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적 평형2|…… 혜천스님설교

2019. 12. 8. 17:1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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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2556년 9월 2일 



동적 평형2 

 

 

이번 주의 주제는 지난 주의 주제를 그냥 갖고 가겠습니다.

 

고르바쵸프가 농업담당 서기일 때,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그 당시에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은 식량위기로 굉장히 허덕거리고 있었습니다.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죠. 고르바쵸프는 공산당 중앙서기국의 농업담당 서기였어요. 그래서 식량생산을 독려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방문했었죠. 그런데 그는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길에 줄곧 트럭 하나를 쫒아서 모스크바까지 오죠. 트럭이 모스크바에 도착하자, 고르바쵸프는 트럭운전자에게 다가가서 말하죠. "동지! 내가 동지를 우크라이나에서부터 모스크바까지 따라 왔습니다. 내가 처음 동지를 만났을 때, 동지의 트럭에서는 감자가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지는 모스크바에 도착하는 순간까지도, 여러 군데에서 휴식을 취했지만, 감자가 떨어지는 걸 단도리하지 않았습니다. 동지는 감자가 떨어지는 걸 몰랐습니까?" 그러자 트럭 운전사는 말했죠. "아니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감자를 단도리 안했습니까?" "나는 당으로부터 모스크바까지 운반하라고 하는 지시를 받았지, 중간에 감자가 떨어질 경우에 감자를 단도리하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나는 당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지, 내 잘못은 없습니다. 처음에 감자를 실은 동지들이 제대로 단도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대로 미수꾸리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내 잘못이 아닙니다."

 

고르바쵸프는 그 때, 큰 깨달음을 얻죠.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즉 생산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바로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이 치명적인 암에 걸려 있다는 거였죠. 그것은 어떤 암이냐? 기계적 평형이라고 하는 불치병에 걸려 있다는 거였죠.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난지 70년이 된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은모든 사람들이 공평해야 한다고 하는 그 기계적 평형에, 그 함정에, 그 늪에 빠져 있었던 거죠. 어느 누구도 그 잘못을 깨닫고 있지 못했어요.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바로 감자를 운반했던 트럭을 보고서 소련이 살기 위해서는 개혁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죠. 그 기계적 평형을 깨트리지 않으면 연방은 붕괴할 것이고, 혁명 또한 70년만에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고르바쵸프는 알았어요.  

 

우리 사회가 포퓰리즘 논쟁이 치열하죠. 진보가 되었든, 보수가 되었든. 우리나라 진보와 보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진보든 보수든 기계적 평형의 함정에 빠져서 허우적거린다는 거죠. 너무 그 깊은 늪에 빠져 있어서, 헤어날 가망이 보이지 않죠. 고르바쵸프는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을 살리기 위해서 페레스트로이카라고 하는 개혁을 시작했죠. 그러나 소련 연방은 해체를 막지 못했어요. 왜? 70년간 사람들의 의식이 기계적으로 고착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르바쵸프는 깨어났지만, 모든 사람들이 잠든 사회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결국은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은 해체되었고, 3등 국가로 전락했죠.우리 사회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하는 법이 없죠. 다행히 대한민국은 좁아서 해체될 연방은 없죠. 그렇지만 국민이 기계적 평형의 사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오늘의 고통을 반복하게 되겠죠. 우리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에 증오심을 나타내죠. 왜 그 사건이 생길 수 밖에 없는가? 그 사회적 환경과 그 사회적 동기와 그 사람의 가정 환경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 관심이 없어요.          

 

