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혜천스님설교

2019. 11. 2. 09:5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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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스님 일요강론 : 12년 8월 12일

명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오늘 주제는 ‘명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을 떠난 존재는 없다고 했습니다.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존재라는 것은 마음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은 그릇과 같고, 우리의 몸은 그릇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과 같죠. 몸은 곧 마음과 함께 합니다. 존재를 규정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오감의 정보가 축적돼 있는 기계와 같습니다. 오감을 떠난 마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명상을 하는 것은 거기에 있습니다.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고, 존재를 해석하기 위해서고, 또 존재를 파악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존재를 해석하고 이해하고 파악하려고 하는 것은 다르마를 해석하고 이해하고 파악하기 위해서입니다. 부처님께서 명상을 강조한 이유는 다르마를 파악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르마의 원인이 그 본질이라면 다르마의 권위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존재를 파악해야 다르마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 존재라는 것은 마음을 떠나서 얘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마음을 떠난 존재는 없다고 했습니다. 물론 몸을 떠난 존재도 없습니다. 마음과 몸은 하나의 그릇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릇이라고 하면 그릇이라는 형태를 뜻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그릇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을 뜻하기도 하죠. 우리가 그릇의 형태와 그릇의 물질을 분리해서 생각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몸을 분리해서 구분하려는 것 또한 어리석은 짓이죠. 마치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현실은 내가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세계고, 비현실은 경험하지 않고 상상하는 세계죠. 그런데 마치 비현실을 현실처럼 인식하는 거죠. 내가 상상하는 세계를 마치 경험하는 세계처럼 생각하죠. 우리의 의식이 그렇게 만들죠.


우리의 의식은 기억을 바탕으로 합니다.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오감의 정보가 축적된 기계를 말하죠. 오감을 떠난 어떤 정보도 우리는 얻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육감을 이야기 하죠. 육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육감이라고 하는 것도 오감의 정보가 작동한 것이지 육감이라고 하는 제육의 어떤 감각기관은 없는 것이죠. 우리는 그 기억을 바탕으로 해서 현실의 경험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죠. 즉 우리의 경험의식이라는 것은 현실의 세계가 함께 담겨져 있는 것이죠.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와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의 차이를 구분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죠. 그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바로 명상입니다. 명상이라고 하는 것은 상상의 나래를 펴서 그 상상의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비현실의 차이를 분명히 이해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상한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현실세계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엄격하게 이야기하면 이 육신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육신이라는 것은 오직 현실세계에만 담을 수가 있어요. 존재하는 이 현실 세계가 아니면 우리 육체는 담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상상의 세계에서는 육체를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담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물을 그릇이 없는 허공에 담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


우리나라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전라북도 부안군 산내면 변산이라고 하는 산에 올라가면 월명암이라는 암자가 있죠. 아주 기가 막히게 경치가 좋은 절입니다. 그 절은 바다와 산을 동시에 볼수 있는 절이죠. 낙조가 아름답고 일출이 아름답고 특히 가을날에 달빛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그 달빛에 누우면 세상의 근심과 시름을 다 잊을 수 있습니다. 이 암자에 신라시대 때 부설이라고 하는 거사와 그의 아들과 딸이 살았습니다. 부설거사는 본래 스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스님이 아니면 약을 먹고 죽겠다는 아가씨를 위해서, 그녀를 위해서 결혼을 했지요. 그리고는 그의 도반스님들하고 약속을 했죠. 이십년 후에 만나자. 그래서 이십년 후에 만났다는 거죠. 그래서 자기가 닦은 바를 보여주기로 했지요 그 방법은 아주 간단했어요. 표주박 호리병 박에 물을 넣고 그 호리병 박을 깨뜨렸을 때 물이 쏟아지지 않는 사람이 이기는 거죠.


