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으로 법칙 삼고 방일하지 마라 / 고봉스님

2019. 11. 2. 09:3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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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달음으로 법칙 삼고 방일하지 마라 / 고봉스님

▒ 깨달음으로 법칙 삼고 방일하지 마라 / 고봉스님

격동기 제자리 지키던 올곧은 수행자 고봉스님

큰스님들의 법문을 보노라면 한 가지 동일한 가르침이 보인다.
이 사바세계에는 어느 것 하나 마음 둘 곳 없으니
끊임없이 정진하라는 말씀이다. 
부귀영화도 순식간에 사라지는 아침이슬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인
‘제행무상 불방일정진(諸行無常 不放逸精進)’도 예외는 아니다.
교주의 말이기 때문에
단순히 되풀이하는 공허한 말에 불과한 것일까.
큰스님들이 세속의 허망함과 수행의 과정에서 터득한 사자후다.

“금생(今生)에 일대사를 밝히지 못하면
방울만한 물도 녹이기 어려울지니 착실하게 정진하라.
깨달음으로써 법칙을 삼고 방일(放逸)하지 말라.
때가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목숨이 또한 잠깐 사이에 있으니 이 순간을 버리고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고봉(古峰, 1890~1961)스님의 대중을 향한 법문은
대부분이 게으름을 경책하는 내용이다.
격동기 속에서도
의연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수행자다운 모습이다. 
스님은 1890년 대구 지동(池洞)의 부유한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법명은 경욱(景昱), 호는 고봉이다.
스님은 대구 파계사(把溪寺) 성전(聖殿)에서 수행을 시작하였다.
생사를 잊고 자기와 경계를 잊는 과정이 지속되었다.

1915년 4월 선실(禪室) 마당에 있는 바위 위에서
홀로 좌선삼매(坐禪三昧)에 들었는데,
깨닫지 못해 괴로워하던 번뇌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당시 기분이란 오도송(悟道頌)에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밝은 태양이 솟아나고,
눈앞의 산과 구름이 뚜렷해진 것이었으리라.

비바람 가고 나니 밝은 태양 솟아났네.
푸른 산 흰 구름 눈앞에 뚜렷하니,
흐르는 물소리 시원도 하여라.

風雨遇後出太陽
靑山白雲眼前明
孱孱流水冷其中

지독한 수행 끝에 자신의 아만은 사라졌으니
장부일대사를 마친 것이다.
그러나 출가자의 본분이 자신의 깨달음에만 국한된 것인가.
이후 스님은
“부처를 보고 중생을 보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게 된다.
혼자만 해탈을 얻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것은 스님이 주도한 항일운동으로 이어졌다.
1919년 3월 8일 시작된 소위 ‘대구사건’은
영남 3 · 1운동의 효시로 ‘학생의거’라고도 한다.
서울에서 3 · 1운동의 거사 준비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을 때
대구에서는 서문(西門)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스님은 이 운동을 주도한 죄로
1년 6개월간 투옥되어 고문을 당한 것이다.

스님은 자신의 본래면목을 깨우치기 위해
끊임없는 용맹정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정진이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소승적(小乘的) 해탈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스님의 항일운동은 그러한 의미에서
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고통스럽다는
대승보살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깨달은 이후 스님의 행적은 어딜 가나 걸림이 없었다.
정혜사(定慧寺)에서 만공(滿空)스님의 가르침을 받을 때다.
궁핍한 살림으로 인해 탁발을 해서 수행을 유지해야 하는데,
스님은 자신이 탁발한 것은 모두 어려운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빈손으로 돌아 온 것이다.
의아해 하는 만공스님의 질문에
보름 동안 절에서 먹지 않고 나가 있었으니
그것만 해도 적지 않은 쌀을 벌어놓은 것이라고 말해
‘보통 사람의 테두리 밖에 뛰어난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또한 양산 내원사(內院寺)에서는
스스로 황소가 되기도 하였다.
조실 혜월(慧月)스님이 외출한 사이
소중히 여기는 황소를 팔아 대중공양에 돈을 써버린 것이다.
당시 혜월스님은 공부하는 납자들을 동원하여
황무지 개간에 여념이 없었지만,
먹는 것에는 소홀히 하신 모양이다. 

귀가한 혜월스님이 소가 없어져 이유를 묻자
스님은 벌거벗고 조실 방으로 가서
황소 울음소리를 내며 사방을 기어 다녔다.
혜월스님은 소의 볼기짝을 치면서 내쫓아버렸다고 한다. 
벌거벗고 소가 되어 기어 다닌 스님이나
그 소의 볼기짝을 때린 혜월스님이나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던 수행자의 모습들이다.
고봉스님의 행적은 출가자와 재가자를 막론하고
무엇 때문에 수행을 하고 깨달은 이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출가 이후에도 아만덩어리였던 어리석은 이가 깨달은 이후
인천(人天)의 스승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굶주리고 있는 대중들을 위한 배려는
깨달은 이에게서 볼 수 있는 단순한 행동은 아니었다.
대중을 위한 자비심이 깨달음의 기초가 되어 있는 것이다.

