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평화를 타고 온다|…… 혜천스님설교

2019. 6. 30. 09:4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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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혜천스님 일요강론 : 2556년 5월 6일

행복은 평화를 타고 온다

 

 

오늘 주제는 '행복은 평화를 타고 온다'입니다.

 

평화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연상되시는가요? 엄마 품 안에서 잠들어 있는 아기? 뭐,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 아니면, 가족의 행복한 저녁식탁 자리? 숲 속의 햇살? 여러 가지가 연상되죠. 평화라는 단어 속에는 여러가지를 연상시킬 수 있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평화라는 것은 싸우지 않는거라 그랬죠. 평화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싸우지 않는거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세상은 나와 싸우려 하지만,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싸우려고 하죠. 우리가 싸우려고 하는 것은 내 마음 속이, 내 마음에 불만족스러운 것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부처님은 불취외상(不取外相)하고 자심반조(自心返照)하라 그랬죠. 외상을 취하지 말고, 스스로의 마음을 반조해 봐라.  

 

우리가 싸우려고 하는 것은 남과 싸우려고 하죠. 사실 남과 싸우려고 하는 것 같지만, 남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싸우는 거예요. 그래서 밖에서 찾지 말고, 스스로 마음을 반조해 보라는 거예요. 우리가 왜 평화롭지 못하느냐면, 우리는 언제나 계량화하걸랑요. 대상을 계량화하고, 자기 자신을 계량화하죠.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백낙천이 조소도림선사를 찾아와서 인사를 하니까, 조소도림선사가 물었습니다. "관리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그래서 백낙천이 말했죠. "내 성은 칭(秤)이요" 칭은 저울이라는 뜻입니다. 저울이라고 하는 것이 뭔가요? 계량화시켜서 다는 것이죠. 백낙천은 '내가 오늘 선사를 한 번 저울에 올려 놓고 선사의 값을 메기려 왔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성씨가 칭씨라 그랬죠. 그랬더니 조소도림 선사가 소리를 한 번 지르고는 말했죠. "이거는 몇 근인가? 달아보게."  

 

사람은 모든 거를 계량화시키죠. 대상도 계량화시키고, 자기 자신도 계량화시키죠. 마치 백낙천이 스스로가 칭씨라고 이야기하듯이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계량화하려고 하죠. 뭔가를 비교하고 싶어 하죠. 계량화하는 것은 비교하는 거걸랑요. 무게를 달아보고 싶어 하죠.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의 평화가 잘 유지가 되지 않아요. 마음의 평화가 유지되지 않는 이유는, 그 계량화라는 것은 굉장히 자의적이라는 거죠. 어느 기준도 없걸랑요. 기준이 없는 것을 계량화시키니까 언제나 그것은, 그 계량화는 흡족하지 못하죠.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밖에서 찾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는 원인을 항상 밖에서 찾죠. 근데 원인은 밖에 있는게 아니걸랑요. 내 마음의 안에 있죠. 우리가 마음, 마음 하면, 모든 것을 또 마음에 넣어버리는 우를 범하기도 하죠. 그렇지만 중요한 거는 문제는 밖에 있지 않다는 거예요. 안에 있지.  

 

도멸괵(假道滅虢)이라고 하는 말이 춘추좌전에 나오죠. 이거는 천자문에도 나옵니다. '길을 빌려서 괵나라를 멸망시키다'라고 하는 뜻이죠. 춘추시대 때 진나라 헌공(晉獻公)이 괵나라를 집어 삼키고 싶었죠. 그런데 괵나라를 갈려면, 우(虞)나라라고 하는 나라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됐어요. 그래서 진나라 헌공은 우나라에 사신을 보내서우리가 괵나라를 칠려고 하니, 길을 좀 빌려 달라고 했죠. 우리 군대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좀 빌려 주라! 그랬더니 우나라 임금이 거기에 대해서 마땅치 않아 앴어요. 그래서 1차에서는 실패를 했죠. 그러자 진 헌공은 금은보화와 비단(錦 璧 馬))을 우나라 임금에게 보냈죠. 금은보화와 비단을 받은 우임금은 너무 기분이 좋아서 군대가 통과해도 좋다고 했어요. 자기 땅을 밟고, 자기 이웃 나라 괵나라를 쳐도 좋다고 그랬죠.