부처님께서 어느 날 사리푸트라 존자가 제자를 가르치는 것을 봤죠. 제자는 너무 힘들어 했어요. 그것은 오랫동안 부처님이 주시하고, 본 것이기도 하죠. 그래서 하루는 부처님이 사리푸트라 존자에게 그 제자를 가르치지 말라고 하죠. 그리고 부처님이 직접 가르치는 거예요. 얼마 있지 않아서, 그 비구는 아라한과를 얻죠. 사리푸트라 존자가 말하죠. "어째서 부처님께서 가르치자 그가 아라한과를 얻습니까? "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그대는 그 비구에게 부정관을 가르쳤다. 근대 그 비구는, 그 비구가 가지고 있는 속성상, 그 비구는 부정관을 하면 할수록  고통과 절망과 좌절을 느끼게 된다. 내가 그에게 가르친 것은 인연관이었다. 연못 가에 앉아서 그저 연꽃이 피고 지는 것을 바라보게 했을 뿐이다." 사리푸트라 존자는 기계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같은 걸 가르쳤던 거예요. 사람은 각자가 그 속성이 다르죠. 그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일란성 쌍둥이도 그 성질이 다릅니다. 그런데 하물며 전혀 다른 환경과 전혀 다른 부모 속에서 성장한 사람이 어떻게 똑같을 수가 있겠어요. 다를 수밖에 없죠. 부처님께서는 그거를 파악한 거예요. 사리푸트라 존자는 기계적으로 가르쳤고, 붓다는 동적으로 가르쳤던 거예요.

 

동적이라고 하는 것이 뭐예요? 동적이라고 하는 것은 살아서 생동감있게 움직이는 걸 말하죠. 중국 문인화 이론의 확립자 동기창은 그의 화론인 화선실 수필에서 기운생동이라고 하는 말로 시작하죠. 그림과 글씨는 기운이 생동해야 된다는 거예요. 동기창 이후에는 서화이론에는 기운생동이라고 하는 네 글자로 정리하죠. 글씨와 그림에는 기운이 생동해야 된다. 기운 생동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유기체처럼 살아 숨쉬어야 된다는 거예요. 바로 동적인 상태를 말하죠.       

 

고르바쵸프가 쏘련 사회의 암적인 존재인, 그 불치병인 기계적 평형을 깨트릴라고 할라다 실패했죠. 부처님은 동적 평형의 삶을 살아야 된다고 그래요. 우리의 사고가 동적인 평형이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기계적인 사고에 고착화 되어 있죠. 고착화 되어 있어요.

 

영국의 버나드 쇼가 어느 날, 로뎅이라면 끔찍이 싫어하던 평론가들을 초청했죠. 그리고 버나드 쇼가 조각품 하나를 내 놨죠. "제가 요새 로뎅의 작품을 하나 어렵게 구했습니다. 이 작품에 대해서 평론가들께서 좀 품평을 해 주시죠." 조금 전에 얘기했듯이, 로뎅이라고 하면 치를 떨 정도로 싫어했던 사람들이예요. 로뎅의 조각이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 순간 초청받은 사람들은 온갖 험담을 쏟아내기 시작했죠. 조각 봐라! 이 따우 조각이 어딨냐? 이봐라, 여여여여여... 여긴 하다 말았네. 끌이 가다 말았잖아. 야! 로뎅, 얘 완전 사기꾼이야! 아니 이 따우도 작품이라고 내놔? 아니, 이런 작품을 좋아하는 인간들은 뭐야? 온갖 험담을 늘어 놓고 있는데, 버나드 쇼가 이렇게 이야기하죠. "아이고! 여러분,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요. 제가 로뎅의 작품을 내 놓다는 것이 그만 실수로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내놨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이건 미켈란젤로의 조각입니다." 그러자 평론가들은 입을 닫고(?) 아무 말도 못했죠. 로뎅의 작품이라고 하는 순간, 온갖 비난을 쏟아내던 사람들이 갑자기 그 작품이 로뎅의 작품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그 위대한 조각가 미켈란젤로꺼라니까 그만 다 명품이라고 말했죠. 그들은 로뎅이라고 하는 말을 듣는 순간 모든 평형이 깨져 버렸죠. 그들의 사고는 기계적이었어요. 로뎅이라고 하는 말을 듣는 순간 로뎅에 대한 그 분노와 그 저주가 쏟아져 나온 거예요.

 

왜 부처님께서 부처님의 장자라고 지칭되고, 부처님의 수석 제자라고 지칭되고, 부처님의 계승자라고까지 지칭되는 사리불을 제자가 지도하던 것에서 손을 떼게 하고 당신이 직접 가셨을까요? 우리는 기계적인 사고를 하죠, 동적인 사고를 못하고. 만약에 고르바쵸프가 만났던 그 운전기사가 어느 날 대한민국에서 만났더라면, 아마 그런 기사는 없을 겁니다. 대한민국 트럭기사들은 당연히 트럭에 실린 물건이 떨어지거나 흔들리며는 단도리를 다시 하죠. 달리다가도 세워서 합니다. 고속도로 갓길에 세워 놓고서라도 하죠. 그 트럭 운전사는 그걸 하지 않죠. 그걸 하지 못한 이유는 그의 사고가 기계적으로 고착화 되어있었기 때문이죠.  

