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가능성의 문을 열다 |…… 혜천스님설교

2020. 3. 7. 15:5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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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강론: 2556년 12월 15일 

붓다, 가능성의 문을 열다 

 

 


 

 

부처님께서 보리수와에서 진리를 얻고 설법을 하지 않으시려고 하시죠. 그것을 지켜본 대범천왕이 부처님께서 세상을 불쌍히 여겨서 설법해달라고 하는 청을 올리죠. 우리는 그것을 범천권청梵天勸請이라고 표현을 하죠. 범천왕이 부처님에게 설법하기를 청했다는 것이죠. 권해서 청했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을 향해서 설법할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는 거죠.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고 보니까 세상 람들의 염오심이 너무 깊어서, 그 염오심을 씻어내기가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부처님은 범천왕의 설법의 권유를 받아들여서 설법을 시작하시죠. 이것은 '부처님이 왜 설법을 시작했을까?'라고 하는 그 이유를, 범청권청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이야기할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한 것은 하나 있죠. 부처님은 사람들이 마음이 염오되어 있다고 하는 판단을 하셨던 것은 틀림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은 전도선언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사람들 중에는 마음이 더러움이 적은 이도 있거니와, 그들도 그냥 두면 악에 떨어지고 말리라."는 거죠. "법을 들으면 깨달을 것이 아닌가!" 부처님은 사람들이 염오되어 있는 그 마음이 정도의 차이는 있다는 거예요. 많은 사람이 있고, 적은 사람이 있고. 그냥 방치해 두면 염오심染汚心이 적은 사람도 악에 떨어질 것이라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설법을 하신다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비구들에게 그 가르침을 전하기를 권하기도 했고. 부처님의 뜻은 분명하죠. 그 분명한 뜻은 우리의 염오되어 있는 마음을 씻어서 그 마음을 청정심淸淨心으로써 전환시키라는 거예요.   

 

부처님이 말하는 청정심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불교에서 청정심이라고 하는 용어를 사실 많이 씁니다. 그런데 그 청정심이라고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부처님께서 말하는 염오심이라는 건 뭘까요?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이 탐진치 삼독貪瞋痴 三毒에 염오되어 있다는 거예요. 탐심과 진심과 치심에 그 염오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 염오되어 있는 마음을 씻어서 청정심으로 만들어야 된다는 거예요. 무탐하고, 무진하고, 무치한 것이죠.  그것이 청정심이죠.

 

청정심이 되어야 비로소 그 가능성을 여는 것이죠.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설법을 하려했던 것은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죠. 사람들 중에는 한계성을 벗어나기 어려운 사람도 있지만, 그 한계를 벗어나서 가능성을 열 수 있는, 가능성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거였어요. 어쩌면 부처님께서 진정으로 설법하셨던 이유는 우리에게 그 가능성을 열어주기 위해서 였죠.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은 '진리의 문을 연다'라고 표현했죠. 진리의 문을 연다고 하는 것은 그 가능성을 열어 준다는 거죠. 그 가능성을 열어서 모든 사람이 그 진리의 문을 든다는 거예요. 진리의 문에 들기를 원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겠죠.

 

부처님께서 아파마나를 강조하셨던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청정심이 되어야 아파마나가 되죠. 탐진치 삼독에 물들어 있는, 그 때가 끼어 있는 그 염오심에서 어떻게 아파마나가 일어날 수 있겠어요. 어떻게 무량심이 일어날 수 있겠어요.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요체, 핵심은 아파마나, 즉 무량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나는 벗어나지 않는다고 봐요.  

 

지금 우리는 힐링healing이라고 하는 단어가 세상에서 마치 유행의 물결처럼 흐르는 시대를 살고 있죠. 그래서 수 없는 분들이 힐링하겠다고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해 주죠. 위로를 하죠. 어떤 분은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했고. 나는 붓다의 뜻은 분명하다고 봅니다. 무엇이 분명한가? 부처님은 근본적으로 힐링이 필요없는 세상을 만들려고 하셨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치유가 있다고 하는 것은 상처가 있기 때문이죠. 상처가 없다면 치유가 필요가 없죠. 우리는 상처에는 약을 발라야 된다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설레발을 떨며, 약을 들고 나오는 것을 보죠. 그런데 그 사람들의 손에 들려 있는 약이 무엇인가요?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상처를 치유하겠다고 약을 들고 나오지만, 그 약은 한약으로 말하면 감초에 불과라죠. 전부 다 감초만 들고 나오죠. 감초는 약재이지만 병을 치유하지 못하죠. 상처를 치유해 주지 못합니다. 감초는 여러 약의 조화를 위해서 쓰는 약재이지, 상처를 치료하고 병을 치유하는 약재가 아니죠.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병을  치유하겠다고 들고 나오는 것은 한결같이 감초만 들고 나온다는 거죠. 그리고 그 감초를 달여서 주죠. 물론 위약효과라고 그래서 안 먹은 것보단 먹은 것이 낫겠죠. 그러나 감초는 근본적으로 사람의 병과 상처를 치유하지 못 합니다.

