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12. 12:27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특강 3 : 불기2556년 3월 18일 병(病)
오늘의 강론은, 주제는 병입니다. 사람은 일생을 살면서 두 가지 병을 끼고 살죠. 하나는 탐욕이라고 하는 병이고, 하나는 분노라고 하는 병입니다. 탐욕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집요하게 끌어당기는 것을 말하죠. 분노라고 하는 것은 내가 싫어하는 것은 한사코 밀어내는 겁니다. 그래서 그게 병입니다.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떡하든 끌어 당길려고 하죠. 근데 내가 싫어하는 것에 대해선 어떡하든 밀어낼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부조화가 오죠.
끌어당기는 것과 밀어내는 것은 작용하는 힘이 반댑니다. 우리는 끌어댕기고 밀어내는 것을 동시에 하진 몬하죠. 그런데 우리는 좋아하는 것만을 끌어댕길 수가 없다는 거예요. 좋아하는 것을 끌어 당기면, 내가 싫어하는 것도 같이 붙어서 끌어당겨 진다는 거죠. 내가 싫어하는 것을 밀어내면, 싫어하는 것만 밀려나야 되는데, 내가 좋아하는 것도 같이 붙어서 밀려난다는 거예요. 좋아하는 것만 선택할 수 없고, 싫어하난 것만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죠.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게 되면, 싫어하는 것도 함께 선택해야 되고, 싫어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으면, 좋아하는 것도 함께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은 흑암천녀와 길상천녀의 비유를 드시죠. 길상천녀는 행운의 여신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이야기 하시죠. 어느 날 어떤 사내 집에 아름다운 여인이 찾아 왔다는 거죠. 그래 당신은 누구냐고 그랬더니, 자기는 길상천녀, 행운의 여신이라는 거죠. 내가 머무르는 집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얻는다는 거죠. 그러니까 사내는 너무 좋아서 그 여인을 안방으로 모셨죠. 조금 있으니까 아주 못생기고, 얼굴이 시커먼 여인이 찾아 왔어요. 그래서 이름이 흑암이죠. 그 여인이 말하기를 자신도 이집에 머물르고 싶다는 거예요. 당신이 내 집에 있으면, 내게 무슨 이익을 주냐고 그러니까, 그녀가 말했죠. 내가 머무는 집은 가난해지고, 내가 머무는 집은 천해지고, 내가 머무는 집은 귀함이 없어지죠. 그러자 사내는 말했죠. 당신은 필요가 없다고. 그랬더니 흑암천은 말했어요. 조금 전에 당신이 모시고 들어간 길상천은 내 언니죠. 그녀와 나는 일란성 쌍둥이입니다. 그녀가 머무르는 곳엔 내가 반드시 머무르지요. 나를 내치면, 언니도 이 곳에 머무를 수없습니다. 그러자 사내는 길상천녀에게 가서 묻죠. 지금 온 여인이 당신의 동생이냐고. 길상천녀가 말하죠. 그렇습니다. 나를 이 집에 머무르게 하려면, 내 동생도 나와 같이 머무르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동생과 나는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지요.
길상천녀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끌어당김과 같습니다. 흑암천은 내가 싫어함을 밀어냄과 같죠. 이 두가지는 언제나 함께 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거기서 오는 부조화로다가 우울하고, 근심하고, 번민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공포스러워 하죠. 내가 좋아하는 것만 선택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내가 싫어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지 않다면, 그거보다 더 행복이 있을 수가 없겠죠. 그러나 우리는 좋아하는 것만 선택할 수 없고, 싫어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병이죠.
우리가 일생을 끼고 살아야 하죠, 이 두 가지를. 우리는 매순간 끌어당김과 밀어냄을, 그 부조화 속에 놓여 있습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아주 큰 일까지 말이예요. 다행이 이것이 병이라는 거죠. 병이라는 것이 뭔가요? 본래부터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라는 거죠. 우리의 마음은 두 가지의 일을 함께 하지 않으면 안되죠. 하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또 하나는 자신의 생존을 도모해야 된다는 거죠.
자신을 위하는 것과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는 것은 끌어당김과 밀어냄과 같습니다. 그 둘은 조화를 이루기가 어렵다는 거죠. 자기를 이해하게 되면 생존의 문제점을 노출할 수가 있습니다. 생존의 문제점을 해결하게 되면, 자기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죠.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생존을 걱정해야 하고, 이 두 가지의 삶의 부조화는 우리의 삶을 불안정하게 만듭니다. 끌어당김과 밀어냄도 삶의 부조화입니다. 자기를 이해함과 생존을 도모함도 삶의 부조화입니다. 흑암천과 길상천도 삶의 부조화죠. 그런데 이것은 두부를 자르듯이 잘라낼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병이죠.
