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전당(殿堂)|…… 혜천스님설교

2019. 5. 18. 08:3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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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불기2556년4월1일

붓다의 전당(殿堂) 

 

 

오늘 강론 주제가 붓다의 전당입니다. ‘붓다의 전당’, ‘전당’ 집이라고 하는 ‘전당’

 

에~ 경에서 그분은 많은 사람들에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오신 분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분은 굶주린 사자를 위해서 자신의 몸을 증여했고, 저울대 위에 자신의 몸을 올렸고, 비천한 수미타를 귀하게 하였고, 악인인 앙굴리마라를 선하게 하시었고, 굶주림에 시달리던 할머니를 풍족하게 하였고, 마탕카를 진리의 문에 들게 하시었죠. 그분은 누구를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온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이 나 자신을 위해서 왔음을 믿어야 됩니다. 그 분이 나 자신을 위해 왔음을 믿는 것, 그것이 바로 信解脫입니다.

 

부처님은 세 가지의 해탈을 말씀하시었죠. 첫 번째는 믿음의 해탈, 신해탈(信解脫, 두 번째는 마음의 해탈, 심해탈(心解脫), 세 번째는 지혜의 해탈, 혜해탈(慧解脫)입니다. 이 세 가지는 다른 것 같지만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믿음이 토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는다고 하는 것은 확신한다고 하는 거죠. 확신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동요도 없는 것을 말합니다. 천근의 추처럼 어떠한 흔들림도 없는 거죠. 우리가 끊임없이 동요되는 것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내 마음에 천근의 추처럼 버티어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죠. 이 밖에 떠나서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불문을 읽을 때마다 이와 같은 구절을 읽습니다. ‘나모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붇다싸’ ‘그 분 존귀하신 번뇌로부터 떠나신 분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신 분을 존경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간단하게 이해를 하면은 굉장히 간단합니다. 어떻게 간단하게 이해될 수 있느냐? 나는 부처님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그 뜻입니다. 길게 이해할 것이 없어요. 간단하게 이해하면 됩니다. ‘나무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붇다싸’ ‘나는 부처님을 믿고 따릅니다.’ 무엇을 믿고 따르는 가요? 부처님께서 나를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믿는 거예요. 무엇을 따르는가요? 내가 부처님을 따르면 붓다의 전당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겁니다. 우리는 붓다의 전당에 올라야 합니다. 우리가 붓다의 전당에 오르기 위해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식을 배우기 위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그저 심심해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오직 붓다의 전당에 오르기 위해서입니다.

 

붓다의 전당은 모든 사람이 오를 수 있습니다. 붓다의 전당에 오르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만 오르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가 오를 수 있습니다. 근데 우리가 왜 붓다의 전당에 오르지 못할까요? 우리가 붓다의 전당에 오르지 못하는 이유는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확신만이 나를 붓다의 전당에 오르게 해줍니다. 처음부터 천근의 추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천근의 추도 작은 쇠붙이들이 모여서 용광로에서 녹여서 만들어지죠. 우리의 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확신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확신은 만들어지는 것이지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확신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왜 부처님께서 신해탈이라고 하는 말을 쓰겠어요. 믿음을 통한 해탈, 믿음을 토대로 한 해탈을 말씀하시겠어요. 사실 우리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부족한 거는 믿음의 확신이 부족하죠. 믿음의 확신이 부족하니깐 언제든지 어떤 계기만 되면 동요되게 돼 있습니다. 바람이 불어서 동요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동요되기 때문이죠. 내 마음의 천근의 추처럼 굳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작은 일에도 동요되는 거죠.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은 믿음은 모든 것의 근본이 된다고 이야기를 했죠. 믿음은 모든 것의 근본이 된다는 거죠. 모든 것은 믿음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출발점입니다. 동시에 종착점이죠. 우리를 붓다의 전당에 오르게 해주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은 다 공허하죠.

 

많은 분들이 붓다의 전당에 오르기 위해서 지금도 쉬지 않고 붓다의 전당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붓다의 전당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붓다의 전당에 도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거예요. 많지 않은 이유는 붓다의 전당에 가는 길은 여러 가지 장애가 놓여있기 때문이죠. 마치 장애물 경주를 하는 거와 같죠. 장애물을 넘어서야 만이 붓다의 전당에 올라갈 수 있는 데 장애물을 만날 때마다 그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니 어떻게 붓다의 전당에 나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나아갈 수 없으니 전당에 오를 수가 없죠. 그 장애물은 본래 놓여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장애물을 만드는 것은 내 마음이죠. 내 마음이 그 장애물을 만든 겁니다. 내 마음이 장애물을 만든다는 것은 그것이 내 마음의 장애물로 여긴다는 거지요.

