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15. 13:11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허걱! 스님께서 인터넷을 하시나봐요! 아님, 누가 일일이 보리도량 카페 얘길(꼰질르나?) 하나 봐요. 방금 전 이런 문자를 받고 화들짝 놀라 잽싸게 올립니다. "문혜 선우님 2일 일요강론은 중요한 강론이니 바쁘더라도 보리도량에 꼭 올려 놓으시길 바랍니다 혜천"
혜천(嵇瀳)스님의 일요강론: 2556년 12월 2일 낡은 의식을 버리고 무량심을 구성하라
부처님께서 낡은 사유를 불살라 남김없이 제거하라고 하셨죠.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그 낡은 사유를 불살라야 된다고 그랬어요. 불살라서 남김없이 제거하라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이 말씀은 우리의 자의식을 완전히 해체시켜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의 자의식을 완전히 해체시키고 새롭게 마음을 구성해야 된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낡은 사고에 사로잡힌 자는 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다'라고 했는데, 그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시간의 의식이죠. 우리의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 속에서 구성된 의식입니다, 우리는 그 한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죠. 우리가 가능성을 열고, 무한성에 이르지 못하고, 한계에 갇히는 이유는 그 시간 의식의 한계성에 갇혀 있기 때문이예요. 우리가 거기에 갇혀 있기 때문에 가능성을 열지 못하는 거죠. 부처님은 그것을 남김없이 타파시켜야 된다는 거예요. 그것을 남김없이 씻어버리고, 그것을 남김없이 긁어버리고, 그것을 남김없이 잘라내야 된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는 그 한계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죠.
존경받는 고행림의 수행자였던 고타마 싯타르타가 왜 고행림을 뒤로 했겠어요. 그 때 고타마 싯타르타는 이렇게 이야기 하죠. "지난 날 나는 잠부나무 아래서 도리어 자애심이 충만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몸도 황폐해지고, 마음 또한 황폐해져 있지 않는가?"라고 하죠. 부처님은 그리고 고행림을 떠나서 보리수와에 앉습니다. 피팔라나무 말이예요. 피팔라 나무는 고타마 싯타르타가 그 나무에 앉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성스러운 나무라는 보리수라는 명칭을 얻죠. 붓다는 보리수 아래에서 잠부나무 아래에서의 그 유년기의 의식으로 돌아가죠. 그 유년기의 의식으로 돌아가서, 시간의 의식 속에서 형성된 낡은 의식을 완전히 해체시켜 버리죠. 그것이 자의식의 해체입니다.
무아란 자의식을 해체하는 걸 말하죠. 무아라고 하는 것은 자아가 있느냐 없느냐하는 그런 의미가 나는 아니라고 봅니다. 무아의 의미는 자의식이 해체된 상태를 말하죠. 자의식이 해체되어서 새로운 마음이 구성되는 걸 말하죠. 새로운 의식이 구성되어야만이 우리는 한계성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나는 전에도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인간은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스스로의 마음이다.' 어떤 인간도 스스로의 마음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그 마음의 감옥에 갇히죠. 우리는 죄수입니다. 스스로의 마음에 갇힌 죄수.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의 마음의 그 자의식을 깨트려서 해체시키지 않으면 안 되죠.
우리가 자의식에 갇혀 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보지 못하죠. 우리가 자의식에 갇혀 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듣지 못하고, 우리가 자의식에 갇혀 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새로운 것을 느끼지 못하고, 우리가 자의식에 갇혀 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이야기하면, 사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봐도 그것을 거부하죠. 새로운 것을 들어도 귀를 씻고, 새로운 것을 알아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느껴도 내가 미쳤는가봐 라고 생각하죠.
나는 전에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전을 읽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경을 읽는다 그러죠. 어떤 사람은 고전을 읽는다 그러죠. 그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을 읽죠. 경을 읽은 것 같지만 스스로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왜 스스로의 마음을 읽는 것일까요? 설사 붓다의 말을 읽는다 할지라도, 오직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내 마음이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자기 마음을 벗어나서 그것을 읽어내려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스스로의 마음을 벗어나서 그것을 볼 수가 없죠. 우리는 언제나 그 안에 있습니다. 알고 보면, 내가 보았다고 느끼는 것도, 내가 알았다고 느끼는 것도, 내가 들었다고 느끼는 것도 오직 내 마음 안에의 시각이고,오직 내 마음 아래의 청각이고, 오직 내 마음 아래의 지각일 뿐이예요.