 

그랬더니 우나라 대부 궁지기(宮之奇)는 결사적으로 반대했죠. '괵과 우는 순치지세(脣齒之勢, 脣亡齒寒)입니다. 이빨과 입술과 같은 사이입니다. 그런데 어찌 길을 빌려준단 말입니까?' 그렇지만 우나라 임금은 금은보화와 비단이 탐이 나서, 기어이 궁지기의 반대를 물리치고 길을 빌려줬죠. 진헌공은 고마워하면서, 군대를 이끌고 괵나라를 멸망시켰죠. 근데 원래 괵나라가 나라가 작아서, 멸망을 시켰는데,  배가 부르지가 않아. 만족스럽지가 못해. 그래서 돌아오다가, 참으로다가 우나라도 먹어버렸죠. 진헌공은 돌아오는 길에, 길을 선뜻 빌려주지 않는 우나라가 괴씸해서 쳐서 없애 버렸죠. 전에는 괵과 우가 동맹관계 였기 때문에, 합심해서 항거해서 어려웠지만, 재물이 탐이 난 우나라 임금은 괵을 팔아버린 거죠.

 

진헌공은 돌아오면서 우나라를 먹어치웠고. 우나라 사람들은 아늘이 무너질까봐 늘 걱정이었다 그래요. 하늘이 무너져서 우나라가 망할까봐 근심했다는 거죠. 기우(杞憂)라고 하는 말이 거기서 나왔죠. 그런데 정작 나라가 망한 거는 하늘이 무너져서가 아니라 우나라 임금이 어리석어여서죠. 궁지기가 나라가 망한 뒤에 우나라 임금한테 이렇게 얘기했죠. '몇 푼되지 않는 재물을 탐을 내다가 나라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구나!' 문제는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우가 멸망한 것은 진나라 때문에 멸망한 것이 아니라 우왕 자신 때문에 멸망한 거죠. 문제는 바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안에 있었던 거죠.      

 

평화를 깨트리는 것은, 밖에 누군가가 나의 평화를 깨트리진 않습니다. 그 평화를 깨트리는 것은 나 자신이죠. 내가 계량화하기 때문이죠. 어떤 바라문이 자기의 조카가 고타마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분개해서 붓다를 찾아 왔죠. 바라문은 자기의 종성은 고귀한 종성인데, 어떻게 크샤트리아인 붓다의 제자가 되느냐는 거죠, 자기 조카가. 인도의 사성 계급에서 보면, 당연히 브라만이 계급이 높죠. 쫒아와서, 그 브라만은 부처님께 온갖 악담을 다 퍼부어요. 그렇지만 부처님은 묵묵히 앉아 있어요.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하는 말이 있듯이, 시비를 거는데, 상대를 안해주면 재미가 없다는 거죠. 제풀에 지치는 거예요. 바라문은 붓다를 비난하다가 제풀에 지쳤죠. 온갖 비난을 쏟아 붓다가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좋은 욕이 없었어요. 그러자 입을 다물었죠. 그 때 부처님이 말씀을 하셨어요. "누가 손님으로 나를 초대하더라도, 그가 나에게 많은 음식을 대접하더라도, 내가 그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그 음식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랬어요. "그대가 나에게 와서 수없는 욕설을 퍼부었지만, 나는 그대의 욕설을 들은 적이 없으니 그 욕설은 그대의 것이다."   

 

우리가 마음의 평화가 깨지는 것은 대상 때문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신의 마음 때문이죠. 며칠 전 바람이 부는데, 마루에 걸쳐 앉아 있으니까, 우리 며느리밥풀꽃들이 춤을 추더군요. 바람과 며느리밥풀꽃이 손을 잡고 탱고를 추고 있더라고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람이 불기 때문에 탱고를 추는 건지, 아니면 스스로가 추는 건지.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이거죠. 우리에게는 며느리밥풀꽃 같은 속성은 없다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면,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은 동요되지 않죠. 며느리밥풀꽃은 바람이 불면 흔들리지만, 우리의 마음은 대상이 흔든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그것에 따라서 꼭둑각시처럼 춤을 추지 않는다는 거죠.     

