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중일여(病中一如)/성철큰스님 평전

2019. 10. 6. 11:4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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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병중일여(病中一如)/성철큰스님 평전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 병이 들었지만 성철의 눈빛은 여여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철은 견성에 대한 그릇된 견해와 망설이 퍼져있음을 가장 우려했다. 그것은 선종의 종지(宗旨)를 흐리고 정맥(正脈)을 끊는 일이었다. 성철은 이를 바로잡는 데 일생을 바쳤다. 견성이 곧 성불임을 밝히는 것이 깨침의 회향이었고, 오도(悟道) 후의 불사였다. 돈오돈수 사상도, ‘자기를 바로보자’로 상징되는 법어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

상대적이고 유한한 세계를 넘어 절대적이고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종교다. 그렇다면 그 영원한 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불교에서는 바로 마음속에 있다고 한다. 그러니 마음을 보라고 했다. 마음을 보면 자기 자신이 절대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중생의 근본자성은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하지만 번뇌망상이란 먼지가 끼어 있어서 스스로를 보지 못하니 자신의 본래면목을 보기 위해서는 마음을 닦는 공부를 해야 했다. 여러 가지 공부가 있겠지만 성철은 마음을 보는[見性] 가장 수승한, 가장 빠른 길이 참선이라 일렀다. 부처님도 성불하기 전에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 깨닫고 보니 중생이 빠짐없이 불성을 갖추고 있었고, 그래서 “신기하고 신기하다”고 감탄했다. 그런 만큼 자기 마음속에 부처가 있음을 믿고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하지만 한국불교는 견성에 대한 설이 분분했다. 성철은 견성에 대한 그릇된 견해와 망설이 퍼져있음을 가장 우려했다. 그것은 선종의 종지(宗旨)를 흐리고 정맥(正脈)을 끊는 일이었다. 성철은 이를 바로잡는 데 일생을 바쳤다. 견성이 곧 성불임을 밝히는 것이 깨침의 회향이었고, 오도(悟道) 후의 불사였다. 돈오돈수 사상도, ‘자기를 바로보자’로 상징되는 법어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사실 경향각지의 선방마다 견성했다는 승려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성철이 보기에는 어림없었다.

“견성했으니 인가해달라고 찾아오는 이가 일 년에 수십 명이 넘는데 태반이 견성은커녕 몽중일여도 되지 않은 자들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견성이란 동정일여·몽중일여를 넘어 숙면일여가 되고 나서 얻는 것이라고 설명해주면 ‘아, 견성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었습니까?’ 하고 순순히 돌아가곤 하는데, 간혹 막무가내로 고함을 치며 법담(法談)해보자고 달려드는 이들도 있다. 또 자기는 몽중일여 숙면일여를 넘어 완전히 무심경계에 들었다고 억지를 쓰는 이들도 있는데 그건 완전 거짓말이다. 천하 사람을 다 속인다 해도 자신은 속일 수 없다. 그렇게 거짓말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간혹 숙면일여를 지나 묘각을 성취했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예전엔 이런 이들을 물리치지 않고 일일이 만나줬지만 아무리 일러줘 봐야 소용이 없다. 그래서 근간엔 시자를 시켜 만나보게 하는데 그런 이들이 한둘이 아니라 도처에 가득하다.” (성철 ‘선문정로’) 

성철의 몽둥이질이 차츰 뜸해졌다. 고희를 넘기면서부터는 찾아오는 선승들을 아예 만나주지도 않았다. 성철은 탄식을 쏟아냈다.

“‘성철은 너 성철이고 나는 나다. 긴 소리 짧은 소리 무슨 잠꼬대가 그리 많으냐’ 하면서 달려드는 진정한 공부인이 있다면 내가 참으로 그 사람을 법상에 모셔놓고 한없이 절을 하겠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출격 대정부이며 시퍼렇게 살아있는 사람이다.”

기어이 성철이 혼잣말을 했다.

“그놈이 그놈이구나. 내 말 듣는 놈이 아무도 없어.”

성철은 눈 푸른 납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달마의 푸른 눈을 닮은, 깨친 선승은 오지 않았다. 성철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팔순이 다가오자 기력이 눈에 띄게 쇠해졌다.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해졌고, 무엇보다 가슴 부위가 아팠다. 심장질환이 분명했다. 제자들이 스승을 모시고 심장 전문의 서정돈 박사를 찾아갔다. 진찰 결과 부정맥을 앓고 있음이 밝혀졌다. 서 박사는 심장조절박동기를 심장에 부착해야한다고 했다. 성철은 몸속에 기계를 박아야한다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냥 죽지, 그래 살아서 뭐하겠나.”

서 박사는 그런 성철을 곡진하게 설득했다.

“부정맥은 흔한 병입니다. 심장조절박동기 부착은 간단한 시술입니다. 눈 나쁜 사람이 안경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말하자면 심장에 안경 하나 얹는 것입니다.”

박사의 ‘안경론’을 성철은 묵묵히 들었다. 제자들도 입원을 간청했다. 성철은 이내 수술대 위에 누웠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제자 원택이 서 박사에게 은밀하게 물었다.

“큰스님께서 치료를 받으셨는데, 제가 어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겠습니까?”
“다른 이상은 없으시니 앞으로 건강하실 것입니다. 그래도 각오는 하셔야 합니다.”

원택은 안심이 되면서도 등골이 서늘했다. 제자는 ‘각오’란 말을 그냥 삼켜버릴 수 없었다. 스승이 없는 백련암, 가야산, 해인사, 한국불교를 떠올려봤다. 1987년 봄날의 일이었다.