 

우리는 무엇은 이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스님은 이래야 된다고 생각하고, 목사는 이래야 된다고 생각하고, 선생님은 이래야 된다고 생각하고, 공무원은 이래야 된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항상 이래야 된다고 생각하죠. 이래야 되는 것는 것은 없죠. 저래야 될 수도 있는 거죠. 어떻게 항상 같을 수가 있겠는가요?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항상 같을 수가 있는가요? 부처님이 쏘냐비구에게 위냐(중도?)의 가르침을 주신 이유도 거기에 있지요. 언제나 평형을 유지해야 되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지만 그 평형이라고 하는 것이 언제나 같을 수는 없습니다. 같아서도 안 되죠.

 

우리가 다 아는 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죠. 안방에 가면 시어머니 말이 옳고, 부엌에 오면 며느리 말이 옳다고. 안방에가면 시어머니 말이 분명 옳습니다. 그러나 부엌에 가서 며느리 말을 들어 보면 며느리가 옳지요. 며느리와 시어머니 입장과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죠. 여기에서는 빛나는 것도, 저기에서는 쓸모가 없죠. 우리가 익히아는 중국 고사 중에 이런 고사가 있지 않던가요. 어떤 사람이 돼지를 키웠는데, 돼지 새끼를 낳았는데 흰 돼지를 낳았다는 거죠. 그래서 아! 이거는 너무나 귀한 돼지다. 왜? 그 지방에는 다 검은 돼지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 먼 요동 지방에서 임금님께 진상할려고, 그 돼지를 고이 모시고 갔는데, 그 곳에 가니 모든 돼지는 다 색깔이 하얗더란 거죠. 요동에서는 흰 돼지가 없어서, 귀하디 귀한 돼지라고 생각했는데, 서울 가보니까 모든 돼지 색깔이 다 희더라.

 

우리가 그런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죠. 가장 내가 귀하다고 여기는 그것이, 그 곳에 가니 모두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 얼마 전에 미얀마에 다녀오신 스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미얀마의 어떤 스님이 휴대폰을 꺼내 놓고 그렇게 자랑을 하더래요. 전화도 오지 않는데 막 받는 척하고. 왜 그러냐면 거기는 귀하니까. 그래서 몇 날 몇 일을 보던 그 스님이 견디다 못해서, 너무나 앞에서 고문을 해대니까. 고문이라는 것이 남산에 모셔가서 이영희 선생 고문하는 듯이 고문하는 것이 고문만이 아니예요. 그것도 고문이걸랑. 그래서 그 스님이 이렇게 이야기 했다는 거예요. 한국에는 초등학교 1학년도 이걸 들고 다니거든. 그 곳에서는 휴대폰 하나가 귀하디 귀한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초등학생도 들고 다니죠. 거 아무 것도 아니거든. 어느 곳에서는 생명을 걸 정도로 귀한 것이지만, 어느 곳에서는 발길에 채어 귀찮아서 쓸어버려야 될 정도로 그저 별 볼일 없는 그런 물건일 수도 있다는 거죠.                 

 

