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금질|…… 혜천스님설교

2019. 6. 15. 22:3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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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불기2556년 4월 8 

담금질 

 

 

오늘 강론의 주제는 담금질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법을 보지 못하는 자는 나를 보지 못한다고 그랬어요. 법을 보는 자가 나를 본다고 그랬지요. 부처님을 볼려면, 법을 봐야 된다는 거예요. 법을 보지 못하게 되면, 붓다를 볼 수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여기서 의문을 가지고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법을 보아야만이 붓다를 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법을 어떻게 보느냐?

 

다르마를 보지 않으면, 붓다를 보지 못합니다. 다르마를 봐야만이 붓다를 보는데, 다르마를 어떻게 보느냐는 거예요. 우리는 다르마라고 하는 말을 많이 써요. 그런데 다르마를 어떻게 보느냐? 다르마를 본다고 하는 것이 도대체 뭐냐? 그거에 대한 답은 사실은, 우리는 별로 가지고 있지 않죠. 다르마를 본다고 하는 것은, 다르마를 보는 도구는 확신이예요. 확신할 때 다르마를 보죠. 확신하지 못하면, 다르마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아디모카(adhimokkha, 信解)를 굉장히 중요시 여겨요. 아디모카는 확신이라고 하는 뜻이예요. 아디모카가 없으면, 다르마를 보지 못하죠. 세 가지의 확신이 있어야 다르마를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붓다에 대한 확신, 두 번째는 말씀에 대한 확신, 세 번째는 구원에 대한 확신, 이 세 가지 확신이 있어야만이 다르마를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붓다에 대한 확신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나의  구원자라고 하는 것을 확신해야 돼요.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그 확신이 있어야 돼요. 이것이 붓다에 대한 확신이예요. 붓다는 나의 구원자다, 붓다는 나의 구세주다라는 확신, 그 확신이 첫 번째 있어야 돼요. 두 번째는 말씀에 대한 확신이예요.  말씀에 대한 확신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반드시 내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확신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이야말로 나를 영원한 행복으로 데려다 줄 수 있다고 하는 확신, 즉 붓다의 전당에 올라가게 해 줄 수 있다는 확신, 그 확신이예요. 세 번째는 구원에 대한 확신이예요. 내가 붓다로부터 구원을 받아서 붓다의 전당에 오를 수 있으리라고 하는 자기 확신이예요. 내가 붓다의 전당에 오를 수 있으리라고 하는 자기 확신. 이게 세 번째예요.   

 

우리가 이 세 가지 확신의 입장에서 보면, 행복은 자기 확신이예요. 자기 확신이 행복이예요. 자기 확신이 없는 행복은 늘 불안정해 지죠. 확신은 곧 행복이예요. 그래서 아디모카는 바로 니르바나죠. 아디모카, 즉 확신한다고 하는 것은 그대로 열반이예요.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동요가 없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진리를 보아서, 붓다의 전당에 올라야 붓다를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확신이 있어야 돼요. 조금 전에 이야기한 세 가지 확신, 붓다에 대한 확신, 말씀에 대한 확신,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지만이 붓다의 전당에 오를 수가 있어요.  

 

근데, 여기서 그러면 확신은 어디에서 오느냐 이 말이예요. 확신이라는 것은 담금질을 통해서 이루어지죠. 담금질이라고 하는 것은 반복되는 겁니다. 부단히 반복하는 거죠. 일본 에도 막부 때 혼아미 고에쓰(本阿彌光悅: 주: 도검의 감정과 수리를 전문으로 하는 가문 출신으로 두쿠카와 이에야쓰에게 발탁된 인물)는 이렇게 얘기하죠. "명검은 오직 담금질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즉 담금질을 통해서 만들어 진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명검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명검이라고 하는 것은 대장장이가 수 없이 담금질을 반복하는 가운데 명검이 탄생한다는 거예요. 중국의 전설적인 명검인 어장검(魚腸劍)이니, 이런 것도 처음부터 명검은 아니예요. 수 없는 반복되는 담금질을 통해서 명검이 되죠. 부엌의 식칼도 대장장이가 수없이 담금질을 하면, 명검으로 탄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명검이 되지 못하고, 그저 부엌의 식칼이 되어서, 채소나 자르고, 생선이나 자르고, 고기나 자르는 이유는 대장장이의 담금질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예요. 부엌의 식칼은 대장장이가 두 세번 밖에 담금질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지만 명검은 수 백번, 수 천번의 담금질이 필요하죠. 끊임없이 담금질을 하면서 두드리죠. 그러면서 불순물을 빼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명검이 되죠.   