 

왜 붓다가 그 시대의 육사외도를 비판했고, 왜 부처님께서 그 시대의 바라문을 비판했겠어요? 그 이유는 나는 한 가지라고 봅니다. 그들이 감초로써 세상을 고치겠다고 나와서 설레발을 떨기 때문이죠. 부처님은 감초를 가지고 나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그 사람들의 상처와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그 사람에게 맞는 약을 들고 나왔죠. 어떤 사람에게는 부자를 먹였고, 어떤 사람에게는 인삼을 먹였고, 어떤 사람에겐 갈근탕을 먹였죠.   

 

부자는 독약입니다. 부자는 잘못 먹으면 죽죠. 조선 조때 사약을 내릴 때는 부자를 달여서 내렸습니다. 먹으면 죽으니까요.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부자보다 좋은 약은 없죠. 때에 따라서는 부처님께서는 부자를 썼죠. 부자를 썼다는 것은 뭘까요? 기존의 모든 가치체계를 비판하고 해체시켰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부자이죠. 어떤 사람에게는 갈근탕을 썼죠. 그저 가볍게 어루만져 주신거죠. 왜요? 마음의 더러움이 적으니까요. 굳이 부자까지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죠. 부처님의 본래의 뜻은 약이 없는 세상입니다. 약이 필요없는 세상! 그것이 부처님께서 본질적으로 이 땅 위에 건설하려고 했던 불국토죠. 그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상처받을 이유도 없고, 병들 이유도 없고, 약을 찾을 필요도 없고, 의사도 필요없고, 환자도 없는 세상 말이예요. 

 

나는 전에도 말씀드렸죠. 나눔이 필요없는 사회야말로 가장 좋은 사회라고. 나눔이 있다고 하는 것은 누군가가 나눔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다는 걸 뜻하죠. 약자가 있다는 걸 전제한다는 이야깁니다. 애초에 나눔이 필요없는 세상이 가장 좋은 세상이죠. 부처님께서는 그런 세상을 우리에게 제시하신 거죠. 부처님이 우리에게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나는 그것이라고 봐요. 우리는 그러한 세계를 구현할 만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부처님께서는 크샤트리아 전사였습니다. 크샤트리아는 본래 전쟁을 위해서 양성된 전사였죠. 전에도 내가 말씀을 드렸었지만, 붓다는 살인병기로 양성된 사람입니다. 그것이 크샤트리아 전사의 의무이자 도덕이였기 때문이죠. 크샤트리아 전사는 전쟁에 나가서 승리해야 되고, 승리하려면 반드시 적의 목을 잘라야 하고, 그 수급(首級:전쟁에서 베어 얻은 적군의 머리)을 말갈귀에 묶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게 바로 크샤트리아 전사죠. 그러나 부처님은 어느 날 그 칼을 던졌죠. 그 칼을 잊어 먹었습니다. 크샤트리아 전사가 보리수와에서 자비의 전사로 거듭 태어났죠. 그 자비의 전사가 우리에게서 가능성을 읽어낸 거죠.  

 

인간은 기본적으로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먹지 않고 살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가요? 먹는 다는 것은 다른 생명을 내 위장 속으로 집어 넣는다는 걸 뜻하죠. 그렇지 않은가요? 동물을 먹고, 식물을 먹고, 열매를 먹죠. 적어도 붓다는 동물을 먹는 것은 찬성하지 않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인간의 가능성을, 그 가능성 여는 데 방해롭기 때문이죠. 무슨 방해로움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의 자비심을, 우리의 자애심을 끊는다는 거예요.