그래서 부설 거사와 두 도반스님은 모였습니다. 한 스님이 호리병 박을 치자 당연히 물이 흘러내리죠. 그러자 한 스님이 “이 친구 이십년동안 허송세월을 했구만, 아니 호리병 박을 치는데 물이 쏟아지다니... ” 하면서 갖고 있던 주장자로 자기 몫인 호리병 박을 내리 쳤습니다. 그렇지만 보기 좋게 물이 쏟아져 내렸지요. 그러자 구설거사가 말했지요. “그대들은 이십년간 무엇을 했단 말인가 한번 보게” 부설 거사가 내리치자 박은 깨졌지만 물은 허공에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도력의 증거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야기 속 세계에서는 병이 깨져도 물이 쏟아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세계에서는 그러한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구순뿐만 아니라 부설거사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이야기는 무언가를 상징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현실세계에서 그 물이 쏟아지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예요. 만약에 병이 깨졌는데도 물이 쏟아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현실의 세계가 아닙니다. 현실의 세계는 비현실의 세계와는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가요. 물리학적인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런 현상은 일어날 수 없는거죠. 왜 일어날 수 없을까요. 그것은 현실의 세계이니까요.


현실의 세계에서는 먹어야만 배가 부릅니다. 먹어야만 생존하고 숨을 쉬어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명상하라고 하는 것은 거기에 뜻이 있습니다. “네가 현실과 비현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구분하고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왜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지 못할까요. 각자가 보여지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차를 타고 가다 동전을 떨어뜨리면 내가 볼 때는 그 동전은 직선으로 떨어지지만 멀리서 달리는 기차를 보고 있는 사람에게는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기차에서 동전을 떨어뜨린 나는 직선으로 보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곡선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그거와 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있는 그대로 보라 하셨습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고 하는 것은 그래서 강조되는 것입니다. 현실세계에서는 현실 세계 그자체를 있는 그대로 봐야 합니다. 현실세계에서는 공중부양을 할 수 없습니다 현실세계에서는 날라 다니는 인간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장기에는 꿈속에서 날라 다니는 꿈을 꿉니다. 아직 날라다니는 꿈을 꿉니까? 아직 날라다니는 꿈을 꾼다면 아마 여러분은 아직 유년기의 자아가 작동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자아에게는 다른 표현을 쓰죠. 불교에서는 자아라는 표현을 안쓰니까.. 우리의 의식에는 세가지의 의식이 있습니다. 유년의 의식, 중년의 의식, 노년의 의식....


내가 백화점에 갔습니다. 백화점에 갔더니 마음에 드는 코트가 있어요. 너무 마음에 들어서 코트를 만져보고 입어봤지요. 그랫더니 백화점 판매원 아가씨가 말했죠.'너무 어울리시네요 딱이예요‘ 그래서 가격표를 봤지요. 그런데 그 가격이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이었습니다. 머뭇거리자 그 아가씨는 이렇게 얘기하죠. ’손님 정도의 인격이면 이정도 입어주셔야 품위가 살아나지요‘ 그렇지만 너무 비싸서 사 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망설이다가 옷을 벗었지요. 그러자 그 아가씨가 한마디 던집니다. ’손님한테는 이것이 좀 너무 쎄지요?‘ 그소리를 듣는 순간 너무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마음에 들고 입어 봤지만 너무 가격이 비싸서 사지 않을 려고 했는데 아가씨가 자존심을 긁었습니다. ’너무 비싸서 못사겠지? 네 수준에 안맞지?‘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긁어 버립니다. 순간적으로 그의 유년의 의식이 작동한 것입니다. 유년의 의식은 통제되지 않는 의식입니다. 유년의 의식은 통제되지 않습니다. 마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다섯 살, 여섯 살 먹은 아이와 같습니다. 다섯 살, 여섯 살 먹은 아이가 어디로 움직일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내 자식이라 할지라도....


