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섬|…… 혜천스님설교

2019. 6. 9. 21:3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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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불기2556년4월22 

딤섬 

 

 

봄을 타고 봄비가 오시네요.  봄과 함께 우리 며느님들이 이 봄꽃들을 그저 금낭, 비단주머니들을 많이 달았어요. 오늘 강론의 주제는 딤섬입니다.

 

딤섬((點心, dimsum)은 중국의 떡 비슷한 음식입니다. 떡과 만두 중간이라고 할 수 있죠.  이 딤섬은 한자로다는 점심(點心)이라고 적습니다. 우리가 점심 먹는다고 할 때 그 점심요. 그러니까 강론의 주제가 점심이기도 하죠. 點心을 중국 사람은 딤섬으로 읽으니까요. 딤섬은 중국의 음식물입니다.

 

당나라 후기에 덕산 선감(德山宣鑑)이라고 하는 선사가 계셨죠. 이 덕산선감 선사는 후대에 임제 의연과 함께, 덕산과 임제라고 병칭되는 인물입니다. 중국 선종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죠. 이 덕산은 젊어서 주금강(周金剛)이라 불렸어요. 성은 주씨고, 금강경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사천성 성도 사람들은 그를 주금강이라고 불렀죠.  그의 본명, 선감이라고 하는 본명을 쓰지 않고, 주금강이라고 불렀어요. 

 

덕산선사는 자기 도반에게 말하기를,  '배울 것이 있고 배울 것이 없고는 나 자신만이 알 수 있다'라고도 했죠. 그러니까 그의 젊은 시절의 기개는 하늘을 덮고, 땅을 뒤엎을 정도로 대단했어요. 그는 금강경 강의로 사천 지방에서 첫 손에 꼽히는 인물이었죠. 근데 하루는 생각하기를, 남방에 선종이 성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지라,  "사문은 천겁에 걸쳐, 부처님의 위의(威儀)를 배우고 만겁에 걸쳐 불의 세행(細行)을 닦는다. 그런데 남방의 사악한 마구니들이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을 가르켜, 바로 성품을 보아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고 하니, 이 작자들의 소굴을 파헤치고, 이것들을 일망타진 하리라!" 생각을 하고는 자기가 금감경에 대해 주석을 단 금강경 해설서를 짊어지고, 남쪽을 향해서 내려왔죠.

 

그가 이 고을 저 고을을 거쳐서, 수 천리 길을 지나서 도착한 곳은 호남성 풍주라고 하는 지역이었어요. 마침 때는 점심 때라, 배가 고팠죠. 그래서 뭔가 요기를 하기 위해서 시장 저작거리에 들어가니까 마침 떡장수가 할머니가 딤섬을 팔고 있었죠. 점심을 팔았던 거죠. 그러자 선감은 등의 무거운 짐을 내려 놓고,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죠. "할머니, 그 점심 좀 주시요." 할머니가 딱 쳐다보니까 건장한 체구의 스님이, 덕산은 칠척 장신이었다 그래요.

 

강한 사천성 사투리, 그리고 무거운 짐 보따리. 그래서 할머니가 물었죠. "스님의 억양 속에는 짙은 사천성 사투리가 느껴지는데, 저 무거운 짐을 지고 수 천리길을 오셨단 말씀입니까? " 그래서 선감이 말했어요. "이 지역에 사악한 마구니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훼손한다는 말을 듣고, 내가 이것들을 일망타진하러 내려온 거요. 저기 있는 저 보따리는 내가 금강경을 주석하고, 해설한 청룡소초(靑龍疏鈔)라고 하는 책이요." 그러자 할머니가 말했어요. "그러면 제가 금강경에 대해서 한 구절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어 보시요." "만약 스님께서 답을 하신다면, 제가 딤섬을 드리지만, 스님이 답하지 못한다면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선감은 말했죠. "나는 금강경에 대해서는 모르는게 없는 사람이요." 스스로가 도반에게 말하기를 배울 것이 있고, 배울 것이 없는 것은 오직 나만이 알 수 있다고 큰 소리 치는 인물인데, 사천성에서 금강경 강의에는 일인자고, 스스로가 금강경의 해설서를 쓸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한 인물인데, 그것이 금강경 구절에 답해주지 못할게 뭐 있겠어요.