그러기 때문에 중국의 천태 덕소(天台德韶)선사가 '마음 밖에 벗어나서 어떠한 존재도 없다'라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죠. 인간은 오직 자기 눈높이에서만 보죠. 자기 눈 높이 이상 것은 보지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가르쳐줘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의 감옥을 열고, 스스로의 마음을 새롭게 구성하지 않으면 안되죠. 마음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구성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스스로의 구성된 마음으로 우리는 세상을 보고, 스스로가 구성한 마음으로 세상과 소통하죠.
나는 부처님께서 보리수와에서 무엇을 깨달았는가, 안 깨달았는가를 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내가 관심있고,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보리수와에서 무엇을 했을까예요. 아까 이야기 했듯이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유년기의 의식으로 돌아가죠. 유년기의 의식으로 돌아가서 시간의 의식을 완전히 타파합니다. 그리고 그 의식을 해체시켜버리고 새로운 의식을 구성하죠.
자의식이 해체되면 어떤 마음이 구성될까요? 궁금하지 않은가요? <반야심경>을 강론하면서, '무아란 자의식의 해체'라고 제가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자의식이 해체되고 나면 내 마음은 어떻게 될까요? 나는 기억의식을 잘라야 된다고 했고, 특히 나쁜 기억의식을 남김없이 잘라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잘라내고, 그것을 긁어내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한계성을 건너고, 가능성을 열려면 그것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야 비로소 깨달음을 논의할 수 있고, 그래야 비로소 무한성의 진리를 이야기할 수가 있고, 그래야 비로소 내가 다르마의 세계에 들었다고 이야기할 수가 있죠. 모든 자의식이 해체되고 나면 비로소 그 때, 마음은 새롭게 구성되는데, 그 마음은 바로 무량심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무량심이예요. 즉 아파마나죠.
부처님께서 보리수하에서 모든 자의식을 해체시키고, 새롭게 마음을 구성하셨습니다. 그 구성된 마음이 무량심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은 할 것이 없어요. 정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 마음을 무량심으로 구성하는 겁니다. 내 시간의식을 잘라서 해체시키고, 내 마음을 무량심으로 구성시키는 거죠. 그 때 비로소 우리는 가능성을 완전히 열어젖히고, 무한성에 들어가게 되죠. 그러기 때문에 붓다가 뭐라고 말씀하시던가요. '자애심이 없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라고 하시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자애심이라고 하는 것이 뭔가요? 무량심의 하나의 부분이죠. 무량심은 우리의 마음을 가장, 어떠한 흠결이 없이 오직 순수한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그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량심입니다. 거기에는 미워하는 마음도 없고, 거기에는 시기하는 마음도 없고, 거기에는 절망하는 마음도 없고, 거기에는 좌절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무량심만이 충만해 있죠.
우리가 왜 행복하지 않을까요?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는데, 우리는 왜 덜 행복하다고 느낄까요? 우리가 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내 마음이 무량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량심이 되며는 너와 나의 어떠한 구분의 경계도 없죠. 무량심이 되면, 그 사람은 타자화된 사람입니다.
붓다가 13년만에 고향에 돌아갔을 때, 그의 아버지 숫도다나는 고타마 싯타르타이기를 원했죠. 그 때 붓다는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던가요? "아버지! 제가 아버지의 생물학적인 자식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이 자리에 아버지가 생각하는 아들은 없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생각하는 싯타르타가 아닙니다." 왜 부처님께서 이 말씀을 할까요? 생물학적으로야 고타마 싯타르타라고 하는 것이 분명하죠. 그러나 이미 그는 고타마 싯타르타였을 때 그 마음을 구성하고 있던 자의식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 하죠. 그의 기억 속에 그의 시간의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말하죠.