출처: 불교저널 조사열전



강바람은 만고에 나부끼고
산달은 천추에 빛나네.
만고의 천추객이 몇 번이나 풍월루에 올랐던가.
태어나면 기뻐하고
죽으면 슬퍼하니
이것은 모두 뜬구름.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슬퍼하리

 

- 고봉선사가 자주 들려준 法語



▒ 숭산(崇山) 법호에 담긴 뜻 / 고봉스님

▒ 숭산(崇山) 법호에 담긴 뜻 / 고봉스님

고봉 스님이 충남 예산의 덕숭산 정혜사
만공 스님의 문하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이 무렵만 해도 삼천리강토가 가난했던 탓에
덕숭산 정혜사의 절 살림도 늘 빈궁하기 그지없었다.
수행자는 많고 식량은 모자라니 그해 겨울 삼동안거가 걱정이었다.         
그래서 정혜사에 있던 모든 수행자가 걸망을 메고
양식을 탁발해 오기로 하고 마을로 내려갔다.
그 후 어떤 분은 열흘을 탁발한 뒤
걸망에 곡식을 가득 짊어지고 돌아왔고,
또 어떤 분은 보름을 탁발한 뒤
곡식을 짊어지고 절로 돌아와 양식을 보탰다.

* 당나귀 타고 온 괴이한 탁발 행각

그런데 유독 고봉 스님만은 괴이하게도 보름이 지나
당나귀를 타고 한들한들 정혜사로 돌아와
그동안 탁발한 양식은 한 톨도 내어놓지 않고
오히려 타고 온 당나귀 품삯을
만공 스님더러 물어달라는 것이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만공 스님이 고봉에게 물었다.
“그동안 탁발한 것은 어찌하고
오히려 타고 온 당나귀 값을 내놓으라고 하는가?”
“소승이 탁발한 곡식은
모두 다 가난한 사람들 주고 왔습니다.”
“그렇다고 당나귀를 타고 와서
그 삯을 내달라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는가?”

그러자 고봉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만공 스님께 대답했다.
“스님, 그동안 소승이 보름동안 절에서 나가 살다 왔으니
그것만 해도 쌀 한말 정도는 벌어놓은 셈이요.
또 소승이 그동안 절에 머물며 용돈을 썼다면
그 또한 몇 십량은 족히 넘을 것이니
그 두 가지만 계산해도 당나귀 값이 훨씬 쌀 것입니다.”

만공 스님은 하도 기가 막혀 더 이상 할 말이 잃었다.
“자네는 참 어찌할 수 없는 특별난 사람일세.
다시는 상관 않을테니 자네 멋대로 지내게.”
그 후로는 일체 간섭조차 않았으니,
그렇게 해서 선객 고봉은 마음껏 선기를 드날릴 수 있었다.

* 승복 벗어던지고 독립운동

덕숭산 정혜사에 머물고 있던 고봉 스님은
어느날 갑자기 승복을 벗어버리고
거사복으로 갈아입은 뒤 대구로 내려갔다.
이역만리 중국 땅에서 독립투쟁을 하던 김좌진 장군이 암살되고,
함경도에서는 탄광부들이 들고 일어나 독립운동을 하고,
만주에서도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산중에서 나만 편히 지내며
열반락을 즐길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마침 대구의 유명한 술집 청수장의 주인 아들은
어려서부터 함께 공부한 친구였으므로
고봉 스님은 그 친구와 더불어 비밀리에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고
독립운동을 모의하며 1919년 3월 30일 대구 남문 밖에서
‘대한독립 만세’을 외친 이른바 ‘대구 만세사건’을 일으키는데
적극 가담, 결국은 체포되어 마산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때 왜경들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해 입은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생해야 했다.