 

왜 싸웁니까? 왜 싸우려 하는가요? 왜 우리가 싸우려고 하냐하면, 내 마음의 평화가 깨져 있기 때문이예요. 내 마음의 평화가 깨져 있다는 것은 내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요. 달마대사는 전설적인 인물이죠. 달마대사 중국에 와서 소림사에서 9년 면벽을 하고 있을 때, 어느 날 혜가라고 하는 젊은 스님이 찾아 오죠. 혜가가 찾아와서 달마스님한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저는 마음이 너무나도 불안합니다. 제발 제 마음을 좀 안정시켜 주십시요." 그러자 달마대사는 말하죠. "그 마음을 가져 오너라." 그러자 혜가는 말해요. "아니, 마음을 어떻게 가져가는 가요? " 그러자 달마대사는 말하죠. "네 마음은 이미 안정되어 있다."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고, 마음이 안정되고는 내 마음이 지어낸 것이죠. 내 마음을 동요시키는 대상도 없고, 내 마음을 동요시키는 내 자신의 어떤 숨겨진 마음도 없습니다. 스스로가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놀래는 것과 같죠.  

 

행복은 평화를 타고 오죠. 평화가 없는 행복이라는 것은 없죠. 불교에서는 '평화'라는 말과 '평안'이라는 말을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평안한 것이나 평화로운 것이나 같은 의미로 씁니다. 평화로운 것은 평안한 것이고, 평안한 것은 평화로운 것이라는 거죠. 평화는 누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평화는 누가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평화는 오직 내 마음에서 흘러 나오는 거죠. 내 마음 속에서 흘러 나와서 넘쳐 흐르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것은 간섭할 수가 없고, 어느 누구도 그것은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평화롭게 가져야 됩니다, 내 마음 속에. 싸우려고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싸우는 거예요.  

 

인화물질이 없으면, 아무리 성냥을 그어대도 불은 붙지 않습니다. 내 마음 속에 인화물질이 있기 때문에 불이 붙는 거예요. 내 마음 속의 인화물질을 제거해야 돼요. 내 마음 속의 인화물질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분노심이죠. 분노심은 불만족에서 나옵니다. 뭔가가 불만족스러운 거예요. 누군가 때문에 불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예요. 스스로가 불만족스러운 거죠.   

 

부처님은 물질과 싸우지 말라고 그랬어요.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바깥 경계입니다. 어느 누구도 대상과 싸워서 이길 순 없어요. 어떻게 대상과 싸워서 이길 수가 있겠는가요? '하늘을 보고 침 뱉기'라고 하는 말이 있죠. 하늘을 쳐다보고 침을 뱉으면, 결국 내 얼굴에 떨어지죠. 이야기는 대상과 싸워서는 이길 수 없다는 뜻이예요. 그래서 부처님은 <담마빠다>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진정한 승리자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조율하는 자이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 그 자가 진정한 승리자라는 거예요.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 하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요?

 

불교에서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을 이야기 합니다.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동요되지 않는 거를 말해요. 적정이라고 하는 말은 평안이라고 하는 뜻이예요. 열반이라는 것은 평안한 것이라는 거예요. 평화로운 것, 그게 열반이라는 거예요. 다른 것이 열반이 아니고, 평화로운 것이 행복입니다. 마치 숲 속의 아침 햇쌀을 받으면서 걷는거와 같죠. 그 숲 속에서는 누구와 싸우려고 하지 않으니까요.

 

저도 아침마다 나가 가지고 , 여섯시 쯤 나가 가지고 가까운 숲 속을 걷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해요. 왜 숲 속에서 만난 분들은 한결같이 그렇게 예의가 바르게 인사를 잘 할까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서로 인사를 합니다. 그 시간에 가면요, 그냥 지나가는 분들은 열 분 중에 두 분 밖에는 안 돼요. 거의 인사를 하시죠. 근데 왜 그 숲만 벗어나면,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을까요? 숲 속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기 때문이예요. 나도 모르게 평화로와 지는 것인지, 아니면 평화로운 사람만 그 숲에 오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일일이 붙잡고 물어보진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평화로운 사람만 거기에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그 곳에서 평화로와 진다고 하는 건 사실이예요. 마음이 릴렉스되기 때문이죠. 적정의 상태가 된다는 거예요.  