 

확신이라는 것도 담금질과 같습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실천을 통해서 확신이 서죠. 생각만으로 확신이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생각과 행동이 합치될 때, 확신이라는 것이 만들어지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담금질이 부족하죠. 그저 조금만 힘이 들고, 조금만 내 맘에 맞지 않으면, 포기해 버리는 거죠. 대장장이도 수 천번의 담금질을 할려면, 얼마나 많은 땀방울을 흘리겠어요. 명검은 땀방울 속에 탄생하죠. 우리는 명검을 쉽게 얻고 싶어하죠. 그러나 쉽게 얻어지는 명검은 없다는 거예요. 아니 쉽게 얻어지는 것은 명검이 아니라는 얘기죠. 부엌 칼은 쉽게 얻어지지만, 명검은 쉽게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혼아미 고에쓰가 명검은 담금질을 통해서 만들어진다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확신은 담금질과 같습니다. 부단하게 자기 자신을 담금질하죠. 부단하게 담금질을 하게 되면, 내 마음 속의 노폐물이 빠지게 됩니다. 마치 철에서 불순물이 빠지는 것과 같죠. 우리 마음에도 노폐물이 있습니다. 우리 행동에도 노폐물이 있죠. 그 노폐물이 뭐냐면, 게으름이예요. 부처님은 게으름을 경계하셨죠. 게으름은 자기 자신을 파멸한다는 거예요. 누가 자기 자신을 파멸하는 것이 아니라 게으름이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는 거죠. 우리의 육체는 편안하게 놔두면, 더욱 편안하고 싶어 하죠. 우리의 육체는 단련시켜야지만 강해 집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죠. 우리의 게으름과 나태함은 노폐물입니다. 노폐물을 빼야만이 확신이 내 마음 속에 생기죠. 다른 것이 노폐물이 아닙니다. 흔들리는 마음이죠. 우리는 작은 것에도 흔들리죠. 끊임없이 동요되고. 조금만 힘이 들면 이런 생각이 들죠. 내가 할 수 있을까? 꼭 이거 내가 해야 되는 거야? 꼭 내가 이거 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 않아도 다 편하게 살잖아? 그래서 우리는 하다가 중단하죠. 명검이 만들어지기 까지는 부단한 담금질이 필요한데, 명검이 만들어지지 않았는데도 담금질을 그만 두었으니까, 명검이 될 수가 없죠. 명검은 만들어지는 것이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확신이라는 것도 만들어 지는 것이지, 탄생하는 것이 아니예요.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 하죠. 어떤 사람은 저렇게 확신과 신념에 차 있는데, 나는 왜 확신과 신념이 부족할까? 그 사람이 확신과 신념이 차 있기까지는 그마만한 노력이 있었던 거예요. 그마만한 땀방울을 흘렸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그저 이렇게 얘기하면, 아아! 그거 힘들어서 명검 어디 손에 넣어 보겠어?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죠. 사실 게으름보다 더 위험한 것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조급증입니다. 게으르면 적어도, 검을 망가트리진 않습니다. 다음에 발분해서 또 두드리면 되니까요. 그러나 조급증은 아예 검을 망가트려 버리죠. 담금질은 열을 가하고, 두드리고, 냉각시키고 이것이 반복되는 겁니다. 조급해지면, 열을 가하고, 두드리고, 냉각시키고 하는 것을 축소하게 되죠. 우리가 명검을 만들지 못하는 이유는 게으름이 30%이면, 조급증이 70%라는 거죠. 어느 날 갑자기 짠 하고 명검이 만들어지고, 확신에 찬 내 모습을 상상한다면, 부단하게 열을 가하고, 냉각을 하고, 두드리고, 풀무질하고, 이 방법이 마치 기계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이뤄져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간격을 뛰어 넘고 싶어 해요. 