부처님은 동적인 평형인 삶을 살라고 우리한테 이야기 하죠. 기계적인 평형을 유지하는 사회는 붕괴한다는 거죠. 기계적인 평형을 사는 사람은 그 삶이 권태롭죠. 그리고 그 삶이 재미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면 기운생동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왜 삽니까? 즐겁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유는 즐겁기 위해서예요. 그 얘기는 머냐면 즐겁지 않은 삶은 의미가 없다는 얘기예요. 우리가 왜 수행합니까? 즐겁기 위해서예요. 우리가 왜 기도합니까? 즐겁기 위해서예요. 우리가 왜 먹습니까? 즐겁기 위해서예요. 우리가 왜 잠을 잡니까? 즐겁기 위해서죠. 즐겁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중국에 이런 격언이 있죠. 공명처럼 장가들지 마라! 천하의 귀재라고 하는 공명이 인물이 박색인 여자하고 결혼했다고 해서 나온 말이 바로 그 말이예요. 공명처럼 장가가지 마라! 얼마나 공명의 아내가 인물이 빠졌으면, 공명처럼 장가가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직도 그 말이 남아 있겠어요. 근데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는 공명이 즐거운데야 누가 뭐라 할 게 있겠어요. 내가 즐거운데, 니들이 뭔 관계있어? 공명이 그녀와 있으면, 즐거운데 무슨 관계가 있어요? 공명이 보면 이렇게 이렇게 이야기 하겠죠. 너희들 부류들이야 본래 그저 육안으로 밖에 사람을  보지 못하니, 그저 가죽 뻔드럼한 것만 보겠지. 나는 심안이 열린 사람이라 그녀의 지혜를 본다네. 너희들 부류하고는 격이 달라. 그 뻔드르르한 피부야 세월이 지나면 쭈글쭈글한 밤송이가 되겠지. 내 아내는 지혜로와서 평생을 같이 살아도 즐겁고 행복하다네. 공명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거죠.

 

그녀는 정말 지혜로운 여자였죠. 조조가 형주를 칠적에 공명의 아내를 인질로 잡기 위해서 군사를 보내죠. 너무나 전광석화 같아서 그의 아내는 피난을 가지 못했어요. 그녀는 언제난 무명옷을 입고 살았다고 그러죠. 군사가 들어와서 공명의 아내가 어디 있냐고 묻자, 공명의 아내는 말했죠. "마님은 벌써 피난을 가셨는데요." 군사들은 그녀가 공명의 아내라는 것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왜? 못생긴데다 옷이 초라했기 때문에. 공명이라는 귀재가 그런 여자하고 살리라고 하는 것은 생각을 못 했죠. 그러자 공명의 아내는 태연하게 말했다는 거예요. 마님이 아직 계시겠습니까? 벌써 갔지. 그러자 군사들은 조조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보고했죠. 하녀만 집을 지키고 있던데요. 우리의 기계적인 사고의 평형은 이렇죠. 공명이라고 하는 귀재가 당연히 뛰어난 미녀와 살거라고 생각을 하죠. 그렇지 않은가요? 만약에 그들이 동적인 평형의 사고를 했더라면, 아마 그 빠른 시간 내에 그의 가족이 피난가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고, 또 주위에 탐문만 했었어도 그녀가 그의 아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겠죠. 우리가 동적인 평형이어야 되는 것은 그래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계적인 사고가 고착화되어서, 기계적인 평형의 사고밖에 못하죠. 사리불 같은 위대한 존자도 똑같은 것을 똑같이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치다가 부처님께 죽비를 맞은거죠. 모든 사람은 같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동적인 사고를 할려고, 동적인 평형의 사고를 할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아까 우리는 즐겁기 위해 산다고 한 이유도 그거예요. 우리의 삶의 목적은 즐겁기 위해서예요. 내가 미안마에 가서 받은 가르침이 바로 이거예요. 내 생각을 바꿔 논 한 말씀이 바로 이겁니다. 즐겁지 않으면 수행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난행고행이죠. 뭔가를 극복해야 되고, 뭔가를 초월해야 되고, 이빨을 뽀드득 뽀드득 갈면서 뭔가를 해야지만이 그게 수행이예요.  도토리 주워 먹고, 그야말로 아장이 여절하고 배슬이 여빙하지 않으면, 수행이 아니여! 그저 주린 창자가 끊어지고, 절하는 무릎이 얼음장이 되어도 절해야 그것이 수행이야. 뭔가를 극복하고 뭔가를 해야죠. 사야도께서 한 마디로 짤라 버리시더군. 즐겁지 않은 것이 어찌 수행이더냐.  

 

[주:  절하는 무릎이 얼음과 같을지라도 불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으며 주린 창자가 끊어질 듯하여도 마음속에 밥을 구하는 생각이 없노라는 뜻.  배슬여빙무연화심(拜膝如氷無戀火心) 아장여절무구식념(餓腸如切無求食念)] 

 

지난 주에 이어서 동적 평형이라고 하는 주제로다가 강론을 했습니다. 여기까지입니다. 함께 좌선을 좀 하시겠습니다. 탁!탁!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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