 

<불유교경佛遺敎經>에 보며는 부처님이 입멸하실 그 때, 적연무성(寂然無聲)했다고 이야기하죠. 적연이라고 하는 것은 고요하다는 뜻이고, 무성이라고 하는 것은 소리가 없다는 뜻이예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오직 고요했다는 거죠. 거기에 바람 소리, 동물들의 울음 소리 이런 것이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평화로왔다는 뜻이죠. 평화로움은 오직 우리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것. 그 평화로움을 깨트리는 것도 우리 마음에서일어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평안하게 가져야 돼요. 자꾸 무언가를 계량화하면 마음이 비좁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계량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겁니다. 많은 계획을 세우지 않는 거예요. 우린 너무 많은 계획을 세우죠. 일본의 어느 분이 젊은 날에 큰 성공을 거뒀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분에게 물었다는 거죠.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으십니까? 그랬더니 그 분이 이렇게 대답했다는 거예요. '앞으로는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는 것이, 그것이 제 계획입니다.' 나는 아무 계획도 세우지 말라고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러나 적어도 많은 계획은 세우지 마라! 많은 계획을 세우면 힘들어 집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계획을 세우죠. 많은 계획을 세우니까 청사진도 크게 그려야 되고, 청사진을 크게 그리니까 당연히 힘들죠.

 

무엇이든지 간에 처음에는 작게 출발하는 것입니다. 큰 강물도 한 방울의 물에서 시작하고, 큰 불도 반딧불같은 작은 불에서 시작되죠. 처음부터 큰 강과 처음부터 큰 불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작은 것에서 시작하죠. 행복도 작은 것에서 시작하고, 불행도 작은 것에서 시작하죠.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은 초심을 이야기하죠. 처음 그 마음을 일으켰던 것을 잊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는 금방 잊어 먹죠. 처음에 그 순수했던 마음 말이죠. 처음에는 그렇게 많은 계획을 세우지는 않죠. 그러나 계획이 점점 가지를 치고, 새끼를 쳐서 그 계획이 커지죠. 많은 것을 이루려고 하면, 힘들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진 않죠. 물론 마음을 먹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이룰 수도 없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너무나 많은 것을 이루려고 한다고 해서, 그 많은 것을 다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고, 내가 우선 이룰 수 있는 것부터 하는 거예요. 마음의 평화는 그 때 찾아 오죠. 그 때 행복도 그 평화를 타고 오죠.                  

 

부처님은 소욕지족(所欲之足)하라고 그러죠. 소욕지족이라고 하는 말은 욕심을 버리라고 하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우선 정하라는 이야기예요. 내가 옳을 수 있는 지점을 우선 정하고, 내가 성취할 수 있는것을 우선 정하면 돼요. 그게 소욕지족이예요. 지금 우리에게 히말라야 산을 올라가라 그러면, 우린 못 올라갑니다. 아니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린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곳에 오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거든요.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설악산 정도는 가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정도는 돌아 올 수가 있죠. 우선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것을 실천하는 거죠.    

 

부처님은 근행(勤行이라하는 말을 하셨어요. 근행이라는 말은 내가 무언가를, 정신적인 것, 육체적인 것을 내 심신 닿는데까지 하는 거예요. 그게 근행입니다. 간디가 물레를 돌린 것은 근행입니다. 그것은 정신적인 행동과 육체적인 행동이 동시에 있는 것이죠. <사벽의 대화>를 보면 석우라는 스님이 낮에는 나무를 하고, 저녁에는 도토리를 까죠. 그 자체도 근행입니다. 근행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쉼없이 하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찾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한다는 거예요. 그게 근행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하다 보면, 내가 할 수 없었던 것 까지도 할 수 있게 되죠. 처음에 할 수 없는 것을 도전하게 되면, 마이 아픕니다. 마음도 아프고, 육체도 아프죠.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하다가 보며는 할 수 없었던 것 까지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연습이 되어 있기 때문이죠.