고봉 스님이 서울 미타사에 잠시 머물고 계실 때의 일이었다.
충남 예산 덕숭산 수덕사에서 수행하던 제자 행원이
은사이신 고봉 스님을 찾아뵈었다.
“스님, 제가 어제 저녁에 삼세제불이 다 죽었기 때문에
송장을 치우고 오는 길입니다.”
이렇게 행원이 스승께 문안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고봉 스님이 대답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나?”
“여기 증거가 있습니다.”
행원이 먹다 남은 오징어와 술병을 꺼내 스님 앞에 놓았다.
“그럼 한잔 따르라.”
“잔을 내 주십시오.”
고봉 스님이 손을 내밀었다.
“이게 손이지 술잔입니까?”
행원이 술병으로 방바닥을 쳤다.
“이놈 봐라. 고약한 놈이로고!”
고봉 스님이 자세를 고쳐 앉으시며 제자 행원을 노려보았다.
“그럼 내 마지막으로 묻겠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다가 밥그릇이 깨졌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이에 행원이 대답했다.
“하늘은 푸르고 물은 흘러갑니다.”
“아니다!”
“3·3은 9입니다.”
“아니다!”
“오늘은 날씨가 맑습니다.”
“아니다!”
“방바닥이 뜨끈뜨끈 합니다.”
“아니다!”

행원이 더 이상 말없이 즉여(卽如)의 도리로 답하니
이윽고 고봉 스님은 제자 행원의 손을 뜨겁게 꽉 잡으며 말했다.
“꽃이 피었는데 내 어찌 나비가 되어주지 않겠느냐?”
“꽃 피었으니 나비가 되어 주마”
그리고 그 후 18일 만에 스승은 제자에게 게송을 내렸다.

“일체법은 나지 않고
일체법은 변하지 않는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법
이것이 이름하여 바라밀이라 한다.”

*숭산(崇山) 법호 하나에 담긴 스승의 뜻

고봉 스님은 이때 유일한 상좌 행원에게 법호를 내렸다.
“오늘부터 그대 당호를 숭산(崇山)이라 하게.”
그렇게 해서 행원의 법호가 숭산으로 정해졌다.

숭산(崇山)
충남 예산 덕숭산(德崇山)의 법을 널리 펴고
법맥을 크게 전하고, 법을 깊이 행하라는
스승 고봉 스님의 간절한 뜻이 담긴 멋진 법호였으니,
이 법호를 내려받은 제자 행원 숭산 스님은
스승의 깊은 뜻을 그대로 마음에 새겨 한평생
덕숭산의 법을 전세계를 무대로 한껏 펼치며
덕숭산의 법맥을 오대양 육대주로 뻗어
전세계 방방곡곡에 부처님의 법음을 확산시켰다.
참으로 법호 하나에 담긴 스승의 간절한 당부와 원력은
이토록 엄청난 위력을 나툴 수도 있다는 것을
고봉 스님과 그 제자 행원 숭산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 스승에 그 제자…”
이 말을 듣기가 얼마나 어렵고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오늘 새삼 느낀다.
그리고 부모와 스승으로부터 내려 받은 내 이름에 대해,
과연 나는 내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스스로 한번쯤 물어볼 일이다.

윤청광 〈방송작가〉



▒ 천하의 도인도 늙고 병들어 이렇게 가네 / 고봉스님

천하의 도인도 늙고 병들어 이렇게 가네 / 고봉스님

고봉 스님은 호방하기 짝이 없는 스님으로 잘 알려졌다.
곡차도 사양하는 법이 없었고. 흥이 났다 하면 두주불사였다.
어느 해 여름. 고봉 스님은 그날도 곡차를 많이 하시고
크게 취하여 절로 돌아와서는 마루에 벌렁 드러누우면서 시자를 불렀다.
 

“이것 보아라,
어서 대야에 물을 떠 가지고 와서 내 발을 좀 씻겨다오.”
“예, 스님.”
시자가 스님의 분부를 받고 돌아서는데
다른 스님 한 분이 시자를 불러 세웠다.

“이봐라. 고봉 스님이 너에게 발을 씻기라고 하시더냐?”
“예, 그러셨습니다”
“이 녀석아, 고봉 스님께서 발을 씻어라 하셨으면
그 땐 네가 이렇게 물어보아야 하는게야.”
“뭘 어떻게 물어보라는 말씀이신지요?”
“스님, ‘더럽고 깨끗한 것이 둘이 아닌데, 발은 씻어 무엇 합니까?’          
이렇게 물어야 되는게야. 알겠느냐?”
“아 예. 그럼 제가 그렇게 한번 여쭈어보겠습니다.”
시자는 이렇게 대답하고 대야에 물을 가득 담아 가지고 와서
고봉 스님의 발을 씻겨드리기 시작했다.

시자는 조금 전 다른 스님이 시킨 대로 고봉 스님께 물었다.
“스님, 더럽고 깨끗한 것이 둘이 아닌데 발은 씻어 무엇 합니까?”
발을 씻겨드리며 시자가 그렇게 묻자마자
눈 깜짝할 사이에 고봉 스님의 엄지발가락이
시자의 입안으로 벼락같이 들어왔다.
시자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자빠지면서 침을 뱉었다.