 

할머니가 물었죠. "경에 이르기를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이라고 했습니다.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지금, 점심을 어느 마음에 하실려 하십니까?" 이 질문은 굉장히 교묘한 질문입니다. 음식물도 점심입니다. 그렇죠. 딤섬. 식사하려고 하는 때도 점심때입니다. 지금 점심 식사를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점심 식사를 어느 마음에 할려고 하느냐는 것은 점심이라는 단어는 하나를 쓰고 있지마는, 의미는 두 가지를 다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주 굉장히 교묘한 질문이죠. 점심을 지금 어느 마음에 하려고 하십니까? 점심하려고 하는 마음은 과거의 마음입니까? 아니면, 현재의 마음입니까? 아니면, 미래의 마음입니까? 노파가 물어보죠.

 

덕산은 마치 철퇴로 머리를 얻어 맞은 것처럼, 머리는 텅 빈 것처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어요. 멍하게 서 있었죠. 평소에 스스로 자부하기를, 배울 것이 이 있고, 없고는 나만이 알 수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는 금강경에 대해서는 자신보다 더 아는 사람은 없다라고 큰 소리를 쳐왔는데, 호남성 풍양 저작거리 떡장사 할머니한테 딱 걸려가지고, 금강경 구절을 물었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해요. 도처상수(到處上手)라고 하는 말이 있죠. 상수는 도처에 있다. 보기 좋게 덕산이 지금 상수에게 딱 걸려든 거예요. 왜 덕산이 대답하지 못했을까요? 그렇게 하늘을 덮고, 땅을 뒤엎을 기개를 가진 덕산이 점심을 지금 어느 마음에 하시려 합니까? 하는 물음에 왜 대답을 하지 못했을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의식은 경로를 의존하죠. 덕산이 답하지 못한 것은 경로 의존성 때문이예요. 우리의 의식은 어떤 하나의 경로를 이용하게 되면, 다른 통로를 통해서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답할 수 없어요. 내가 기억의식을 잘라 내야 한다고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기억의식을 잘라내지 못하면, 우리의 의식은 하나의 경로만을 의존하게 되죠. 그렇게 때문에 다른 경로를 통해서 들어오는 어떠한 것도 받아들일 수 없게 돼요. 그것을 우리는 경로의존성이라고 부르죠. 우리가 경로의존성을 탈피하려면, 기억의식을 잘라내야 되죠. 덕산이 거기에 답하지 못한 것은  경로의존성때문이예요. 모리 오가이가 각기병이 각기균에 의한 병이라고 하는 신념을 버리지 못한 것도 경로 의존성 때문이죠. 우리가 일생에서 오류를 겪는 것도 이 경로 의존성이예요. 바깥에는 봄을 타고, 봄비가 오고 있죠. 그런데 바깥에는 봄비가 오고 있는데, 안에는 한겨울인거와 같죠. 여기서 '안에'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내면 의식을 말합니다. 

 

중국에 파자소암(婆子燒庵)이라고 하는 화두가 있죠. 할머니가 암자를 불태웠다는 얘기. 어떤 아주머니가 20여년간 한 스님을 한결같이 뒷바라지를 했죠. 마을 뒷산에 암자를 지어놓고 20년을 뒷바라지를 했는데, 도대체 스님이 그 동안 20년간 공부가 성취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이제 밥값을 달라 그래야 되는데, 밥값을 했는지 안했는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18살 먹은 딸을 붓단장 시켜서, 암자에 올려 보냈죠.  딸은 어머니가 시킨대로, 암자에 올라가니까 마침 스님은 좌선하고 있었죠. 딸은 스님! 하고 부르니까 스님이 쳐다봤죠. 엄마가 시킨대로 다짜고짜 스님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는 물었죠. "스님, 이럴 때는 기분이 어떠신가요?" 그러자 스님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마른 고목에 찬 바람이 스쳐가니, 특별한 것이 없다." 그러자 딸은 내려와 어머니에게 말했죠. "스님이 성도했어요."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전했죠. 그랬더니 어머니는 벼를 짜던 북을 집어던지면서 말했어요. "내가 20년간을 한결같이 뒷바라지를 했건만, 속인 보다 못한 놈한테 20년간이나 정성을 기울였구나! " 그러고는 아주머니는 쫒아 올라라서 스님을 쫓아내고, 암자는 불질러서 태워 버렸죠.