 

중국 선종에서 쓰는 말 중에 일촌즉입여래지(一寸卽入如來智)라고 하는 말이 있죠. 한 번에 바로 깨달음에 이른다고 하는 뜻이예요.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어떤 사람도 히말라야 정상을 한걸음에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빨리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있지만, 중간을 생략하고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어떤 인간도 태어나자 마자 80살을 먹을 순 없어요. 우리가 확신을 못 만드는 이유는 게으름과 조급증 때문이죠. 빨리 확신에 찬 내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죠. 또는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태한 마음을 일으킨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는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야 한 순간에 이루지기를 원하죠.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죠. 내 마음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기를 원하지만, 대상은 한 순간에 이루어 주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죠. 그건 내 마음이예요. 그러나 대상은 무엇을 이루어줘야할 당위성이 없는 거예요.  

 

확신이라는 것은 부단한 담금질을 통해서 만들어져요. 어느 순간에 그 담금질이 완성이 되죠. 부단히 하다 나면요. 풀무질하고, 열을 가하고, 냉각하고, 두드리는 그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명검이 되는 거예요. 제가 지금 순서를 계속 바꿔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냉각된 뒤에 두드리는 게 아니라, 열을 가한 뒤에 두드리죠. 우리가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실 집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잘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집중이 부족하면 게을러 집니다. 집중이 부족하면 조급해 지죠. 내가 게을러 지고, 내가 조급해지는 것은 내가 집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예요.

 

자,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한다고 한 번 생각해보죠. 안전 운전한다고 고속도로에서 60킬로로 달려 보십시요. 이것이 옳은 행위입니까?  이것도 딱지깜입니다.  내가 처음 운전 면허를 따 가지고, 고속도로에 세렉스를 끌고 올라갔는데, 무서워가지고 60을 밟았어요. 옛날 영동고속도로 2차선 때. 진부에서 횡계까지 갔는데, 고 얼마 안 됩니다. 악몽이었어요, 악몽. 정말 차를 이탈시켜서 날라가고 싶었어요. 뒤에 끝없이 차가 이어져 있는데... 2차선이니까. 뒤의 차가 화가 너무 나가지고, 헤트라이트를 깜빡 깜빡 깜빡 깜빡 깜빡..... 계속 이러는 거예요, 뒤에 쫒아 오면서. 나야 안전 운전하다고 60킬로 달렸지만, 뒤에서 오는 분들 입장에서 보면, 세상에 고속도로에 올라와 가지고 저렇게 달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으름은 고속도로서 60킬로로 달리는 거와 같습니다. 조급증은 뭔가요? 과속하는 거죠. 한 150킬로나 180 킬로쯤 밟는 거예요. 우리가 운전할 수 있는 이유는 확신할 수 있기 때문에 운전하는 거예요. 무엇을 확신하는가요? 첫째, 자동차를 확신하죠. 두 번째, 도로를 확신하는 거예요. 도로가 끊겼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달리지 몬하죠. 세 번째, 자기 자신을 확신하죠. 우리가 운전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세 가지 확신이 있기 때문이예요. 자동차에 대한 확신, 도로에 대한 확신,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 이것이 없으면, 어떻게 고속도로에서 150씩 밟을 수 있겠어요. 아니, 60킬로 달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전에 말한 세 가지 확신이 없으면, 우리는 운전석에 앉아서 운전대를 잡지 몬해요.

