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문 > 시절과 인연을 살핀다는 것은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 답변 >
질문자는 지금 시절과 인연을 따르지 않고 있소? · · · · · · 모든 게 다 시 절과 인연 따라 굴러가는 거요. 그런데 그 시절과 인연이 다 비었으면 굴러간다고 말하긴 해도 굴러가는 게 없는 거요.
그러니 시절과 인연을 살핀다는 얘기는 지금처럼 모든 걸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고 다 해도 하는 일이 없다는 뜻이오. 그와 같이 시절도 인연도 다 비어서 따를 일도 좇을 일도 없음을 알아야 그때 비로소 시절과 인연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소.
실제로 따라야 할 시절과 인연이 따로 있고, 그 시절과 인연을 따라야 할 ‘나’가 있는 한 절대로 그 자리에 합하긴 글렀소. 계속 이 공부를 세간의 학습하는 자세로 대하는 게 참 문제요. 밖으로부터 오는 소리를 듣고, 글을 읽고 하면서 얻어진 지견을 차곡차곡 쌓아 모으는 그 버릇을 버리지 않는 이상 계속 헛수고만 하는 거요.
그러는 동안은 수행의 주체가 계속 ‘나’요. 수행의 주체가 ‘나’인 한 천년만년 가도 전혀 가망 없소. 모든 게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 주재자(主宰者)가 없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체달하지 못한다면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소.
모든 게 인연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바닥까지 사무쳐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치게 되면, 인연이 본래 인연이 아닌 거요. 그렇다면 목전에 펼쳐진 이 세상은 전부 다 환상이오. 철저히 환상이오. 모든 객관경계, 그 경계를 보고 듣고 관찰하는 주체, 둘 다 상상만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생주이멸(生住異滅)하고, 생로병사(生老病死)하고,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 듯 보이는 모든 세상사가 자체로는 성품이 없기 때문에 생주이멸이 생주이멸인 채로 생주이멸이 아닌 거요.
말만 있을 뿐 아무 일도 없는 거요. 그래서 세간상이 상주(常住)한다고 그러는 거요.
- 대우거사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