 

왜 그 아주머니가 그렇게 화를 냈을까? 아니, 그 정도 경계면, 딸이 성도했다고 할 정도로다 그거한데, 왜 그 엄마는 화를 냈을까요? 엄마가 화를 냈던 것을 그의 답 때문이었어요. 딸의 느낌, 딸의 향취, 딸의 심장 박동, 딸의 입술의 느낌 그런것이 느껴지지 않을리가 없죠. 그런데 그는 마른 고목나무에 찬 바람이 스친다고 했어요. 그래 특별할 것이 없다. 봄이 오면, 모든 살아있는 나무가 꽃을 피우죠. 고목나무는 어떨까요? 고목나무에는 꽃이 피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봄은 꽃을 피우는 나무에게도 가득하고, 마른 고목에도 가득하죠. 바로 그 엄마가 스님을 쫒아내고, 암자를 불질러버린 이유는 거기에 있어요. 봄은 마른 나무 가지 가지마다 가득하죠.

 

그러면 왜 그 스님은 그렇게 답했을까요? 바로 그의 기억의식의 경로 의존성 때문이예요. 그의 의식 속에는 하나의 의식만 존재하죠. 그 하나의 의식이 다른 경로를 통해 접속해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질 못해요. 이런 사람들을 중국 선종에서는 칠통배(漆桶輩)라고 그러죠. 꽉 막힌 놈. (냅 둬요. 재는 안쏘는 애예요.나나미, 재는 안쏘는 애예요, 착한 애예요.)  이 덕산선감 선사나 아까 그 토굴의 스님이나 경로 의존성을 지금 탈피를 못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일생을 이렇게 살죠. 어떤 하나의 경로에 익숙해져 버리면, 그 경로를 탈피하지 못해요. 우리가 시험문제를 조금만 비틀어 놔도, 답을 적지 못하는 것은 바로 경로 의존성 때문이예요. 경로 의존성을, 그 하나의 경로만을, 고착화된 그 의식을 갈아 엎어야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길은 많습니다. 길은 하나의 길만 있는 것이 아니죠. 수 없는 길이 있죠. 단지 우리는 그 하나의 길이 익숙하고, 편안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길을 이용하는 것이죠. 우리의 마음이 말이예요. 왜 그럴까요? 기억의식의 발현이기 때문이죠.

 

우리의 기억의식은 현실의식을 지배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실의식은 기억의식의 발현이기 때문에, 하나의 경로에 의존하게 되면, 다른 경로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 해요. 선감은 점심을 과거의 마음, 현재의 마음, 미래의 마음, 어떤 마음에 점심하겠느냐고 하는 물음에 답하지 못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어요. 덕산같은 상수도 또 다른 상수를 만나서 자기의 경로 의존성이 여실히 드러난 겁니다.   

 

우리는 삶을 그렇게 삽니다. 덕산이 자기 도반 스님에게 말한 거와 같죠. 배울 것이 있고, 배울 것이 없고는 나만이 알 수 있다. 그런데 막상 조금만 포인트를 바꿔 버리면,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죠. 왜 그럴까요? 하나의 패턴에 의식이 고착화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패턴에 의식이 고착화되어 있으면,  우리는 항상 같은 것만을 보게 되죠. 분명히 우리는 항상 같은 것만을 보지는 않습니다. 근데, 같은 곳으로 보는 것으로 느끼는 거죠. 그 고착화된 하나의 패턴을 깨트려야 새로운 패턴이 나오죠.  

