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도덕을 초월한 깨달음은 없다|…… 혜천스님설교

2020. 1. 26. 11:3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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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강론: 2556년 11월 11일 

윤리도덕을 초월한 깨달음은 없다

 

 


 

 





오늘 주제는 '윤리 도덕을 초월한 깨달음은 없다'입니다.

 

윤리와 도덕을 초월한 깨달음은 없다, 그것이 오늘 주제입니다. 우리가 윤리와 도덕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 가요? 왠지 모르게 그 말에 일정 부분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가요? 저 같은 경우는 윤리와 도덕이라는 말을 들으면, 일정 부분 거부감이 들어요. 왜 우리가 윤리와 도덕이라는 말에 일정 부분 거부감을 느낄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윤리와 도덕은 관제화(官制化)된 윤리와 도덕이기 때문이죠. 적어도 과거 동양에서는,  윤리와 도덕은 관제화된 것이었어요. 국가가 윤리와 도덕의 기준을 세우고, 그 윤리와 도덕을 따를 것을 강요했다는 얘기죠. 과거 시대의 윤리는 삼강(三綱)과 오륜(五倫)과 삼종(三從)으로 대변되죠. 도덕은 온량공검양(()으로 대변됩니다.  온은 온화(溫和), 량은 선량(善良), 공은 공경(恭敬) , 검은 검약(儉約), 양은 양보(讓步), 이 다섯 가지를 도덕 기준으로 삼았죠. 그리고 그들이 기준을 세운 도덕과 윤리를 모든 사람들이 따를 것을 강요했습니다.

 

과거 시대, 윤리와 도덕은 철저하게 관제화된 것이었어요. 그랬기 때문에 거기에 저항하는 사람도 있었죠. 그 관제화된 윤리 도덕에 말입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명나라 말기에 양명좌파였던 주학파(泰州學派) 사람들이죠.  안산농顔山農)이라거나 하심은(何心隱)이라거나  탁오 이지(卓吾 李贄) 같은 사람들은 관제화된 윤리 도덕을 거부했어요. 그리고 거기에 저항했죠. 그래서 우리는 윤리와 도덕이라는 걸 딱 들으면 왠지 거부감이 느껴집니다.   

 

우리 조선조 500년에도 중국이 관제화한, 그 윤리 도덕을 수입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했죠. 그리고 그들의 기준에 벗어나면 강상윤리(綱常倫理)*를 벗어났다고 해서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송대에 정이천(程伊川)이런 말을 했죠. "죽는 것은 적은 일이요, 절개를 잃는 것은 큰 일이다" 라고 주장하면서, 모든 여자들의 개가를 금지했죠. 그래서 나온 것이 삼종 아닙니까?  모든 여자는 태어나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을 해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라야 된다. 송대의 정이천이가 죽는 것은 작은 것이고, 절개를 잃는 것은 큰 일이라고 주장한 이래, 조선조 500년 여자들에게는 암흑의 시대였죠. 과거의 윤리와 도덕은 관제화된 것이었습니다. 국가가 그 기준을 제시하고, 국가 그것을 판별했죠. 설사 내가 그들이 정한 강상윤리를 범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강상윤리를 범했다는 지목만 받아도, 그것이 음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은 조선 사회에서 용납받지 못했죠.  

 

과거 시대에 윤리와 도덕이 관제화되었다면, 현대 시대는 어떤가요? 우리는 윤리와 도덕이 박제화

(剝製化)된 시대에 살고 있죠. 과거에는 윤리와 도덕에 저항하는 것은 관제화된, 권력화된, 폭력화된 윤리와 도덕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근데 현대에는 윤리와 도덕에 대한 저항은 철저히 자기 기만이죠. 왜냐하면 현대의 윤리와 도덕은 박제화되어 있으니까요. 

