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혜천스님설교

2019. 12. 14. 14:0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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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강론: 2556년 9월 9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우선 공지사항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 주 일요일은 초하루와 겹치기 때문에 일요법회와 초하루 법회를 함께 하겠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에 참석하실 분들은 원래 법회시간보다 1시간 늦춰서,10시 30분까지 참석하시면 되겠습니다. 다음 주가 초하루 맞죠, 음력.

 

오늘 주제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입니다.

 

쉬라바스티(Shravasti 사위성 舍衛城)교외의 빈민촌에 우물가에서 처녀가 물을 긷고 있었죠. 처녀가 물을 긷고 있는데, 노란 가사를 입은 수행자가 하나 다가와서 말을 걸었습니다. "아가씨! 제가 지금 몹시 갈증이 납니다. 물을 좀 떠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그러자 그 처녀는 수행자를 지긋이 한참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하죠. "저는 찬다라의 마탕카입니다. 귀한 분에게는 물을 떠 드릴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그 수행자는 이렇게 말했죠. "나는 붓다의 제자인 아난다라고 합니다. 붓다께서는 평상시에 남자들은 아들이라고 부르고, 여자들은 딸이라고 부르죠. 우리 모두는 형제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의 제자들은 바루나를 따지지 않습니다." 

 

찬다라라고 하는 말은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을 뜻하죠. 바루나는 피부의 색을 말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뿐만 아니라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사람의 피부의 색깔은 정복자와 피정복자,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뜻하죠. 그녀의 피부는 검었어요. 그것은 그녀가 불가촉천민임을 뜻하죠. 그녀는 자기가 마탕카라고 했어요. 그것은 그녀의 이름이 아니죠. 그녀가 속한 부족의 이름이었어요. 그녀가 물을 떠 줄수 없는 것은, 그녀가 물을 떠서 그에게 주면 그의 물이 부정해지기 때문이죠. 불가촉천민의 것은 상위 캐스트들은 직접 물건을 손으로 받지 않죠. 받지 않는 이유는 찬다라인 불가촉천민이 물건에 손을 대는 순간, 그 어떤 물건도 더러워지기 때문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마탕카녀는 아난다에게 물을 줄수가 없다는 거죠. 거기에 대해서, 아난다는 우리 모두가 형제와 자매기 때문에 바루나, 즉 피부의 색깔은 보지 않는다 그랬어요. 

 

그러자 이윽고 그 처녀는 아난다에게 물을 떠 줬고, 그리고 아난다는 돌아갔어요. 그 처녀는 물동이를 이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마치 구름을 걷는거와 같았죠. 세상에! 그렇게 멋진 수행자가 있다니! 그의 음성은 여전히 귓가에 머물러 있었고, 그의 눈빛은 그녀의 가슴 속에 있었죠. 그래서 마탕카는 결심했어요. 아난다와 결혼 해야지! 그와 하루를 살더라도 그와 결혼할 수 있다면, 그녀는 행복하다고 생각했죠.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굳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니까요.  

 

다른 장면 하나를 보죠. 때는 조선조 인조때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문상을 가기 위해서 길을 나섰죠. 아버지에게는 친구가 되고, 동시에 사돈입니다. 아들에게는 장인이죠. 그들은 상가에 도착해서, 빈소에 들어서 조문을 표하면서 곡을 했죠. 그런데 갑자기 어떤 여인이 소복을 입고, 술과 사과를 들고 오더니 술을 따라서 아들에게 먹으라고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잠시 당혹스런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그 술을 받아서 벌컥 벌컥 마셨죠. 거듭 세 잔을 말이죠. 그러자 그 여인은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돌아갔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버지의 표정은 노기가 가득했어요. 그리고 이윽고 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너는 지금 장인의 빈소에 들어서 주는 술을 받아 마시다니, 이게 무슨 비례란 말이더냐? 예를 안다고 하는 니가 어찌 이같은 짓을 할 수 있단 말이냐?" 그러자 아들은 이렇게 답했어요. "아버지! 저도 이것이 이것이 예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 사람은 정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제가 저 사람이 주는 술을 거부하고 마시지 않는다면, 저 사람은 무엇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겠습니까? 제가 저 사람의 술을 받아 마신 것은 예를 몰라서가 아니라, 저 사람의 정을 빼앗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은 단지 이 세상을 그저 정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자 아버지가 아들의 손을 잡고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그러죠. "네가 나보다 더 학(學)이 깊구나! 내가 너를 꾸짖은 것이 도리어 부끄럽구나!" 