 

처님은 우리에게 고착화되어 있는 의식을 깨트리라고 얘길 해요. 고착화된 의식은 우리 삶을 위태롭게 하죠. 왜 고착화된 삶이 우릴 위태롭게 하고, 우린 고착화된 의식을 깨트려야 할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세상은 수없는 패턴이 있기 때문이죠. 바깥에 봄을 타고 봄비가 내리지만, 그 봄비가 떨어지는 곳은 다 다릅니다. 그 봄비를 맞고 각자가 성장하는 식물도 다르죠.  사람은 굉장히 섬세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굉장히 섬세해요. 너무 섬세해서 인간의 마음이 어떻다고 규정하기 어렵죠. 변화가 심합니다. 날씨의 변화는 인간의 마음의 변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예요. 날씨의 변화는 인간의 마음의 변화에 대한다면, 변한다고 할 수도 없어요. 그마만큼 인간의 마음의 변화는 빠르고 다양하죠. 오죽하면, 이런 속담이 다 생겼겠어요. 문지방을 넘을 때와 문지방을 넘어서서 그 마음이 다르다고. 들어 갈 때 마음과 나갈 때 마음이 달라요. 그것은 우리 마음의 변화가, 변동의 폭이 크기 때문에.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항상 하나의 경로를 사용한다는 거예요.         

 

붓다는 의식의 경계를 무너뜨리라는 거예요. 의식의 경계를 무너뜨리라고 하는 이야기는 모든 경로를 열어라는 얘기예요. 사통팔달처럼. 이 세상에 360도를 볼 수 있는 눈은 잠자리 눈 밖에 없습니다. 잠자리는 360도를 다 보죠. 인간은 180도 밖에 못 봅니다. 그래서 뒤통수에 뭐가 날아오면, 속수무책으로 '아야!'하죠. 인간의 치명적인 단점은 뒤에서 일어나는 일을 방어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잠자리는 360도를 보기 때문에 전방과 후방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되죠. 앞과 뒤라고 하는 말이 성립이 안 됩니다. 만약 우리가 뒤를 볼 수 있다면, 전면과 후면이라고 하는 말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디가 전면이고 어디가 후면이고, 어디가 앞이고 뒤인가요? 360도를 다 보는데. 우리가 180도 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앞과 뒤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죠. 앞면과 뒷면이라고 하는 것도 그래서 존재돼요. 근데 잠자리에게는 애초, 그런 거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아요. 360도를 다 보니까요.

 

야구감독 김성근 감독을 야구의 신이라고 부르죠. 김성근 감독 자신은 가장 좋아하는 별명이 무어냐고 물렀더니, 잠자리 눈깔이라고 그랬어요. 자기는 젊었을 때 별명이 잠자리 눈깔이었다는 거예요. 너무나 야구에 대해서 해박했으니까요. 김응룡 감독은 그를 야구의 신이라고 불렀죠. 자기는 그 말보다는 잠자리 눈깔이라고 하는 그 별명을 더 좋아한다고 그랬어요. 그 이유는 모든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예요. 

 

우리가 모든 것을 볼 수 가 없으면 , 우리는 삶에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안락하지 못한 이유는 거기에 있죠, 사실. 안락하면 극락입니다. 불안하면 지옥이죠. 하나의 패턴만이 영원한 경로 의존성은 굉장히 불안정합니다. 위험을 많이 노출하게 되죠. 폐쇄적인 자기의 의식 세계에 함몰되어 버리기 때문이죠.  

 

후진 때에, 승조(僧肇)라고 하는 스님은, 후대에 그를 중국 불교의 확립자라고 부르죠. 수나라 시대 때, 천태 지의를 중국 불교의  완성자라고 부른다면, 승조 스님은 중국 불교의 확립자예요. 승조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죠. "성인은 세상과 함께 주유하지만, 그 세상에 매몰되지 않는다. " 그랬어요. 성인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성인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거죠. 세상 사람이 웃으면 함께 웃고, 세상 사람이 울면 함께 울고, 세상 사람이 기뻐하면 함께 기뻐하고, 세상 사람이 함께 절망하면, 함께 절망하고. 성인라고 하는 존재는 세상 사람과 함께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인은 거기에 매몰되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러기 때문에 성인이라는 거예요. 그 이야기는 무슨 뜻인가요? 하나의 경로 패턴을 이용하는 것은 그 하나만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매몰되어 버리죠. 성인은 여러가지 패턴과 경로를 이용하기 때문에, 그 어떤 하나만을 보고 거기에 매몰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성인이다. 승조스님은 그렇게 이야기 하죠.  