병이 있으면 반드시 약이 있게 마련입니다. 부처님은 이 병을 치료할려면, 스스로의 생각을 바꿔야 된다는 거예요. 스스로의 생각을 바꾸지 않는한, 이 병은 치유할 수 가 없다는 거예요. 무슨 말씀이냐 하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해서 끌어당겼을 때, 내가 싫어하는 것이 같이 당겨 왔을 때, 그것을 받아들여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싫어하는 것을 밀어냈을 때, 내가 좋아하는 것도 같이 밀려나는 것을 받아들여야 된다는 거예요. 받아들여야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우리는 싫어함과 좋아함을 억지로 자꾸 분리시키려고 하죠. 분리되지 않는데 말이예요. 흑암천과 길상천이 함께 머무르듯이. 함께 머무른다는 것을 우리가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부조화는 더 이상 부조화가 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평지만 있을 수는 없어요. 평지 끝에는 반드시 언덕이 있죠. 언덕 끝에는 평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평탄한 길을 원하죠. 모든 길이 평탄할 수는 없습니다. 또 모든길이 평탄하면, 우리는 그 길에 대한 어떤 행복감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보왕삼매론에서는 장애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고 그러죠. 장애가 있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어려움을 극복했을 때 행복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생각을 바꾸는 일에 굉장히 서툽니다. 생각을 바꾸질 잘 몬하죠. 생각을 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스스로 마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마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는 스스로의 마음을 굉장히 협소하게 갖기 때문이죠. 마음이 좁으니, 그 마음에 담겨지는 것도 작을 수 밖에 없지요. 물이 차면 넘친다고 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끌어당기면 밀려난다는 것도 또한 진리죠. 근데 우리는 그것을 잘 받아들이지 몬해요.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의 공간이 적기 때문에 거기다 담아내지 못하죠.
그래서 부처님은 무량심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무량심이어야만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 있고,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거예요. 무량심은 그 한계가 없는 마음입니다. 그 끝이 없죠. 그 끝이 없고, 한계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담을 수가 있습니다. 불교 수행의 가장 핵심적인 요체는 무량심을 키우는 것, 마음의 공간을 넓히는 겁니다. 마음은 누가 대신 넓혀줄 수가 없어요. 스스로가 넓혀야지.
중국 선사들은 칠통배(漆桶輩)라는 말을 많이 썼죠. 칠통배라고 하는 말은 옻으로다가 시커먼 칠을 해놓은 통에 들어앉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예요. 그 마음이 꽉 막혀서, 마치 검은 옻칠을 한 검은 통속에 들어앉아 있다는 것과 같다는 거죠. 황벽선사는 어느 날 법상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죠. "이 술 찌게미나 먹는 놈들아! 정신 차려라!" 왜 당신 제자들을 술찌게미나 먹는 놈들이라고 그랬겠어요. 황벽선사가 이야기 한 것은 칠통배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이야기예요. 칠통배처럼 생각하면,아무 것도 담아내지 못하죠. 우리가 병을 치료할려면 무량심이어야 되니다.
이 병은 본래 내가 가지고 있던 병이 아닙니다. 단지 병일 뿐이예요. 병은 치료하면 됩니다. 약을 먹으면, 돼요. 근데 약이 있는데도, 약을 먹으려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아니 더 문제는 병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겠죠. 이거는 병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끼고 사는 병이예요.
탐욕과 분노는 우리 삶을 부조화하게 만듭니다. 내가 탐욕이란 말을 내가 좋아하는 것을 끌어 당기는 마음이라 그러고, 분노라는 것은 내가 싫어하는 것을 밀어내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실질적인 삶에서 더 적절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탐욕이라고 규정지을 순 없습니다. 모든 것을 분노라고 규정지을 수 없습니다. 내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는데, 그것을 참고 있다면, 그것이 어찌 한 인격의 주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내가 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온갖 노고를 다하는 것을 어찌 탐욕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어요? 그 동안 불교는 모든 것을 탐욕과 분노라고 하는 것으로 몰아 부쳤죠. 그것은 잘못된 겁니다. 탐욕이라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집요하게 끌어댕기는 겁니다. 분노라고 하는 것은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한사코 밀어낼려고 하는 것. 실질적으로 우리는 일상에서 이렇게 삽니다. 그것이 우리 일상이예요. 특별히 어떤 사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너, 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산다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늘 삶의 부조화로 어려움을 겪지요.
중국의 선사들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칠통배는 삼세제불이 세상에 나오셔도 구할 수 없다. 무슨 말인가 하며는 스스로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어쩔 수 없다는 것. 마음의 문을 연다고 하는 것은 무량심입니다. 내가 수없이 강조했던 아파마나가 무량심이죠. 우리가 아파마나해야 하는 이유는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을 위해서 하는 거죠. 어느 누구도 내 자신의 삶의 부조화를 걷어내서 조화롭게 해줄 순 없습니다. 내 삶을 조화롭게 하는 것, 역시 내 자신이죠. 부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하더라도 내가 나와 함께 하시는 부처님을 내가 받아들여야만이 나와 함께 하는 부처님이 되는 것처럼, 삶의 부조화도 누가 대신 걷어내줄 순 없어요.