 

옛날에 성철스님이 열반하셨을 때, 세상 사람들이 해인사를 달려갈 때, 저도 거기에 편승해서 달려간 적이 있죠. 나는 아직도 그렇게 사람이 많이 몰린 것은 보지 못했어요. 산과 강과 들과 길과 고속도로에는 사람들이 넘쳐났죠. 고속도로는 기능이 상실했어요. 고속도로가 아니었어요, 다 주차장이었어요. 모든 사람들이 고속도로에 차를 그대로 세우고 걸어 갔으니까요. 재밌는 건 말입니다, 한 사람이 고속도로에 차를 세우고 불법주차를 하면, 경찰이 그 차를 단속한다는 거죠. 긴데, 수 백대, 수천대가 모두 고속도로에다 차를 세우면, 그곳은 주차장이죠. 경찰이 나와서 차를 단속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차를 주차하도록 돕고 있더군요.

 

일요일이 되면, 서울의 대형교회 주변에는 불법 주차로 몸살을 앓죠. 하다 못해 강변도로에도 불법주차를 하죠. 신에게 기도해서, 신에게 복을 받기 위해서 불법을 저지르는 거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현대사회는 윤리와 도덕이 철저히 박제화되어 있기 때문이예요. 과거 시대에 윤리와 관제화되어 있다면, 현대 시대의 윤리와 도덕은 박제화되어 있죠. 스스로 윤리와 도덕을 무력화시키죠.

 

어떤 사람들은 깨달음은 윤리와 도덕을 초월해 있다고 주장합니다. 정말,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윤리와 도덕을 초월할 수 있을까요? 본래 깨달음이 윤리와 도덕을 초월한다고 하는 주장은 중국에서 불교가 유자(儒者)들로부터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집단이라고 공격받기 시작하면서, 그것에 대응하기 위해서 개발한 논리였어요. 불교는 무부무군의 집단이다. 무부는 부모가 없다는 뜻이고, 무군은 임금도 없다는 뜻입니다. 불교는 임금도 섬기지 않고, 부모도 섬기지 않으니까 윤리와 도덕을 거슬러는 무도한 집단이다, 이것이 유자들의 논리였어요. 중국에서 윤리의 기준은 효와 충입니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었어요. 그것이 중국의 윤리 도덕의 기준입니다. 거기에 대응하기 위해서 개발한 논리가 깨달음은 윤리와 도덕을 초월해 있다는 것이었어요. 한 마디로 말해서, 멍청한 대응이었죠. 속된 표현으로 말해서, 어떻게 한결같이 돌들만 모여있는지, 그런 논리로 대응했는지 알 수 없죠. 

 

언제 부처님께서 윤리와 도덕을 버린 적이 있던가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직접 관을 메어 장례를 치렀고, 열 세살 먹은 아들이 유산을 요구하자 그에게 다르마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라훌라는 부처님의 10대 제자로서 지금 이 시대에도 추앙을 받죠. 그의 이모이자, 그의 법적인 어머니이기도 한 마하파자파티와 그의 아내인 야소다라가 먼 길을 찾아와서 출가를 청했을 때, 아난다의 청을 수용하는 것으로서 그들의 출가를 허락하죠. 마하파자파티와 야소다라 이전에 여자가 정식으로 출가하는 그런 집단은 인도에는 없었습니다. 비로소 여자가 출가라는 것을 공인받고, 시작된 것이 그 때죠. 그로 인해서 붓다는 다른 이교도들로부터 끊임없는 비난을 받죠. 여자의 출가를 허락했기 때문에.

 

붓다가 언제 자기 동족을 버린 적이 있던가요? 비두다바가 카빌라를 공격할 때, 붓다는 땡볕에서 비두다바의 군대를 저지하죠. 무려 세 번이나 말입니다. 비두다바가 군대를 이끌고 그의 고국을 침공할 때, 붓다는 땡볕에 앉습니다. 비두다바는 말에서 내려 부처님께 묻죠. "세존이시여! 왜 이렇게 뜨거운 땡볕 아래 이렇게 앉아 계십니까? " "동족은 시원한 그늘과 같은 것이요.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내 동족을 위해서"라고 하죠.  그 말을 듣고 비두다바는 세 번이나 회군을 하죠. 언제 붓다가 가족을 가족을 버린 적이 있고, 언제 붓다가 그의 동족을 버린 적이 있던가요?