인간은 시간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인간은 시간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인간이 시간을 뛰어남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한계성에 갇혀서 허우적거리죠. 혹시라도 시간을 뛰어넘는 사람이 있던가요? 혹시라도 시간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던가요? 있다면, 그 분을 극진히 모시십시요. 그 사람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이니까요. 적어도 내가 만나본 어떠한 인간도 시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 시간을 뛰어 넘는 인간은 아직 나는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그런 인간이 있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겠죠. 우리의 의식은 시간의 의식입니다. 시간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는 거죠. 시간 속에서 영향받은 것이고,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거죠.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의식은 좋은 것도 있지만, 좋지 않은 것도 있죠. 시간은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우리들 마음 속에, 내가 걸어온 자취가 나이테처럼 각인되고, 아로새겨 있죠. 그것은 지금의 내 의식을 지배하죠. 나는 우리의 들 숨, 날 숨에도 그것이 개입되어 들어온다고 생각하죠. 우리의 의식이 내 호흡에도 영향을 미치죠. 내 세포 하나 하나에 내 시간의 의식이 마치 서각書刻을 하듯이, 그것이 각자刻字되어 있죠. 부처님께서 왜 잠부나무 아래에서의 유년기 기억을 고행림에서 떠올렸는지를, 우리는 깊이 새겨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을 앋고,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얻었다고 인정받았던 고타마 싯타르타가 왜 그것을 낡은 것이라고 버렸을까요? 붓다는 철저하게 기존의 낡은 사유를 해체시키고, 재구성하지 않으면, 새로운 세계를 열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새로운 안경을 쓰지 않는데, 어떻게 새로운 것을 볼 수 있겠어요? 새로운 자리에 서 있지 않는데, 어떻게 새로운 자리를 느낄 수 있겠는가요?
오직 스스로의 마음을 아파마나(appa-mana)로 구성하십시요. 우리 마음이 무량심이 되면 우리는 안심할 수 있고, 적요할 수 있습니다. 안심 적요(安心 寂寥)하면 언제나 행복하죠.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행복을 느끼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행복을 덜 느끼는 이유는 내 마음이 안심하고 있지 못하고, 내 마음이 적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죠. 내 마음이 안심 적요하면 우리는 언제나 안락합니다. 고통받는 자가 한계성을 넘어서, 가능성을 열고, 무한성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던가요?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던가요? 없습니다.
우리가 가능성을 열고 무한성에 가려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낡은 의식을 남김없이 제거해버리고, 무량심으로 구성해야 됩니다. 무량심을 구성하면, 이미 우리는 타자화된 사람입니다. 이것은 누가 대신해 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스스로가 할 수 있습니다. 이끌어 줄 수 있으나 이르게 할 수 없고, 알게 할 수는 있으나 대신 알 수는 없습니다. 오직 스스로 알고,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가 보는 거죠. 왜 그런가요? 내 마음이기 때문에. 세상을 속일 수 있으나, 스스로의 마음을 어떻게 속일 수 있겠어요? 스스로의 마음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마음을 벗어날 수 없으니까요. 스스로의 마음을 벗어나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자의식을 해체시키고, 마음을 새롭게 구성하라는 거예요. 무량심으로 말이예요.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부처님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없다는 거예요. 누구나가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그것을 이루는 것이지, 처음부터 이루는 사람은 없다는 거죠. 생이지지生而知之하고, 돈오돈수頓悟頓修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오직 스스로의 노력과 좋은 선우들의 함께 하는 힘으로써 그것이 이루어지죠. 좋은 선우가 그래서 필요한 겁니다. 봄이 되면 어느 곳인들 봄기운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죠. 하다 못해 마른 나뭇가지에도 봄은 가득한 거와 같습니다. 항상 노력하고 노력하십시요. 노력만이 스스로를 무한성에 이르게 해주니까요.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랫만에 어느 분이 기도를 좀 이끌어주시죠. 기도를 이끌어 주실분이 없으신가? 정말 이 기도를 잘하셔야 되는데... 에, 다함께 합장하시죠.
우러러 온 법계에 충만하사 아니계신 곳 없으신 부처님! 오늘도 부처님의 성전에 좋은 벗들이 함께 모였사옵니다. 함께 모여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기고, 또 되새김질 했습니다. 저희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부처님이 일러주신 그 길로 게으름 피우지 않고, 그 무한성의 성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노력하며, 나아가겠사옵니다. 오늘 이 법회에 모인 선우들과 저와 저희 가족들이 부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 모두가 다 무한성의 성에 이르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싸두 싸두 싸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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