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길목에서 이끄는 방법 / 릴라님

2019. 7. 13. 18:3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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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길목에서 이끄는 방법 / 릴라님


처음 마음공부를 하려는 사람에게는 현실적인 불만에서 벗어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삶의 무상함을 느끼거나 괴로움을 느낀 사람들이 무상함과

괴로움을 떠난 진리의 세계, 편안하고 고요한 세계를 꿈꿉니다.

현실 삶에서 만족하는 사람은 지금 주어진 현실을 떠나려는 마음을 내지 않습니다.

현실이 불만족스럽거나 괴롭다면 현실에서의 삶의 질은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공부를 위해서는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분별의 세계를 벗어날 기회가 열린 것입니다.

그렇게 길에 들어섭니다. 이 길은 목표이기도 하고 과정이기도 합니다.

사실 길을 떠나기 전에도 이미 도달해있고, 길을 가는 중에도 이미 도달해 있으며,

길이 끝나더라도 이미 도달해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분별하는 마음이 강하게 남아있으므로 이제야 길 위에 오른 것처럼 느낍니다.

길에 들어선 사람은 깨달음을 향해 나아갑니다. 본성을 구하고 마음을 구합니다.

세속적은 것들은 더 이상 의미가 없고 오직 법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속적인 것들이 몹시도 싫게 느껴집니다. 집을 떠나 공부가 더 잘 되는 곳으로 가고

싶어 하고, 공부를 진일보 시켜줄 사람을 찾습니다.

 그에게는 지금 눈앞의 현실은 더럽고 어지러우며 공부에 방해만 됩니다.

깨달음에 대한 갈망이 현실과 더 큰 괴리감을 만듭니다.

오히려 길 위에 오르지 않을 때보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감은 훨씬 큽니다.

그 마음의 간극은 법이라고 할 만한 것, 깨달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지금 여기에서 일어난

한 생각이라는 자각이 일어나면서 해소됩니다. 현실이 이런저런 모습이나 깨달음에 대한

이런저런 상상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난 한 생각이라는 자각이 일어나면서

밖을 향해 나아가던 마음이 문득 멈춰지는 체험을 합니다. 그동안 세속적인 경계는

놓아버렸는데, 법이라는 경계는 놓아버리지 못했다는 자각이 일어납니다.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과 마음속에서 추구하던 깨달음에 대한 모든 것이 환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전과 다르게 밖을 향해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마음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눈앞의 현실을 이전보다 더 자세히 보게 되고 어떤 경험을 하더라도 마음이 다른 곳에

있지 않게 됩니다.

삶이 이전보다 더 단순해지고 생각도 많이 쉬어졌습니다. 그러나 삶을 살아가다 보면

현실을 판단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큰 목소리는

아니지만 낮은 목소리로 교묘하게 나의 상태를 돌아보고 눈앞의 현실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막연하게나마 무엇인가 해소되지 않은 것이 남아있는 찜찜함이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이 낮은 목소리가 힘을 발휘하지 않지만 나와 깊이 연결된 일이나 사람,

상황이 일어나면 이것이 몹시도 크고 질긴 목소리로 장애를 만듭니다.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가끔 깊은 좌절을 느끼게도 하고, 아무 때나 나타나지는 않지만

아주 중요한 일을 마주할 때 불쑥 일어나 장애를 만듭니다.

여전히 마음 깊숙한 곳에는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조종하려는 마음이

작동되고 있습니다. 자기의 생사나 자기가 깊이 의존하고 있는 사람이 위험해지는

상황이나 사건 앞에서 마음이 크게 요동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전히 이 세계를

판단하고 해석하며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바꾸려는 자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결국 이런 자아의식마저 미묘하면서도 고질적인 분별 의식이라는 것을 보면서 더 이상

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됩니다. 이 목소리가 들리더라도 습관적으로 일어나는

메아리처럼 들을 수 있게 됩니다. 더 이상 스스로를 구속하는 것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 사람에게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추구하는 것도 있을 수 없고,

마음에 두는 법도 없습니다. 바람이 불면 물결이 치듯 반응합니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목마르면 차를 마십니다. 모든 것이 필요에 의해 그때그때 할 뿐입니다.

그때그때 행동하더라도 남아있는 게 없습니다. 모든 것들이 있는 그대로 허공과 같습니다.

그의 마음에 더 이상 뿌리내린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어진 대로 매 순간 부족함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모습으로 드러나 있지만 비었고, 비었지만 온갖 모습으로 다 드러납니다.

드러나는 모든 것에 그것이라고 할 것이 없어서 모든 것이 한결같고 평등합니다.

이것이 중도(中道)적 삶입니다.

사람에 따라 공부의 깊이가 다릅니다. 그 사람이 어느 정도의 공부 깊이냐에 따라 다른 말로

안내할 수 있습니다. 현실적인 것들이 모두 존재한다고 여긴다면 무상을 얘기하고,

법만이 진실하다고 얘기합니다. 현실의 무상함을 알고 법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법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난 한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현실적인 경계도 법이라는 것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난 환상과 같은 것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여기라는 분별도 놓아버리게 합니다. 자성도 이름일 뿐이며, 마음도 이름일 뿐입니다.

머물만한 곳이 있다면 모두가 분별 의식입니다. 무언가 의지할만한 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아직 훌쩍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마음의 방향성이 사라지고 지키는 자리가 사라져야 합니다.

비로소 이런 사람이라면 할 얘기가 따로 없습니다. 그때그때 인연 따라 삶의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온갖 얘기를 하지만 장애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