 

자애심이 없는 한 깨달음은 얻을 수 없다

 

나는 깨달음은 윤리와 도덕을 초월한다고 하는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한 가지 때문이죠.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 뭔가요? 깨달았다는 하는 것은 알았다는 뜻입니다. 본래 깨닫는다는 말은 안다는 뜻입니다. 알았다 이 말입니다. 무엇을 알았다는 것일까요? 다르마를 알았다는 뜻입니다. 다르마란 우주 만법의 법칙이고, 생명 존재의 규칙입니다. 그게 다르마입니다.

 

깨달음이 윤리와 도덕을 초월할 수 없는 이유는 부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애심이 없는 한 깨달음은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이 무슨 말인가요? 과거 시대의 동양의 관점에서 보면, 삼강과 오상과 삼종이 윤리입니다. 온화와 선량과 공경과 검약과 양보가 도덕입니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도덕은 무량심입니다. 자애로운 마음, 공감하는 마음, 차별없는 마음, 함께 기뻐해 줄 주 아는 마음입니다. 함께 아파해 줄 주 아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이 도덕입니다. 이 인간세계에서 이것을 떠나서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가요?  

 

인간과 오랑우탄의 다른 이유는 뭔가요? 오랑우탄은 자기 본성에 충실합니다. 배고프면 먹을 것을 찾고,짝짓기가 하고 싶으면 짝을 찾죠. 아주 본성에 충실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때에 따라서는 내가 배가 고파도 기꺼이 내 음식을 내어 주기도 하죠. 과거 시대에 우리나라는 가난했습니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도 여기 한반도에 살았던 인간은 단 한번도 양식이 풍부해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부족했던 지역이 바로 한반도죠. 지금도 마찬가지로 양식이 부족하고. 과거 시대 우리 어머니들은 자식을 위해서 스스로의 밥을 자식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는 굶었죠. 아이들이 엄마에게 엄마도 먹자고 하면, 나는 이웃에 가서 배불리 먹고 왔다고 했어요.

 

오랑우탄이나 침팬지는 자식을 위해서 자신이 배고픈 것을 참지 않습니다. 자식에게 먹을 것을 내어주진 않습니다. 자기가 먼저 먹죠. 아마 원시 시대에는 우리 인간들도 그와 같았을른지도 모르죠. 그러나 적어도 인간이 마음을 발견한 이래는 자식을 위해 기꺼이 굶는 것이 부모였습니다. 그것이 인간이죠. 왜 자식을 위해 굶었을까요? 그것이 자애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농업인의 날입니다. 옛날에 농부는 콩을 심을 때, 세 개를 심었다고 그러죠. 하나는 새를 위해서 심고, 하나는 땅 속에 벌레를 위해서 심고, 하나는 나를 위해서 심었다는 거예요. 콩 세알을 심은 이유는 거기에 있다는 거예요. 그 농부의 마음은 자애심의 발로죠. 바로 그것이 윤리입니다. 다른 게 윤리가 아니예요. 도덕이라고 하는 것이 무량심이라면, 그 무량심의 실천이 윤리죠. 마치 농부가 날짐승(강론 중에 길짐승이라고 했지만, 잘못 말씀하신 듯)을 위하고, 땅 속의 벌레를 위해서, 그리고 가족을 위해서 콩 세 알을 땅 속에 묻는 것, 그것이 윤리입니다. 

 