 

우리는 조금 있으면 점심을 먹습니다. 할머니는 점심 식사라고 하는 점심과 딤섬이라고 하는 그 한자어가 같은 것을 이용해서, 덕산에게 질문하죠. 점심을 어느 마음에 할려고 해? 조금 있으면, 점심을 먹습니다. 우리 선우님들은 과거시의 점심을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현재시의 점심을 하겠습니까? 아니면 미래시의 점심을 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의 경로 의존성을 탈피하지 못하는 한, 그 경로 의존성을 갈아 엎지 못하는 거예요. 우리는 항상 덕산과 같은 입장에 서 있게 된다는 거죠. 그렇게 큰 소리 치더니. 자기가 가장 잘 안다고 이야기 하는 바로 그 금강경 구절에 말 한 마디 대답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중국의 유명한 서예가가 목주 도명(?)이라고 하는 스님을 찾아 왔죠. 자기가 초서, 행서, 해서, 예서, 그리고 다양한 서법에 대해서 얼마만큼 능숙하고, 그야말로 천하의 명필인가를 자랑을 했죠. 그러자 목주 도명스님이 그 서예가에게 물었죠.  "선생께서 그렇게 모든 서체와 서법에 능통하시다 그랬는데, 제가 거기에 대해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물어보시요." 점을 하나 딱 찍고 물었죠. "이거는 어디에 속하는 거요?"  그러자 그렇게 큰소리 치던 서예가는 아무 말 하지못하고 앉아 있었죠. 그러자 목주 도명스님은 말했죠. "영자 팔법의 첫 점도 모르다니, 그러고도 모든 서체에 능통하다고? 꺼져라, 이 사기꾼아!." 길 영(永)자를 쓰는 팔법에 길 영자 첫 점. 왜 그 서예가가, 모든 서법에 달통했다고 하던 그 서예가가 영자 팔법 첫점에 걸려서 넘어졌을까요?

 

그 서예가 뿐만이 아니라 덕산 선감 뿐만 아니라 혹시 우리 자신도 그와 같지 않은지 모르죠.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거, 내가 가장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 내가 이거는 누구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하나의 경로 의존성인지도 모르죠. 아까 나는 도처상수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 세상에는  고수가 너무 많아요. 누가 진정한 고수인지는 칼이 칼집밖에 나와 봐야 알죠.  칼이 칼집에 꽂혀 있을 때야, 천하에 적수가 없지만, 그 칼이 칼집 밖에 나오면, 목이 떨어진다는 걸 알아야죠.칼이 칼집에 꽂혀 있을 때는 큰 소리 칠 수 있지만,  그 칼이 칼집에서 빠져 나오면, 목을 자라목처럼 움추려 들여야 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죠.

 

오늘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거는 지난 주와 다르진 않습니다. 기억의식을 잘라 내라는 겁니다. 기억의식을 잘라내지 않으면 우리는 경로 의존성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것이 경험의식을 지배하기 때문에, 우리의 이성의식을 마비시켜 버리기 때문이죠. 사실 덕산이 답하지 못하고, 암자의 스님이 답하지 못하고, 그 큰소리치던 서예가가 답하지 못한 이유는 이성의식이 마비되었기 때문이예요. 하나의 경로만을 의존했기 때문이예요. 그거를 상대방이 그 길을 포크레인으로 파서 없애 버리니까, 내가 스포츠카를 타고 신나게 질주하다가, 아뿔싸! 길이 없어져 전복당해 버린거죠.   

 

오늘 점심은 덕산선감 선사처럼 딤섬을 드시죠. 그 딤섬을 드시면서 한 번, 한 분 은 노파가 되고, 한 분은 선감이 되서 문답을 한번 해보시죠. 지금 점심을, 자네는 지금 어느 마음에 하고 있는가? 과거의 마음인가, 현재의 마음인가, 미래의 마음인가 하고 말이죠.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