중년의 의식과 노년의 의식은 자기 통제력이 강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적어도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유년의 의식은 현실과 비현실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다섯 살, 여섯 살 아이들은 현실을 어떻게 알고 비현실을 어떻게 알겠어요. 단지 그 순간에 생각나는대로 움직일뿐이지 어떠한 생각을 미리 하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유년의식은 마치 이와 똑같습니다. 우리가 왜 현실세계에 살면서 불만족을 느끼고, 왜 우리는 현실세계에서 덜 행복할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설사 구분한다고 해도 그 경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분명하게 구분했다면, 많은 사람들은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지 못하죠. 조금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있죠. 우리가 세상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는 누구보다도 현실적이다가 어떨 때는 누구보다 비현실적이라는 거죠. 우리는 유년의 의식과 중년의 의식과 노년의 의식을 마치 바이킹을 타듯이 왔다갔다 합니다. 바이킹 타보셨죠? 물론 저는 안타봤습니다. 바이킹을 보면 크다란 배가 왔다 갔다 하지요. 우리의 의식은 어떤때는 유년의 의식에 가있다가 중년의 의식에 있다가 노년의 의식에 가 있지요. 노년의 의식에 있을 때는 행복하고 그때 판단한 것은 대부분 옳죠. 중년의 의식에 가 있을 때는 덜 행복하죠. 그때 판단한 것은 적어도 실수하지는 않죠. 그러나 유년의 의식에 갈때는 현실과 비현실이 마치 그저 팔당땜  녹조라떼처럼 모호해지죠. 본래 물빛은 다 사라지고 그저 다 남색뿐이죠. 그때 판단한 것은 전부가 다시 해야죠. 속된 표현으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요. 요강은 삶아도 밥그릇으로 사용할 수 없죠. 제가 먼저 떠올린 단어는 걸레는 빨아도 걸레다 그럴라고 그랬는데 너무 말이 품위가 없지요.


우리가 많이 착각하는 것이 있지요. 그 중 하나가 명상하는 것입니다. 명상이라고 하면 초월적인 무엇을 체험하는 것으로 생각하지요. 명상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라 할수 있지요.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면 어떻게 다르마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나 자신의 존재를 모르는데, 어떻게 존재 밖의 대상을 알겠습니까. 많은 분들이 수십년간 명상을 하면서 스스로의 생각조차 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본래 그가 추구하는 것이 비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명상은 현실이걸랑요. 명상한다는 것이 뭐예요. 내 몸과 마음, 그 존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지요. 내부 시각을 보고 마치 그것이 새로운 세계인양 생각하죠. 그것은 내부시각일 뿐이죠.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 이유는 거기에 있죠. 명상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죠.


오늘 주제가 '명상한다, 고로 존재한다!' 입니다. 명상한다는 것은 존재를 본다는 것입니다.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수행한다는 많은 분들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마저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도 현실에서 행복을 느끼는데 수행하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더 고통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현실세계를 비현실세게로 밀어 넣는 거죠. 무슨 말인가 하면 나 자신을 비현실 세계로 밀어 넣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표현을 쓰지요. 현실 세계와의 부조화를 비현실의 세계에 자신을 밀어 넣음으로서 자기자신을 거기에 숨겨서 자신을 합리화 시키는 거지요.


이것은 부처님께서 경계하고 경계하신 내용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죠. “존재하는 인간은 먹지 않고 존재할 수 없다.” 이것보다 더 분명한 말씀이 있을 수 있을까요. 존재하는 인간은 먹지 않고 존재할 수 없습니다. 현실세계의 인간은 현실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을 부정한다고 해서 현실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현실을 긍정할 때 그 현실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립니다. 어떻게 현실을 긍정할까? 그것이 바로 자애심입니다. 명상한다는 것은 자애심을 일으켜서 그 자애심을 확충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잠시 명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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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친구에게 - 강수지
02. 친구에게 - 안상수
03. 친 구 - 안재욱
04. 안 부 - 남일해
05. 친구여 - 조용필

06. 좋은친구 - 하남석
07. 보고싶다 친구야 - 홍수철
08. 무한우정 - 녹색지대
09. 나의 친구야 - 고연숙
10. 나의 옛친구 - 공일오비 & 이승환

11. 친구를 위해 - 손지창 & 김민종
12. 친 구 - 김경남
13. 길 잃은 친구에게 - 덧마루
14. 내 오랜 친구들 - 김동률
15. 휴식같은 친구 - 김민우

16. 친구에게 - 듀  스
17. 친구야 - 자  두
18. 친 구 - 박혜경
19. 힘들때마다 생각나는 친구 - 오현란
20. 친 구 - S.E.S
 
21. 친구야 너는 아니 - 부  활
22. 문득 친구에게 - 윤  상
23. 친구라 말할 수 있는건 - 신성우
24. 친 구 - 양희은
25. 미안하다 친구야 - 올드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