 

내가 벌벌 기다가 세 달쯤 되니까, 참 고속도로가 그저 앞 마당 같두만. 그래, 신나게 밟다가 중부고속도로에서 들이받아가지고. 혼자 받았어요, 혼자. 차는 완전히 다 부셔졌고. 거의 죽다 살았어요. 아, 물론 사람은 안 다쳤습니다. 발가락 하나, 새끼 손까락 하나 멍든 데 없었어요. 보험사 직원이 정~~말 스님이 운전한 거 맞냐고? 사실대로 이야기 해보라고, 차가 이렇게 망가졌는데, 어떻게 사람이 멀쩡하게 걸어다니냐고. 한 동안 운전대에 앉으면요, 가슴이 떨려서 운전을 못 하겠더라고요. 차가 완전히 박살이 났는데, 그 때 느낌이 뭔 줄 아세요? 이래서 죽는 구나! 내 밟는 걸 알았어요. 깜빡 졸았는데, 새벽에요. 아! 벽이 앞에 와 있더라구. 분리대가요. 그 때 느낌이 이거예요. 그래서 죽는구나, 오늘. 한 동안은 운전대를 잡으면, 다리에 힘이 들어 가고, 가슴이 왠지 모르게, 운전대를 잡느다고 하는 것이 아 그렇게 편안하지 못해요. 왜 그랬겠어요? 자기 확신이 없어졌던거죠. 우리가 운전할 수 있는 이유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예요. 그런데 우리는 확신하지 못하면, 두려워서 운전하지 못해요. 과속을 하는 거는 조급증 때문이죠, 사실. 내가 바쁘다 그래서 날라갈 수 없는 거걸랑. 이렇게 광분하는 차 치고 먼저 집에 가는 차 없죠. 다 만나니까요, 톨 게이트에서.  

 

우리가 담금질을 반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조급증과 게으름 때문이예요. 빨리 결과를 보고 싶은 조급증. 빨리 결과가 오지 않으면, 우리는 게을러지고 나태해지죠. 정확히 말하면, 모든 걸 포기해 버리죠. 그것 때문에 확신이 생기지 않는 거예요. 확신은 몸을 부딪쳐서 얻는 겁니다. 생각을 얻는 것이 아니라 몸을 부딪쳐서 얻는 겁니다. 즉 실천을 통해서 확신을 만드는 거예요. 아까 저는 말씀 드렸습니다. 행복은 자기 확신이라고요. 자기 확신이 없는 행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동요 됩니다. 세상 사람이 다 행복한 거 같죠, 나만 빼고. 세상 사람들이 다 행복해 보이죠. 그런데 나만 행복하지 않은 것 같죠. 왜 그런 줄 아세요? 자기 확신에 대한 부족 때문이예요. 자기 확신이 있는 사람은 타인이 얼마나 행복한가에 대해서, 왜 나만 행복하지 않은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면, 그럴 필요가 없걸랑요.      

 

확신이라는 것은 담금질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담금질 해야죠. 근데 담금질은 하지 않고, 확신만 안 생긴다고 생각하죠. 왜 나만 확신이 없을까? 아, 세상 사람들은 다 확신에 차 있는데...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 아세요? 확신에 찬 사람이예요. 확신에 찬 사람이 자기 행복을 이뤄요. 확신에 찬 사람이 세상의 행복을 만들어 가는 사람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뭘까요? 자기의 확신을 확인하는 거예요. 자기 확신을 확인한다 말이예요.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거예요. 

 

주관적인 자기 확신은 위험성을 내포하죠. 깨달음은 자기 확신을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거예요. 나는 그렇게 봐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확신에 대한 확인이다. 어떤 확인? 객관적인 검증을 통한 확신. 그걸 확인하는 거예요. 그 단계가 되면, 열반이 되죠. 붓다의 전당에 오른다는 것은 바로 열반의 세계에 이른 걸 말해요.  그 세계에는 그런 분들만 있는 세계니까요. 그 곳에 이르는 사람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예요. 누구라도 그 곳에 이를 수 있지만, 누구라도 오를 수 있지만, 조급증과 게으름 때문에 그 곳에 이르지 못하는 거죠. 즉 자기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죠.  