 

아버지는 율곡 이이의 제자이자 조선 예학의 완성자라고 하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고, 그 아들은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입니다. 김장생의 아들이죠. 이 두 사람은 동방 18현으로 문묘에 배향된 조선을 대표하는 선비죠. 부자가 문묘에 배향된 것은 이 부자밖에 없습니다. 광산김씨를 명문 중에 명문으로 꼽은 이유는 벼슬아치들이 많이 나와서이기도 하지만, 부자가 가장 영광스럽다고 하는 문묘에 배향됐기 때문이죠.

 

신독재 김집은 예을 몰라서 그 자리에서 술을 받아 마신게 아니었습니다. 그 여인이 누군가요? 눈치채셨죠? 짐작하셨죠?  그녀는 신독재 김집의 아내입니다. 그의 아내는 우리가 말하는 바보 천치였어요. 그의 아내는 지능이 다섯 살, 여섯 살 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런 여인이었죠. 그의 아내는 아버지의 상중이라고 하는 그런 관념이 없었죠. 자기를 존중해주고 자기를 사랑해주는 남편을 보자, 그저 정이 동해서 아무 샹각이 없었죠. 그저 남편에게 술 한잔을 주고 싶었을 뿐이예요. 신독재 김집은 아내의 그런 정을 빼앗을 수 없었죠. 그것이 예나 비례냐고 하는 것은 중요치 않다는 거죠. 아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정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정을 빼앗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마탕카녀가 아난다에게 느낀 것도 정이죠. 신독재 김집의 아내가 김집을 보고, 동한 것 역시 정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별을 보면 네 생각이 나! 나는 달을 봐도 네 생각이 나지. 나는 따가운 햇빛을 받을 때도 네 생각이 나, 바람이 스쳐가는 소리에도 네 생각이 나고, 맛 있는 음식을 봐도 네 생각이 나지, 한 여름에 천둥과 비바람이 몰아쳐서 내 몸을 적실 때도 네 생각이 나, 나는 너를 빼 놓고는 아무 것도 말할 수가 없어. 나는 너를 빼 놓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 나는 너를 빼놓고는 아무 것도 할수가 없어. 나는 나를 이야기하면서도 너를 이야기하고 있어. 왜냐고?  나는 너이걸랑. 너는 곧 나이기도 하지. 너와 나는 오직 이 하나의 이름 아래 있으니까. 그 이름이 뭔지 너도 알지? 그것은 바로 정이야. 우리는 정을 살아.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예로서 산다고 하지.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도로 산다고 하지. 어떤 사람은 세상을 법으로 산다고도 해. 어떤 사람은 세상을 깨달음으로 산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신의 구원 속에서 산다고 하지. 그런데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봤을 때, 정이라고 하는 이 한 단어를 그것들이 뛰어넘을 수 있을까? 우리는 네 이름을 빼놓고는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못해. 우리는 네 이름을 부르지 않고는 아무도 만날 수 없지. 부모와 자식과 형제와 자매도, 부부도, 친구도 너의 이름이 빠지는 순간 우리에게는 아무 의미도 주지 못하지. 오직 네 이름이 너와 나 사이에 선으로서 연결되어 있을 뿐. 너와 나 사이에 너의 이름이 점을 찍을 때, 너와 나 사이에 너의 이름이 평면을 그릴 때,  너와 나 사이에 너의 이름이 내 마음 속에 입체로서 각인될 때, 우리는 부모와 자식이 되고,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고, 친구가 되고, 부부가 되고. 너를 빼놓고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정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정이라는 것을 한한대사전에 보면, 글자를 마음 정(情)이라고 하죠. 정은 마음입니다. 정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요? 명예로 사는 가요, 권력으로 사는 가요, 아니면 권력으로 사는 가요? 아니면 사랑으로 사는가요?  돈도, 명예도, 권력도, 사랑도 우리를 북돋와줄 수 있지만, 우리를 존재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하나의 이름 아래서입니다. 그것은 정이죠. 정이라고 하는 하나의 단어를 빼앗아 버리면, 우리에게는 남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치 쭉정이와 같아지죠. 쭉정이는 바람이 불면, 모두 날아가고 남지 않습니다. 명예도, 권력도, 돈도, 사랑도 정이라고 하는 하나의 글자가 빠지면, 그저 바람 앞에 흩날리는 쭉정이와 같죠.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것 중의 하나가 무엇일까요? 돈을 잃어버렸나요, 권력을 잃어버렸나요, 며예를 잃어버렸나요, 사랑을 잃어버렸나요? 돈을 잃어버리고, 명예을 잃어버리고, 권력을 잃어버리고, 사랑을 잃어버린 건 작은 겁니다. 정을 잃어버린 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거죠. 