과거에 중국에서는 불행스럽게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가장 가까운 아함경을 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몰랐어요. 몰랐기 때문에 유자들이 무부무군의 집단이라고 공격하니까 깨달음은 윤리와 도덕을 초월한다고 하는 공허한 논리로 대응했던 거죠. 붓다는 분명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애심이 없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무량심이 충만해 있지 않으면 깨달음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무도한 인간이, 경허 만공 같은 인간이 어떻게 깨달을 수가 있는가? 그럴 수 없다는 거예요. 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기 때문에. 깨달음이라는 것은 시정잡배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양아치와 사기꾼들이 얻을 수 있는게 아닙니다. 왜 얻을 수 없을까요? 깨달음이라는 것은 인간 존재의 근원이고, 우주 만유의 본질이기 때문이죠. 내가 깨달았다는 것은 우주에서 한 점이 되었다는 뜻이고, 내가 깨달았다는 것은 우주 자체가 되었다는 걸 뜻하기도 하죠. 불행스럽게도 우리는 불교를 모른다는 거예요. 불교를 모르는 것은 불교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죠. 아마 이렇게 이야기할 겁니다. 이 산 저 산, 이 고을 저 고을, 이 동네 저 동네, 이 골짜기 저 골짜기 있는 저것들은 뭐냐고? 물론 그것이 절이 맞습니다. 불상을 모셨다고 그래서, 절일 수는 없습니다. 

 

초발심에 보면, 초심에 보면,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이라고 하는 거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오죠. 개가 코끼리 가죽을 뒤집어 쓰고, 코끼리 행세를 한다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개가 사자 가죽을 뒤집어 썼다고 그래서 사자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멀리서 봤을 때, 그것을 사자라 부를 수도 있죠. 외피가 사자라고 그래서 그 내면까지 사자일 수는 없습니다. 내면이 사자가 아닌데, 어떻게 사자 울음소리를 낼 수 있겠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런 비유를 쓰셨죠. 당나귀가 늘 사자한테 시달렸다는 거죠. 그래서 어느 날은 사자 가죽을 뒤집어쓰고 사자의 행세를 하니까, 세상에 모든 동물들이 무서워서 벌벌벌벌 떨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당나귀가 너~무나 기분이 업(UP) 이 돼서, 자기도 사자처럼 포효를 했다는 거죠. 자기는 사자처럼 포효를 했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거는 당나귀의 울음소리였다는 거죠. 그러자 주위의 짐승들이 속은 줄 알고 달려들어서, 당나귀를 찢어 죽였다는 거죠.

 

내면이 아닌데, 아무리 외피를 뒤집어 쓰고 있다고 해서 사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불상을 모셨다 그래서 절일 수 없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부처님의 정법이 아닌데 어떻게 부처님의 가르침이 될 수 있겠는가요? 이 땅에는 부처님의 정법이 너무 남루해져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사악한 견해인지도 모르고, 그것이 잘못된 지도 모르고, 깨달음은 윤리와 도덕을 초월한다는 잘못된 이야기를 뻔뻔스럽게 이야기한다는 거죠. 윤리와 도덕은 인간의, 인간 사회에 존재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것입니다. 굶주린 자식에게 내 음식을 내어주는 것이 윤리이며, 그것이 도덕입니다. 그것을 벗어난 윤리와 도덕은 없습니다. 그것을 벗어난 깨달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멀리서 농부가 부처님을 찾아왔을 때, 부처님은 그 농부에게 밥을 먼저 먹을 수 있도록 해주죠. 아난존자에게 말하죠. "아난아! 저 농부를 데려가서 배불리 먹여라, 그리고 푹 쉬게 해 주어라, 그리고 나서 나에게 데려오너라" 아난다 존자가 말하죠. "멀리서 찾아온 농부에게 가르침을 주시지 않고, 어떻게 밥부터 먼저 먹이신다 말씀입니까?"  붓다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 농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나의 가르침이아니라 한 그릇의 밥이다." 부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우리가 깊이 새겨 들어야 됩니다. 

 

달음을 박제화시키면 안 됩니다. 과거 시대에는 깨달음이 관제화 되었습니다. 현재는 깨달음을 박제화시키고 있죠. 우리가 깨달음을 논의한다고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시대에 살고 있죠. 깨달음을 논하는 것이 우스운 것은 깨달음이 박제화되어 있기 때문이예요. 지금 우리가 말하는 깨달음에는 어떤 생명력도 없습니다. 윤리와 도덕이 박제화 되었고, 깨달음 자체가 다 박제화 되었기 때문이죠. 박제화된 이유는 인간 스스로가 자신이 행하지 못하는 것을 은폐하려고 하기 때문이예요. 