 

남쪽에는 지금 벚꽃 축제를 한다고 하죠. 꽃소식이 가득합니다. 오늘 북쪽에는 산중에 눈이 내린다고 하죠. 한겨울입니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는 당연히 오게 되어 있습니다. 꽃샘추위가 있기 때문에 꽃이 귀한 것이죠. 그런데 꽃샘추위를 장애로 여긴다면 우리는 꽃을 볼 수가 없습니다. 내가 말하는 꽃은, 눈에 보이는 꽃이 아니라 마음의 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장애가 없기를 바라지 마라. 어찌 네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단 한 번의 장애도 없기를 바라느냐.” 우리는 일생을 살면서 한 번의 장애도 없기를 바래요. 만약에 장애가 없다면 붓다의 전당에 오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본래 갖추어지고 구족되어 있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우리에게 주지를 않습니다. 죽어서 극락세계에 가면 극락세계는, 극락세계 나무는 옥으로다 만들어져 있고, 땅은 금이고, 바위는 은이고, 모든 것이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진주 이런 거로다가 이루어져 있다는 거예요. 흐르는 강물은 감로수고, 감로수는 불사의 영약입니다. 감로수를 마시면 영원히 죽지 않죠. 단 한 잔을 마셔도 말이예요. 그렇게 진시황이 마시고 싶었던 감로수가 그저 소양강 물처럼 흐릅니다. 그저 떠먹으면 돼. 안 죽습니다. 만약에 이 땅이 그와 같다면 우리는 그거에 대한 고마움이 없을 겁니다. 고마움이 없는 게 아니라 어쩌면 지겨울 지도 모르죠. 아이고 저 놈의 감로수 한 번 죽어봤으면 소원이 없겠네. 생각해 보셔요. 모든 사람들이 죽지 않는다면 죽는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특권이 될 거예요. 죽는다는 것이 행복일 거예요. 아무도 죽을 수 없다면 말이에요. 다른 표현을 쓰죠. 아무도 죽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세계라면 말이에요. 오직, 죽는 자만이 특권을 누리는 자죠. 우리가 붓다의 전당에 오르는 것을, 그 문에 들어가는 것을, 소원하는 것은 본래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발로 그 곳에 가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모든 사람이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산을 헬기를 타고 내려간다면 특별한 의미가 없을 겁니다. 힘들여서 그 곳을 올라가기 때문에 그것이 의미가 있죠.

 

100킬로를 달리는 것을 울트라마라톤이라 그러던가요? 100킬로. 만약에 100킬로 울트라마라톤을 자동차를 타고 달렸다고 치자 이 말 이예요. 아마 아무 의미도 없을 겝니다. 100킬로를 뛰어서 달린다면 우리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도 특별하게 여기죠. 그러나 그 100킬로를 자동차로 달리면 이렇게 이야기하죠. 드라이브 잘했네. 그저 드라이브입니다. 물론 자전거라도 타고 달리면 또 다르죠. 내 육신을 써서 그 곳에 이른 것은 내 땀이 젖어있고 거기에는 포기하지 않은 내 의지와 인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특별함을 갖죠. 자동차 위에서 내가 한 일이라고는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저 핸들을 돌리고 조작했다는 것 밖에 없죠. 자동차 위에 올라가면 누구나 달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100킬로를 자동차로 달려서는 아무 감흥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청춘남녀가 100킬로를 자동차를 타고 달렸을 때는 또, 다르겠죠.

 

오직 내 스스로 붓다의 전당에 올랐을 때만이 붓다의 전당에 오른 의미가 있습니다. 아니, 오직 내 힘만이 그 곳에 오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셨죠. “나는 누구나가 나의 전당에 오르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가 나의 전당에 오라고 부르고, 손짓하고, 때에 따라서는 그에 손을 잡아끌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의 전당에 오지 않으려고 하는 자를 억지로 끌고 들어올 수는 없다”. 왜 부처님은 억지로 그 곳에 끌고 들어가지 않을까요? 왜 억지로 끌고 들어가 주지 않을까요? 억지로 그를 끌고 들어간다면 그에게는 붓다의 전당은 지옥의 전당일 것입니다. 아무리 금은보화라 할지라도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강제되면, 설사 그것이 붓다의 전당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지옥의 전당일 뿐입니다. 붓다가 그를 붓다의 전당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 그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를 붓다의 전당에 집어던진다 한들 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죠. 내가 그 곳에 이르려고 하는, 마음 속에 소망이 있어야 돼요.