“아이구 스님, 더러운 발가락을 왜 소승의 입안에다 넣으십니까?”
“이놈아, 더럽고 깨끗한 것이 둘이 아니라고 한 말은
네 말이 아니었더냐?”
시자는 더 이상 할말을 잃었다.
더럽고 깨끗한 것이 둘인 줄 알았다면
스님의 발가락이 입안으로 들어간들 무슨 상관이 있을 것인가?
고봉 스님의 선지는 실로 이처럼 전광석화였다.

호방함 속 선지 번득여

고봉 스님은 은사 혜봉 스님이
사바세계와의 인연을 마치려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남장사로 달려갔다.
평소 은사 스님을 곁에서 모시지는 못했지만 고봉 스님은 늘

혜봉 스님의 은혜를 감사히 여기고 있었다.
고봉 스님이 손에 수건을 들고 스승께 물었다.

“스님, 이것이 보이십니까?”
“그래, 보인다.”
“경욱이는 항상 이 속에 있습니다.”
“그래. 그대는 남장사의 꽃이요, 세상의 빛이다.”
“스님, 중노릇은 생사를 초월하고
범성을 벗어나는데 목적이 있다 하였는데,
스님께서는 걸릴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동산 대본선사는 자다가 갔고,
불인선사는 이야기 하다 갔지.
다 이것은 선정과 지혜의 힘이니 공부들 잘들 하게나.”
혜봉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스스로 잿속에 불사그라지듯 조용히 열반에 드셨다.
고봉 스님은 스승의 수족을 편안히 해드리며 담담히 말했다.
“옛사람도 이렇게 갔고, 지금 사람도 이렇게 갔고,
우리 스님도 이렇게 가셨으니 장차 우리도 이렇게 가리라.”

그리고 나서 고봉 스님은 스승의 열반을 위해 다비문을 읽었다.
“인도에서 오신 달마대사의 뜻이 당당하여
스스로 그 마음 깨끗이 하여 고향에 들어갔습니다.
묘한 몸 담연(淡然)하여 처소가 없으니
산과 물 땅, 참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세상의 빛이로다”

고봉 스님은 늙기 전에 이미 생사의 경계를 훌쩍 뛰어 넘은 분이었다.
고봉 스님은 평소에 곡차라도 한잔 하시고 나면
곧잘 다음과 같은 시를 외우곤 하셨다.
고봉 스님의 ‘십팔번’인 셈이었다.

“강바람은 만고에 나부끼고
산달은 천추에 빛나네.
만고의 천추객이 몇 번이나 풍월루에 올랐던가.
태어나면 기뻐하고
죽으면 슬퍼하니
이것은 모두 뜬구름.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슬퍼하리.”


늘 이렇게 노래하며 유유자적한 가운데
호방한 선풍을 드날리던 고봉 스님이
안국동 선학원에서 향곡 스님을 만났다.
하루는 향곡이 누더기를 깁고 있는 것을 보고 고봉이 물었다.

“바느질을 어떻게 하는고?”
향곡 스님이 대답 대신 바늘로 고봉의 허벅지를 찔렀다.
고봉 스님이 “아야! 아야!”소리를 지르니
향곡이 다시 한 번 찔렀다.
그러자 고봉이 껄껄 웃으며 한마디 했다.
“허허 그 녀석 바느질 잘 하는구나!”
찌르는 사람도, 찔린 사람도 호방한 선풍을 드날린 셈이다.

무엇을 기뻐하고 슬퍼하리

1961년 여름. 세속 나이 72세에 이른 고봉 스님은
서울 미타사의 조실로 계시다가
서울 수유리 화계사로 들어 와
사바세계와의 작별을 준비하고 계셨다.
고봉 스님이 하루는 제자들에게 일렀다.

“들 것을 만들어 오너라.”
“들 것을 왜 만들라는 말씀이신지요?”
“그 들것에 나를 태우고
수유리 골목골목을 한바퀴 돌아보도록 하지.”
“예에? 스님을 들것에 모시고 한바퀴 마을을 돌아 보자구요?”
“그래. 어서 내 시킨대로 해라.”
“무슨 까닭이신지요 스님?”
“천하에 도인으로 소문 난 이 고봉도
이렇게 늙고 병들어 이렇게 빈손으로 간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가려고 그런다.
내 뜻을 알겠느냐?”
고봉 스님은 이 사바세계의 중생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이렇게 남기시고 열반에 들었다.

옛 부처님도 이렇게 가셨고, 옛 조사님들도 이렇게 가셨고,
천하의 도인들도 모두 이렇게 가니
이 세상 모든 중생들도 이렇게 가는 법,

무엇을 욕심내고, 무엇을 기뻐하며, 또 무엇을 슬퍼하리.

출처: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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