 

나는 분명하게 말씀드리죠. 내가 그것을 설사 행한다 하지 못하더라도, 그 가치를 훼손시켜서는 안 됩니다. 설사 내가 윤리적이고 도덕적이지 못하다 하더라도, 내가 설사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설사 내가 그것을 지키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박제화시키면 안 됩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죠. 하늘 아래 허물 없는 인간이 어디 있더냐? 나는 이 땅 위에 사는 인간들 중에, 저 하늘 아래 사는 인간들 중에 허물이 없는 인간은 없다고 봐요. 모든 인간은 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거는 분명하죠. 무엇이 분명한가요? 적어도 지혜로운 자는 스스로의 허물을 감추거나 합리화시키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죠. 보배경에서. 깨달은 자는 잘못을 감추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의 허물을 합리화시켜 가죠. 하늘 아래 사는 이상, 허물이 없을 수가 없어요. 단 그 허물을 합리화시키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윤리와 도덕 없는 깨달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윤리와 도덕을 깨달음이 초월한다는 그들은, 세상을 혹세무민 하고 있죠.     

 

주희는 대학 장구 서문에서, 자기가 대학에 장구에 붙이는 것은 혹세무민하는 이단의 사설을 배척하고, 제거하기 위해서라고 했어요. 내가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 또한 그래서 그렇습니다. 내가 윤리 도덕적이어서도 아니고, 내가 허물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그러면 굳이 왜, 남에게 이런 비난을 퍼부어 댈까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내가 부처님의 가사를 훔쳐 입고, 그의 밥을 먹는 이상 이상, 나는 그의 가르침을, 그 훼손되는 것을 막아야될 의무가 발생하기 때문이죠. 나는 그 의무를 이행할려고 하는 것 뿐이예요. 나는 어떤 사람에게 사적인 감정이 없습니다.    

 

오늘의 주제가 '윤리와 도덕을 초월한 깨달음은 없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 우리가 일으켜야할 운동은 윤리와 도덕의 회복입니다. 박제화된 윤리와 도덕에 생명력을 불어 넣고, 관제화된 윤리와 도덕에 그 관제화를 타파해서, 모든 사람이 윤리와 도덕의 삶 속에서 깨달음에 나가는, 그런 윤리와 도덕의 회복 운동이 있어야 된다는거예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도덕은 무량심입니다. 윤리는 그 무량심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윤리와 도덕을 회복해야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죠. 우리가 좌선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잠깐 좌선을 함께 하겠습니다.

 

   

文慧 註 

*강상윤리(綱常倫理): 강상윤리 또는 윤리강상이라고도 하는데, 강상(綱常)은 군주와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를 가리키는 '삼강(三綱: 君爲臣綱, 夫爲婦綱, 父爲子綱)'즉, 임금은 신하의, 남편은 아내의, 아버지는 자식의 (벼리: 일이나 글의 뼈대가 되는 줄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과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오상(五常, 오륜(五倫)이라고도 함)'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어떤 경우는 오상으로 仁義禮智信을 들기도 한다. 강상죄인은 三綱(삼강)․五常(오상)을 어긴 사람. 윤리 도덕, 부모 자식 간의 도리를 저버린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로, 법이 아니라 윤리와 도덕을 어긴 사람은 죄인으로 다스린다.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  

 

 

 

 

 

 

낙엽'과 어울려 지는 하모니카' 기타 '연주곡  ...  24'곡
 
 

01. 그대 먼곳에

02. 내가 만일

03. 라노비아

04. 바람 2

05. 사랑으로
 
 
 

06. 숨어우는 바람소리

07. 스와니강

08. 애모

09. 허공

10. A time for us
 

11. Amazing Grace

12. Ta Trena Pou Figan

13 .the day after you left

14.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15. 내가 아는 한가지
 

16. 바람

17. 백년의 약속

18. 봉숭아

19. 사랑없이 난 못살아요
 
20. 여수 

21. 월량대표아적심

22. 천상재회

23. 헤어진 다음날

24. 민들레 홀씨되어
 
 
 

♥편안함과 쉼이 있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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