오직 내 스스로 내 마음의, 내 생각의 전환을 통해서 이루어져요. 이것이 다행인 것은 이것은 병이라는 거예요. 병일 뿐이지, 우리의 본질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만약 이것이 우리의 본질의 문제라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본질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이것이 병이기 때문에 우리는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나는 의사다'라고 그랬죠. 너희의 병을 치료해주는 의사라고 그랬습니다, 부처님이. 그렇지만 부처님은 이 말씀도 하셨죠. 그러나 나의 치료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나도 그의 병을 낫게 해 줄 순 없다 그랬어요.
중국 역사상 가장 사랑받은 책은 <삼국지연의>라고 하는 책입니다. 중국에서 가장 사랑받은, 지금도 사랑받고, 우리나라에서도 사랑받는 책. 일본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책이죠. 삼국지에 보면, 조조가 편두통으로다가 늘 고생을 하죠. 어느 날 편두통으로 고생하는 조조를 위해서 명의로 알려진 화타를 부르죠. 조조를 진찰한 화타는 말하죠. 왕께서는 늘 머리가 아프고, 늘 불안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고칠 수 있는 병입니다. 조조는 기뻐서 말하죠. 알겠네, 어서 약을 지어 주게. 그런데 화타는 뜻 밖의 말을 하죠. 이것은 약으론 고칠 수가 없습니다. 약으론 고칠 순 없고, 두개골을 징으로 열고 외과수술을 해야 된다. 그러자 조조는 분노하죠. 네 이놈, 누가 나를 암살하라고 지시했느냐? 조조는 의사들을 믿지 않았어요. 믿지 않았던 이유는 전에 의사이던 도관이 조조를 암살하려다가 발각되어서 처형을 당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 이후로 조조는 어떤 의사도 믿지 않았어요. 근데, 그 시대에 두개골을 연다고 하는데, 그걸 조조가 믿겠습니까? 조조는 믿지 않았어요. 그래, 화타는 옥에 갇혀서 심한 고문 끝에 죽죠. 배후를 캘려고 수없이 고문했지만, 배후가 없는데, 어떻게 밝히겠어요. 중국의 전설적인 의사 화타는 조조의 병을 치유할려 했다가, 고문 끝에 그렇게 죽죠.
부처님께서는 모든 병은 치유할 수 있지만, 그 치유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부처님도 치유할 수 없다는 거예요. 병은 알고보면, 누가 치유해 주는 것 아닙니다. 스스로가 치유하는 거죠. 물론 누군가의 손을 빌리는 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의사를 신뢰하지 않으며는 병은 치유할 수가 없어요. 병은 스스로가 치유하는 거죠. 스스로의 마음으로 치유하는 거예요. 마음의 병은 오직 마음으로만 치유할 수 있습니다.
어렵게 생각하실 거 없어요. 부처님께서 제시하신 아파마나를 하시면 됩니다. 마음의 한계없이, 그 마음의 끝이 없이, 한없이 넓혀가면 됩니다. 한없이 마음을 넓혀가면, 처음에는 병원체가 엄청 크지만, 그 병원체가 머무르고 있는 숙주가 갈수록 커지며는, 병원체는 갈수록 작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스스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죠.
부처님께서 왜 생로병사를 말씀하셨겠어요? 생로병사에서 병을 단순히 육체적 병이라고 생각하진 마세요. 우리는 육체적인 병과 마음의 병을 동시에 앓습니다. 우리 육체의 병은 마음에서 오는 겁니다, 사실. 내가 육체의 병이 마음에서 온다고 하는 것은 내 마음의 부조화에서 온다는 이야기입니다. 항상 우리가 부조화 속에 놓여 있는데, 그 하나 하나마다 우울하고, 근심하고, 번민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두려워 하고... 이것은 병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병을 키우는 거죠. 스스로의 마음을 넓혀 가세요. 그러면 병은 스스로가 물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아, 뭐 질문하실 것 있으면, 질문 받겠습니다. 반야심경 강의도 그렇고. 활발하게 질문하시고 그래야 되는데. 질문이라고 하는 거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내 생각을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는데, 내가 평소 생각한 것과 다르다. 이거는 서로에게 공부가 되는 겁니다. 절차탁마라 그러지 않습니까? 옛날에 스님들은 경을 공부할 때는 반드시 토론을 했습니다. 경을 놓고 반드시 토론했어요. 원래 사찰에는 주입식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전부다 토론이었어요. 격렬하게 토론을 해서 어떤 때는 목침이 날아갔다 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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