 

아까 그래서 내가 세 가지 확신을 얘기한 겁니다. 붓다에 대한 확신, 말씀에 대한 확신, 구원에 대한 확신. 이것은 세 가지지만, 딱 하나로 줄이면 자기 확신이예요. 붓다에 대한 확신도 자기 확신입니다. 말씀에 대한 확신도 자기 확신이예요. 구원에 대한 확신도 자기 확신이예요. 자기 확신이 없으면, 붓다에 대한 확신이 있을 수가 없어요. 자기 확신이 없으면, 말씀에 대한 확신이 생길 수 없어요. 자기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구원에 대한 확신을 내가 신뢰할 수 없게 돼요? 자기 자신을 말이예요.  

 

부처님은 말씀하시죠. 모든 것은 니 마음으로부터 출발한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그것이 붓다의 확신이 되었든, 말씀의 확신이 되었든, 구원의 확신이 되었든, 내 마음, 내 자신, 내 자신의 확신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거예요. 확신을 내 마음 속에 각인시키세요. 우리가 그거를 명심(銘)이라고 그러죠. 명은 돌이나 쇠붙이에 글자를 새겨 넣는 것을 말해요. 옛날 종정문(鐘鼎文)이나 비문같은 거. 돌에 새긴 것을 명이라고 그러죠. 명심이라고 하는 말은 돌에 새기고, 쇠붙이에 새겨 넣듯이 마음 속에 새긴다는 거예요. 확신을 자기 마음 속에 새겨 넣어야 해요. 그래야 행동으로 나오죠.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것은 마음 속에 각인되지 않았기 때문이예요. 마음 속에 각인되면, 당연히 행동으로 나오게 돼요.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나무의 뿌리가 잘라지지 않으면, 나무를 베더라도 나무에서 새 싹이 올라온다."  풀 아무리 베 보세요. 또 올라오지. 풀을 뽑아서 던지지 않는 한, 베어 가지곤 끝나지 않죠. 마치 그거와 같습니다. 마음 속의 확신을 새기면, 그것이 언제든지 행동으로 나오죠. 처음에는 나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마음 속 깊이 새겨서 잠겨져 있으면, 어느 순간부터는 떠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부처님이 뭐라고 표현한 줄 아세요? "기름병을 연못 속에 넣은 거와 같다"고 했어요. 자, 기름병을 호루병 병마개를 빼고, 호수에다 던져 넣어 보세요. 처음에는 기름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이 되면, 물의 일렁임과 함께 기름이 서서히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하죠. 처음에는 기름을 던져 넣었다 그래서 바로 기름이 올라오진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이 되면 기름이 나오기 시작하죠. 떠오르기 시작하면, 그 병 속의 기름이 완전히 다 비어서 소진될 때까지 계속 나오죠. 우리 마음 속에 확신을 각인시키면, 그와 같이 우리 행동에도 그게 반영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 마음의 지시에 따라서 행동하기 때문이죠. 마음이 지시하지 읺으면, 우리는 행동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확신하지 몬하는 것은 내 마음이 확신하지 몬하기 때문이예요. 내 마음 속에 확신이 각인되지 않기 때문이예요. 내 마음 속에 확신이 각인되면, 그것이 깊이 새겨지는 그 순간, 그게 바로 열반이고, 그게 바로 깨달음이고, 그게 바로 행복입니다.     

 

오늘의 주제가 담금질입니다. 그것은 담금질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부단한 담금질. 힘들면, 쉬셔도 좋습니다. 담금질 하다가 힘들면, 쉬어도 괜찮아요. 담금질 하다가 쉬면 큰 일 난다고, 죽을 둥 살 둥 피골이 상접할 때까지 담금질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거는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차라리 게으름만 몬하다." 지나치게 의욕이 넘쳐서 그것을 망치는 것은 게으른 것만도 몬하다는 거예요. 담금질하다 힘들면, 쉬어도 관계가 없습니다. 너무 오래 쉬면 안 되겠죠. 쉬다가 다시 마음을 일으켜서 담금질 하면 됩니다.