언제부턴가 성철은 추위를 무척 탔다. 백련암은 가야산의 한기가 그대로 몰려왔다. 백련암에서 겨울나기가 힘들어졌다. 제자들은 노승 성철을 따뜻한 남쪽으로 모셨다. 제자들은 부산에 거처를 마련했다. 부산 중심가에서 대형목욕탕과 숙박업을 하고 있던 이용수, 최봉순 부부는 자신의 건물 맨 위층에 별실을 만들어놓고 성철을 맞았다. 부부는 성철을 6·25전쟁 직후부터 극진하게 섬겼다. 훗날 자신의 업소를 절터로 기증했다. 또 구봉 현승훈 거사, 정행인 보살 부부도 부산 선동 화승원 안에 성철의 처소를 마련했다. 성철은 이곳에서도 바랑을 풀었고, 그 공간을 ‘시간 밖’이라는 뜻의 겁외사(劫外寺)라 이름 지었다. 열반 후 제자들이 성철의 생가 터에 지은 절 겁외사는 여기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성철은 부산 해운대 근처에 있는 해월정사에도 머물렀다. 바다를 좋아하는 스승을 모시기 위해 맏상좌 천제가 바다가 보이는 곳에 절을 지었다. 성철은 사찰이름도 바다 해(海)자를 넣어 직접 지었다. 넓은 바다와 밝은 달빛(月)은 부처님의 법과 지혜를 뜻했다. 해월정사에 머물 때에는 일체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바다만을 바라보며 마음을 씻었다. 가끔 송정, 기장 해변과 장안사 등을 둘러봤다.

가야산 호랑이로 살아온 지 30년, 성철도 노인이 되어야 했다. 늘 다니던 포행길도 힘겨웠다. 그런 성철에게 병이 들어왔다. 폐렴으로 부산 동아대병원에 입원하여 한 달 넘게 고생하고 있었다. 성철이 제자 원택을 찾았다. 열반하기 1년10개월 전이었다. 초췌해진 얼굴로 제자를 쳐다보던 성철이 한마디 했다.

“똑같다.”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제자가 눈만 끔벅거렸다.

“이놈아, 똑같다 이 말이다.”
“무엇이 똑같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성철은 제자를 한참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옛날 젊었을 때나, 장좌불와할 때나, 지금이나 다 똑같다는 말이다. 너는 벽창호를 언제 면할 것이냐. 그 말도 못 알아들어. 쌍놈 아닌가.”

그때서야 제자는 스승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성철의 법문이 머리를 스쳤다.

“숙면일여, 즉 오매일여의 경지를 넘어서야 비로소 안과 밖이 투철해지고(內外明徹) 무심(無心)을 얻어 큰 깨달음을 이룬다.”

성철은 죽음을 넘나드는 와병 중에도 ‘일여’의 경지를 잃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제자에게 확인하여 전하고 있음이었다. 병세가 위중했음에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깨달음의 마음이 한결같았다. 원택은 문득 스승이 지월 스님을 병문안했을 때의 장면이 떠올랐다.

지월 스님은 그 누구를 만나도 하대하지 않아서 ‘가야산의 인욕보살’로 추앙받고 있었다. 그러던 스님이 몸져누웠다. 원택은 산문에 든 지 얼마 되지 않은 1973년 초봄, 성철을 모시고 병문안을 갔다. 이때 스승의 병문안이 자신의 생각과 사뭇 달라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성철은 다른 일체의 말은 하지 않고 오직 화두만을 챙겼다.

“성성합니까? 화두가 끊어지지 않고 잘되지요?”
“그렇습니다.”
“똑같다 이 말이지요?”
“일여합니다.”
“그러면 됐습니다. 화두만 끊어지지 않고 잘되면 됐습니다.”

성철은 곧바로 일어섰다. 화두를 들고 있기에 더 붙들 이유도 슬퍼할 이유도 없었다. 불생불멸, 부증불감이었다. 지월 스님은 성철과의 선문답을 나눈 그날 밤 열반에 들었다.

  
▲ 성철 스님이 병중에 쓴 게송. 원택 스님이 처음 공개했다.


그렇게 지월 스님을 보냈던 성철이 병상에서 자신을 점검하고 있었다. 원택은 병중일여(病中一如)에 든 성철이 새삼 경이로웠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솟구쳤다. 이때 스승이 불쑥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백일고고벽소중 白日杲杲碧霄中
천심해저어생각 千深海底漁生角
조주운문각미로 趙州雲門却迷路
만타산호광찬란 萬朶珊瑚光燦爛
-1992년 1월28일, 동아병창(東亞病窓)에서
쨍쨍한 해가 푸른 하늘에 빛나고 빛나며
천 길 바다 밑에서 고기는 뿔이 돋아나네
조주 운문 스님은 도리어 길을 헤매고
만 갈래 산호가지는 그 빛이 찬란하네.

종이를 받아든 원택은 깜짝 놀랐다. 불길한 생각이 엄습했다.

‘정녕 떠나실 준비를 하시는 것인가.’

하지만 글을 꼼꼼하게 읽어보니 열반송은 아니었다. 열반송이라면 굳이 ‘동아병창’이라는 장소를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스승 성철이 병중일여의 심경을 표출한 것이었다.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고 있음이었다. 일테면 ‘병중일여 게송(偈頌)’이었다. (원택 스님은 취재차 만난 평전 작가에게 성철이 힘들게 쓴 병중의 글씨를 처음 공개했다.)

몸은 쇠약해도 글은 기운찼다. 해는 푸른 하늘에서 빛나고 고기는 뿔이 돋고 있었다. 조주 스님은 성철 앞에서 쩔쩔 매고 있음이니, 이를 보며 산호가 만 갈래의 가지를 흔들며 깔깔거리고 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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