 

평화라고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평화를 유지하면 됩니다. 내 마음에 평화를 유지하게 되면, 우리는 남과 싸우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남과 싸우는 것은 나 자신과 싸우는 거죠. 경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오죠. 아주 성깔있는 뱀이 있었다는 거예요. 이 뱀은 얼마나 한 성깔 했는지, 주위의 어느 뱀들도 감히 대적을 못했다는 거예요. 어느 날 뱀이 쉬고 있는데, 뭔가 자기 머리를 때리더라는 거예요. 너무나 한 성깔 하는 뱀은 화가 나서 덥석 물어서 삼켰죠. 계속 삼키다 보니까, 얼레? 지 머리가 보이는 거예요. 지 머리를 때린 것은 지 꼬리였던 거예요. 지 꼬리에 화가 나서 삼킨 거죠. 계속해서 자기 몸을 자기가 삼키고 있었던 거죠. 어느 순간에 보니까 지 머리가 지 머리 앞에 와 있은 거죠. 자기와 싸우는 것은 마치 이 뱀과 같죠.

 

부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얘기하려 하겠어요? 싸우지 말라는 거예요. 싸워서 해결될 것 같으면, 백 번이라도 싸우겠죠. 싸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싸워서 얻어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머리띠 매어서  얻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마음 속에 평화가 가득할 때, 내 옆에 사람도 평화로워 질 수 있다는 거죠. 내 옆에 사람이 평화로울 때 내 이웃도 평화로워 집니다. 웃는 낮에 침뱉지 못한다고 그랬어요. 이 세상에는 어떤 일방적인 관계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실. 누가 먼저냐가 문제지, 어떤 한 사람이 100% 잘못하고, 어떤 한 사람이 100% 잘하는 것은 없다는 거예요. 대상과 나는 분리되어 있지만 동시에 함께 있기 때문이죠. 

 

꿀벌들 보면, 여왕이 꿀벌사회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죠.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꿀벌사회는 여왕은 여왕으로서 역할을, 일벌은 일벌로서 역할을, 숫벌(벌의 수컷을 뜻하는 원래 표준 맞춤법은 수벌이지만, 이하 스님의 발음대로 숫벌로 표기함)은 숫벌로서 역할이 있죠. 벌통에서 제일 쓸모 없는 놈이 뭔 줄 아세요? 숫벌입니다. 숫벌은 아무 것도 안해요. 어떻게 보면, 인간 남자들이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가 꿀벌의 세계예요. 꿀벌의 세계에서는 여성만 노동합니다. 일벌들은 다 여성이걸랑. 숫벌은 아무 것도 안 해요. 일벌들이 가서 꿀을 따오면 앉아서 먹기만 하죠. 하지만 이 놈들도, 이 쓸모없는 숫벌들 이 딱 한번 쓸모있을 때가 있어요. 그건 여왕벌이 짝짓기 할 때죠. 여왕이 높이 날아 오르면, 가장 높이 날아오르는 숫벌과 짝짓기 하죠. 가장 우수한 정자를 받는 거죠. 숫벌들은 그것으로서 자기 임무를 완수하는 거죠.1년간의 밥값을 하는 거죠. 정자 제공을 함으로써. 그 숫벌들이 벌통 안에서 아무것도 안한다고 숫벌들을 다 쫒아 내면 어떻게 될까요? 꿀벌사회는 그것으로서 끝이 날 겁니다. 그 쓸모없는 숫벌들이 없게되면, 여왕들은 짝짓기할 수 없고, 그러면 여왕벌은 알을 낳을 수 없으니까 더 이상 꿀벌사회는 존속할 수가 없어요. 그 쓸모없는 숫벌들 조차 꿀벌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이라는거죠. 일벌, 여왕벌 각자가 자기 역할을 한다는 거예요. 여왕이 지배하는 사회같지만, 그 사회는 모든 구성원 자체가  각자의 역할을 한다는 거죠. 그럼으로써 그 사회의 평화가 유지되고, 그 사회가 존속되죠.   

 

평화라고 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내가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고, 누군가라도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평화에 기여를 하는 거예요. 총들고 앞에 나가서 화려하게 관운장 모양, 안량과 문추의 목을 베는 것만이 평화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농부가 소를 끌고 밭갈이를 하는 것도 관운장보다도 더 그 사회를 평화롭게 만드는 일인지도 몰라요. 이 세상에는 보여지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니까. 

 

행복이라는 것은 평화를 타고 온다는 거예요. 평화가 없는 행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집니다. 오늘 강론에 질문 있으신 분. 질문 없으면, 그럼 평화의 명상을 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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