통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바다와 파도의 관계이다. [그림 3]을 보자.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본질적인 실체는 바다와 같이 고요히 머물고, 그 현상인 파도가 바다를 현현(顯現)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오류가 있다. 무한 영역인 空은 자신을 현현(顯現)하는 色을 무한 영역 밖으로 현현(顯現)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한 영역 외에 다른 어떤 영역이 있게 되고, 따라서 무한 영역이라는 말은 스스로 모순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참된 空의 현현(顯現)은 [그림 4]와 같이 무한 영역 안에서의 '내재적 현현(內在的 顯現)'이라고 해야 보다 정확할 것이다. 이처럼 무한 영역 안에서의 내재적 현현(顯現)이기 때문에 色은 그대로 무한 영역에 포섭되게 되어, 무한 영역 그 자체에는 아무런 질적·양적 변화도 없으며, 생멸(生滅) 또한 있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이 무한 영역에서는 이 세계의 시작도 끝도 또한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시간 역시 무한영역 안에 포섭되어 의미를 잃기 때문이다. [그림 2]와 [그림 4]의 다른 점은, [그림 2]는 각 요소들이 자신의 영역을 점유하여, 고유한 자성(自性)을 갖고 있는데 반해, [그림 4]에서는 a, b, c, d의 각 요소들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가유(假有)에 불과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인(世人)들은 그림의 a, b, c, d와 같은 것들이 자성(自性)이 없는 空한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각각 실체가 있다는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되어, 아집(我執)에 빠지고 苦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도식 또한 우리의 사유 형식에 따른 표현에 불과하다. 우리의 사유형식으로는 결코 그와 같은 무한 영역의 체험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사유형식이 상대무(相對無)가 아닌 절대무(絶對無)를 사유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절대적이고 무한한 신(神)의 존재는 결코 우리의 주관이 대상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신(神)은 대상화된 타자(他者)가 아니라 대상이 없는 '절대타자(絶對他者)'라는 용어가 보다 적합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인간은 하느님과 다르면서도 또한 다르지 않은 그러한 존재이다. 전체와 단절된 나는 있을 수 없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전체'의 개념은 공간적 개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인간은 전체이면서 또한 전체이지 않은 그러한 존재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비유를 하곤 한다. 우리 인간은 성령의 바다 속에 있는 기포와 같은 존재라고, 고유한 모습을 갖고 있으면서도 또한 바다 그 자체인 그러한 존재라고... 

우리는 또한 [그림 4]에 나타난 불교의 우주관을 통해 현상과 본질이 다르지 않다는, 즉 "色이 곧 空이여, 空이 곧 色이다"라는 결론을 얻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의 일상 삶이 그대로 곧 진리의 세계이며, 진리의 세계가 곧 우리의 일상 삶임을 뜻하는 것이다(자료실 6번 "일상의 삶이 곧 진리의 삶(色卽是空 空卽是色)" 참조). 이는 곧 우리의 역사 안에 하느님께서는 구체적으로 현존하시고, 하느님의 역사가 곧 우리의 역사임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의 일상사가 바로 하느님의 역사라는 것은, 하느님을 현상계를 벗어난 우리와 전혀 이질적인 그래서 대상적일 수 밖에 없는 그런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삶 안에서 그대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는 매우 실천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