 

우리는 내가 키우던 가축은 가급적이면 잡아 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 집의 고양이를, 내 집의 토끼를, 아니면 내 집의 강아지를 어느 날 집에서 삶았을 때, 우리는 울고불고 했던 어린 날들이 있죠. 왜 내 강아지를 삶았냐고? 내 토끼를 삶았냐고? 내 고양이를 삶았냐고? 그런데 우리는 남의 집 것을 삶는 데는 거리낌(꺼리낌이라고 발음하고 쓰는데 잘못된 표현)이 없죠. 도대체 내 집 것을 삶는 것과 남의 집 것을 삶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요? 차이가 없죠.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무량심을 강조하는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자애심이 충만하지 않는 한 무한성을 얻을 수 없다고 한 것도 거기에 있는 것이죠. 부처님은 우리에게서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지만, 그 가능성을 낙관하지는 않으셨어요. 왜 낙관하지 않으셨을까요? 그 가능성을 열려면 땀과 열정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노력이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열정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그것을 얻으려면 분투하지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인도에서 출가 수행자를 쉬라마나śramaṇa라고 그랬죠. 쉬라마나의 뜻은 '분투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쉬라마나라고 하는 말을 중국에서는 사문沙門이라고 번역을 했죠. 스님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기도 하죠. 사문의 뜻은 분투하는 자입니다. 열정을 가지고 분투하는 자, 헌신하는 자. 스님들의 고행을 찬양하죠. 성철스님은 30년간을 장좌불와 했다고 찬양하죠. 그런 고행을 했다고. 고행의 원어는 타파스tapas입니다. 타파스는 강렬한 열을 뜻하죠. 재밌지 않은가요? 강렬한 열을 뜻하는 타파스가 고행이라고 하는 뜻을 갖는다고 하는 것. 나는 고행이라고 하는 것은, 그 타파스에서 말하는 열이라고 하는 것은 열정이라고 생각하죠. 가능성을 열기 위해서 분투하는 열정! 비록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고 하는 조소과 조롱를 받더라도 불굴의 의지로서 수레를 멈추려고 하는, 도전적인 그 열정, 그 열정이야말로 고행이죠.

 

부처님은 인간의 본성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던 거죠. 나는 그렇게 봐요. 그 가능성이 없었다면, 그 1%의 가능성이 없었다면 붓다는 결코 세상에 나와서 설법하지 않았을 겁니다. 설법할 이유가 없죠. 우리는 그 1%의 가능성을 보고 도전하죠. 우리는 그 1%의 가능성을 갖고, 그 한계성을 뛰어 넘어서, 그 가능성을 열고, 그 무한성에 이르는 거죠. 

 

부처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메시지를 던지죠. 가능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얻어진다고 하는 것을. 이 땅 위의 불국토도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얻어지는 것이지. 내가 얻는 것이고, 내가 만드는 겁니다. 나는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행복하지 않는 자, 죽어서 행복할 수 없다'고. 이 땅에서 열반을 얻지 못한 자가 어찌 저 땅에 가서 열반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 상처받고, 이 땅에서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자가 어떻게 해서 저 땅에 가서 상처가 치유될 수 있겠어요?

 

붓다가 기존의 바라문교와 육사외도를 비판했던 것은 그 상처를 치유한다며 들고 나온 감초 때문이었습니다. 붓다는 그것은 사기며, 거짓이라는 거예요. 그것은 세상을 속이는 것이라는 거죠. 다르마이기 때문에 진실이 아니라, 진실이기 때문에 다르마죠. 붓다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거죠. 지금 필요한 것은 감초가 아니라 부자탕을 먹여야 된다는 거죠. 부처님께서 그 시대 사람들에게 부자탕을 먹였듯이, 우리 또한 부자탕을 먹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자탕을 먹는다는 것은 두려움이죠. 부자탕을 잘못 먹으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을 떨쳐내고, 그 두려움을 떨쳐내고, 그 부자탕을 기꺼이 마셔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우리의 세계가 바뀌고, 내 삶이 바뀌죠.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가? 부처님의 그 가르침에서 배워야할 것은 한 가지입니다. 분투하는 용기입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단숨에 그 부자탕을 마시는, 그 열정적인 용기가 필요하죠. 아쉽게도 우리에게는 그것이 부족하죠. 혹시라도 죽을까봐 두려워서 부자탕을 안 먹을려고, 기껏 찾아서 돌아다니는 것은 감초탕이죠. 감초탕을 먹으면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병은 고치지 못하고, 영원히 상처는 치유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했듯이, 우리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가능성을 발견해야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가능성을 발견한다고 하는 것은 내 마음을 무량심으로 전환시키는 걸 뜻합니다. 그것이 가능성의 발견입니다.  