 

부처님께서는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라고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붓다는 끊임없이 붓다의 전당에 오르는 것이야말로 너희들에 진정한 이익이고 행복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붓다의 전당에 오르면 우리는 영원한 진리의 세계에서 안식과 평화를 얻게 됩니다. 그 안식과 평화를 얻는 사람은 깊은 믿음과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예요.

 

부처님은 믿음과 확신을 가진 사람들, 그 사람들이 함께하는 그런 세계를 ‘상가’라고 했어요. 우리는 예불문에서 상가에 귀의한다고 하는 것을 읽습니다. 상가는 그 믿음과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런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붓다의 전당에 오르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가 형제라고 하셨어요. 피를 나눈 형제는 한 생의 형제에 불과합니다. 지금 생의 형제일 뿐이라는 거예요. 법의 형제는 다겁 생의 형제입니다.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형제입니다. 또 영원히 함께 가는 형제이기도 합니다.

 

믿음과 확신은 우리를 붓다의 전당에 들어서 영원한 진리의 세계의 안식과 평화를 누리는 열반의 세계에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확신이 부족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어떻게 믿음을 천근의 추처럼 가질 수 있을까? 우리가 그것을 갖기 위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기도라고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직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거예요. 부처님께서 나를 위해 오셨음을 믿고 따르는 겁니다. ‘나모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붇다싸’ 저는 믿습니다. 부처님께서 나를 위해서 오셨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따릅니다. 제가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한 나는 붓다의 전당에 오르리라고 하는 것을 확신합니다. 다른 것이 필요 없습니다. 무엇을 많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많이 읽고, 많이 외운다고 해서 기도가 아닙니다. 많이 한다고 해서 그것도 수행도 아닙니다. 오직 진실한 한 마음이면 됩니다. 오직 진실한 한 마음을 담아서 오직 부처님을 믿고 따르면 됩니다.

 

부처님은 이 길이야말로 유일한 길이라고 그랬죠. 무슨 유일한 길일까요? 붓다의 전당에 오른 유일한 길이라는 거예요. 믿음과 확신이야말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을 수 있다’라고 이야기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라고 하죠. 믿을 수 있고 확신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이고,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죠. ‘나는 진실만을 말할 뿐이다.’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나는 한 입 가지고 두 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헛소리 하지 않는다.’ 라고 하셨어요. 왜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을까요? ‘나는 속이는 말을 하지도 않는다.’라고 하셨어요. 아난다 존자가 ‘혹시 부처님께서 저희들에게 감추어두고 가르쳐주지 않은 것이 있으십니까?’ 라고 물었을 때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내가 너희들에게 감추어두고 가르치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 내가 모든 것을 다 말해주지 않았느냐? 너는 무엇을 도대체 의심한다는 말이냐?’ 부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일러 주셨습니다. 다만 우리들은 부처님께서 일러주신 그 길을 따라서 가기만 하면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굶주린 사자를 위해서 자기 몸을 던져서 먹이로 삼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비둘기를 위해서 스스로의 몸을 저울대 위에 올리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천한 수미타를 손수 씻겨서 그를 귀하게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살인마 앙굴리마라를 직접 찾아가서 그를 구제하시고, 그를 선하게 하시었습니다. 가난해서 남에 집 쌀뜨물을 얻어서 연명을 하는 할머니를 풍족케 했습니다. 불가촉천민이었던 그래서 멸시와 모멸의 대상이었던 마탕카를 진리의 문에 들게 하셨습니다. 부처님을 그렇게 싫어했던 할머니에게 부처님에 권능의 화신을 보이셔서 그를 제도하셨습니다.

그러신 부처님께서 어찌 나 한 사람만을 외면하시겠습니까? 그들도 부처님에 구원을 받았는데 어찌 나 한 사람만을 제외시켜 놓겠습니까? 우리가 믿음과 확신으로 부처님을 따라야 합니다. 믿음과 확신이 토대가 되지 않으면 언제나 불안정할 수밖에 없죠. 그저 임시로 지어논 집이 강한 바람에 무너져 내리는 거와 같습니다.