 

나는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권력과 명예와 돈과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그랬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한다고 해서 부끄러울 것이 없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을 감출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을 추구하면서도, 권력을 추구하지 않는 척하고, 명예를 얻지 못해서 상갓집 개모양 돌아다니면서도, 명예를 초개와 같이 여기는 척 하죠. 돈을 얻기 위해서 비굴한 짓을 수없이 반복하면서도, 돈은 사람을 타락시킨다라고 말하죠. 사랑을 얻기 위해서 감언이설을 다 늘어 놓으면서도 자기는 정직하다고 이야기하죠. 그것을 추구해서 얻은다 한들, 인간의 본질인, 인간의 본성 이전에 뭐라고 이름붙일 수 없는 정이라고 하는 그 하나의 단어를 떠나서, 우리가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정을 잃어버린지가 좀 된 거 같애요.

 

신독재 김집이 훌륭한 유학자이고, 그가 예학의 대가이기 때문에, 김집을 내가 오늘 거론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예라고 하는 것, 도학이라고 하는 것, 그 이전에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다는 거예요. 정이라고 하는 그 인간의 본질 말이예요. 김집인들, 곡을 하는 와중에 술을 받아 먹었을 때, 아버지 사계 김장생으로부터 꾸지람을 듣으리라고 하는 것을 어찌 몰랐겠어요? 그도 예학의 대가인데, 어찌 세상 사람들이, 그저 평범한 선비라도 해서는 안 될 짓이라고 하는 것을 왜 몰랐겠어요.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꾸지람도, 세상의 비난과 세상의 눈과 세상의 귀를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그저 아무 것도 모르고, 오직 살아가는 이유 하나가 남편인 김집을 바라보는 그 하나의 마음, 그 하나의 마음을 빼앗을 수 없었던 거죠. 김집이, 신독재 선생이 훌륭한 선비인 것은 그의 학문 때문이 아니라, 그의 따뜻한 마음 때문이죠.   

 

우리가 정이라고 하는 마음을 떠나서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아까 이야기했듯이, 별을 봐도, 달을 봐도, 비를 맞아도, 그를 생각하지 않고는, 그를 떠올리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 이것이 바로 정입니다. 우리가 이 시점에 회복해야 할 것은 바로 정입니다. 우리가 정을 회복해야 해요. 정은 우리의 존재이며, 정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정으로 삽니다. 다른 거로 사는게 아니예요. 우리 인간에게서 정을 분리해 버린다면,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부처님은 자애심을 강조했죠. 자애심과 정이 어떻게 다른가요? 정이라고 하는 것을 따나서 자애심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마탕카가 아난다를 언제 봤다고, 우물가에서 단 한 번 봤을 뿐인데, 마탕카의 그 마음에 불을 지핀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정이죠. 정은 모든 잊게 하고, 정은 모든 것을 얻게 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잊게하는 것은 내 삶을 잊게 하는 것이고, 모든 것을 얻게하는 것은 명예와 권력과 돈과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모든 것을 초월하게 하죠.   

 

붓다는 13년만에 고향인 카빌라로 돌아가죠. 어느 날 붓다는 동생인 난다가 머무르고 있는 궁궐 전각 앞애 서 있죠. 그 날은 난다의 혼례식이 있는 날이었어요. 난다는 그가 존경하는 형이자, 붓다가 그의 혼례식 날 아침에 그의 전각 앞에 발우를 들고 서자 너무 기뻤죠. 새신랑인 난다는 붓다의 발우를 받아서, 혼례 음식을 담았어요. 그리고 그걸 건네려고 붓다에게 다가갔는데, 붓다는 받지 않고, 돌아서서 걸었죠. 그러자 난다는 '아! 이 발우를 들고 문밖까지 오라는 소리구나!' 하는 뜻이라고 생각하고는 발우를 들고 붓다를 따라 갔죠. 대문에서 건네려고 했는데, 난다의 생각과는 달리 붓다는 돌아보지 않고 걸었어요. 그러자 난다는 그 때 깨달았죠. 아! 붓다께서 나에게 특별히 하실 말씀이 있었어. 붓다의 처소까지 따라오라는 뜻이구나! 그래서 그는 발우를 들고 붓다를 따라갔죠. 처소에 도착한 붓다는 발을 씻고 앉았어요. 그러자 난다는 붓다에게 발우를 드렸죠. 