 

담금질하다 쉬는 것, 이게 용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욕바라밀이죠. 우리가 인욕이라고 하는 것, 인내라고 하는 거를 무조건 이빨 뽀드득 뽀드득 갈면서 참는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건 인욕이 아닙니다. 인욕이라고 하는 것, 인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절제입니다. 아무리 그것이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나 자신을 상할 정도가 되면, 멈춰야죠. 아장이 여절이라도 무구식념하고(餓腸如切無求食念), 배슬이 여빙이라도 무연화심하라고 하니까(拜膝如氷無戀火心) , 발심수행장에서 원효스님이 하는 말인데, 그저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해, 그저 뱃가죽이 등가죽하고 딱 달라 붙더라도, 먹는 거를 생각하지 말고, 그저 절하는 무릎이 얼음처럼 얼어버리더라도 따뜻함을 생각하지 마라! 마,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잘 하는 것인 양 여겨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그 정신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예요. 지나치면 모자람만 몬하다. 지나친 것은 차라리 게을른 것만 몬해요. 내가 힘겨울 때, 멈추고 쉬는 것이 인욕바라밀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자기 확신을 만들 수 있어요.

 

우리가 자기 확신을 만들지 못하는 이유는 두렵기 때문이예요. 무엇이 두렵냐? 멈췄다 다시 달리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 자동차, 저녁에 퇴근했다고 해서 집에 세워놨다고 해서, 그 다음 날 움직이지 못하는 거 아니잖아요? 그저 움직이지 못하는 차는 강원폐차장 밖에 없어요. 그저 보통 차들은 다 잘 움직입니다. 세워 놔도 그 다음 날 움직이는 데 아무 지장 없어요. 우리의 몸과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면 쉬어도 됩니다. 쉬었다 담금질 하면 돼요. 쉬는 것을 내 자신이 게으르거나 내 자신의 의지가 박약하거나...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작심삼일이라고 하는 말을 많이 씁니다. 나는 작심삼일 찬양론자입니다. 작심삼일이라도 할 수 있으면, 작심삼일 안 한 것보다는 낫죠. 적어도 그는 무언가 할려고 하는 의지가 있으니까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아무 생각도 못하고, 처음부터 아무 도전도 못하는 사람이  있죠. 제가 그 전에 작심삼일이라고 하는 강론을 했었는데, 작심삼일을 한 백 번만 해보세요. 내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내 삶을 바꾸지 못하는 것은 작심삼일을 할려고 하는 의지와 행동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예요.

 

자기 확신이라고 하는 것도 처음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예요. 담금질을 통해서 부단히 노력이 필요하죠. 부처님은 법을 보지 못하는 자는 나를 볼 수가 없다고 그랬어요. 즉 법을 보지 못하는 자는 나를 볼 수 없다는 말은 붓다의 전당에 오르지 못한다는 뜻이예요. 붓다의 전당에 오르는 사람은 확신하는 사람이예요. 자기를 확신하는 사람. 자기를 확신하는 사람만이 붓다를 확신할 수 있고, 자기를 확신하는 사람만이 말씀을 확신할 수 있고, 자기를 확신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봄비 오는날 들으면 좋을 곡 모음

 

 

 

 

01 당신이 그리울때 마다 -- 김대완
02 여 정 -- 왁스
03 그때 그사람 -- 심수봉
04 비 -- 김정민


05 야생마 -- 김하정
06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 -- 이선희
07 눈 동 자 -- 조용필
08 유리창엔 비 -- 햇빛 촌


09 빗 물 -- 조관우
10 아픈만큼 성숙해지고 -- 구창모
11 비와 나 -- 송창식
12 아직도 못다한 사랑 -- 솔개 트리오

 

13 빗속에서 -- 이문세

14 비와 외로움 -- 바람꽃
15 비내리는 고모령 -- 장사익
16 비와 당신 -- 럼블피쉬


17 비와 찻잔사이 -- 배따라기

18비와 당신의 이야기 -- 부활 (보컬 : 이승철)
19 사랑하는 이여 내 죽으면 -- 송골매 (배철수)
20 빗물 -- 송골매 (배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