 

모든 것은 믿음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해탈도 오직 믿음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붓다에 전당에 오르는 것도 오직 믿음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깊은 믿음과 확신을 내셔야 합니다. 믿음과 확신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순간에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눈사람을 만드는 거와 같죠. 첨에 눈사람을 만들려면 주먹만 하게 눈을 뭉치죠. 그리고 굴리죠. 그러면 눈덩이 불어나듯 불어난다는 말이 있듯이 눈덩이는 갈수록 늘어나죠. 믿음도 마찬가집니다. 부처님에 대한 믿음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면 그 믿음과 확신으로 부처님에 대한 믿음도 서서히 커집니다. 그것이 천근의 추처럼 흔들림이 없어집니다. 어떤 상황과 어떤 환경이 오더라도 천근의 추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믿음과 확신은 천근의 추와 같습니다. 천근의 추는 나를 붓다의 전당 위로 밀어 올리는 힘이 됩니다.

 

항상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내셔야 됩니다. 믿음을 내는 것은 마음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행동도 같이 따라줘야 됩니다. 생각만으로 천근의 추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생각만으로 음식을 만들어 낼 순 없습니다. 생각만으로 자동차를 달리게 할 순 없습니다. 생각과 함께 행동이 따라야 됩니다. 행동이 없는 것은 마치 육지에 놓여있는 배와 같죠. 부처님은 그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육지에 있는 배와 같아서 쓸모가 없구나.’ 배라고 하는 것은 물 위에 떠서 운행해야만 되죠. 그런데 그 배가 육지에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아무 쓸모가 없죠. 육지에 있는 배는 폐선입니다. 쓸모없는 배죠. 부처님은 행동하지 않는 것은 ‘뭍의 배와 같다.’라고 했어요. 땅 위에 배가 있으니 배로서의 그 효능은 없어진 것이죠. 항상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실천을 강조하신 거죠.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 뭐예요. 실천하는 거죠. 기도라고 하는 것이 뭐예요. 실천하는 겁니다.

 

오늘은 붓다의 전당에 우리가 오르는 그러한 전기가 되는 날입니다. 지금 우리 불자님들은 붓다의 전당을 향해서 어디쯤 오고 있습니다. 지금 어디쯤, 붓다의 전당에서 얼마만큼 거리에 있습니까? 각자가 한 번 돌아보세요. 나는 지금 붓다의 전당을 향해 가고 있는데, 나는 지금 어디쯤 있는가? 붓다의 전당이 눈앞에 보이는가? 붓다의 전당이 멀리 보이는가, 아예 보이지도 않는가? 도대체 붓다의 전당이 어디에 있는가? 알 수도 없는가? 나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오늘에 주제는 붓다의 전당입니다. 붓다의 전당은 다르마의 세계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다르마의 세계인 붓다의 전당에 올라서 영원한 평화와 안식 속에서 열반의 세계의 그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그 곳에 누구나 오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특별한 사람만 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 곳에 오르려고 하는 마음이 있고 그 곳에 오르려고 하는 실천이 있다면 그 곳에 누구나 오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단지 마음을 내지 못하고 마음을 내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만을 우리가 걱정하면 됩니다. 마,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아, 오늘 뭐 특별히 질문이 있으신가요? 믿음에 대해, 기도에 대해 질문하셔도 좋습니다. 오늘.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도하면 되는가? 마 어떻게 하면 마~좀 더 지름길로 가는 기돈가? 뭐 그런 것을 물으셔도 됩니다. 다 아는 걸 물으니깐, 그러면 특별히 말씀이 없으시면 잠시 아파마나 수행을 좀 하겠습니다.

 

아파마나 수행

 

다들 합장하시죠. 자비하신 부처님, 어젯밤 꿈에는 붓다의 전당에 올랐습니다. 오늘은 모든 법우들과 손잡고 붓다의 전당에 오르기를 간절히 희구합니다. 저희들이 꿈에서가 아니라 실제의 세계에서 붓다의 전당에 오르기를 원합니다. 저희들이 붓다의 전당에 오르는 그날까지 불퇴전의 심신과 불퇴전의 확신으로 어떠한 장애와 어려움이 있어도 중단하지 않고 붓다의 전당을 향해서 나아가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저희들을 이끄시고 부처님께서 저희들을 밀어주소서. 그리하여 한 사람도 빠짐없이 붓다의 전당에 올라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얻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기도하는 저희와 저희 가족과 이웃에게도 부처님의 전당에 오를 수 있는 축복이 있기를 소원하고 기도합니다. 싸두, 싸두, 싸두

 

 


김광석 네번째(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