 

노력이 없는 결과는 없죠. 나는 전에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인간세계에는 결과가 없다. 단지 과정만 있다.' 이 인간 세계에서는 하나의 과정에서 또 하나의 과정으로 가는 거에 불과하다고 그랬습니다. 그 과정은 타파스를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되죠. 어쩌면 부처님이 우리에게서 발견했다고 하는 그 가능성이라는 것이 타파스인지도 모르죠. 뜨거운 열 말이예요. 영하 30도의 추위도, 그 추위 속에서도 견뎌내는 열, 그 열을 부처님은 가능성으로, 희망으로 보았는지도 모르죠.  

 

내가 강론에서 항상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열정을 가지고, 하나의 과정에서 또 다른 과정으로 넘어가는데 있어서 두려움을 떨쳐버리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근본을 바꿔야 된다는 거예요. 근본을 바꾸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반복할 수 밖에 없죠. 부처님은 뿌리를 잘르지 않는한 되살아난다고 말했죠. 가지를 치고 잎사귀를 따서는 되살아나는 걸 막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 뿌리를 잘라서 완전히 뽑아버려야만이 그것은 다시 돋아나지 못한다고 하셨죠.

 

부처님 시대에 고민했던 것을 우리가 이 시대에 다시 고민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가요? 2500년동안 인간들은, 여태까지 해온 것이 잎사귀 몇 개 따고, 가지 몇 개 쳐낸 것 밖에 없다는 거죠. 무슨 말씀인가 하면, 우리는 그 본질인 우리의 본성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부처님은 염오심을 씻으라고 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염오심 속에 있고, 우리는 아파마나 무량심을 잃어버린지 옛날이죠. 우리는 더 이상 아파마나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말하지도 않아요. 아파마나는 사어가 된 지 오래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부처님의 뜻은 희나리가 된지 오래인지도 모르죠.

 

우리가 다시 부처님의 그 뜻을 되살리는데 헌신하시기를, 분투하는자 쉬라마나가 되기를 함께 서원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주제는 '붓다, 가능성의 문을 열다'입니다. 여기까지입니다.

 

오늘은 날씨도 푸근하니까, 어느 분이 좀 기도를 이끌어 주실라는가요? 지난 주에는 너무 추워가지고, 내 입이 얼어가지고 얼른 내려갔는데 오늘은 날씨가 따뜻하니까 입이 녹았어요. 말이 길잖아요. 다함께 합장하시죠.

 

우르러 온 법계에 충만하신 부처님!

저희들은 부처님의 뜻을 바들어 쉬라마나가 되겠습니다. 저희가 비록 이 땅위에 불국토를 건설하는 힘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이 땅 위에 불국토를 건설하는데 두려움 없이 분투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생명이 다른 생명으로 전환되는 그 날까지, 아니 그 생명과 생명이 끊임없이 이어져서 이 땅 위에 불국토가 건설되는 그 날까지 부처님의 뜻을 따르는 쉬라마나로서 노력하고 노력하겠습니다. 이 노력하는 공덕으로 저와 저희 가족들의 앞 날에 장애와 어려움 없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싸두 싸두 싸두.

 

 

 

 * 당랑거철螳螂拒轍

 사마귀가 버티고 서서 수레바퀴를 가로막다. 미약한 자가 제 분수도 모르고 무모하게 덤빔

≪淮南子(회남자)≫ 人間訓篇(인간훈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齊(제)나라의 莊公(장공)이 사냥을 하러 나가는데, 벌레 하나가 장공이 타고 가는 수레바퀴에 발을 들어 치려 했다. 장공은 御者(어자)에게 물었다. “저게 무슨 벌레인가?” “저놈이 이른바 버마재비란 놈입니다. 저놈은 원래 앞으로 나아갈 줄만 알고 뒤로 물러설 줄을 모르며 제 힘도 헤아리지 않고 상대를 업신여기는 놈입니다.” “그래, 그놈이 만일 사람이라면 반드시 천하의 용사가 될 것이다” 하고 장공은 수레를 돌려 버마재비를 피해 갔다. ≪莊子(장자)≫의 人間世篇(인간세편)에는, “그대는 당랑을 알지 못하는가. 그 팔을 높이 들어 수레바퀴를 막으려 한다. 그것이 감당할 수 없는 것임을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나와 있다. 미약한 자가 제 분수도 모르고 무모하게 덤비는 경우나 타고난 성질을 고치기 어렵다고 할 때 이 말을 쓴다. 당랑은 버마재비 혹은 사마귀라고 부른다. 당랑거철은  당랑지부螳螂之斧라고도 한다.