 

붓다는 발우를 받으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난다야! 너도 출가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러자 난다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죠. '아니요, 저는 순다리가 좋습니다.' 생각은 이렇게 했는데, 입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죠. "저도 원하던 바입니다." 그러자 붓다는 사리푸트라에게 말했죠. "난다가 일찍부터 출가를 원하고 있었다네. 난다를 출가시키게." 난다는 원하지도 않는 출가를 했죠. 정말 자기 생각에는 '출가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생각했지만, 생각과 다르게 입은 출가를 원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는 출가를 했어요.  

 

그의 아내가 되기로 예정되어 있던 순다리 난다는 미녀였다고 그러죠. 혼례식 날 아침에 아무 생각이 없이 출가한 난다는 순다리가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아무 말없이, 이유도 없이 출가해버린 난다를 순다리 난다 또한 잊을 수가 없었죠. 그래서 난다는 아침만 되면 탁발을 순다리 난다 집으로 갔죠. 그저 순다리 난다 집앞에 서면 기다렸던 순다리 난다는 그의 연인인 난다의 발우에 밥을 담았죠. 난다의 눈에도 눈물이 흐르고, 순다리 난다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죠. 이 이야기도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오늘의 주제와 맞게, 오늘은 그 뒷이야기를 할려는 것이 아닙니다.  

 

순다리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도, 난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도, 그것이 무엇이라고 불러야 될까요? 그것이 눈물인가요? 물론 그의 육체에서 흐르는 생리 현상인 것은 눈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마는 그것은 그 두 사람의 눈물 샘에서 흘러내리는 액체가 아니라, 순다리 난다와 난다의 마음 속에 있는 정이 물결치듯이 흐르는 거죠. 순다리 난다의 눈에서 흐르는 것도 정이고, 난다의 눈에서 흐르는 것도 정이예요. 그 두 사람의 감정은 정이라고 하는 한 마디, 한 글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어요. 

 

마탕카녀가 아난다에게 느끼는 것도, 신독재 김집의 아내가 김집을 보는 순간 일어난 것도, 순다리 난다와 난다의 눈에서 흐르는 것도 단 하나, 그것은 오직 정이라고 하는 하나의 마음입니다. 오늘의 주제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입니다. 사람은 정으로 살 뿐입니다. 우리에게서 정이, 내 몸과 마음에서 흘러 나가는 순간, 우리는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입니다. 풀과 나무와 동물과는 다르게 정으로만 삽니다. 정을 떠나서는 인간은 살 수가 없죠.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죠.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마라, 못 만나 괴롭다. 미운 사람을 만들지 마라, 만나서 괴롭다. 사랑하는 사람은 고운 정이 있고, 미워하는 사람은 미운 정이 있습니다. 미워하는 것도 정이요, 좋아하는 것도 정이죠. 고운 것도 정이요, 곱지 않은 것도 정이예요. 나는 붓다의 이 말씀이 차~~~암 맘에 듭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마라, 못만나 괴롭다. 미운 사람도 만들지 마라, 만나 괴롭다. 사랑하는 사람/ 미운 사람, 못만남/ 만남. 우리는 일생을 그 사이에 있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미운 정이 되었든, 그것이 고운 정이 되었든, 인간은 오직 정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거예요.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늘은 어느 분이 좀 기도를 이끌어 주실라는 가요.  오랫만에 기도를 한 번 이끌어 보겠습니다. 다함께 합장하시죠.

 

우러러 온 법계에 충만하신 부처님! 저희들의 마음 속에 정이 샘솟게 해주시고, 그 샘솟은 정이 저의 온 몸을 감싸 씻게 하소서! 내 몸을 감싸 안은 이 정이, 이 흐름이 나와 한 이불을 덮고 사는 그를 적셔주기를 바라며, 내 몸과 마음으로 잉태한 내 아이들에게도 그 정이 넘쳐흐르기를 원하오며, 저를 이 땅에 존재케 해주신 내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도 그 정이 마음 깊이 이르게 하소서. 제가 오늘 일심으로 기도하오니, 부처님께서 저의 마음 속에 부처님의 정을 가득 채워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싸두 싸두 싸두.   

 

잠시 좌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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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란영 카페가요 18곡



김란영 카페가요 모음 18
01. 사랑
02. 난 아직 모르잖아요
03. 사랑하기에
04. 관계
05. 가슴앓이
06. 지금
07. 백년의 약속
08. 귀로
09. 기억속으로
10. 광화문 연가
11. 내 여자라니까
12. 사랑을 위하여
13. 약속도 없는 사랑
14. 꿈에
15. 보이지 않는 사랑
16. 너에게로 또 다시
17. 사랑해도 될까요
18. 묻어버린 아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